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고진유는 서책을 가리켰다.
“여기에는 무림맹을 포함해서 중원 주요 문파들 안에 숨어 있는 간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
표지가 누렇게 변한 서책.
단순히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는 서책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것 또한 신단 제조서와 함께 풀린다면 무림은 대혼란에 빠졌을 것이었다.
한 장씩 넘기는 우종성의 손이 떨렸다.
‘사마…… 추.’
이미 알고 있는 인물부터 이름이 나왔다.
이후로 집법당주였던 반검형, 백리세가의 백리노문 등의 이름이 이어졌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이름들이 중간중간 나열되어 있었다.
영서당주 역리청, 용봉 부당주 진일한의 이름이 그들 사이에 똑바로 적혀 있었다.
‘아직도 그들의 간자들이 무림맹에 이리도 많이 숨어 있다니…… 대단하다.’
우종성은 화산파가 나올 때까지 책장을 빨리 넘겼다.
멈칫.
그의 손이 떨리며 멈추었다.
화산파 글자 아래에 눈에 익은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이분이…….”
청매단주 도홍.
그는 화산파의 일대제자였다.
우종성과 나머지 사형제들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설마 그의 이름이 서책에 나올 줄은 몰랐다.
장두총은 믿기지 않다는 듯 소리쳤다.
“이걸 믿으라고?”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화산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중원 각 문파 대부분의 주요 인물들도 적혀 있었다.
“이럴 수가…… 여기 적혀 있는 게 사실이라면 무림에 난리 정도가 아니라 폭풍급이잖아.”
“태우려면 이걸 태워야 하지 않아?”
묵경도 같은 생각이었다.
극일천의 간자가 적힌 명부가 중원에 퍼져 나간다면 각 문파마다 대혼란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우종성은 얼른 서책을 닫았다.
“휴우. 묵 형의 말대로 이것을 태우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이 드는군.”
“철갑을 찾고자 한 이유가 명확한걸. 두 개 중 하나라도 밖으로 나왔다면 대혼란이 일어났을 거야.”
“사제가 철갑을 도중에 열어서 다행입니다.”
“호정 사제, 여기에 적힌 인물들을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
사형제들은 한마디씩 하며 고진유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스윽.
고진유는 서책을 집어 들었다.
“안타깝지만 우린 여기에 적힌 인물들을 무작정 처리할 수는 없어요.”
“진유 아우,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가장 먼저 바로 각 문파에 알려 간자를 잡아야 하는 게 순서가 아닌가.
“묵경 형, 만약에 이 명부를 극일천에서 거짓으로 만든 것이라면 어떻겠어요?”
“……!”
고진유의 말에 흥분된 감정이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대꾸도 없이 고진유를 볼 뿐이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어요. 확실하지 않은 이상 그러기에 이것을 중원에 알릴 수는 없습니다.”
“……사제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결국 증거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군. 함부로 의심했다가 후회할 수 있겠어.”
묵경은 먼저 철갑을 열었던 무혼신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분께서는 뭐라고 하셨어?”
“누님께서도 조용히 확인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도 그 방법이 제일 좋은 것 같구나.”
“그럼 우리의 뜻이 정해졌으니 제갈 군사와 이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철갑에 대해서 이야기를 모두 마쳤다.
그들은 집무실에서 일어났다.
“아, 모두 모여서 화산지에서 한잔 마시기로 했는데?”
“먼저 가세요. 제갈 군사님을 만나고 나서 바로 화산지로 갈게요.”
“알겠다. 일이 먼저이니…… 나중에 보자.”
“사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나중에 와.”
그들은 한마디씩 한 후 맹주전을 나섰다.
‘……조용해졌군.’
홀로 남은 집무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철갑은 잠겨 있었다.
다시 열고자 한다면 극일천주의 피가 필요했다.
고진유가 물끄러미 철갑을 바라보다 날카로운 침으로 약지를 찔렀다.
뚝. 뚝.
피가 철갑 위에 떨어졌다.
철갑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피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철갑 안에서 진동 소리가 미세하게 울렸다.
고진유는 철갑을 양손으로 잡으며 뚜껑을 열었다.
‘내 피에 반응을 보일 줄은…….’
철갑을 열기 위해서 극일천주의 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 고진유는 혹시나 사람의 피면 똑같이 반응하지 않을까 싶어 자신의 피를 떨어뜨려 보았다.
그런데 철갑이 반응하며 열렸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때는 철갑에 무엇이 들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의 피에 철갑이 반응했다는 사실이었다.
철갑은 뚜껑을 닫자 안에서 자동으로 잠겼다.
한 번 더 떨어뜨려 보았다.
철갑이 다시 열렸다.
의문이 들었다.
