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253화 (253/425)

253화

극일천을 아주 오랫동안 끊임없이 견제했던 세력이 무구천이었다.

천주 도해령의 배신이 있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무구천의 보이지 않은 힘은 강했다.

극일천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무구천의 힘이 필요했다.

천주와 무구천의 본진을 잃었지만 다행히 사람들은 무사했다.

그것으로도 일단락된 게 무구천의 입장에서는 행운이었다.

일행은 북경으로 들어올 때와는 달리 마음 편하게 움직였다.

무혼신녀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말과 다르게 걱정이 앞섰다.

“도제, 그 녀석이라면 잘할 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지 않습니까?”

“동생 말처럼 천만다행이지. 그년이 바로 극일천으로 잡혀 갔다면 큰일이 났을 테니까.”

무혼신녀는 함께한 일행을 보았다.

“모두 무구천을 도와줘서 고맙다. 너희들이 없었다면 큰일 났을 거야.”

“아닙니다. 저희가 없었다고 해도 누님이라면 충분히 이겼을 것입니다.”

“과연 그랬을까?”

“어…… 아닙니까?”

묵경은 그녀에게 물었다. 평상시라면 그녀는 당연하다고 답했을 텐데.

“극일십우라고 들어봤느냐?”

“아니, 처음 듣습니다.”

“극일천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다. 얼마 전 비무장에서 난리친 폭우존자라는 녀석도 그들 중 한 명이지.”

“그 독안룡이라 부르는 인물도 극일십우입니까?”

“맞아. 극일천의 최강 무인이라 할 수 있지. 무구천이 강하다고 하나 전면전으로 붙는다면 사실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건 맞아. 무구천에서 제대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를 알겠느냐?”

고진유가 바로 대답했다.

“무구천의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입니까?”

“역시 동생은 똑똑해. 그 말이 정답이야. 무구천의 실체를 정확하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 숨어 지내는 것이지. 허장성세(虛張聲勢)라 할 수 있었어. 나라도 극일십우 전부와 상대하기는 버거우니.”

“폭우존자, 그도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인물이 맞다면 그도 천문전주와 비슷한 연배의 인물이지.”

고진유는 궁금한 게 있었다.

여태껏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었다.

“누님. 제가 그들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지금 느낌으로는 그들에게 진다는 생각은 안 들어. 동생 생각은 어때?”

“음……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됐어. 그런 기분으로 붙어보는 거야.”

무혼신녀의 성격은 시원스러웠다.

그녀에겐 걸림돌이라는 게 없어 보였다. 발에 걸리는 게 있다면 치우면 된다고 여겼다.

‘대단한 분이야.’

고진유뿐만 아니라 네 명 모두 그녀를 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다.

일행이 북경을 거의 넘어갈 때였다.

고진유는 뒤를 돌아보았다.

무구천에서 헤어졌던 백종이 다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모양인가 봅니다.”

“다행입니다. 멀리 가신 줄 알았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백종은 먼저 품 안에서 붉은 주머니를 꺼냈다.

“도제님께서 주신 물건입니다.”

“이게 뭔가요?”

“열어보시면 안다고 했습니다.”

고진유는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물건을 만졌다.

‘차가운데?’

주머니 안에서 작은 상자가 손안에 잡혔다.

냉기에 의해 상자 표면에는 서리가 묻어 있었다.

고진유는 양손으로 상자를 잡은 뒤 중앙 부분을 돌렸다.

딸깍.

상자 안에서 미세하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흐음…….’

천천히 뚜껑을 들어 올렸다.

흰 연기가 빠져나오면서 그 안에 붉은 액체가 든 병이 보였다.

‘이건…… 피!’

고진유는 옥병에 든 피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 알았다.

무극천주가 지녔던 철갑의 열쇠였다.

상자를 다시 닫은 뒤 붉은 주머니 안에 넣었다.

“……도제님께 고맙게 잘 받았다고 전해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백종은 인사를 한 뒤 사라졌다.

일행은 붉은 주머니에 시선을 빼앗겼다.

묵경은 신기한 듯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혹시 그게……?”

“맞습니다. 무구천에서 가지고 있던 극일천주의 피입니다.”

“그렇다면 드디어 철갑을 열 수 있겠군!”

“네. 그의 피가 확실하다면 열릴지도 모를 일이죠.”

“정말 기대가 되는데? 철갑 안에 무엇이 있을까?”

“…….”

묵경의 기대감과 달리 고진유의 표정은 담담했다.

