265화
안휘성이 들썩거렸다.
혈사천과 마곡이 정면으로 붙었다.
먼저 움직인 쪽은 마곡.
마곡주 후규영은 마곡의 모든 전력을 이끌고 혈사천으로 쳐들어갔다.
하나 혈사천주 조탁은 그들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도 가소로웠다.
마곡 정도는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다.
하지만 낭사산으로 밀어붙이는 마곡에게 전패를 당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다급히 사파 연합의 수장인 녹림에 도움을 청하는 전서를 보냈지만.
녹림은 도움을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사파 연합 모든 문파들은 혈사천에게 도움을 주지 말라는 명까지 떨어졌다.
혈사천은 마곡을 상대로 홀로 싸워야 했다.
“헉…… 헉…….”
혈사천주 조탁은 가슴에 붉게 탄 흔적을 내려다보았다.
“혈폭신마…… 공약.”
마교의 십이신마가 눈앞에 서 있었다.
“큭큭. 마교에서도…… 결국 나오는군.”
“당연한 게 아닌가? 지금이 가장 적절한 기회이지.”
조탁은 마지막 살기를 끌어 올렸다.
죽음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크크크…… 혈폭신마. 죽더라도 억울해서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다!!”
타앗!
그는 동귀어진을 선택했다.
살형아공으로 그와 함께 폭발하고자 한 것이다.
‘정신이 나갔군. 감히 누구 앞에서…….’
공약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왜 자신을 가리켜 혈폭이라 부르는지 혈사천주 조탁은 모르는 듯했다.
우우우우웅-
닫힌 공간에서의 폭발의 위력은 더 강했다.
콰아아아앙!!
공약의 혈광폭이 터지며 동귀어진을 택한 조탁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혈사천주 조탁의 죽음.
혈사천과 마곡의 전면전은 그의 죽음과 함께, 마곡의 승리로 돌아갔다.
* * *
안휘성에서 가장 조용하게 지내는 곳은 남궁세가였다.
천살지인과의 대결 이후, 남궁세가는 마치 봉문이라도 당한 듯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림에서 보기에 조용한 듯 보일 뿐 남궁세가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가장 큰 변화는 비대위 체제에서 우선 일 년 동안 남궁후진을 세가주 대행 체제로 세운 것.
남궁후진은 세가를 제정비하기 위해 세가주 대행이 된 직후, 곧바로 각 당의 빈자리에 새로운 인물들을 임명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세가의 인물들이 새롭게 임명되었지만, 가장 큰 공을 세운 창천신검 남궁무명의 이름은 없었다.
호천수호대의 전각으로 들어선 사내.
대주 반의중이 허리를 숙이며 그를 맞이했다.
“세가주 대행님을 뵙습니다.”
“반 대주, 무명 아우는 어디에 있는가?”
“연무장에 계십니다.”
“또? 하루 내내 수련만 하는 모양이구만.”
“늘 모자라신다고…….”
“쩝.”
그가 누구를 목표로 삼는지 잘 알았다.
‘괴물 같은 녀석이 있어 다행이야.’
남궁무명은 그를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발전할 것이 분명했다.
건물을 돌기 전부터 그의 기운이 느껴졌다.
“대단하군. 여기까지 내기가 진동을 하네.”
창천황신공의 내기는 점점 강해졌다.
남궁세가에서 또 한 명의 검황이 탄생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기다렸다.
반각이 지난 후, 연무장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끝났다.”
남궁후진은 천천히 건물을 돌아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남궁무명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냥 요즘 뭐 하는가 싶어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정도로 할 일 없는 것은 아닐 테고. 가주가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온 건 일이 있다는 것이겠지. 무슨 일이야?”
“눈치는 빨라.”
스윽.
남궁후진은 허리 뒤에서 술병을 꺼냈다.
“술 한잔 마실까?”
“잘한다. 가주가 대낮에 술을 마셔도 되나?”
“우리 둘이서만 몰래 한 병 나눠 마시면 아무도 모르잖아. 안 그래?”
“따라와.”
남궁무명은 앞장을 서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남궁후진은 두 개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어때? 향이 좋지?”
“좋군.”
“내가 세가주의 지위를 이용해서 특별히 구해 온 술이지.”
“조만간 말아먹는 건가?”
“하하하! 그러니까 말이야! 난 하기 싫다고 했는데.”
