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수곡자의 보고를 받았다.
그곳에는 믿기지 않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하중은 과연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아닐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철갑이 이미 열렸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철갑은 절대로 열 수 없어. 그것을 만든 천공공도 그의 피가 없이는 열지 못한다고 했다.’
“크하하하하!”
고심하던 나하중은 갑자기 대소를 터뜨렸다.
“약은 놈…… 우리가 찾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들 생각이었군. 화산도협, 그따위 속임수에 당할 것 같으냐?”
나하중은 결정을 내렸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가 가진 철갑을 빼앗아 와야 했다.
“천영령, 곁에 있는가?”
“말씀하시지요.”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하중은 어디에서 들리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극문전주에게 가서 내가 만나고 싶다고 전하게.”
“알겠소이다. 다른 건 없소이까?”
“……없네.”
나하중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천영령.
그는 천주궁에서 나온 인물이었다.
그 말은 즉 극일천주의 사람이라는 뜻.
두 명의 공각원주가 죽은 이후 천주궁에서 그가 파견을 나왔다.
나하중은 그를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천주의 명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쳇. 혹을 달고 다니는 기분이군.’
앞으로 조용하게 처리할 일을 맘대로 하지 못할 게 확실했다.
천문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천주궁에 여과 없이 보고될 게 뻔했다.
‘그동안 무림에는 관심이 없던 천주가 왜 갑자기 안 하던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군.’
극일천의 모든 일에 대해서 천주는 오 년이 넘게 관여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알려지기로는 폐관에 들어섰다고 했다.
‘폐관의 의미도 없는 양반이 정말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천주의 무공은 선계에 들 정도로 신선지경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이 무공 수련을 위해 폐관을 한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나하중은 시간이 지나면서 천주가 폐관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 사실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천주궁 안에서 나온 음식들을 본 것이 바로 그 계기였다.
‘소식(小食)을 한다고 해도 음식에 전혀 손을 댈 순 없다. 폐관에 들어서도 사람은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으니까.’
그 뒤, 나하중은 며칠 동안 천주궁에서 그대로 나오는 그의 식사를 확인했다.
보름이 지난 뒤에야 들어간 음식이 반쯤 비어 나왔다.
나하중은 그때 확실하게 깨달았다.
‘천주는 외부에 나갔다 온 게 틀림없다…… 보름 동안 어디에 다녀온 걸까?’
분명 딴짓을 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당분간 조심해서 움직여야겠어.”
극일천의 천주이자 자신의 주군이긴 하지만, 그를 믿을 수 없었다.
* * *
찍찍.
인양은 주머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형, 귀여워요.”
“네가 키울래?”
“아! 그래도 되나요?”
“그냥 유기한 채 갔으니 나도 잘 모르겠다. 나중에 주인이 나타나면 이놈이 알아서 찾아가지 않을까?”
“그럼…… 그때까지 제가 데리고 다닐게요.”
“그렇게 해.”
“알겠습니다!”
인영은 금율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무혼신녀는 야밤에 고진유가 밖에 나갔다 온 기척을 알고 있었다.
“극일천 놈들이 맞지?”
“이걸 훔치려고 했습니다.”
“그게 정말로 철갑을 열 수 있는 모양이군. 훔치겠다고 저런 작은 놈까지 보낸 것을 보니.”
“이젠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사용하네요.”
“극일천은 원래 그런 곳이다. 방심했다가는 당하게 되지.”
“그런 것 같습니다.”
무혼신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근데…… 왜 그들을 굳이 보내줬지?”
“딱히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게 이유야?”
“네.”
고진유는 문제가 되지 않은 듯 말했다. 그때 묵경이 나서며 한마디 거들었다.
“누님, 진유 아우는 예전부터 목숨 걸고 싸우지 않으면 상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 나중에 그놈들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르지 않느냐?”
고진유는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누님, 제가 상대했던 자들을 모두 죽여야 했다면 중원인의 절반이 사라질 겁니다.”
“…….”
무혼신녀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극일천은 다르지 않아?”
“저에게는 똑같습니다. 극일천이나 정사마의 무림인들이나 자신들의 야망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음…… 같다라…… 세상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지?”
“서로 생각하는 관점이 다를 뿐입니다.”
“네가 그렇다면야…… 이해는 했다만, 혹시나 극일천도 나쁘지 않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나 싶군.”
“그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분명 나쁜 짓입니다. 극일천이 그렇지요.”
“흐으음. 그 말은 극일천은 분명 나쁘지만 직접 목숨 걸고 싸우지 않는다면 그 이상은 아니다?”
“대충 비슷한 것입니다.”
