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고진유는 허리를 숙였다.
“두 분, 오셨습니까?”
“맹주에 오른 걸 감축하네.”
유하랑은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옆에 선 조여하도 살짝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누님과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그렇네.”
무혼신녀를 누님이라 부르는 그를 보니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두 분께서 더 할 이야기가 있으시면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인사차 온 것 같아. 특별하게 할 이야기는 없어.”
무혼신녀는 유하랑과 조여하를 보며 물었다.
“나에게 더 볼일은 없겠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아침이나 먹고 가게. 그대가 옆에서 당분간 도제를 도와줘야겠어. 금강불성은 나올 생각이 없을 테고, 그 뺸질한 녀석은 하는 게 영 미덥지가 못해.”
‘후후, 이무결, 이 녀석 완전히 무혼신녀님에게 제대로 찍혔군.’
그동안 천주와는 죽이 잘 맞았던 남자였다.
“쯧, 그 녀석도 하는 짓이 의심스럽지 않나?”
“무혼신녀님,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유하랑도 그가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성향일 뿐 무구천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자네가 그렇다고 한다면 믿지.”
다다다-
그때, 계단을 빠르게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 소저, 반갑소이다.”
묵경이 다른 누구보다 청미화 조여하를 먼저 보며 손을 흔들었다.
“음, 개인적인 성향인 게 맞는 것 같군.”
무혼신녀는 입이 반쯤 벌어진 채 내려온 묵경을 보면서 인정했다.
“엥? 누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다. 서로 세상에서 추구하는 게 다른 것 같아 하는 말이다.”
“갑자기 무슨 심오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냥 그런 거다.”
묵경은 살짝 콧등에 주름이 잡고는 유하랑과 인사를 나누었다.
“으음? 안녕하십니까?”
* * *
극일천주의 피를 누가 가지고 있는 지 확인해야 했다.
가장 유력한 인물은 화산도협 고진유.
극일천주의 피를 확보했다면 철갑을 여는 건 시간문제다.
그가 정말로 지니고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굳이 그를 잡지 않아도 말이다.
무림맹으로 향하는 일행은 하남성을 넘어서 정주로 향했다.
꼬르륵.
앞서 걷던 녹림야검의 배에서 허기진 소리가 들렸다.
묵경이 하늘 위에 뜬 해를 올려다보았다.
“정확한데. 점심 먹을 시간이야.”
“넌…… 아침에 그렇게 먹고 또 배고프다고?”
“헤헤헤. 제가 예전부터 소화를 잘 시키는 편이라서요.”
고진유도 잠시 쉴 겸 점심을 먹기로 했다.
“묵경 형, 간단하게 먹고 가죠.”
“그럴까?”
“제가 앞에 밥 먹을 곳이 있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녹림야검이 전방으로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진 그는 반각도 되기 전에 되돌아왔다.
들뜬 그의 표정이 무엇인가 찾아낸 듯했다.
“앞에 노점이 있습니다. 상당히 좋은 냄새가 났습니다.”
“녹검 씨가 말하는 그곳에 가죠.”
“제가 빨리 가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겠습니다.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렇게 하세요.”
휘이익!
녹림야검이 서 있는 자리 뒤로 바람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길가 한편에 열 개 정도의 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주인의 솜씨가 좋은지 한 자리만 비어 있고 나머지 자리에는 손님들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빈자리에 녹림야검이 뿌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의 말처럼 자리에 앉기도 전에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인양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다른 이들은 무엇을 먹고 있는지 둘러보았다.
“형, 돼지볶음이 제일 잘나가는 것 같은데요?”
“그럼, 우리도 그걸 시켜.”
“네. 알겠어요.”
인양은 손을 들었지만 점소이는 바쁜지 쳐다보지 않았다.
“제가 갔다 올게요.”
“그렇게 해.”
고진유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휘익!
순간 가슴으로 작은 기척 하나가 뛰어들었다.
탓!
고진유는 가슴 앞에서 잽싸게 양손으로 잡았다.
‘이건…… 율서(栗鼠)?’
손안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동생, 그게 뭐야?”
