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삼십 년 전 중원 무림에 백안의 눈동자를 지닌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가 무림에서 활동한 시간은 근 일 년으로 짧았지만, 그가 명성을 얻기에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중원 무림은 사내의 이름 앞에 독안룡(獨眼龍)이란 별호를 붙였다.
중원 무림에서 독안룡의 행적은 충격적이었다.
그가 상대에게 원한 건 십초비무.
가장 먼저 검황 남궁천문과의 십초비무에서 비겼다.
그다음 행선지는 훗날 사일검성인 종남파의 운소진인, 권왕 황보강, 창성 산동악가 악진경, 청화기검 청성파 명청자.
그는 이들과 모두 십초비무를 한 뒤 비겼다.
하지만 중원인들은 알았다.
그가 떠난 후, 그를 상대했던 모든 이들은 보름 동안 무공을 펼칠 수 없었다.
이에 중원 무림은 그의 가리켜 십초무적이라 부르기도 했다.
독안룡 여주형은 그렇게 일 년 동안 무림을 누빈 뒤 사라졌다.
도제 시남구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극일천에서 독안룡이 나오다니.’
폭우존자에 이어 독안룡까지. 극일천 최고 무인 극일십우가 한 명씩 무림으로 나오고 있었다.
직접 싸워보지 않아도 그들의 강함을 알고 있었다.
“도제, 우리도 시작해볼 까?”
“독안룡…….”
도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구수호군들은 당황했던 처음과 달리 극일천의 무인들을 상대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까지 버티고 있을지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도제, 그 자신이 어떻게 되느냐에 달려 있었다.
‘내가 무너지면…….’
독안룡과 싸워 지게 된다면 무호수호군은 급격하게 무너질 게 확실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군.’
그는 시천도를 잡은 손에 내력을 끌어 올렸다.
독안룡 여주형의 걸음걸이가 가볍게 흔들리며 앞으로 나섰다.
“오래전 그때 그대와 한번 붙고 싶었는데 무림에서 지낼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아쉬웠지. 오늘에서야 도제의 도천공을 상대해 보는군.”
그의 백안은 점점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붉게 변한 홍안.
번쩍!
홍광이 폭발하는 순간, 독안룡의 신형도 움직였다.
그의 빠르기는 전광석화였다.
순식간에 앞에 다가선 그가 도제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뻗었다.
콰아아앙-!!!
독안룡의 폭풍소장(爆風消掌).
‘우욱.’
도제는 시천도를 세워 재빨리 도막을 일으키며 폭풍소장을 막아냈다.
강대한 두 개의 기가 팽팽하게 맞섰다.
서로 부딪힌 상태에서 독안룡은 코웃음을 쳤다.
“훗. 제법이야. 반응이 상당히 빠른데?”
“독안룡, 도제인 본인을 무시하고 있군.”
“그거 미안하게 됐소. 그렇다면 제대로 해주겠소이다!”
파앗-!!
독안룡은 손에 힘을 주자 도막에 막힌 폭풍소장이 빛을 내며 도제를 밀어냈다.
‘우욱.’
도제는 강해진 상대의 내력에 밀리면서 신형이 뒤로 물러났다.
쿠욱.
그는 발뒤꿈치에 힘을 주며 겨우 신형을 멈췄다.
“크크크. 제법이야. 역시.”
“이노오오오옴!”
그의 비웃음을 본 도제는 기합을 터뜨리며 끌어낸 내기를 시천도에 집중시켰다.
도제의 머리 위로 솟구친 거대한 도강이 독안룡을 향해 떨어졌다.
“십초까지는 봐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군. 당신이 끝을 보겠다고 하니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독안룡의 홍안이 또 한 번 흑색으로 변했다.
우우우우웅-
양손에서 펼쳐진 폭풍암흑마력장이 시천도의 도강을 녹이며 도제를 향해 쏟아졌다.
한 번도 도강이 사라진 적이 없었다.
‘이…… 정도로…… 강…… 할 줄은…….’
도제 시천구는 이를 악물었지만 그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끝…… 이다.’
그가 눈을 감을 때였다.
쏴아아아아-
옆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
도강까지 녹였던 폭풍암흑마력장을 거대한 파도가 쓸어버리고 사라졌다.
독안룡과 도제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곳이 이렇게 되었지?”
무혼신녀의 노기가 무구천 전체로 솟구쳤다.
그리고 주위를 향해 사자후를 터뜨렸다.
“지금부터 움직이는 놈이 있으면 팔다리를 잘라 버리겠다!”
그녀의 화난 목소리에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무구천에는 적막감이 휘몰아쳤다.
무혼신녀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천주 도해령을 노려보았다.
“넌 왜 거기서 자빠져 있지?”
도해령은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도제의 목소리가 침울했다.
“무혼신녀님, 천주가 본 천을 배신했습니다.”
“하! 내 그럴 줄 알았다. 저년이 진작 미쳤다는 것을 알았지.”