무혼신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하튼 철갑에 무엇이 들었는지 엄청 궁금하군. 무림맹에 돌아가면 열어보겠지?”
“…….”
고진유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저번에 누님이 말씀하신 대로…… 열어봐야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물건이 있다면 어떻게 할지 걱정이긴 합니다.”
“망설여지는 건 나도 이해한다. 감당할 수 없다면…… 과감히 버려야지 않겠어?”
“우선은 누님과 둘이서만 보는 걸로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묵경은 살짝 실망한 얼굴이었다.
철갑을 찾느라 모두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희생 또한 생겼다.
“묵경 형과 인양, 녹검 씨에게도 미안하지만…… 누님과 먼저 보고 난 뒤에 보여 드리겠어요. 이해해 주세요.”
“흐음, 그래. 알겠다. 난 철갑 안에 혹시나 몸에 좋은 게 있을까 싶어 궁금한 것뿐이니까.”
“후후후. 안에 없더라도 제가 몸에 좋은 것이 있으면 구해 드릴게요.”
“좋았어. 그렇게 해주는 거다.”
묵경은 아쉽기는 하지만 고진유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고진유가 자신들이 바로 보게 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듯했으니까.
정말로 그의 말처럼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진유 형, 전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인양은 현 상황에서 변하는 것이 싫었다. 그저 이대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후후. 알았어.”
“저도 괜찮습니다.”
녹림야검도 손을 번쩍 들었다.
“모두 고맙습니다. 빨리 무림맹으로 돌아가도록 하죠. 철갑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네요.”
그 틈에 묵경은 예전부터 몰래 물어보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근데 말이야. 네가 철갑을 잘 숨겨 놓았겠지만, 혹시 어디에 두었냐?”
“무림맹 안에 있어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었어? 그걸 밖에 두지는 않았을 게 아니냐?”
“후후, 진짜로 무림맹 안에 있어요. 도착하는 대로 보여 드릴게요.”
“……?”
고진유를 제외한 일행은 무림맹에 도착할 때까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 * *
펄럭!
무림맹이 있는 정주로 달려오는 마차 위 깃발이 휘날렸다.
마차의 양쪽에 두 개의 깃발.
우측은 검각 봉검문기이며 좌측에는 검후령기였다.
정주로 들어선 마차는 빠르게 무림맹으로 달렸다.
중원인들은 마차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알았다.
무림 최고의 여무인 검후가 마차 안에 타고 있었다.
봉검문에서 거의 외부로 나오지 않는다는 검후가 멀리 하남성까지 왔다.
‘멸봉자라…… 정말로 그녀가 멸봉자란 말인가?’
제자인 아진화의 서신을 받았다.
멸봉자라고 하는 미친년이 검후이신 사부님을 욕보였다고 적혀 있었다.
멸봉자란 말에 그녀는 곧바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모든 사실을 확인했다.
무림맹주인 화산도협의 누님이라 알려진 여인.
최근에는 중원오협의 검류화협까지 꺾었다고 했다.
검후 또한 무력이 강했지만 검류화협 이무결을 일 초만에 꺾을 수는 없었다.
검후 소청연은 다급했다.
정말로 그녀의 정체가 멸봉자가 맞다면 빨리 찾아뵌 뒤 용서를 빌어야 했다.
백 년 전 봉검문이 멸문될 뻔한 사건.
당시 검후는 무림대회의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세상에 자신보다 뛰어난 무인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검후는 그 자리에서 그 여인을 무시했다.
그리고 무림대회의가 끝난 후 봉검문으로 돌아간 하루 뒤, 무림맹에서 만났던 여인이 찾아왔다.
그녀의 무공은 강했다.
일단 봉검문의 현판부터 부순 뒤 안으로 들어섰다.
수많은 봉검문의 제자들이 달려들었지만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검후조차 그녀의 검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봉검문을 멸문시키고자 했고, 그때 검후는 눈물을 흘리며 한 번의 용서를 빌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다음에도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나쁜 짓을 한다면 봉검문을 두 번 다시 중원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라 선언했다.
멸봉자란 별호가 알려진 사건이었다.
“검후님, 조금만 더 가면 무림맹입니다.”
“알았다.”
“어떻게…… 여기에서 내리셔야지 않겠습니까?”
“…….”
무림맹 앞은 금마지(禁馬地).
금마지에선 무림맹주와 무력군 외에는 누구도 말을 타고 지나갈 수 없었다.
“그냥 가자.”
“알겠습니다.”
비록 금마지라고 하더라도 봉검문의 검후였다.
마차를 타고 들어서도 상관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금마지 안으로 마차가 들어설 때였다.
“멈추시오.”
히이잉!
