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늦은 시간 나란히 앉은 두 사람.
고진유는 남궁무명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예전과 달리 그의 얼굴은 편안했다.
“얼굴이 좋아 보입니다.”
“고맙소. 맹주가 된 것을 감축하오.”
“정확하게는 맹주 대행입니다.”
“무림맹도 웃기는군. 대행은 무슨…… 그러다가 그만두면 뒷일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소.”
“더 좋은 인물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남궁무명은 피식했다.
“말하는 것을 보니 때가 되면 그만둘 생각이군.”
“맞습니다. 혹시 무림맹주에 관심이 있다면 제가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나를?”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만. 남궁세가의 가주는 안 될 것 같고, 맹주나 하시지요.”
“…….”
고진유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무공이 강한들 남궁세가의 가주는 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특이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세가주의 정통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세가주가 안 된다고 해서 너무 서운하게 생각 마세요.”
“나를 걱정하는 것인가?”
“마음에 드신 분이라 혹시나 상처를 입으실까 봐서 하는 말입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마십시오.”
“그건 아닐세. 세가주는 할 수 없으니 그래서 무림맹주가 되라는 말인가?”
“명분이 좋지 않습니까? 맹주에 오르도록 먼저 권유를 받았다고 하면 세가에서는 얼씨구나 좋다고 하면서 전폭 밀어줄 겁니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네. 그대는 맹주를 그만두고 무엇을 할 생각인가?”
“아직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만. 조용하게 살지 않겠습니까?”
“후후후.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군.”
“하하, 그건 그때 일이겠죠.”
적당하게 인사를 나눈 듯하자 남궁무명은 이제 그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 말을 꺼냈다.
“나를 만나고자 한 이유를 말해보게. 물론 알고는 있지만, 그대가 말하는 것을 듣고 싶군.”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다 보니 계시다고 하기에 얼굴이나 보고자 왔습니다.”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인가?”
“세상을 너무 속고만 사셨군요.”
“…….”
“천살지인과 생사결을 하신다지요? 그동안 얼마나 무공이 강해졌는지 구경 삼아 온 것입니다. 별다른 뜻은 없으니 건투하시면 됩니다.”
그는 무림맹주이기도 하지만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었던가.
웃긴 녀석이었다.
천살지인과 잘 싸우라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천살지인과는 인연이 깊은 사이로 알고 있네. 그대의 사숙이지 않은가?”
“맞습니다.”
“정말 내가 이겨도 된다는 뜻으로 말을 한 것인가? 말리지 않고?”
“……부모님의 원수를 갚는 일이 아닙니까. 맹주의 신분이 아닌 그분의 사질로서 부탁한다고 해도, 남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 겁니다.”
“그런 그렇겠지.”
“그냥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번 한 번으로 남궁세가와 그분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되었으면 합니다.”
“혈사천과의 관계는 이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닐세.”
“남궁세가와 혈사천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림맹과 사파에서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혈사천은 녹림대존의 명을 어기고 함부로 움직였습니다. 사파연합에서도 독자적으로 움직인 혈사천에 손을 뗐다는 말입니다.”
“그렇군. 잘된 일이군.”
“그리고 무림맹에서도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과의 문제는 남궁세가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알겠네. 세가에 맹주의 뜻을 알리도록 하지.”
“그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가는가?”
“할 말은 모두 했습니다. 게다가 비무가 있기 전에 모르는 사람들 입에서 굳이 안 좋은 말을 들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남궁무명은 그를 따라 일어났다.
“다음에 좋은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궁무명은 밖으로 나간 고진유를 보았다.
그가 떠나면서 한 말.
‘다음이라…….’
천살지인과 생사결을 앞에 두고 있는 자신에게 다음을 기약했다.
누가 이길지 안다면 오히려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모르겠군.’
* * *
고진유는 현진세가 밖으로 나왔다.
‘강해졌어.’
남궁무명의 무공은 예전과 달랐다.
그의 신형에 흐르는 내기를 보면서 혈사천에 도전한 이유를 알았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할 만했다.
‘사숙을 만나 뵈러 가야겠어.’
남궁세가에 오기 전에 천살지인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혈사천주에게 연락을 해도 만나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조용히 만나야 해.’
휘익.
고진유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혈사천은 무호 초입에 진영을 갖추고 있었다.
진영 외부로 혈사천의 무인들이 진법을 펼친 채 호위를 섰다.
하지만 고진유의 움직임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스으으-
고진유는 내력을 감추며 진영 안으로 들어섰다.
천살지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해도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천살성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군막.
그곳에 천살지인이 있을 것이었다.
