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눈앞에 보인 세 개의 신패.
오무천자의 신분을 증명하는 오무신패가 확실했다.
“이것을 왜……?”
“내 신패 뒤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어봐라.”
“…….”
백종은 세 개의 신패 중에서 그녀의 신패를 찾아 뒤를 보았다.
글이 적혀 있었다. 읽기에 어렵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지?”
“……!”
“안 죽어도 된다는 말이다. 조용히 따라와라. 나중에 할 일이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백종은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무혼신녀를 죽이고자 했을 때 천주의 표정에는 사심이 느껴졌다.
정말로 그녀가 극일천의 간자였다면 천주가 비밀리에 찾아올 리 없었다.
분명 공론화시켜 무구천 자체에서 처리했을 터.
‘내가 어리석었다. 그동안 무구천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거늘…… 천주가 딴생각을 한 것이 확실하구나.’
무구천은 극일천에 대항하기 위해 세워졌다.
중원에서 극일천과 싸우는 화산도협의 존재를 알았을 때 무구천에서는 도움을 줘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히려 그에게서 철갑을 빼앗아 오는 것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무구천이 나서지 않은 이유가 이제야 명확히 이해가 되었다.
‘천주가 문제였어.’
* * *
천주 도해령은 며칠 전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쯤이면 척신단에서 보고가 들어와야 하는데.’
무혼신녀를 죽이기 위해 보냈던 척신단의 연락이 끊어졌다.
‘무혼신녀에게 당한 뒤 죽었거나…… 그녀의 편으로 돌아섰거나.’
차라리 그녀에게 당했다면 마음이 편할 텐데.
이제 무구천에는 믿을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그녀의 명을 받아 싸웠던 도제도 무구천으로 돌아온 뒤 분위기가 달라졌다.
만에 하나 오무천자들이 전부 무혼신녀를 따른다면 천주의 자리가 위험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깨우지 말았어야 했어.’
그녀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최선의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천주의 명은 절대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오무천자가 반기를 들어 그들 모두 제거하고 싶다 해도, 그 일을 수행할 무구천의 인물들이 과연 그들을 상대로 싸워 죽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쳇. 나 혼자 잘살고자 한 건 아니었는데.”
언제 중원에 나타날지 모르는 극일천을 상대하기 위해 무구천의 인물들도 수백 년을 숨어 지냈다.
떳떳하게 무공을 드러내고 중원의 여러 문파처럼 잘살고 싶을 뿐이었다.
‘이게 잘못된 생각인가?’
갑갑한 무구천에 갇혀 살다가 죽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지. 내 것이 안 된다면 아무도 가질 수 없어.”
도해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한 표정으로 밖을 나섰다.
* * *
“전주님, 수곡자입니다.”
늦은 시간.
이미 잠자리에 누운 지 한 시진이 지났다.
‘흐음.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나하중은 눈을 뜨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스윽.
그는 침상에서 내려온 뒤 도포를 어깨에 대충 걸쳤다.
“들어오게.”
수곡자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늦은 시간에 송구합니다.”
“됐네. 자네의 모습도 보니 다급하게 온 것이로구만.”
수곡자 또한 그와 비슷한 차림이었다. 늦은 시간에 찾아올 만큼 다급한 일이 생긴 게 확실했다.
“방금 북경에서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북경이라면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무구천주가 보낸 서신입니다.”
“별일도 다 있군.”
서신을 받은 그는 마치 연애편지를 읽기라도 하는 듯 눈에 인상을 쓰며 서신을 읽었다.
“훗.”
코웃음 소리가 났다.
“지금 이 내용을 믿으라고 보낸 것인가?”
“사실일 것입니다. 수하가 직접 무구천주를 만났다고 합니다.”
“허허허.”
나하중은 웃음이 나왔다.
서신에는 무구천주가 극일천에게 의탁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걸 어떻게 믿으라는 것인지 모르겠어.”
“전주님.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최근 무림에서 올라온 소식들을 보면 오무천자와 연관된 내용이 많습니다. 천주와 그들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오무천자라…….”
나하중은 그녀가 먼저 생각이 났다.
‘하긴 그녀의 성격이라면 무구천주를 고분고분 따를 인물이 아니지. 무구천주 입장에서는 충분히 문제가 생길 수 있겠군.’
무혼신녀가 오무천자라고 하지만 무구천주의 명을 따른다는 보장이 없다.
“후후…….”
나하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러 가지 상황들을 유추하면서 대충 어떤 일인지 그림이 눈앞에서 그려지기 시작했다.