마부는 갑자기 앞으로 뛰어든 무림맹 무인을 보며 마차를 급하게 멈췄다.
“봉검문의 검후다.”
마차 뒤에서 따르던 백마가 다가왔다.
검후봉 아진화가 말 위에서 무림맹 무사를 건방진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알고 있소. 마차 위에 검후령기를 봤소이다.”
“어느 분의 마차인지 알아보았으면 물러나라.”
“검후께서 타고 계셔도 이곳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말에서 내려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 검후께서 걸어서 무림맹으로 들어가라는 것인가?”
아진화는 화를 버럭 냈다.
검후봉의 무력을 정문 위사가 받아내기에는 버거웠다.
하지만 정문위사 상강묵은 물러날 수 없었다.
현 무림맹은 예전과 달리 완전히 바뀐 상황.
괜히 융통성 있게 하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 또한 무림맹에서 보낸 지 십 년이 넘었다.
변화가 있을 때는 무조건 정석대로 원리 원칙을 지키는 게 안전했다.
“죄송합니다. 금마지에서는 무림맹주님 외에는 말을 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검후께서 잘 아시리라 봅니다.”
“이…… 자가…….”
아진화의 얼굴이 붉어졌다.
겨우 정문 위사 따위에게 거절을 당하자 화가 났다.
“이봐. 지금 실수하는 거야. 알겠어?”
“허어. 요즘 정신 빠진 년들이 왜 이리 많아졌지? 싸움 좀 한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군.”
“……!!”
아진화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소스라쳐 고개를 돌렸다.
‘그녀다.’
무혼신녀의 매서운 시선에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그녀의 옆에는 무림맹주 고진유가 무심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우리도 걸어 다니고 있는데 어디서 건방지게 말 위에서 눈을 내리깔고 있느냐? 빨리 안 내려?”
휘익!
아진화는 다급하게 말 위에서 내렸다.
‘아…… 다행이다.’
그녀의 모습을 본 정문위사 상강묵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림맹주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무혼신녀는 아진화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툭 밀었다.
“내가 사람 되라고 좋게 보내주지 않았느냐? 어떻게 전혀 바뀐 게 없지?”
“…….”
아진화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사부인 본녀가 제자를 잘못 가르친 듯합니다.”
그때, 검후 소청연이 마차에서 내렸다.
전서의 내용에 적힌 인물, 제자가 멸봉자라고 했던 여인이 앞에 있었다.
‘이십 대 후반 정도…… 인데. 그분의 전인인가?’
멸봉자는 백 년 전의 인물이 아니던가.
“……혹시 소저가 제자에게 멸봉자라고 했는가?”
“갑자기 어디서 반말이야.”
“…….”
“넌 내가 보이는 만큼밖에 안 보이나?”
무혼신녀의 비웃음 검후는 당황하여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꿀꺽.
‘무림에는 보지 않으면 믿기지 않는 일들이 많지…… 설마?’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그녀는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긴 보는 눈들이 많으니 조용히 안으로 들어와라. 괜히 더 창피해지기 전에. 알았느냐?”
“……알겠습…… 니다.”
소청연은 그녀의 분위기에서 마치 돌아가신 사부가 다시 돌아온 느낌을 받았다.
스윽.
무혼신녀는 검후가 타고 온 마차를 가리켰다.
“이것들은 뭐냐? 네가 귀부인이라고 되는 모양이지? 마차를 타더라도 무인답게 해서 타고 다녀라.”
“죄송합니다…….”
“쯔쯔. 사부가 이 모양이니 제자란 놈이 똥오줌도 못 가리는 게 이해가 되는군.”
무혼신녀는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렸다.
고진유는 얼굴이 붉어진 검후의 앞으로 다가섰다.
“검후님, 처음 뵙겠습니다. 고진유라 합니다.”
“……반갑소이다. 무림맹주군요. 본녀는…… 소청연이라 하외다.”
“누님께서 말씀을 과격하게 하시지만 원래 속마음은 그게 아닙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고…… 맙소이다.”
“검각에서 오셨다면 먼 길을 오시느라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녀는 부드럽게 대하는 고진유의 말에 기분이 풀렸다.
화산도협 고진유에 대해 소문을 많이 들었지만 직접 만나 보니 완전히 달랐다.
‘역시…… 소문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법이구나. 어리석었다.’
무혼신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동생, 뭘 그렇게 신경 쓰고 있어.”
“누님도 조금 편안하게 해주세요. 잘못한 게 없으시잖아요.”
“됐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들어가자.”
“네. 누님.”
나란히 걷는 천하제일남매.
고진유와 고진하를 본 중원인들이 부르는 말이었다.
‘저렇게 보면 진짜 남매 사이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