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260화 (260/425)

260화

고진유는 북소연의 눈빛에 살짝 주눅이 들었다.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도 잘못한 느낌을 받았다.

북소연은 그런 고진유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겁먹을 거 없어요.”

“아…… 알겠소이다.”

“방금 공자님께서 여인복이라 하셨잖아요. 그래서 제가 딱 두 사람만 인정할게요. 그 이상은 절대로 안 돼요.”

“…….”

딱 두 사람이 누구인지,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흐음, 대답을 안 하는 것을 보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하셨네요.”

“소저, 그녀들과는 별다른 사이가 아닙니다.”

“어휴…… 방금 공자님의 말을 그녀들이 들었다면 엄청나게 실망하겠어요. 별다른 사이가 아니라면 그 손목에 걸려 있는 손수건는 무슨 이유로 계속 매고 있는 거예요?”

“…….”

“그리고 왼손에 낀 백환지(白環指)는요?”

“……알고 있었소?”

“당연하잖아요. 내 남자인데 그걸 모르는 여자가 어디 있어요? 가끔 보면 남자들은 정말 멍청하다니깐.”

“아…… 미안하외다.”

“됐어요. 이미 우리 사이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요.”

“고맙소.”

“그래도 이건 알아두세요. 내가 첫째입니다.”

“소저의 뜻을 따르겠소이다.”

“그럼 됐어요. 공자님에게 허락을 받았으니 나중에 그녀들에겐 따로 연락할게요.”

고진유는 미소를 띠며 그녀를 안았다.

“지금 고마워서 이러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소저가 좋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럼 곁에 아무도 없으니 이번에는 저도 공자님이 가는 곳에 따라갈 수 있나요?”

“음…… 같이 가도록 합시다. 못 갈 곳은 아니거든요.”

“고마워요. 근데 아무 준비도 안 했는데…….”

“제 옆에 있는 건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어째 말이 청산유수처럼 바로 나오는군요. 많이 발전하긴 했어요.”

고진유는 여전히 웃음을 지었다.

“소저는 본인이 다른 사람이라도 좋아할 수 있소?”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무림맹주가 아니고 나쁜 놈이라면?”

“얼마만큼 나쁜 사람인가요?”

“무림을 정복한다거나…….”

“똑같네요. 공자님은 늘 무림에서 정사마의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굳이 그걸로 나쁘다고 할 수 없잖아요. 혹시 무림을 정복할 생각이세요?”

“…….”

“음…… 말을 못 하는 것을 보니 그럴 생각인가 보네. 그럼 저도 도울게요. 어차피 지옥혈림의 혈미호라고 욕도 많이 듣는데요, 뭘. 남의 말은 별로 신경 안 쓰는 편이라서. 중요한 건 전 공자님이 좋은 것뿐이에요.”

“후후후. 나를 돕겠다고 하니 마음이 놓입니다.”

휘릭!

고진유는 그녀의 안아 올려 등 뒤로 업었다.

“소저는 앞으로 걱정하지 마시오. 세상이 본인을 나쁜 놈이라 부르더라도 당신에게는 나쁜 사람이 안 될 테니.”

“…….”

북소연은 문득 그가 맞지만 예전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 * *

얼마 만에 철갑을 보게 되는지 몰랐다.

나하중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철갑을 주시했다.

“무구천주가 지니고 있던 극일천주의 피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철갑을 열었다는 것이군.”

“맞습니다.”

공승의 설명을 들었다.

‘신기한 일이야…….’

대체 어떻게 철갑을 열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천공공에게 한 번 더 확인했다.

그의 대답은 같았다.

‘무구천주가 가지고 있던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인가? 천공공, 이놈이…… 또 다른 놈에게 극일천주의 피를 넘겼던 건가?’

극일천주의 피가 다른 인물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그 길은 천공공밖에 없었다.

‘망할 놈이…… 우리를 또 속이다니…….’

당장에라도 그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지만 천공공은 극일천을 위해 할 일이 많은 인물이었다.

“쳇, 죽일 수도 없고…….”

나하중은 옥병을 꺼냈다.

그가 지니고 있던 극일천주의 피.

‘음…….’

나하중은 먼저 자신의 손가락을 찌른 뒤 피를 떨어뜨려 보았다.

“…….”

당연히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했더니…… 아니군.’

옥병을 열어 천주의 피를 철갑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철갑의 뚜껑을 열었다.

‘이건…….’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다.

“선계문도군.”

예상과는 달리 무림맹 고서전에서 찾아낸 백서가 들어 있었다.

“필요 없다는 것인가?”

별 볼 일 없는 비단 천에 그려진 그림 한 장.

나하중은 백서를 다시 안에 던져 놓았다.