철갑 때문에 일어난 수많은 일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기분이 좋은 것 같지 않은데? 왜 그래?”

“지금도 우리 상황은 나쁘지 않잖아요. 근데 혹시나 좋은 상황이 아니라면…….”

“두려워?”

망설이는 고진유의 모습에 무혼신녀가 물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굳이 열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을 테니…… 그래서 고민이 됩니다.”

“그렇기는 하지. 별문제가 없는데 일부러 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철갑의 주인이라고 하기엔 이상하지만, 네 판단에 맡기도록 하마.”

무혼신녀는 열어도 괜찮고 열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철갑에 대한 결정권은 고진유에게 있었다.

“만일 보지 않아도 후회하고 보고 나서도 후회하는 것이라면 넌 무엇을 택하겠느냐?”

“……둘 다 후회하는 것이라면 보고 후회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럼 이미 결정이 났구나.”

“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 마음속에서 결정은 된 상태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언정 결정을 내렸다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게 좋지 않을까?”

“네.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가슴에 넣어둔 주머니를 만졌다.

‘음…… 뭔가 있는 것 같군.’

무혼신녀는 평소와 다르게 고진유가 머뭇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 * *

“쯔쯔. 마음에 안 드는군.”

나하중은 북경에서 올라온 보고를 받았다.

무구천을 기습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혼신녀와 화산도협 일행의 방해를 받았다고 적혀 있었다.

“운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운명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인지 모르겠어.”

무구천주를 끌고 왔으면 무구천을 쉽게 정리할 기회였을 것이다.

“좋은 기회를 놓쳤군…… 하긴 나 또한 무구천으로 바로 쳐들어갔겠지.”

독안룡의 판단은 잘못된 게 아니었다. 그때의 상황이었다면 정리하는 게 맞았다.

무혼신녀와 화산도협이 그곳에 나타날 거라고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소림사에서 내려온 그들이 모습을 감추었던 이유가 무구천으로 다급히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전주님.”

수곡자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할 말이 있는가?”

“무극천주는 그분의 피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 참, 그렇지. 잠시 잊고 있었어. 나이가 들다 보니 바로 생각이 나지 않는군.”

“만약 그것이 화산도협에게 전해진다면 철갑을 열 수 있습니다.”

“허허…… 이런…….”

나하중은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생각지도 못한 큰일이 일어났다.

당분간 철갑에 대해서 잊고 있었건만 다급한 일이 되어 버렸다.

“화산도협이 그 물건을 가졌다고 보는가?”

“그건…… 무구천에서 바로 떠났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알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갑자기 피곤해지는구만.”

“송구하옵니다.”

“자네가 미안할 것이 무에 있는가. 일을 똑바로 못한 놈들이 미안해야 할 일이지.”

나하중에게 도해령이 접근했을 때 가장 먼저 요구해야 했던 것이 극일천주의 피였다.

설마 그 물건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쯧쯧…… 어떻게 하면 좋을까?”

“…….”

수곡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한 번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철갑에 든 물건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엄청 중요한 물건이긴 하지만 본 천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닐세.”

중요한데 극일천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수곡자는 누군가에게는 꼭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건이라는 것을 느꼈다.

“굳이 깊이 알려고 하지 말게.”

“아…… 네에. 죄송합니다.”

“분명한 건 꼭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우선 확인부터 먼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확인이라는 게, 그 물건을 녀석이 가지고 있는지 알아본다는 것이겠지?”

“맞습니다.”

“좋아. 이번 일은 자네가 알아서 해보게. 필요한 인원이 있으면 맘대로 사용해도 돼.”

“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수곡자는 곧바로 천문전을 나섰다.

* * *

스윽.

고진유는 가슴 안에서 붉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여전히 냉기가 서려 있는 상자를 만졌다.

‘이것도……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것인가?’

딸깍.

상자를 열어 옥병을 보았다.

‘극일천주의 피.’

옥병 속의 피를 본 고진유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드륵.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해, 안 자고?”

“묵경 형.”

“시간이 늦었는데 잠이 안 오는 모양이지?”

“그러네요.”

묵경은 그의 손에 든 옥병을 보았다.

“그게 철갑의 열 수 있는 극일천주의 피군.”

“네. 맞아요.”

“우리 이것 때문에 엄청 고생했잖아. 안 그래?”

“네. 후후…….”

그의 말대로 철갑에 의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철갑은 잘 있겠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잘 숨겨두었습니다.”

“기대되지 않아? 드디어 철갑을 열 수 있게 되었잖아.”

