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무혼신녀는 상체를 일으켰다.
“음…… 검후의 제자가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을까?”
아진화를 자세히 살폈다.
그녀의 몸속에 흐르는 내력은 진하고 자연스러웠다.
‘충분히 건방질 만큼 무공이 강하긴 하군.’
무혼신녀는 단번에 그녀의 무공을 확인했다.
‘후훗. 내력은 이만하면 괜찮은 것 같고. 어디 검후의 제자의 무공은 어떠한지 한번 볼까?’
슈우우욱.
그녀는 아진화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면서 손을 뻗었다.
“왜…… 그래요?”
그녀는 무혼신녀의 손을 막아내기 위해 옆으로 물러났다.
‘호오, 보법도 괜찮은 편이고…….’
파아앗.
무혼신녀는 물러난 그녀의 앞으로 다시 다가서며 어깨를 잡았다.
“앗! 뭐 하는 짓이야? 어서 안 놔?!”
“이게 어디서 반말을 하나? 죽고 싶은 모양이지?”
그녀는 아진화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아아악……!”
어깨가 부서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아진화는 호신강기를 일으키며 무혼신녀의 손에서 빠져나오고자 했다.
하지만 갑자기 몸에 내력이 사라졌다.
“봉검문의 차기 문주라는 인물이 이 정도밖에 안 될 줄은 몰랐군. 성격이 완전히 개차반인데? 검후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 또한 별 볼 일 없는 인물인지 궁금한걸.”
“……이익!!”
검후조차 무시하는 말을 들었지만 그녀는 무혼신녀의 기세에 밀려 말도 하지 못했다.
타악.
무혼신녀는 귀찮은 듯 그녀를 밀어 냈다.
“꺼져라. 괜찮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아니군.”
“다, 당신 누구야? 내 사부가 누구인지 알아?”
“검후라면서?”
“잘 알면서 나를 괴롭힌다고? 이 사실을 검후이신 사부님이 아신다면 당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용서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으나 한번 만나보고는 싶군.”
“그리고, 그리고 난 조만간 무림맹주를 만나서 사귈 예정이라고!”
스윽.
아진화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녹림야검과 인양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녹림야검은 어이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뭐래?”
“그러게요. 꿈도 야무지네요. 무림맹주님이 누가 만나주기라도 한대요? 성격이 이상한 여자는 안 좋아하실 텐데.”
“원래 봉검문 출신 여자들이 전부 잘난 맛에 산다고 할까? 엄청 자부심이 강해.”
그녀는 녹림야검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봐, 당신들! 허튼소리 그 정도만 하는 게 좋겠어! 봉검문을 적으로 두면 다칠 수 있다고!”
“에공. 엄청 겁나는구만.”
녹림야검은 마치 겁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놀렸다.
“당신들은 지금 봉검문을 무시하고 있어. 분명 이 일에 책임을 지게 될 거야.”
이번에는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겠소이다. 소저는 그만 내려가는 게 좋겠소. 조용히 한숨 자고 싶은데 잘 수가 없구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고진유를 노려보았다.
“방금 당신이 말했어?”
“그렇소이다. 계속 대화를 하다가는 정말 싸움이 나겠으니 그만 내려갔으면 합니다.”
“쳇. 더럽고 치사해서…….”
그녀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옆에서 노려보는 시선, 무혼신녀의 기세에 밀려 함부로 날뛸 수 없었다.
“나중에 보세요. 봉검문을 무시한 대가를 꼭 치르도록 만들어줄 테니. 특히나 사부님이 무시당한 사실을 아신다면 당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예요.”
“마지막이다. 다치기 전에 가라.”
“이익……!”
아진화는 얼굴이 붉어진 채 특등석을 내려갔다.
인양은 옆으로 고진유를 보며 돌아앉았다.
“저 여자가 형하고 사귀겠다고 하던데요?”
“뭐, 내가 묵경 형처럼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능력은 뛰어나잖아. 중원 모든 여인의 목표가 되는 것은 당연해.”
“푸흐, 맞아요. 나도 형들처럼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번에는 녹림야검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인양아, 너도 두 분처럼은 아니지만 중원 여인들에게 구애의 대상이야.”
“어……? 그런가요? 근데 왜 한 명도 나를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이 없을까요?”
“그건 네가 몰라서 그래.”
“헤헤헤. 여하튼 기분은 좋네요.”
인양은 털썩 의자에 다시 누웠다.
씨이이익.
그리고 그 장면들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 * *
장강은 중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거대한 강줄기였다.
상부에서 진사강이라 불리며 중부로 내려오면서 천강, 형강이라는 이름으로 흐른 뒤 하부에 와서는 양자강으로 불리는 장강.
뱃길은 지루하면서도 평온했다.
중간중간 들른 포구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타며 목적지 무호를 향해 내려갔다.
스윽.
녹림야검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음…… 여기일 텐데…….”
“녹검 형, 왜 그래요?”