‘현재의 오무천자와 같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거야.’
결국 그 과정에서 천주가 무구천을 맘대로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음을 알았다.
“이제 알겠군. 무구천주가 욕심이 많았어. 무구천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군. 중간 과정은 모르겠지만 계획이 틀어지니 억울한 생각이 들었겠지. 쫓겨난다면 지금까지 고생했는데 그냥 뺏길 수 없다고 본 것이고.”
나하중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수곡자, 이번 기회에 무구천의 본진을 털어볼 생각이 있는데 할 수 있겠는가?”
“무구천주를 받아줄 생각이십니까?”
“설마.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난 배신자를 믿지 않아. 받아주는 척하면서 무구천을 정리하면 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누가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이번 일은 독안룡에게 맡기는 게 좋을 듯하군.”
“…….”
수곡자는 멈칫거렸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지만 독안룡이란 말에 덜컥거렸다.
“왜 말이 없는가? 겁나는 모양이지?”
“아닙니다. 독안룡…… 님께 가보겠습니다.”
“어떤 일인지 알려주면 뒤처리는 그가 알아서 잘할 테지. 그만 가보도록 하게나.”
수곡자는 허리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갔다.
나하중은 잠시 자리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도 변하다니……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는군.’
무구천주가 연락이 온 건 의외의 일이었다.
“그동안 귀찮은 놈들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건만…… 이런 식으로 일이 풀리는군.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나중에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해야겠군. 하하하!”
* * *
북경루로 다가선 흑의사내.
그의 오른쪽 눈동자는 갈색 빛이 아닌 전체가 백색이었다.
“북경루가 여기군.”
독안룡 여조형.
극일천 최극강의 무인으로 극일십우의 일인이었다.
그는 계단을 한 층씩 올라섰다.
마지막 오 층에 오르자 계단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여조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구천주가 계집일 줄은 몰랐군.”
“……!”
천주 도해령은 순간 화가 났다.
무시하는 태도에 눈가에 주름이 생겼지만 애써 웃음으로 참았다.
“후후…… 극일천의 맹수 독안룡이 직접 올 줄은 몰랐군요.”
“훗. 그래도 무구천주라 이거군.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걸 보니.”
“너무 쉬운 게 아닌가요?”
도해령은 그의 얼굴에서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긴 내 얼굴을 보면 쉽게 알 수 있겠군.”
“여기서 이야기할 것은 아닐 테고.”
“안내해라.”
“……혹시 본녀가 누구인지 모르나요?”
“알고 있다. 내가 반말을 해서 기분 나쁜가?”
“그렇다고 하면?”
도해령의 입가에 살소가 나왔다.
그녀 또한 무구천의 천주이기에 무공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지금 내 앞에서 살기를 보였나?”
“당신이 먼저 무시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싸워보겠다는 건가?”
독안룡 여조형의 오른쪽 백안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여기서 무구천주를 잡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본녀를 죽이겠다면 얼마든지 죽여도 되지만 그 대신 무구천의 본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약은 년…… 여하튼 기분 나쁘면 너도 반말해.”
그의 오른쪽 눈동자가 백색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자리를 옮긴 뒤 마주 보며 앉았다.
“무구천의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뭐지?”
“극일천에서 한자리를 원해.”
“한자리라…… 지금 무구천의 천주가 더 좋은 자리일 텐데. 아닌가?”
“좋긴 해. 하지만 이젠 음지에서 숨어 지내고 싶지 않아. 극일천이 양지에 나올 때 본녀도 극일천과 함께하고 싶을 뿐이야.”
“그렇군. 겨우 그 이유 때문에 천주란 인물이 무구천을 버린다는 것인가? 똑바로 말해봐.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그건 나중에 일이 끝나면 알려주도록 하지. 당분간은 그렇게 알고 있어.”
“……훗. 일이 있다는 말이군.”
“…….”
“좋아, 그 이유는 나중에 듣도록 하지. 대신 무구천의 본진이 어디인지 말해.”
“그건…….”
천주 도해령은 잠시 망설였다.
그것을 극일천에게 알려주면 그녀는 확실히 선을 넘는 것이었다.
“……극일천에서 나를 확실히 받아주는 것인가?”
“당장은 아니지. 확인도 없이 무작정 받아줄 수는 없지 않나? 당신이 우릴 못 믿는다면 없던 일로 하면 돼. 이번 한 번만큼은 조용히 물러가도록 하지.”
“…….”