휘익.

천영령이 그의 앞으로 내려섰다.

“뭐 하는 짓이지?

나하중은 인상을 쓰며 명도 없이 나타난 그를 노려보았다.

천영령은 이미 철갑을 들고 있었다.

“이 물건은 천주님의 물건입니다.”

“…….”

나하중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것 때문에 천주께서 그대를 보낸 것인가?”

“그건 아닙니다.”

천영령은 바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이것을 천주께 드리지 않을 거라 여긴 모양이군. 천영령, 그대 생각에 내가 못 미더운 모양이야.”

“…….”

“대답을 바로 못 하는 것을 보니 알겠군.”

“아닙니다.”

“됐네. 지금 아니라고 한들 이미 늦었네. 그대가 내 수고를 덜어주는구만. 그 물건을 천주께 가져다 드리게.”

나하중은 천영령을 향해 손을 휘이 저었다.

“알겠습니다.”

천영령은 앞에서 사라졌다.

‘제대로 되는 게 없군.’

그가 원했던 신무신단의 제조법은 화산도협의 손에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자네도 그만 가보게. 이제 서로 빚은 없는 것으로 하세나.”

“그렇게 하지요. 근데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공승은 철갑 안에 든 물건이 무엇이기에 천영령이 나타나서 가지고 가는 것인지 궁금했다.

“철갑 안에 든 게 궁금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선계문을 그려놓은 그림일세.”

“그건 알고 있소이다. 특별한 그림입니까?”

“그건 나도 모르네. 예전에 듣기론 단순한 그림이라고 하더군. 그 이상은 듣지 못했지.”

“음…… 선계문도를 천주님께서 찾으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천주님의 속을 어떻게 알겠나. 언제 천주께서 우리에게 이유를 알려주면서 명을 내렸던가?”

공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천주는 오직 명만을 내릴 뿐이었다.

“전주님, 화산도협을 죽여도 상관이 없습니까?”

“…….”

나하중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건방진 녀석이었습니다.”

“무공이 강한 놈이니 당연할 수밖에. 한데…… 그대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이길 수 있겠는가?”

“승패를 가늠할 수 없지만 그와 제대로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 화산도협과 싸우기 전에 그런 말을 많이 들었네. 하지만 한 명도 이기지 못했지.”

흑화전과 우문전에서 나섰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누구도 화산도협을 이기지 못했다.

“그들은 화산도협에 대해 방심을 했을 것입니다. 최소한 방심하지 않는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허허, 자신감이 좋군. 화산도협을 죽이든지 살리든지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하게나. 그를 죽여주면 본인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

“알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겠습니다.”

공승은 밖을 나섰다.

홀로 남은 나하중은 밖으로 사라진 그를 생각했다.

‘그가 화산도협을 잡는다면 좋겠지만…….’

앞선 결과와 같게 나올지, 아니면 이번에는 다르게 나올 것인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독안룡도 화가 무척 난 것 같으니 좋은 여흥이 되겠군.’

* * *

천영령은 철갑을 들고 천주궁으로 들어섰다.

그의 눈앞에 실개천이 흘렀다.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지만 천주궁에서는 길이 아니면 다닐 수 없었다.

푸른 옥빛이 나는 계단을 따라 실개천을 넘어섰다.

우우우웅-

실개천 너머로 내려서자 계단이 사라지고 있었다.

‘올 때마다 주위가 변하니 함부로 여기에 들어왔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지.’

죽음의 진법이지만 통과하는 건 쉬웠다.

붉은색을 띤 길.

천영령은 오로지 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그의 걸음이 한순간 멈칫거렸다.

사방이 운무에 잠겨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건너편을 향해 보고했다.

“천영령입니다. 천주님께 드리기 위해 철갑을 가지고 왔습니다.”

쏴아아아-

그러자 눈앞을 가렸던 운무가 바람에 쓸려 사라지면서 그의 앞으로 백의자락이 흩날렸다.

이십 대 초반의 여인.

그녀는 미소를 띤 채 그를 맞이했다.

천영령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천화 공녀님을 뵙습니다. 철갑을 가지고 왔습니다.”

“수고했어요. 철갑을 주세요.”

천영령은 공손히 그녀에게 철갑을 내밀었다.

“이것을 누가 가지고 왔지요?”

“극문전주 공승이 무림맹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극문전주가 무림맹주와 싸워 이겼다는 말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맹주전의 집무실에서 몰래 가지고 나온 모양입니다.”

“후훗…….”

천화공녀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무림맹주에게 지금까지 당해왔으면서 몰래 가지고 왔다는 말을 믿나요?”

“…….”

