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한수로 가기 전 마지막 마을이 보였다.
이미 그곳에는 평원을 지나기 위해 세 곳의 표국들이 마을 입구에 함께 모여 있었다.
그 주위로 삼십여 명의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들이 함께 섞여 떠나기를 대기하는 중이었다.
고진유와 북소연은 봇짐장수들 곁으로 다가섰다.
“우리도 같이 갈 수 있습니까?”
“장사꾼은 아닌 것 같은데?”
봇짐장수는 고진유와 북소연의 전신을 살폈다.
“고향에 가는 길입니다.”
“그러시오? 고향이 어디요?”
“광동입니다.”
봇짐장수의 얼굴이 밝게 폈다.
“오우. 동향 사람이구만. 광동 어디요?”
“연주 사람입니다.”
“하하하! 이런 인연이 있나. 나도 연주 사람이외다. 혹시 연주에 잘 아는 사람이 있소?”
“왕종이란 분을 알고 있습니다.”
“왕종? 뭐……? 왕종대인을?”
“그를 잘 아십니까?”
“그…… 분은 연주상단의 주인이 아니오?”
“맞습니다.”
“이런…… 제가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귀인이신지 몰라뵈었습니다.”
“아닙니다. 우연히 그를 알게 된 것뿐입니다.”
“아…… 네에. 저희와 같이 가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따각따각.
그때, 고진유와 북소연의 곁으로 말을 탄 표국의 표두가 다가왔다.
“당신들도 본 표행의 무리에 함께 하는 모양이지?”
“그렇소이다.”
표두의 시선은 북소연의 전신을 슬쩍 훑듯 살폈다.
“무림인이오?”
“그렇소이다.”
“어디 출신이오?”
“연주 사람입니다.”
“동네 무관 출신이구만.”
표두는 단번에 고진유를 보며 무시했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요?”
“혼인을 약속한 사이입니다.”
“그렇소? 사내는 자신의 여인을 잘 보살펴 줘야 하는데…… 실력은 미미한 것 같아 보이는군. 수련을 많이 해야겠소이다.”
“맞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중입니다.”
“훗, 잘해보시오.”
휘익!
표사는 말 머리를 돌리며 표행의 앞으로 움직였다.
북소연은 어이가 없었다.
“저 녀석은 뭐야?”
“뭐,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틀린 말은 아니네요.”
* * *
마을에서 출발해 평원에 들어선 지 반나절이 지났다.
“공자님, 정말로 여기에는 사방에 숨을 만한 곳도 없어요.”
“마적의 입장에서는 이런 장소가 습격하기 가장 좋겠소이다.”
“마적이 여기 있다면 최적의 장소가 맞아요. 바보가 아닌 이상 놓칠 일이 없죠.”
고진유와 북소연의 대화는 마적 떼가 나타나는 걸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저…… 놈은 누구야?”
그때, 성화표국의 표두 은무동은 전방을 보면서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평원에 홀로 선 사내.
은무동이 위협적으로 말을 몰며 사내를 향해 다가섰다.
“물러나라. 비키지 않으면 다친다.”
“멍청한 놈. 상대의 능력이 어떠한지 모른다면 죽어라.”
‘허억.’
사내의 백안에 은무동은 온몸이 순식간에 뻣뻣히 굳어졌다.
슈우우웅-
폭풍혼마장(爆風混魔掌)이 그를 녹이기 위해 쏟아져 나왔다.
상대는 고수였다.
그의 실력으로 막아낸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할 만큼 엄청났다.
은무동이 자신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하는군. 죽이지 않고도 가르쳐 줄 수도 있거늘.”
쏴아아아-
은무동은 등 뒤에서 다가오는 뜨거운 바람을 느꼈다.
고진유는 폭풍혼마장의 굉음이 터지기 직전 은무동의 목덜미를 잡은 후 뒤로 당겼다.
콰아아앙!
평원이 들썩거릴 정도로 터진 굉음의 위력은 대단했다.
앞으로 달려 나온 고진유의 모습.
고진유의 일권을 본 독안룡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건…… 무슨 권공이지?”
“아니, 화산파 제자가 무슨 권법을 익히겠소? 당연히 화산파의 무공이지.”
“화산도협, 화산파에는 방금과 같은 위력을 지닌 권공이 없다.”
“화산복호권이 어떠한지 한 번 더 보여줄까?”
“……!”
타앗!!
고진유의 일권은 마치 호랑이가 먹이를 향해 날아오른 듯한 기세를 펼쳤다.