무혼신녀는 어이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주가 배신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돌겠군. 사고 칠 줄은 알았지만 이런 짓을 할 줄은.”
그녀는 독안룡을 노려보았다.
“극일천 놈인가? 근데 네놈 한쪽 눈은 왜 그래?”
“당신이…… 무혼신녀라는 오무천자군.”
“나하중이 가르쳐 주던가?”
“…….”
“네가 여기를 이렇게 만든 놈이겠지?”
“후후후. 그렇다고 봐야겠지.”
“흥. 잘했다. 네가 안 했다면 내가 한바탕 난리쳤을 텐데. 힘을 아껴주게 해줘서 고맙군.”
“…….”
독안룡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때 천문전주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던데, 맞소?”
“난 그런 인간 기억에서 지웠다. 이야기 꺼내지 마라. 여하튼 이제 넌 나에게 맞아야겠다.”
무혼신녀의 신형에서 내기가 솟구쳤다.
“본인을 이길 수 있다고?”
“잔말 말고 덤벼. 떼거리로 덤벼도 좋다. 한 놈도 남김없이 목을 베어주지.”
슈우우우-
그녀의 손에 무형검이 나타났다.
당장에라도 독안룡을 향해 달려 나갈 기세였다.
“워워…… 너무 성급한 게 아니오? 이 여자가 죽을 텐데…….”
독안룡의 손아귀에 천주의 목이 잡혀 있었다.
“그년은 죽어도 상관없어. 배신자를 구해줄 일도 없으니 네놈 마음대로 해.”
무혼신녀는 한쪽 입술이 치켜 올랐다.
“정말로 죽여도 된다면 죽여주지.”
“커억…….”
독안룡은 손아귀에 힘을 주며 목을 강하게 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혼신녀는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
‘어…… 정말로…… 상관 안 하는데?’
오히려 독안룡이 멈칫했다.
천주 도해령을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웠다.
그녀에게 무구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내야 했다.
“왜 아직 안 죽이나? 물을 게 많은 모양이지?”
“……쳇.”
독안룡은 그녀를 죽이지 못하고 손에 힘을 풀었다.
무혼신녀와 싸우고 싶지만 때가 아니었다. 무구천주를 끌고 돌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무혼신녀, 우리의 싸움은 다음으로 기약하도록 하지.”
독안룡은 무구천은 그대로 둔 뒤 도해령을 끌고 가고자 했다.
스걱.
그때, 허공이 잘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날아왔다.
‘어떤 놈이?’
그는 고개를 돌려 검기를 펼친 사내를 보았다.
쉬이이익-
도해령을 잡고 있는 손에 검기가 점점 가까워지며 강해졌다.
‘허억.’
손이 잘릴 것 같은 검기에, 독안룡은 그녀를 놓으며 재빨리 손을 뒤로 거두었다.
그와 동시에 인영이 날듯이 도해령을 잡은 뒤 빠져나갔다.
“……!”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었다.
눈앞에서 천주 도해령을 어이없이 빼앗겼다.
‘화산도협…….’
고진유가 틀림없었다.
너무나 간단하게 무구천주를 강탈당했다는 사실에 황당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큭, 이런. 매화 향이다.’
독안룡은 허리를 뒤로 숙이는 동시에 가슴 위로 스쳐 지나가는 사의검을 보았다.
한 발만 늦었어도 허리가 베였을 것이었다.
타앗!
그는 그 자리에서 몸을 비튼 뒤 뒤로 물러났다.
스르르-
상의 자락이 잘린 채 바닥에 하늘거리며 허공에서 날렸다.
‘……매화검이 어렇게 빠르다니 믿기지 않는군. 역시 무림맹주란 말인가.’
피이이잇-!!
이번에는 등 뒤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보통 살기가 아니었다.
독안룡은 재빨리 몸을 돌려 살검에서 벗어나고자 바닥을 굴렸다.
“큭!”
뇌려타곤으로 피한 그는 빠르게 일어나며 주위를 살폈다.
눈앞으로 모여든 네 명의 사내들.
무림맹주 화산도협과 친협들이었다.
‘이들 네 명을 한꺼번에 상대하면 당한다.’
독안룡 여주형은 망설였다.
질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드는 순간 많은 생각들이 그의 몸을 좌우했다.
‘틀렸어. 여기에서 물러나야 해.’
네 명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망할…….’
무구천주를 잡고 극일천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처음부터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극일천으로 갔어야 했군.’
천추의 한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웠다.
고진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아하니 도망갈 생각이군. 좋은 생각이오. 죽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외다.”
“…….”
독안룡은 얼굴이 석화처럼 굳어졌다.
‘이 녀석에게 격장지계를 당하다니.’
고진유와 일대일로 싸운다면 자신이 있다.
하지만 싸우고 싶어도 이미 기세는 꺾여 버렸다.
물러날 때를 알아야 오래 사는 법이었다.
“화산도협, 오…… 늘은 때가 아닐 뿐이다. 본인을 꼭 기억해라. 담에 꼭 만나도록 하지.”