채애앵!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며 한 모금에 잔을 비웠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술의 진한 향기가 부드러웠다.
“괜찮군.”
“한잔 더 마실 텐가?”
남궁무명은 말없이 술잔을 내밀었다.
그는 술을 받으면서 물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뭔가?”
“방금 혈사천과 마곡의 결전이 끝났어.”
“어떻게 되었지?”
“예상과 다르게 혈사천주가 죽었다. 동시에 혈사천이 멸문.”
“의외군. 혈사천주의 사파오패천을 꺾을 줄은…… 마곡의 힘이 그 정도인가?”
“아니. 혈사천주를 죽인 건 마곡주가 아니라 혈폭신마 공약이야.”
“마교의 십이신마?”
“맞아. 마교가 마곡에 섞여 있었어.”
“마교가 나왔다면 사파 연합에서도 도움을 줬을 텐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혈사천이 녹림에게 밉보였지. 그동안 제멋대로 움직인 탓에 사파 한 곳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한 모양이야. 그리고 맹주와 녹림의 사이가 좋잖아.”
“망한 건 인과응보라. 후진, 이제 무슨 부탁을 할 건지 말해.”
남궁후진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합비를 가져와야겠어.”
남궁무명의 손이 잠시 멈칫거렸다.
합비는 예전부터 남궁세가의 관할이었다. 하지만 천살지인의 합류에 혈사천의 세력이 커지면서 합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마곡이 난리를 칠 텐데.”
“그래서 아우님을 찾아온 것이네.”
“…….”
“합비에 마곡이 들어와 있어도 그들을 칠 명분은 걱정 안 해도 돼. 충분하니깐. 마곡에서 마교의 인물이 들어왔잖아?”
그가 말한 대로 남궁세가에서 합비로 움직일 명분은 있었다.
하지만 남궁무명이 망설이는 건 재정비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명, 다른 것을 떠나 중원 무림에 남궁세가의 힘을 제대로 보여줘야 해. 이번 기회가 본 세가의 건재함을 알릴 기회라 보네.”
“마곡을 완전히 치는 것인가?”
“합비만 찾으면 돼. 물론 마곡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음. 혈사천이 있을 때는 합비를 세가가 차지해도 충분히 견제되었지만, 혈사천이 멸문당한 이상 마곡과 바로 붙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신경이 쓰이겠지.”
남궁세가에서 합비를 치는 건 전면전을 염려에 두고 움직여야 할 사항이었다.
하지만 남궁후진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합비를 치고자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궁세가의 부활을 알릴 기회였다.
“그리고 자네는 마교의 십이신마를 잡을 기회지.”
남궁후진은 그의 호승심을 건드렸다.
강자는 강자를 찾는 법.
현재 남궁무명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싸울 수 있는 강자였다.
“……알겠다. 합비로 가겠다.”
“하핫, 고맙다. 바로 세가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겠어. 끝나는 대로 연락하마.”
남궁후진은 남은 술을 두 사람의 빈 잔에 따라 부었다.
* * *
쪼르르르-
고진유는 술잔을 들어 술을 받았다.
아주 천천히 떨어지는 술 방울 속에서 술잔을 든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한 잔 마시게.”
“…….”
어둠 속에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선가 들오본 익숙한 목소리.
술잔을 부딪친 상대의 손을 보았다.
‘국화?’
그의 손등에 국화 문신이 보였다.
“안 마시고 뭐 하는가?”
벌컥.
고진유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커어억…….”
목에 술이 넘어가는 동시에 속이 타는 고통을 느꼈다.
“크크크…….”
상대의 웃음소리만 들릴 뿐, 여전히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화산도협, 그동안 수고 많았다.”
쉬이이익!
날카로운 검신이 살기 어린 미소를 비추며, 고진유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번쩍!
고진유는 침상에서 눈을 떴다.
“…….”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꿈이었군.’
조심스럽게 침상에서 내려왔다.
고진유는 목을 만지면서 꿈속에서 그의 목을 자른 사내를 떠올렸다.
손등에 국화 문신.
‘사마추…… 그자는 아닌데.’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꿈속의 인물이 그였다면 바로 알아보았을 것이다.
“휴우…… 그래도 꿈이라서 다행인가.”
꿈에서라도 죽는 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주의해야겠어.’
무공이 강하다고 스스로 인정한 탓인지 요즘 들어 안일하게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주의시키신 게 틀림없어.’
