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259화 (259/425)

259화

독전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맹주님. 죄송합니다.”

“문제가 생긴 것 같군요.”

“집무실에 침입자가 들어와서 물건을 훔치고…… 갔습니다.”

“침입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죄송합니다. 침입자를 쫓아갔지만 무림맹을 나서자마자 놓쳤다고 했습니다.”

“혹시 다친 사람은 있습니까?”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한데…….”

“말씀하세요.”

“……침입자의 손에 무엇인가 상자와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고 했습니다.”

“독 대주, 그게 정말인가?!”

담담한 고진유에 비해 제갈양이 깜짝 놀라 다급히 물었다. 맹주전에서 상자를 훔치고 갔다면 그 물건은 철갑이 틀림없었다.

“네. 수하가 손에 상자를 들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맹주…… 큰일 났군. 철갑을 훔쳐간 것 같네. 말이 씨가 됐어.”

“그런 것 같습니다.”

고진유는 여전히 담담했다.

철갑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한 이상 그저 상자일 뿐이었다.

“큰일은 아닙니다. 혹시나 해서 놓아두었는데 정말로 그걸 훔쳐 갈 줄은 몰랐군요.”

“……일부러 놓아두었다는 말이군.”

“중요한 물건도 아닙니다. 극일천의 인물이 맹주전에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우리가 이미 챙기지 않았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무림맹에 들어와서, 그것도 맹주전에서 물건을 훔치고 달아났다는 게 마음에 걸리네.”

“후후. 그만큼 극일천이 대단한 곳이지 않습니까.”

독전호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맹주전의 호위를 선 수하들이 집무실에서 물건을 훔치고 달아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일 물건이 아니라 살수였다면 또 한 번 큰일을 당할 수 있었다.

분명 이번 일은 친위호위대에게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고진유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독 대주께서는 마음에 두지 마세요. 이건 호위대의 능력을 넘어선 일이에요. 그가 마음먹고 도망간다면 무림맹에서 그를 잡을 수 있는 인물은 본도를 포함해서 아무도 없으니 자책할 필요 없습니다.”

“……넵. 알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좀 더 경계를 똑바로 서도록 하겠습니다.”

독전호는 군사전을 물러났다.

“철갑을 잃었는데 정말로 괜찮겠나?”

“귀찮은 물건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는 껍데기만 가져갔을 뿐입니다. 제갈 형님께서도 신경을 쓸 필요 없습니다.”

“자네가 그렇다고 말을 하니 잊겠네.”

“네. 참, 화산지에서 모여 한잔들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 나도 갈까?”

제갈양은 입맛을 다셨다.

“같이 가시죠.”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철갑에 대해 생각했다.

‘이젠…… 기다리면 되는 것인가?’

* * *

맹주전에서 일어난 사건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고진유와 제갈양은 곧바로 화산지에 도착했다.

전각 밖에서부터 안에 모여 있는 이들의 웃음이 들려왔다.

“어…… 동생, 왔어? 양이도 왔구나.”

“누님도 계셨네요.”

며칠 동안 검후와 시간을 보내던 그녀가 화산지에 있었다.

제갈양은 그녀를 보자마자 멈칫거렸다. 무혼신녀가 이들과 같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안 들어오고 뭐 해?”

“아…… 네에에.”

제갈양은 주춤거리며 고진유를 따라 들어섰다.

고진유는 자리에 앉으면서 무혼신녀가 건네주는 술잔을 받았다.

“이야기는 잘 끝냈느냐?”

“그 부분들은 제갈 형님이 잘 처리 해주기로 했습니다.”

“훗. 그건 네가 할 일이 아니냐?”

“제가 바빠서요.”

무혼신녀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여기서 보니 제일 한가한 사람이 맹주더구만.”

“크큭, 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묵경은 곧바로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진유 동생, 무림맹에서 바쁜 일이라는 게 뭐야?”

“제가 잠시 밖에 나갔다 올 일이 생겼습니다.”

“…….”

고진유의 말에 모두 그대로 멈추었다.

묵경은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딜 가려고?”

“묵경 형, 선계문에 가볼까 합니다.”

“……!”

또 한 번 그들은 황당한 표정들이 나왔다.