혈사천의 무인들은 군막으로 가는 주위로 호위를 겹겹이 섰지만, 고진유가 군막에 들어가기는 쉬웠다.
막상 군막 앞에는 호위가 보이지 않았다.
고진유는 곧장 군막 안으로 들어섰다.
‘사…… 숙님.’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한 인물.
천살지인이자 화산제일검 독소응이었다.
그 또한 군막으로 들어선 기척이 누구인지 알았다.
“호정인가?”
“예, 사숙님. 호정입니다.”
눈을 뜬 그의 눈동자는 붉었다.
“생사결이 시작되기 전에 찾아올 줄 알았다.”
“사숙님.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무림맹주가 된 것을 축하한다. 드디어 화산파에서 맹주를 되찾아왔구나.”
“그리고 본 문이 천하제일문이 되었습니다.”
그와 약속했던 화산천하제일문.
“수고했다. 네 사부가 얼마나 좋아할지 눈에 선하다.”
…“…사숙님, 이젠 버리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화산파가 천하제일문파가 되는 것을 보고자 했지.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도다.”
고진유는 그가 원한다면 천살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천살성의 기는 이미 그의 몸을 장악했다.
“……사숙님께서는 천살성을 지울 수 없으십니까?”
“지울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 몸은 완전히 무너질 게야.”
“…….”
“지금도 억지로 천살지인의 기를 누르고 있을 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숙님……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일찍 왔어야 했습니다.”
“아니다. 네가 약속한 시간보다 훨씬 앞당기지 않았더냐. 이젠 후회 없이 세상을 떠나고자 한다.”
“그래서…… 생사결을 받아들인 것입니까?”
“결자해지라 하지 않았더냐. 남궁세가의 일은 내가 마무리를 짓고 가겠다. 네가 그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남궁세가의 힘이 필요하지. 너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거늘 사숙인 내가 어찌 걸림돌이 되도록 있을까.”
“……사숙님.”
고진유는 그를 향해 절을 했다.
그는 화산파를 위해, 자신을 위해 마무리를 짓고자 했다.
“호정아, 오늘 만나서 정말 기쁘도다. 그만 가보도록 해라. 혈사천주가 오는구나.”
“사숙님…… 편히 가시옵소서.”
휘익.
군막으로 빠르게 혈사천주 조탁이 들어왔다.
‘흐음…….’
그의 눈동자가 좌우를 살폈다. 천살지인 외에는 인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잘못 느꼈나?’
분명 천살지인의 군막에서 미세한 기가 느껴졌다.
“천주,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누가 왔다 갔소?”
“무림맹주.”
“……!”
조탁은 군막을 빠르게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맹주가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이오?”
“생사결을 앞두고 잘 싸우도록 응원차 왔다가 갔소.”
“…….”
“별일 아니니 그만 돌아가서 쉬시오.”
“정말로 그 말을 하기 위해 온 것이오?”
“다른 말은 없었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더니 사숙이라고 응원하는 모양이군.”
조탁은 안심이 되었다.
혹시나 싸우지 못하도록 말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번이 남궁세가의 콧대를 완전히 꺾을 계기야. 방해받을 순 없지.’
그는 생사결에서 천살지인이 질 것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생사결에서 이긴 뒤 무호의 땅 역시 혈사천이 점령할 예정이었다.
그는 이미 무호 뒤로 계속해서 혈사천의 영역을 넓힐 계획을 세웠다.
“내일도 잘 부탁하겠소.”
“……천살지인의 검에 패배는 없소이다.”
“크크크. 그렇게 알겠소이다.”
조탁은 웃음을 터뜨렸다.
* * *
둥! 둥! 둥!
생사비무대 주위로 북소리가 울렸다.
비무대를 중심으로 동서 방향으로 남궁세가와 혈사천의 일행이 진영을 갖추었다.
비무대 위로 무림맹 무호지부 남궁이경이 올라섰다.
수만의 군중들이 비무대에 올라선 그를 보았다.
“본인은 무림맹 무호지부 남궁이경이라 하외다. 생사결을 함에 있어 굳이 다른 말들이 필요하겠소이까. 지금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소이다.”
그는 포권한 채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남궁세가와 혈사천에서는 생사결을 겨룰 인물들은 비무대로 올라오시오.”
“와아아아아--!!”
군중들의 함성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남궁세가 진영에서 남궁무명이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반대편 혈사천 진영에서는 천살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강한 살기에 비무대 주위에 있던 군중들이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욱.’
남궁이경도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너무나 강한 살기에 피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만 내려가시지요.”
그의 뒤에서 남궁무명이 다가섰다.
“그렇게 하겠네.”
휘익.
남궁이궁은 비무대를 벗어났다.