끝이 나기 전까지는 긴장을 풀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고진유는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자신은 지금까지 원수라 여겼던 극일천주의 아들이었다.
다행히 사부를 죽인 인물은 극일천주가 아닌 천문전주 나하중.
고진유는 기억이 되찾았다고 해서 극일천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누군지 기억이 났어도 변한 건 없어. 난 화산파 제자이며 극일천은 사부님을 돌아가시게 한 원수일 뿐이다.’
창문 사이로 붉은빛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무림맹 위호사 황정은 가까이 다가오는 두 필의 말을 보았다.
황정은 말을 탄 두 명의 남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끔 금마지를 무시하고 들어오는 인물들이 있었다.
“금마지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또 간이 큰 인물들이 찾아오는구만.”
위호당주가 보았다면 무림맹을 무시하냐면서 난리를 칠 게 뻔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달려가던 황정은 가는 도중 걸음을 멈추었다.
말 위에 탄 사내의 얼굴.
“맹주님!”
황정은 그 자리에서 허리를 숙였다.
“수고가 많소이다.”
“네엡!”
그는 얼른 정문으로 달려간 뒤 고진유가 돌아왔음을 알렸다.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려서자, 정문 옆에 위호사들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었다.
“그동안 별일 없었습니까?”
“넵.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고생을 많이 한 덕분인 것 같군요. 고생들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진유는 위호사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안으로 들어섰다.
이번에도 고진유는 화산지로 먼저 발길을 돌렸다.
“소저, 화산지로 갑시다. 그곳에 가면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네에. 저도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북소연도 화산파의 사형제들과 무혼신녀를 만난다는 사실에 기대가 되었다.
화산지에 도착하려면 아직 반 정도가 남았을 때,
“저기 벌써 달려오는군요.”
거의 하늘을 날다시피 하는 신법을 펼칠 수 있는 인물은 무림맹에서 한 명밖에 없었다.
“형……! 진유 형!!”
얼마나 반가운지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상관없이 큰 소리로 불렀다.
고진유를 생각하는 인양의 마음은 다른 인물들과 달랐다.
그는 원래부터 무림인도 아니었다.
고아였기에 무림에서 혈혈단신이었다. 때문에 오직 고진유만이 그에게 가족이었다.
고진유가 무림맹을 홀로 떠났을 때 혹시나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도 많이 했다.
덥석!
“허어, 명색이 권협이란 녀석이…… 사람들도 보고 있는데.”
인양은 고진유의 품으로 뛰어 들어가듯 껴안았다.
“반가워서요.”
인양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띤 채 뒤에 선 북소연도 반갑게 맞이했다.
“형수님, 오셨습니까?”
“반가워요.”
북소연은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무혼신녀는 앞에 앉은 고진유를 보았다.
북소연과 다정하게 화산지로 돌아오는 그를 보면서 안도감이 들었다.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는 무림맹을 나간 뒤 만족스럽게 볼일을 봤다고만 했을 뿐, 정확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광동까지 내려갔다 온다고 고생했다. 힘들지 않았느냐?”
“편안하게 다녀왔습니다.”
“소연과 함께 갔다 온 모양이지?”
“저도 모르게 형주를 지나쳤던 모양입니다. 그녀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함께했습니다.”
“소연을 좋아하는 게 맞군.”
“그녀와는 운명인 것 같습니다.”
“나도 네가 소연과 있었던 일을 들었다. 원래 인연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시작되는 법이지.”
“그런 것 같습니다.”
고진유는 자신의 비밀을 비밀로 해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알려야 할지 무림맹으로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누님은 내가 기억을 완전히 찾기 전에도 어느 정도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계셨어.’
고진유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광동성에 내려간 건 제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언제 기억을 말하는 것이지?”
“십오 세 때까지의 기억입니다.”
“그건…… 네가 흑선을 타기 전까지를 말하는 것이겠군.”
“후후. 역시 누님은 대단하시네요.”
“대단할 것까지는 없어. 모든 일의 시작은 그때 일어났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녀의 말이 맞았다.
고진유가 십오 세가 되던 그 해.
무림맹에서 극일천이 철갑을 잃어버리면서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누님께서는 망혼대법을 아십니까?”
“……!”
모를 리 없었다.
당사자의 기억을 잠시 봉인한 채 다른 기억을 심는 밀종의 괴이한 술법..
그녀는 망혼대법을 물어보는 고진유를 보면서 눈동자가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