도해령은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알겠어. 나를 따라와. 무구천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 테니까.”
* * *
이각 뒤.
도해령과 독안룡 여조형은 진법이 펼쳐진 무구천 앞에 도착했다.
“훗. 그토록 찾고자 했던 무구천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군.”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진법을 통과해야 해.”
“진법이라…… 유치하게 내 앞에서 애들 장난 같은 것을.”
“애들 장난같이 보여도 함부로…….”
피우우웅-
피우우웅-
그때, 도해령의 머리 위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 지?’
콰아아앙!!
진법 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이어졌다. 폭발은 거의 일각 동안 끊이지 않았다.
아무리 진법이 대단할지라도 일각 동안 터진 폭발에서 제대로 유지될 리 없었다.
‘이…… 자들이……!!’
도해령은 모든 것을 부수고 들어갈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대체…… 왜? 내가 가르쳐 주는데…….”
슈우우욱-
여조형은 그녀의 목을 잡으며 위로 들어 올렸다.
“커어억.”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무구천주, 아니…… 멍청한 년, 고맙다.”
“……컥.”
그녀의 내기는 독안룡 여조형의 손에 잡힌 순간 사라졌다.
도해령은 휘청거리는 다리로 서 있을 힘조차 없었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면서 무너진 무구천으로 달려가는 극일천의 무인들을 볼 수밖에 없었다.
두두두두-
무구천 입구에서 터진 폭발에 도제가 무구수호군들과 함께 달려 나왔다.
극일천의 무인들이 전방에 가득했다.
도제는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저놈들이 어떻게 알고?’
이곳은 무구천의 오무천자 외에는 절대로 알려지지 않은 장소였다.
극일천에서 나타났다면 이유는 한 가지뿐.
‘누가 배신을?’
도제의 궁금증은 곧바로 풀렸다.
극일천의 무인들 사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인물.
“천주……!!”
도해령은 고개를 숙인 채 도제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크하하하! 반갑소이다.”
대소를 터뜨리며 극일천 무인들 사이에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독안룡.”
도제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앞에 나타난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여주형은 당황한 도제를 보며 물었다.
“당신이 도제인 모양이군.”
“천주를 어떻게 했지?”
“내가 한 건 없소. 당신 주인이 우리에게 의탁하겠다고 연락이 먼저 주더군.”
“……!!”
도제는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인물도 아닌 어떻게 천주가 배신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신 빠진 년 때문에 무구천의 운명도 끝이 났군.”
“…….”
“도제. 오늘로서 무구천은 중원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오.”
파악!
독안룡 여주형의 손이 움직이자 극일천의 수하들이 안으로 달려 나갔다.
* * *
무구천으로 향한 일행은 산서성을 빠르게 올라온 뒤 하북성 내원을 통해 북경으로 들어섰다.
여기서부터는 무구천으로 향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는 만큼 최단거리였다.
“누님, 조만간 도착할 것 같습니다. 바로 무구천으로 들어가실 것입니까?”
“흠, 무구천에 들어가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진유는 저번에 가봤으니 알 것이다. 우리가 여기로 온다는 것을 안다면 사방에 무구천의 눈이 있을 게 틀림없지.”
이번에는 묵경이 물었다.
“몰래 들어가면 안 됩니까?”
“여기까지 몰래 오는 건 가능하지만 우리가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곧바로 무구천에 알려지게 게야.”
“우리를 막는다면 결국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까?”
“될 수 있는 한 싸움은 피하는 게 좋겠지. 과연 다른 녀석들도 금강불성처럼 받아줄지 알 수 없잖아. 하지만 천주를 칠 수 있는 명분은 충분하니 무구천 전체와 싸우지는 않을 거다.”
무구천과의 싸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각오한 상태였다.
일행은 북경으로 들어선 뒤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두근두근.
그때, 무혼신녀는 갑자기 가슴이 계속 뛰기 시작했다.
‘……왜 이러지? 이때까지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거늘.’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했지만, 오히려 갈수록 불안한 듯 진정되지 않았다.
고진유는 그녀의 상태를 바로 알아차렸다.
“누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무 일도 없어. 갑자기 울렁거리네?”
“…….”
이유가 없이 갑자기 그럴 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커다란 진동이 멀리서 느껴졌다.
고진유와 무혼신녀는 진동이 어디에서 전해져 왔는지 살폈다.
“이건…… 무구천 방향이야.”
“누님. 그곳에 일이 일어난 듯합니다.”
“가자.”
무혼신녀와 함께 일행은 진동이 느껴진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