비무대에는 둘만 남았다.
남궁무명은 천살지인과 마주 보았다.
먼저 천살지인이 말문을 열었다.
“우리 사이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바로 시작하지.”
“그렇게 하겠소.”
천살성의 기가 남궁무명을 덮쳤다.
파아앗-!!
남궁무명의 전신에서 황금빛이 흐르며 천살기를 막아냈다.
“도전한 이유가 있었군. 검황조차 완벽하게 익히지 못했던 것을…… 축하하네.”
“…….”
비무대를 보던 혈사천주 조탁의 눈이 커졌다.
‘저건…… 창천…… 황신공…….’
남궁세가의 절대비공이라 알려진 무공을 남궁무명이 익혔다는 사실을 알았다.
검황조차 극성까지 익히지 못했다고 한 창천황신공을 그가 펼치고 있었다.
‘이런…… 이러면 안 되는데…….’
조탁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멀리서 비무를 지켜보던 시선 또한 놀랐다.
‘이것 봐라. 남궁세가에서 창천황신공을 익힌 놈이 나올 줄 몰랐는데.’
중년 사내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창천황신공은 극일천에서 인정하는 중원 무림의 무공 중 하나.
‘저놈도 나중에 귀찮게 될 수 있겠군.’
창천황신공이라면 무조건 견제해야 했다.
‘크크크크…… 다행이군.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비무대 아래에 많이 넣어두었지. 좀 더 지켜보고 결정적인 순간에 터뜨려야겠어.’
고진유와 일행은 군중석에 앉아서 비무대를 내려다보았다.
“허, 창천황신공을 익힌 놈이 나오다니…… 무림에 괴물이 한 명 더 있었군.”
“누님, 저게 대단한 무공인가요?”
인양은 남궁세가의 창천황신공에 대해 잘 몰랐다.
“인양아, 혹시 고금 삼대심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처음 듣습니다.”
“삼대심공은 천명공천공, 수미화심공, 그리고 창천황신공이다.”
“아하…… 창천황신공이 남궁세가의 심공이라면…… 나머지는 어디 문파의 무공인가요?”
“천명공천공은 내가 알고 있는 놈 중 나쁜 놈이 익히고 있는 무공이지. 극일천의 무공이다.”
“수미화심공은요?”
“무구천의 심공으로 그건 내가 익히고 있다.”
“정말요? 우와…… 대단하네요.”
“대단은 무슨. 진짜 대단한 건 이 녀석이지.”
그녀는 미소를 띠며 아래를 보고 있는 고진유를 가리켰다.
“넌 어떻게 된 녀석인지 삼대심공을 익힌 것보다 더 뛰어난 것이 아직도 이해가 안 가.”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고진유는 대답하면서도 비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천살지인과 남궁무명은 서로 일초식을 주고받았다.
생사결이 아닌 비무를 하는 듯 가볍게 움직였다.
“분명 검황의 창천황신공보다는 뛰어나지만 아직 멀었군. 검황은 불완전하지만 창천황신공은 강했다. 그대는 익히기만 했을 뿐. 어떠한 무공이라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극성으로 펼친다고 해서 완전해지는 것은 아닐 터.”
“…….”
“창천황신공은 묘는 검에 맞추는 게 아니라 검이 맞춰야 하는 것임을 가르쳐 준 사람이 없는 모양이군.”
천살지인을 노려보던 남궁무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에게…… 가르쳐 주고 있어.’
검황에게 창천황신공을 배웠지만 익히고 운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무공이란 독학으로 배울 수 있지만, 스승 없이 완전한 무공을 펼치기에는 어려웠다.
그만큼 스승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또한 잘 알았다.
타앗!
천살지인은 천살성의 살성을 개방했다.
“나의 살성을 막기 위해서는 창천황신공을 깨우치는 수밖에 없다.”
“……!!”
“똑똑한 놈이라면 알아들었겠지. 남궁의 창천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에게 펼쳐보아라.”
슈우우우우-
혈향을 실은 살검이 남궁무명의 가슴을 향해 이어졌다.
우우우웅-
남궁무명의 몸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황검을 심공의 흐름에 따라…….’
검유심천의 묘를 따라 살검을 향해 황검을 뻗었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두 개의 기가 부딪혔다.
금빛이 천살지인의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벌떡!
남궁세가의 진영에 있던 수십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겼다.”
바닥에 쓰러진 천살지인을 내려다보는 남궁무명의 모습은 승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그때였다.
퍼어어어어엉-!!!
비무대 위에서 거대한 원형 폭탄들이 솟구쳤다.
퍼어어엉!!!
남궁무명의 머리 위에서 폭탄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