“생긴 건 청설모 같습니다만…….”
“청설모?”
무혼신녀는 그의 손안에 든 작은 생물을 보았다.
“음…… 청설모는 아닌 것 같은데. 더 작은 것 같구나. 이게 어디서 나타난 거지?”
“저 사람이 주인 같습니다.”
고진유는 건너편 탁자에서 헐레벌떡 다가오는 사내를 보았다.
그의 손에 작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아이고…… 이런,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놈이 탈출을 했습니다.”
“그렇군요. 여기 있습니다.”
고진유는 조심스럽게 바구니 안에 넣어주었다.
“이놈이 청설모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종류입니까?”
“아, 금율서라 합니다. 귀한 품종이라서 제법 돈이 나가는 놈이지요. 하하하.”
“아하, 그렇군요. 좋은 구경 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집이 돼지 볶음 요리는 끝내줍니다. 맛있게 드시고 내려가십시오.”
“…….”
사내는 바구니를 들고 노점을 떠났다.
고진유는 사라질 때까지 사내의 뒤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올라갈지, 아니면 내려갈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휘익!
네 사람이 동시에 사내가 사라진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수상한데 그냥 뒀어? 잡을까?”
“묵경 형, 그대로 두세요. 저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게 따로 있다는 거야?”
“먼저 식사부터 해요. 급한 일은 아닙니다. 주위에 귀들이 많네요.”
“아, 하하. 알겠어.”
그들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붙어 있었다.
“손님, 주문한 음식입니다.”
“오오…… 죽이는데?”
그리고 일행은 탁자에 내려놓은 돼지 볶음을 보며 방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린 듯 탄성을 질렀다.
“와, 정말 맛있어 보이네요. 정말 배고파지는데요.”
“진유 동생 말이 맞아. 우선 먹고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넵. 잘 먹겠습니다!”
인양과 녹림야검의 젓가락이 바람을 가르기 시작했다.
* * *
힐끔.
사내는 빠르게 걸으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한 기분에 발걸음도 빨라졌다.
“여기네.”
사내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백의 사내가 손짓을 했다.
휘익.
사내는 좌우를 살핀 후 백의 사내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나약, 어떻게 됐지?”
“수곡자님, 금율서가 반응을 보였습니다.”
“정말인가?”
“확실하게 화산도협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그렇군. 수고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에게 그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오늘 밤에 금율서를 이용해서 빼앗아 오면 된다.”
“알겠습니다. 이놈이라면 성공할 것입니다.”
사내는 바구니 안에 든 금율서를 내려다보았다.
* * *
어둠이 짙은 밤이 찾아왔다.
‘됐다. 지금쯤이면 잠에 빠져들었겠지?’
사내는 객잔 주위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스윽.
바구니를 열어 금율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금 바로 그 물건을 가져오너라.”
찌익.
금율서는 마치 사내의 말을 알아들은 듯 객잔으로 향해 움직였다.
‘후후후. 화산도협,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금율서를 보낸 이상 기다리고 있으면 될 뿐이었다.
‘이번 일만 제대로 성공하면 난 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겠지?’
그의 얼굴이 웃음이 나왔다.
“됐는가?”
사내의 뒤로 수곡자가 다가섰다.
“지금 바로 갔으니 조만간 가지고 올 것입니다.”
“들키지 않을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면 모를까? 금율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사내는 자신이 있었다.
사람이 아닌 금율서가 물건을 훔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할 터.
“자네가 확신한다고 하니 기다려 보세나.”
샤샤샥-
금율서는 빠르게 객잔으로 향해 움직였다.
휘익!
이 층으로 올라가는 기둥을 단숨에 뛰어오른 뒤 지붕 사이로 들어갔다.
금율서는 코를 킁킁거리며 대들보를 지나 움직였다.
멈칫.
그리고 목표를 찾았는지 천장에서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침상 위로 고개를 들며 놈이 코를 실룩거렸다.
휘익!
그리고 자리에서 뛰어올라 빠르게 누워 있는 고진유의 품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꽈악!
“이놈. 또 왔구나.”
“찌지지직!!”