“이미 철갑 안에 든 물건을 챙겼겠지요. 그에게 더는 필요 없으니 우리에게 던져준 것 같네요. 공승, 그가 무림맹에서 쓰레기를 가지고 왔어요.”

“그게…… 철갑 안에 천주 황야님께서 찾으시는 선계문도가 들어 있습니다.”

천화공녀의 가느다란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뜻이지?’

무림맹주가 일부러 철갑 안에 넣은 뒤 극일천에 보낸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수고했어요. 그만 돌아가세요.”

“넵. 알겠습니다.”

천화공녀는 그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뒤 안으로 움직였다.

그동안 찾지 못하도록 숨겨놓았던 철갑을 화산도협이 그냥 놓아둘 리 없었다.

‘무림맹주, 이걸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는 건물로 들어가면서 의문 속에 빠져들었다.

* * *

독안룡의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젠장……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그는 무구천의 일을 똑바로 처리하지 못한 탓이라 스스로 자책했다.

‘그년에게서 그분의 피를 먼저 받아냈어야 했어.’

안일하게 대응한 것이 문제였다.

극일십우의 일인인 자신은 중원 무림에서 상대가 없을 것이라 자만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새파란 젊은 놈에게 당했다.

화산도협 고진유.

‘그를 죽이지 않고서는 극일천에 돌아갈 수 없지.’

일각 전, 극일천에서 연락이 왔다.

화산도협 고진유가 호북성으로 혼자 움직이고 있었다.

“이놈…… 잡았다.”

독안룡은 그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 * *

다각다각.

소가 끄는 수레에 고진유와 북소연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형주를 지나 호남성의 임례로 들어왔다.

소를 몰던 농부가 뒤를 보았다.

젊은 사내와 여인의 모습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두 남녀는 한수까지 간다고 했다.

“저기…… 요즘 한수에 가는 길에 도적들이 많이 출몰한다고 합니다.”

“산적들인가요?”

“평원 지대라서 산적은 아닙니다.”

“마적들인가 보군요.”

“그, 혹시나 그곳에 가더라도 큰 무리를 지어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수레는 한수로 들어가는 길목에 멈추었다.

“두 분께서는 여기서 내리면 됩니다. 저기로 가면 한수로 가는 작은 마을이 나올 겁니다. 기다렸다가 표행을 하는 표국이 있으면 함께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신경 써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고진유는 사내의 손에 금화 한 냥을 건네주었다.

“헉…… 이건…….”

“아저씨 덕분에 편안하게 잘 왔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이건 너무…… 큰돈인데…… 고맙습니다…….”

“나중에 애들이랑 맛있는 거라도 사서 드세요.”

고진유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떠나는 그를 보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소저, 우리도 가볼까요?”

“그래요.”

고진유와 북소연은 한수로 들어서는 길을 따라서 걸었다.

“요즘 부쩍 주위에서 도적들이 많이 활동하는 것 같아요.”

“이유가 있소이까?”

“중원 각 문파들이 몸을 사리는 중이에요. 그들도 조만간 큰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아요.”

“도적들이 그 틈을 노리는 모양이군요.”

“그렇다고 봐야죠. 괜히 우리들 때문에 백성들만 힘이 들죠.”

“한번 정리를 해야 하겠군요.”

“힘들어요. 각 문파에서 그들을 잡아봤자 아무것도 얻는 게 없잖아요.”

“그건 결국 돈이 안 된다는 말 같은데…… 맞소?”

“바로 정확하게 맥락을 보셨어요. 이득도 없는데 굳이 위험하게 다칠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런 것을 보면 무림이…… 어떤 때는 필요 없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군요.”

“…….”

다른 건 몰라도 일반 백성들을 괴롭히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소저, 이 일을 지옥혈림에서 맡아서 처리해 줄 수 있겠어요?”

“흐음…….”

아무리 그와 사랑하는 사이라도 지옥혈림에서 그런 일을 해줄 수는 없었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마적 한 명당 금액을 정하면 되지 않겠소?”

“그 돈은 누가 내는 거예요?”

“중원상국에서 내는 거로 하죠.”

“뭐…… 그렇게 해준다면야 본 림에서도 못할 일은 없지만, 중원상국에서 공자님의 뜻을 받아들일까요? 돈이 많이 들 텐데…….”

“초기에는 많이 들겠지만 나중에는 소문이 나서 함부로 도적질을 못 할 겁니다. 그리고 중원상국도 손해는 보지 않을 겁니다. 충분히 중원인들의 명성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두 곳에 제 뜻이 어떠한지 연락 좀 부탁하겠어요.”

“호호호, 알겠어요.”

“괜찮다 싶으면 세부사항은 서로 만나서 직접 의논하라고 하고요.”

마적 문제를 너무 쉽게 해결하는 고진유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