풍(風)의 구결에 따라 화산복호권이 자유롭게 바람을 타고 움직였다.
휙휙휙.
독안룡은 좌우에서 빠르게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강하군. 인정한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밖에 실력이 안 된다면 절대로 나를 이길 수…….”
독안룡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쉬이이익!
뒤로 물러나는 그의 가슴을 향해 사의검이 번쩍이며 날아왔다.
스걱.
“큭!”
첫 번째 공격 화산복호권은 허초.
가슴에 상처가 났다.
뼈가 보일 정도의 깊은 곳까지 상처는 아니었지만 가벼운 부상도 아니었다.
“이…… 놈이…… 이것을 노렸군. 일부러 방심하게 만들었어.”
너무나 약은 수에 당했다.
무림맹주란 놈이 설마 첫 수부터 허초를 펼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독안룡의 백안이 금색으로 변하며 전신에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크아아아아!!”
독안룡은 최대한 내력을 모으기 위해 괴성을 질렀다.
신무신단을 깨물자 단전이 끓어오르며 폭발했다.
백안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
전력을 다한 일장은 언제든지 출수할 준비를 마쳤다.
“화산도협, 여기에서 누가 강한지 결정을 짓도록 하자.”
“얼마든지.”
독안룡의 내력은 점점 커져 갔다.
그에 대항하기 위해 고진유도 중단전의 상부까지 모두 개방했다.
우우우웅-
두 절대고수의 싸움에 수만 평의 평원이 흔들거렸다.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는 수많은 시선.
그들이 언제 이런 싸움을 본 적이 있었던가.
은무동은 온몸에 땀이 흘러내렸다.
그가 무시하며 충고했던 사내가 무림맹주 화산도협이었다.
‘내가 미쳤지.’
콰아아아앙!!
그들의 검과 장이 부딪히면서 평원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거렸다.
두 사람의 신형은 자욱이 일어난 먼지에 의해 완전히 가려졌다.
콰앙!! 콰앙!!!
먼지 속에서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싸우는 소리가 울렸다.
독안룡은 믿기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놈이지? 그때보다 더 강하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봤던 이유는 무구천에서 보았던 고진유의 실력이 전부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당했다. 그때 실력을 숨기고 있었어.’
고진유의 실력을 알게 된 그는 힘이 빠졌다.
‘훗. 내가 스스로 무덤을 팠군.’
극일십우의 절대고수라는 자부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싸움에서 지지 않았던 그였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왜…… 그동안 천문전주가 고역을 겪었는지 알겠어.”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상대가 강했을 뿐.
파아앗!!
사의검이 지나간 자리에 피가 솟구쳤다.
“당신은 살려줄 수는 없을 것 같소. 다음엔 서로 승패가 바뀔 수도 있을 테니.”
“당연하겠지. 난 강하니깐.”
“…….”
“……그러고 보면 넌 천주님과 성격이 비슷하군. 그분은 약자에게는 늘 인자하지만 상대가 될 만한 적에게는 냉정하게 가혹한 분이시지.”
“그렇소이까? 한번 만나보고 싶소이다.”
“크크. 조만간 만나게 될 거다. 나를 죽인 이상 네 앞에 나타날 놈들은 지금까지 만났던 녀석들과는 다를 테니…… 할 말은 다 했군. 그만 끝을 내라. 강자에게 죽는 건 무림인으로서 영광이다.”
스걱.
그의 목을 향해 냉정하게 사의검이 지나갔다.
극일십우 독안룡 여조형의 죽음.
고진유는 죽은 그를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앞으로 나올 인물들은 다르다니 재미있겠군요. 기대하겠어요.”
* * *
옅어지는 먼지 속에서 고진유의 모습이 드러났다.
북소연은 앞으로 나가 그를 반겼다. 어깨 부분에 마치 불에 탄 흔적처럼 시커멓게 보였다.
“어깨는 괜찮아요?
“괜찮소이다. 스친 것뿐입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가리켰다.
“저자는 누구인가요?”
“극일십우라고 하더군요.”
“저런 인물이 최소한 아홉 명이나 더 있다는 말이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그가 죽기 전 지금까지 만났던 인물들과는 다른 자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 나올 거라더군요.”
“저자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북소연은 극일천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그들이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스윽.
고진유는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모두 이기면 되지 않겠소.”
“공자님.”
“우리가 먼저 가야겠군요. 숨어 있는 마적단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본 모양입니다.”
“네.”
휘이익!
고진유와 북소연은 신법을 펼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팡! 팡! 팡!