순식간에 붙잡힌 금율서는 반항을 하며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고진유는 양손에 놈을 잡은 채로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붉은 주머니를 꺼내어 금율서 앞에 내밀었다.
파다다다닥!
금율서가 발작을 하듯 몸을 떨었다.
“역시…… 이것에 반응하는군.”
낮에 보았던 사내는 극일천의 인물이 맞았다.
“자, 그럼 네 주인을 만나러 가볼까?”
고진유는 옥병을 연 뒤 주머니 안에 피를 떨어뜨려 묻히고는 주머니를 금율서에게 내밀었다.
잠시 냄새를 맡던 금율서는 입에 주머니를 물었다.
‘됐어.’
바닥에 내려놓자 금율서는 벽을 타고 천장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 * *
불이 커진 건물 안.
금율서가 움직인 지 이각이 지났다.
그들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보게, 나약. 지금쯤이면 그 물건을 가지고 와야 하는 게 아닌가?”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리는 것은 좋은데 물건을 가지고 왔으면 좋겠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올 것입니다.”
사내는 금율서가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다.
마음을 졸이며 오기만을 기다렸다.
찌지지직!
‘왔다.’
그때, 멀리서 금율서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수곡자님, 금율서가 오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방으로 돌아온 금율서는 붉은 주머니를 입고 물고 사내의 앞으로 다가왔다.
“하하하. 성공입니다.”
사내는 얼른 손을 뻗어 금율서를 들어 올리고는 입에 문 붉은 주머니를 잡았다.
‘어…….’
손안에 느껴지는 느낌이 이상했다.
“나약, 잘못됐는가?”
“저…… 그게…….”
사내는 텅 빈 붉은 주머니 안을 보여주었다.
“안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라고? 이리 줘보게.”
수곡자는 붉은 주머니를 받아 확인했다.
“어떻게 된 것이지? 혹시 이놈이 가지고 오다가 흘린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겁니다. 주머니가 닫혀 있었습니다.”
“…….”
수곡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빈 주머니가 무엇을 뜻하는 것은…….
“당했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가 금율서에 대해서 알아차린 거야. 일부러 붉은 주머니를 주고 우리 위치를 찾기 위해…….”
“그, 그럼…… 금율서가 미행을 당했다는 것입니까?”
휘익!
사내는 창문을 열고 주위를 빠르게 살폈다.
밖은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수곡자님, 아무도…….”
창문을 닫고 안으로 돌아서던 수곡자를 향한 나약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수곡자 뒤에 나타난 인물.
“헉……! 화산…… 도…… 협!!”
스윽.
고진유는 수곡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극일천의 인물들이 맞군.”
“……!!”
수곡자는 어깨를 잡힌 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극일천의 능력은 어디가 끝인지 모르겠소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소.”
고진유는 그의 어깨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
제압하기 분명 좋은 기회를 그대로 놓아두었다.
수곡자는 뒤로 물러나며 고진유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고진유를 바라보았다.
“본도가 왜 살려주는지 궁금하오?”
“……그렇소.”
“본도를 죽이고자 한 것은 아니기에…… 라고 답하면 믿겠소?”
“…….”
“돌아가서 전하시오. 굳이 이게 없더라도 철갑은 이미 열렸다고.”
수곡자의 눈이 커다래졌다.
철갑은 극일천주의 피가 없으면 절대로 열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된 것이지?’
고진유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말처럼 철갑을 열었다면 극일천주의 피를 지니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일부러 나를 떠보기 위해 하는 말일까?
정말로 철갑을 열었다면 왜 가만히 있는 것이지?
그가 알기에 철갑에는 중원 무림을 시끄럽게 만들 물건이 들어 있었다.
수곡자는 갑자기 수많은 생각 때문인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모르겠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물러가도 괜찮겠소이까?”
“보내주겠다는데 굳이 안 가겠다고 하다니.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알겠소이다.”
휘익!
수곡자와 사내는 그 자리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가는 건 좋은데. 이놈은 왜 놓고 갔지?’
찌지지직!
금율서가 붉은 주머니 안에 들어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