“선계문이 어디인지…… 알고 있어?”

“모릅니다. 근데 가다 보면 나올 것 같습니다.”

고진유의 대답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냥 가다 보면 나온다는 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무혼신녀는 달랐다. 그녀는 느낌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해라. 이번에는 혼자 갈 생각인가 보군.”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인양이 얼른 다가왔다.

“형, 저도 함께 가면 안 됩니까?”

“이번 일은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야. 넌 내일부터 녹검 씨하고 같이 제갈 형님의 일을 도와드려. 무슨 일인지 알려줄 거야.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인양은 실망했지만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고진유는 자신을 쳐다보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처럼 하던 일을 하고 계시면 됩니다. 그리고 혹시나 큰일이 생긴다면 누님께 말씀하세요. 전부 해결해 주실 겁니다.”

“어허, 누구 맘대로?”

“누님, 부탁하겠습니다.”

무혼신녀는 눈을 살짝 흘겼다.

“흥, 빨리 일 마치고 와라. 네 가족은 여기에 있잖아.”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마치 무엇인가를 아는 듯한 그녀의 눈빛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 * *

무림맹을 무작정 나왔다.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해놓은 목적지는 없었다.

하지만 고진유의 발걸음은 이미 한 곳을 정해놓은 듯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를 걸었지만 누구도 고진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은 귀신처럼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며 걸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하군.”

고진유는 잠시 길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자네는 어디서 왔는가?”

고진유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어르신, 하남에서 왔습니다.”

“하남? 말투는 하남은 아닌 것 같은데…… 저기 남쪽 말투 같구만.”

“네. 고향은 광동…… 사람 같습니다.”

“반갑구먼.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도 광동 출신인 것 같네.”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노인은 손에 들고 있던 주먹밥을 하나를 내밀었다.

“점심인데 하나 들게나.”

“어르신께서는 드실 게 있으십니까?”

“두 개 있어. 요즘에는 하나만 먹어도 배불러.”

“고맙습니다.”

고진유는 노인이 건네준 주먹밥을 베어 먹었다. 소금으로 간을 맞춘 밥이 맛있었다.

노인은 한 입 베어 물고 물었다.

“어딜 가는 길인가?”

“음…… 그냥 발길 따라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어…… 어…….”

노인은 말을 멈칫거리면서 똑바로 하지 못했다. 기억하려고 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은 듯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르신, 무엇을 하시는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됩니다.”

“……알겠네.”

노인은 풀이 죽은 얼굴로 앞을 보았다.

“요즘 따라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구만. 분명 무엇인가 하기 위해 나왔는데…….”

“…….”

“예전에 내가 누군지 궁금하다네. 자네는 그 기분을 아는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면 어떤 기분인지?”

“많이 답답하실 것 같습니다.”

“허허허, 그렇지. 답답하다네. 혹시나 내가 나쁜 놈인지 아닐까 생각하면 겁도 나고…….”

“제가 보기에 어르신께서는 좋은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가?”

“처음 보는 저에게 주먹밥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자네는 좋은 사람이구만.”

“고맙습니다. 근데…… 저도 제가 나쁜 사람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노인은 아래위 입술을 누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도 좋은 사람이네. 내가 기억을 못해도 관상은 볼 수 있지. 자네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네.”

“하하, 고맙습니다. 저어…… 한데 이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자제분들이 있으십니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있다네. 하지만 아들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내 자식인지 모르겠어. 그들은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만 난 그들이 말하는 기억들이 내 기억인지도 모르거든.”

“……힘드시겠습니다.”

기억하고 싶어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고진유도 알았다.

“자네는 내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들의 말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게 좋다고 보는가?”

“죄송하지만 무엇이 맞는 것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쯔쯔. 젊은 사람이 그것도 모르는가?”

노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르신, 어디를 가십니까?”

“자네가 가니 나도 가야지 않겠나. 아들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저기가 내 집이라고 했다네.”

고진유는 노인을 부축했다.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똑바로 기억은 못 해도 몸은 아직도 튼튼하지.”

스으윽.

노인은 혼자서 길을 건너갔다.

아직 한 손에는 먹다 남은 주먹밥을 들고 있었다.