‘만일 다른 사람의 피라면.’
그래서 곧바로 인양과 독전호에게 부탁해 피를 받았다.
당연히 열릴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의 피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딸깍.
또다시 철갑이 열렸다.
‘망할…….’
고진유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철갑을 노려보았다.
대체…… 왜…… 열리는 거지?
내가 극일천주인가?
자신은 세상에 혼자 떨어져 버려진 아이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도둑놈 집단에 들어가서 도둑질을 했고, 흑귀에 잡히면서 현재 지금의 자신이 되었다.
풀리지 않은 의문.
이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인물은 오직 한 명밖에 없었다.
극일천주.
‘그를 만나지 않고서는 철갑이 열리는 이유를 알지 못해.’
스윽.
고진유는 탁자 위에 놓인 선계문도(仙界門圖)를 보았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그림.
극일천주가 원한다는 그림이기도 했다.
“…….”
고진유는 철갑에 선계문도만을 넣었다. 이미 그림은 머릿속에 하나도 빠짐없이 외워두었다.
철갑을 집무실 한쪽 벽에 놓아두고 탁자 위에 있던 명부를 들었다.
“이 일을 제대로 할 사람은 오직 한 분밖에 안 계시지.”
서책에 적힌 간자들을 처리할 수 인물은 무림맹에서 제갈양밖에 없었다.
* * *
고진유가 맹주전을 나간 뒤 일각이 지났다.
스르르륵.
텅 빈 집무실에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림정자에서 사라졌던 공승은 여전히 무림맹에 숨어 있었다.
철갑을 찾는 일은 쉬웠다.
단번에 책장에 놓인 철갑을 발견했다.
숨기지 않고 눈에 보이는 곳에 뒀다면 철갑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확실해 보였다.
‘철갑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겠지? 아니면 내가 가지고 가라는 뜻인지 모르겠군.’
공승은 너무 눈에 보이게 놓은 둔 것이 이상했다.
‘……좋아. 이것을 가지고 가라는 뜻이라면 원하는 대로 가져가야겠지.’
철갑이 열린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그건 그에겐 상관없었다.
천문전주가 원하는 것은 철갑이나 극일천주의 피였다.
‘이것으로 그의 부탁은 들어줬다. 앞으로 귀찮게 하지 않겠지.’
공승은 철갑을 들었다.
‘맹주, 네놈은 다음에…….’
스르르륵.
공승은 집무실 밖으로 기척을 내며 나왔다.
잠시 뒤.
공승의 기척을 발견한 친위호위대가 빠르게 움직였다.
* * *
군사전으로 향하는 고진유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쯤이면 철갑을 가지고 갔겠지?’
공승이 계속 주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모른 채 놓아두었다.
철갑을 극일천주의 손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가 필요했고, 그래서 철갑을 잘 보이는 자리에 놓아두었다.
‘선계문도가 들어 있는 것을 본다면…… 알게 되겠지. 내가 왜 선계문도를 보냈는지.’
그가 어떤 반응을 보여줄 것인지 궁금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군사전 입구에 다가섰다.
“맹주님, 오셨습니까?”
“수고가 많소이다. 군사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됐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니 바로 가겠소이다.”
고진유는 이미 천맹군의 건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제갈 형님, 진유입니다.”
“들어오시게.”
고진유는 군사전 집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제갈양은 책상에서 일어난 뒤 걸어 나왔다. 공식적으로 찾아오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맹주, 이 시간에 무슨 일이오?”
“편안하게 말씀하십시오.”
“그런가? 알겠다. 앉아라.”
고진유와 제갈양은 의자에 앉았다.
“지금까지 일하십니까? 고생이 너무 많으십니다.”
“두 사람 일까지 하다 보니 바쁠 만도 하지. 일을 잘 안 하려고 하는 분이 있지 않은가.”
“누군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군요.”
“맞아. 그분은 워낙 밖에 싸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거든.”
“……하하하하. 형님은 능력이 뛰어나서 그가 없어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엎드려서 절받기로구만.”
“아닙니다. 그저 칭찬인걸요.”
고진유가 제갈양의 탁자에 쌓여 있는 서류들을 보았다.
“요즘 무림 정세는 어떻습니까?”
“안휘성에서 조만간 큰 싸움이 일어날 것 같다.”
“남궁세가와 혈사천입니까?”
“혈사천은 맞는데 이번 상대는 남궁세가가 아니라 마곡이다.”
“마곡에서요?”
“천살지인이 없으니 한판 해볼 만하다고 여긴 모양이더군.”
“그렇군요. 본 맹에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남의 잔치에 굳이 덩달아 난리 칠 필요가 있겠냐. 그저 옆에서 구경만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 다른 사건들은 없습니까?”