“……형, 만일 그 안에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물건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글쎄다. 혹시 그것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거냐?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더니. 하긴…… 무림을 책임지는 입장에서는 걱정이 안 될 수는 없겠군.”

묵경은 이해한다는 듯 고진유를 보았다.

턱.

그는 손을 들어 고진유의 어깨에 올렸다.

“네가 잘하는 게 있잖아. 감당할 수 없으면 버리면 되지. 안 그래? 일단 내가 살고 봐야지.”

“아…… 하하, 역시 묵경 형이네요.”

고진유는 그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 감당할 수 없다면 버리겠어요. 그 물건이 얼마나 소중하더라도…….”

“어…… 그래? 그렇지.”

묵경은 대답을 하면서도 고진유가 철갑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 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진유는 붉은 주머니를 가슴에 넣었다.

“형, 고마워요.”

“새삼스럽게 고맙기는…… 들어가자.”

“알겠어요.”

* * *

아침이 밝았다.

인양은 아침 식사 준비를 시키고자 객실 밖으로 먼저 나왔다.

“으으으으-!”

뻐근한 몸을 풀기라도 하듯 기지개를 켜며 밑으로 내려오자,

멈칫.

객잔에 일찍 두 명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어…….”

고독기검 유하랑과 청미화 조여하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권협이 아닌가?”

“유하랑 님을 뵙습니다.”

인양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 함께한 조여하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조 소저를 뵙습니다.”

“아…… 네에. 반가워요.”

인양의 모습은 예전에 봤을 때와는 달리 완전히 청년이 되어 있었다.

건장한 어깨에서 사내다움이 느껴졌다.

의제권협 인양은 중원 여인들의 우상 중 한 명이었다.

“우리가 너무 이른 시간에 온 게 아닌가 싶네.”

“그건…… 맞지만 괜찮습니다. 진유 형님을 만나고자 하십니까?”

“그도 만나기도 하고 무혼신녀님도 함께 계신다고 해서 왔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닐세. 너무 이른 시간이니 깨우지 말게.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유하랑은 올라가려는 인양을 말리고자 했다.

그때 이 층 객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우기 싫다면 밖에 있다가 나중에 찾아오든지 해야지. 꼭두새벽에 찾아와서 하는 말은 아니지 않느냐?”

“…….”

유하랑은 계단을 내려오는 그녀를 보았다.

이십 대 후반의 여인.

하지만 그녀의 깊은 눈동자에서 연륜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유하랑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무혼신녀님을 뵙습니다. 유하랑이라 합니다.”

“마지막 오무천자이군.”

“네. 그렇습니다.”

무혼신녀는 그의 옆에 선 조여하와 시선이 마주쳤다.

“조여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되는 사이냐?”

“스승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호오, 예쁘게 생겼군.”

“고맙습니다. 무혼신녀님.”

“이왕 왔으니 자리에 앉아라.”

무혼신녀가 먼저 자리에 앉자 곧이어 두 사람이 그녀의 앞에 앉았다.

“제가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인양은 차를 준비하기 위해 얼른 주방으로 달려갔다.

먼저 유하랑이 말문을 열었다.

“빨리 찾아와서 인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놀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서로 바쁘니 늦을 수도 있지.”

“도제에게 모든 사정을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별로 한 건 없어. 내가 아니더라도 잘 해결했을 거야.”

“아닙니다. 무혼신녀님께서 계시지 않으셨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천주가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 했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누가 천주에 올렸는지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야. 쯔쯔, 앞으로 잘들 해봐.”

“알겠습니다. 저희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혼신녀님께서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음…… 도움이야 줄 수 있겠지만 웬만하면 너희들끼리 잘해봐라.”

조여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주방에서 움직이는 인영을 주시했다.

‘나…… 온다.’

인양이 쟁반에 차를 준비한 뒤 주방에서 나왔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없어 제가 준비했습니다. 솜씨가 없더라도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탁자에 내려놓은 뒤 각자 앞에 차를 따라 주었다.

조여하는 차를 따를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관을 잡은 움직임 하나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사부 유하랑이 늘 하던 말이 있었다.

차를 따르는 모습만 봐도 그가 고수인지 아닌지 알아차릴 수 있다고.

“권협, 잘 마시겠네.”

“조 소저께서도 드시지요.”

인양은 차를 따른 뒤 다관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진유 형님께 다녀오겠습니다.”

“됐어. 지금 내려올 거다.”

무혼신녀의 말처럼 계단 위로 고진유의 모습이 바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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