‘……저분이 들어가면 나도 가야겠다.’

고진유는 노인이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만 가볼까?’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여기서 뭐 하세요?”

등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

고진유는 뒤로 돌아섰다.

북소연이 환하게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소저, 보고 싶었소이다.”

“언니께 교육을 많이 받으셨네요.”

“후후후. 그렇게 보입니까?”

“네. 그래요. 그나저나 진짜로 공자님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네요. 저도 보고 싶었어요.”

고진유는 그녀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소이까?”

“강릉까지 내려오신 분이 제게 어떻게 알고 왔는지 묻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여기가 강릉이었소?”

“설마 모르고 온 건 아니겠죠?”

북소연은 수하의 보고를 받았다.

무림맹주와 비슷한 사내가 형주의 초입 마을에 나타났다는 내용이었다.

확인을 해보고자 했지만 이내 놓쳤다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혹시나 싶어 그가 나타났던 방향을 따라 예상하며 찾으러 다녔다.

“……무작정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온 모양이외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요?”

그녀는 살짝 걱정되었다.

무림맹주 혼자서 무림을 다닌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 일도. 잠시 누굴 만날 수 있을까 싶어 가는 중이지요.”

“누구를……?”

고진유는 주위를 보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길가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스윽.

고진유는 손을 내밀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떨까요? 이왕 만났는데. 우리가 했던 약속대로 철갑에 대해서 알려줄 것도 있군요.”

“……저기로 가죠.”

* * *

망산 아래 강이 내려다보이는 망하루에 올라섰다.

고진유와 북소연은 여전히 손을 잡은 채 나란히 앉았다.

먼저 무구천에서 일어난 일을 간단히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철갑에는 세 가지의 물건이 있더군요. 첫 번째 물건은…….”

고진유는 세 가지 물건들을 알려주면서 신무신단의 제조서를 태운 것까지 말을 했다.

“두 가지 모두 위험한 물건이긴 한데 제조서는 아깝네요. 무인이라면 내공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텐데.”

“소저가 원한다면 줄 수 있소이다.”

“……태웠다고 하지 않았나요?”

“맞소이다. 누님 앞에서 태웠지요.”

그의 해맑은 표정을 보면서 북소연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속을 뻔했다. 아니,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속았다.

“그것을 외웠군요. 당신…… 정말 당신답네요.”

“후후후. 태우자니 아깝긴 했죠. 혹시나 신무신단의 부작용을 치료할 수 있을지 몰라 외워두었어요.”

북소연은 방금 전까지 가졌던 걱정이 사라졌다.

그는 여전히 예전과 같았다.

“혹시 명부에 본 림의 인물이 있던가요?”

“제갈 형님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들의 함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서로 내분을 일으키게 만들 목적이라는 것인가요?”

“맞소이다. 그래서 무림맹에서도 조심스럽게 접근할 계획입니다. 잠시…… 가까이 와보세요.”

스윽.

고진유는 그녀를 끌어당기며 간자에 대해 속삭였다.

“설마…… 그들이…….”

북소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알려준 인물들이 누구인가.

지옥혈림 최고의 인물들이었다.

“소저, 아직 확실한 건 없어요. 극일천에서 굳이 하나의 명부에 간자들을 모두 적어놓을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그렇긴…… 하네요.”

그의 말이 맞는 듯했다.

“소저, 그만 얼굴 인상을 펴세요. 당장 어떻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아…… 네에…….”

북소연은 바짝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보며 눈이 커졌다.

고진유는 멈추지 않았다.

“……!”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사람의 입술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다음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그저 몸이 알아서 하는 대로 맡길 뿐이었다.

* * *

망하루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어두워지고 있군요. 내려가도록 하죠.”

“어디를 가실 건가요?”

“글쎄요. 혹시 좋은 곳이 있소이까?”

“정말로 무작정 내려왔군요.”

“지금까지 안 믿었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혹시나 했거든요. 저를 따라오세요.”

“고맙소이다. 내가 여인복은 좋은 것 같군요.”

“아…… 그렇지. 언젠가 기회가 있을 때 말을 하려고 했어요.”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이오?”

고진유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느낌이 이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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