중년 사내는 돌아선 채 상의를 벗은 맨몸 상태로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며 수련을 했다.
그의 탄탄한 구릿빛 등은 평소에 얼마나 많은 수련을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천화공녀는 그의 뒤에서 멈춰 섰다.
“무슨 일이냐?”
“철갑을 가지고 왔습니다.”
뚝.
중년 사내의 움직임이 멈췄다.
“철갑이라면 화산도협에게 있다던 그 물건인가?”
“그렇습니다.”
중년 사내는 수련을 멈추며 뒤를 돌아섰다.
사십 대 후반의 나이처럼 보이는 중년 사내.
가슴과 복부 또한 군살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제법이군. 화산도협에게서 철갑을 빼앗아 올 정도라니. 화산도협이 당했다는 말인가?”
“당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필요 없어 버린 것을 그대로 들고 온 모양입니다.”
“철갑이 열렸다는 것이군.”
“무구천에서 얻은 듯합니다.”
“후후후. 무구천이라…… 글쎄다.”
중년 사내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이미 열려 필요도 없는 쓰레기를 좋다고 들고 온 이는 누구지?”
“극문전주 공승입니다.”
“나름 똑똑한 인물인데…… 이번에는 철갑에 눈이 멀었군. 이것을 가지러 갔을 때 철갑이 열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안 그런가?”
천화공녀가 철갑을 가리켰다.
“철갑 안에 선계문도가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후후. 그것이 들어 있었다…….”
중년 사내의 웃음. 이번에는 전과 다른 의미의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띠었다.
“선계문도이 맞는지 한번 볼까?”
그는 철갑을 받았다.
“피를 낼 만한 게 있나?”
“이것밖에…….”
천화공녀는 허리에서 찬 요검을 가리켰다.
“허허. 그건 사람을 벨 때 사용하는 것이고. 여자아이가 장도 같은 것을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
“…….”
“할 수 없지. 검을 뽑아라.”
스르르릉.
그녀의 허리에서 투명한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쿡.
중년 사내는 검 끝에 손가락을 살짝 눌렀다.
뚝뚝.
정확히 두 방울의 피가 철갑에 떨어졌다.
우우웅-
미세한 움직임과 함께 철갑 속에서 팽팽하게 걸려 있던 잠금 부분이 열렸다.
중년 사내는 뚜껑을 열어 안에 있는 물건을 꺼냈다.
백서에 그려진 한 장의 그림.
“선계문도가 맞군.”
천화공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림일 뿐이라는 백서를 굳이 무림맹 고서전에서까지 찾아올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는 꺼낸 물건을 보면서 물었다.
“이게 어디에 사용하는 것입니까? 무림맹에서 구할 정도면 비밀이 담겨 있는 물건입니까?”
“그냥 그림일 뿐이다. 받아라.”
“…….”
웅웅.
그녀는 선계문도를 받는 순간 잠시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리며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왜…… 이러지?’
그녀는 몸이 어지러워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괜찮으냐?”
“죄송합니다. 잠시 어지러워서…….”
그녀는 손에 여전히 선계문도를 들고 있었다.
“네가 손에 든 그것은 오직 두 사람에게만은 특별하지. 잃어버렸던 기억을 깨우기 위한 작은 조각이라고 할 수 있으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넌 망혼대법(忘魂代法)을 알고 있겠지?”
“……!”
천화공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밀종의 유산.
대법을 시전하면 당사자의 모든 기억을 잠시 묻어두고 새로운 기억을 가진 인물로 만드는 고대 밀종의 술법이었다.
그리고 망혼대법에 빠진 인물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사전에 약속한 물건을 봤을 때였다.
그녀는 망혼대법에 빠진 인물을 깨우기 위한 물건이 선계문도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두 사람? 누가 망혼대법에 빠졌다는 거지?’
휘익.
중년 사내는 상의를 걸쳤다.
“들어가자.”
“……네. 알겠습니다.”
중년 사내와 천화공녀는 건물로 들어섰다.
쪼르르르.
그녀는 안으로 들어선 뒤 익숙한 듯 차를 따랐다.
중년 사내는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 있는 여인의 초상화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그리움이 가득했다.
“저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겠지?”
“…….”
중년 사내는 단 한 번도 초상화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초상화의 여인은…….
“긴 세월 동안 내가 사랑한 여인은 오직 한 명밖에 없었다.”
“…….”
“내가 사랑한 여인, 너에게는 어머니가 되겠지.”
이 년 전.
어느 날 초상화를 보면서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마치 숨어 있던 자신에게 알려주기라도 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