파앗!
독안룡이 사라지는 동시에 극일천의 무인들도 무구천에서 물러났다.
싸움은 끝이 났다.
무혼신녀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무구수호군 전체가 고개를 숙인 채 어깨가 축 늘어진 모습에 다시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놈들이 똑바로 정신 차리지 못할까?!”
그녀의 호통 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그리고 재차 소리쳤다.
“싸움에서 도망간 건 극일천이다. 왜 죽을 인상을 짓고 있지? 우린 저놈들은 막아냈다!”
무혼신녀의 말에 무구수호군의 무인들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말처럼 극일천과의 싸움에서 밀리지는 않았다.
“척신단주.”
휘익.
백종이 그녀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척신단의 임무가 뭐지?”
“배신자의 처단입니다.”
“척신단주도 봐서 알 것이다. 배신자를 잡아라.”
“넵. 알겠습니다.”
백종은 인양에게 잡혀 있는 도해령을 인계받았다.
“천주, 당신이 본 천의 배신자가 될 줄은 몰랐소.”
“난…… 아니다.”
“구차하외다.”
백종은 배신자에게는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
그녀를 바닥에 끌고 온 뒤 무혼신녀의 앞에 던졌다.
무혼신녀는 말없이 그녀를 보고 있는 도제를 불렀다.
“도제, 받아라.”
휙.
그의 앞으로 세 개의 신패를 던졌다.
“오무신패가 아닙니까?”
“내 신패 뒤에 무엇이 적혀 있는 지 여기서 큰 소리로 읽어라.”
“……!”
도제는 그녀의 신패 뒤에 적혀 있는 글을 읽었다.
무구수호군의 무인들 모두 도제의 목소리를 들었다.
무혼신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들 모두 알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네. 무혼신녀님.”
“이 시간부로 이자를 천주에서 끌어내리고자 한다. 의의가 있는가?”
“아닙니다. 없습니다. 무혼신녀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그녀는 더는 천주가 아닙니다.”
도해령은 현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천주에서 물러날 줄은 몰랐다.
경악한 그녀와 무혼신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극일천에 무구천을 팔아먹고 잘 살 줄 알았나?”
“무…… 혼신녀님. 전…… 아무것도…… 넘기지 않았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넘기지 않았다면서 이곳은? 어떻게 된 것이지?”
“……그건…… 여기밖에…….”
“됐다어. 네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혼신녀는 더는 도해령과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척신단주, 본 천의 배신자를 죽음으로 처단한다.”
“알겠습니다.”
쉬이익!
백종은 망설이지 않았다.
척신단의 임무는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툭.
무구천주 도해령의 죽음.
주변이 조용해졌다.
오직 말을 꺼낼 수 있는 인물은 무혼신녀밖에 없었다.
“뭣들 하고 있나? 무호수호군은 이곳을 정리하지 않고.”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곁으로 도제가 다가왔다.
“무혼신녀님, 이젠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도제, 그걸 나한테 왜 묻나?”
“…….”
도제는 그녀의 대답에 당황했다.
“백 년 동안 잤던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는 게 정상인가? 만일을 위한 비상 장소가 있지 않아?”
“네. 있습니다.”
“당분간 도제, 네가 책임지고 무구천을 정리하도록 해라.”
“무혼신녀님께서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 내가 나서면 눈치를 볼 게 아니냐. 난 당분간 동생과 함께 다닐 거다. 혹시 힘든 일이 있으면 그때 연락만 해.”
“알겠…… 습니다. 정리가 되는 대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돌아서며 백종과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당분간 도제가 천주 대행이라고 생각하고 도와줘라.”
“네. 무혼신녀님. 본 천에 도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뭐, 나도 무구천 사람이니. 그럼 잘해봐라. 우린 간다.”
무혼신녀는 더는 할 말이 없는지 고진유를 보았다.
“가자.”
“네. 누님.”
그들 일행은 나타난 것처럼 사라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휴우…….”
도제는 숨을 내쉬면서 겨우 안정이 되었다.
‘천주…….’
바닥에 피를 흘린 채 죽은 도해령을 내려다보았다.
‘어찌…… 욕심을 부렸소이까?’
가끔 그녀가 속내를 얼핏 비쳐 보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 그녀의 뜻을 무시했다.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무혼신녀가 없었다면 무구천은 그대로 극일천에게 잠식되었을 게 확실했다.
그리고 고진유에게도 고마웠다. 그가 없었다면 독안룡을 물러나게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곳이 정리가 되면 고맙다고 말을 해야겠군.’
도제는 돌아서면서 깨달았다.
극일천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무구천이라 아니라 화산도협 고진유였다.
“아…… 참. 그게 있었지.”
도제는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철갑을 열 수 있는 극일천주의 피.
천주 도해령의 거처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곳에 있다면…… 화산도협에게 줘야겠군.’
무구천의 중요한 물건을 둔 비밀 장소.
도제는 곧바로 무구천소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