“중원에 관심이 많은 모양인가 보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입니다.”
까닥까닥.
제갈양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건드렸다.
“이젠 찾아온 용건이나 말해보게. 철갑에 든 물건이 무엇인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눈치가 백단이거든. 하하하.”
“그런 것 같습니다.”
고진유는 가지고 온 서책을 그에게 내밀었다.
“철갑에 있던 것 중 하나입니다. 이름들이 적힌 명부입니다.”
“나머지는?”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어?”
“신무신단의 제조법입니다.”
“그 뭐냐…… 내공을 억수로 증진시켜 준다는 극일천의 환단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맞습니다.”
“그걸 왜 불태워? 우리가 만들면 좋지 않나?”
“좋긴 하겠습니다만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서로 가지려고 하지 않을까요?”
“흐음…… 무림맹에서 잘 관리하면 될 텐데. 아쉽군.”
“만일 관리한다면 무림맹이 아니라 화산파입니다. 다른 곳에서 인정하겠습니까?”
“쯧, 아마도 인정 안 하겠지?”
“인정 못 할 겁니다. 그들은 당장 제 앞에서는 말을 못 하겠지만 뒤에서 험담을 하겠지요. 그런 소리를 들은 제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화산파를 욕하는 자들은 정사마를 논하지 않고 베어버릴 것입니다.”
“…….”
제갈양은 방금 한 이야기에 대해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만큼 화산파에 대해 각별한 정을 지닌 인물은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없애 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누님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쩝. 아쉽긴 하지만 괜히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잘했다.”
제갈양은 그가 가지고 온 서책에 관심을 가졌다.
“그럼 이게 나머지 하나인가?”
“총 세 가지였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선계문이 그려진 백서였습니다. 그림만 그려져 있을 뿐이었고요.”
“그건 어디에 있나?”
“철갑에 넣어두었습니다.”
“철갑은 어디에 있는데?”
“집무실에 두고 왔습니다.”
“누가 훔쳐 가면 어떻게 하려고?”
“중요한 건 태웠고 나머지 하나는 이것입니다. 선계문도는 그저 그림일 뿐이니 그들이 철갑을 훔쳐가도 상관없습니다.”
“뭐, 맹주가 그렇다면. 알겠네.”
제갈양은 서책을 한 장씩 펼쳤다.
스윽.
한 장씩 넘기며 안에 적힌 이름들을 보았다.
“많군. 아직도 이만큼이나 숨어 있다니 놀랄 노자야.”
“명부에 적힌 이름들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상황입니다만, 이 서책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 말은…… 확실하지 않다는 말인가?”
“명부에 적힌 이름들을 극일천에서 일부러 적은 것이라면요?”
“흠,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어. 큰일 날 뻔했군. 무턱대고 여기에 적힌 인물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족쳤다면 저들의 계략에 당할 수도.”
“맞습니다. 우선 여기에 적힌 인물들에 대해 확인부터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걸 나보고 하라는 말이겠지?”
“죄송합니다. 형님과 제갈문 어르신이 아니시라면 중원에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건 맞지만 난 되게 바쁜데…… 그리고 여기에 적힌 인물들을 비밀리에 조사하려면 잠행에 뛰어난 인물도 있어야 한다고. 주위에 실력 좋고 믿을 만한 인물이 없어.”
“인양 아우와 녹검 씨에게 말을 잘 놓도록 하겠습니다.”
“…….”
제갈양은 똑바로 고진유의 얼굴을 보았다.
“너…… 두 사람을 맡겨놓고 또 어딜 갈 생각인가 본데?”
“정말 눈치가 백단이십니다. 사실…… 제 신상에 대해 알아볼 게 있어 다녀올 생각입니다.”
“아우 신상을?”
“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 신상에 대해서 중요한 것을 찾은 듯해서요.”
“그건……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 지금까지 고아로 자랐다고 들었는데 단서를 알아낸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형님.”
“언제쯤 나갈 생각이지?”
“오늘 아니면 내일 일찍 떠날 것입니다.”
“빨리 돌아오도록 해.”
“…….”
고진유는 미소를 지었다.
“특별히 죽지만 않는다면요.”
제갈양은 더 묻지 않았다.
단지 빨리 돌아오기를 물었건만 고진유는 죽음에 대한 말을 꺼냈다.
‘뭔가 있군.’
그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있음을 알았지만 물어도 가르쳐 주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제갈 형님, 무림맹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꼭 돌아와. 여기에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전부 있잖아. 안 그래?”
“알겠습니다.”
고진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두 사람이 있는 집무실로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맹주님.”
맹주전에 있어야 할 독전호가 달려왔다.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선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