“동릉채가 여기에서 활동하고 있을 거다.”
“동릉채라면 장강수로채를 말하는 건가요?”
“맞아.”
“그 일 때문에 요즘 조용하게 지내지 않을까요?”
“설마…… 수적 놈들은 그러지 않지. 무식한 놈들이라 직접적인 관련이 안 되면 아무 생각이 없어. 아니, 생각을 안 해. 동릉채는 이번 일에 연관이 안 됐잖아.”
녹림야검의 말이 맞았다.
둥둥둥.
그때였다.
멀리서 북소리가 울렸다.
“봐라. 내 말 맞지? 이 정도의 거선이 장강을 지나가는데 수적이 안 나타날 리가 없지.”
“어떻게 하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보통 이런 일에 대비해서 상납금을 준비해 놓거든. 동릉채에서도 적당하게 받은 뒤 물러가는 걸로 마무리가 될 거야.”
“음…… 결국 똑같네요. 표행이 지나가는 관할 문파에 통행세를 내잖아요.”
“맞아. 그래서 관군에서도 웬만한 사고를 치지 않으면 눈을 감아주는 편이고…….”
쏴아아아-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릴 만큼 빠르게 다가왔다.
수적선이 다가올수록 북소리가 점점 커졌다.
동릉채의 수적선은 거의 백오십장 정도로 거함선이라 불릴 만큼 거대했다.
휘이익. 휘이익.
수적선에서 쇠걸고리가 날아온 뒤 배를 끌어당겼다.
“크하하하!!”
상판 위로 모습을 드러낸 수적들.
목이 터져라고 대소를 터뜨리면서 수적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녹림야검과 인양은 특등석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녹림야검의 말처럼 그들에게 상납금을 주기 위해 선장이 보따리를 건네주고자 했다.
“잠깐!”
그때, 그들 사이에 끼어드는 여인.
검후봉 아진화가 검을 동릉채의 수적들에게 겨누었다.
“어라…… 저 여자 사고 치겠는데?”
녹림야검은 걱정이 살짝 밀려왔다.
“승객들을 건드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상납금만 받고 가는 건데 왜 나서는 거야? 멍청하게…….”
그의 말처럼 아진화의 행동은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었다.
“모두 뒤로 물러나요.”
아진화는 호기롭게 나섰다.
“저어…… 저기요. 그냥 물러나시면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요.”
선장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녀를 말렸다.
괜히 동릉채를 건드려 앞으로 일이 커질 수 있었다. 수십 년 뱃길을 다니면서 이런 경우를 수없이 겪었다.
그들이야 한 번 나서고 물러나지만, 결국 수적들과 마주치는 건 언제나 자신들.
이왕 나선다면 수적들을 모두 사라지게 해주든지, 그게 아니라면 조용히 지켜보는 게 더 좋았다.
“감히 수적들이 일반 백성들의 돈을 갈취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봉검문의 제자로서 가만히 있는 건 검후 사부님의 위명에 해가 되는 일. 최선을 다해 싸우겠어요.”
“……하아…….”
선장은 수십 년 뱃길을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한 번에 말이 먹히지 않는 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뒤로 물러난 그가 동릉채주와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마음은 이게 아니라는 것임을 눈빛으로 강하게 표현했다.
동릉채주가 나섰다.
“방금 듣기론, 소저는 검후의 제자라고 했소?”
“그렇다. 수적 놈들아, 잘 들어라. 본녀는 봉검문의…….”
“아…… 됐소. 그만 물러갈 테니 아무 일 없었다고 검후께나 잘 말씀드리시오.”
“뭐?”
동릉채주는 피곤하게 싸울 필요 없이 그냥 물러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얼굴상이었다.
“부채주, 물러가자. 똥 밟았다.”
“넵. 두목.”
부채주는 수하들에게 우렁차게 소리쳤다.
“두목이 똥 밟았다고 하신다!! 전원 철수우!!!”
“에이…… 재미없네.”
동릉채의 수적들이 밧줄을 타고 빠르게 넘어갔다.
동릉채주 전대부는 싱긋 웃으며 손을 들었다.
“수고하시오. 소저.”
“수적 놈이 어딜 가려고 하느냐? 당장 멈추지 못할까?”
“허어…… 그냥 간다는 데 볼일이 있소?”
“수적을 잡아 관아에 넘길 것이다!”
“음…… 소저는 정의심이 투철하시구려.”
“그렇다. 이것이 검후께서 봉검문을 세우신 목적이시다.”
“아…… 네에…… 잘 알겠소이다. 소저의 정의심을 존경하여 우린 그만 물러가겠소이다.”
“이 수적 놈이……!”
전대부의 비웃는 표정에 그녀는 소리를 치며 달려들었다.
파아앗-!!
봉검문 독문무공인 봉검화천무(鳳劍花天武)를 펼치며 한 번에 제압하고자 살수를 펼쳤다.
“허어억.”
동릉채주 전대부는 깜짝 놀라 양손에 채운 철갑수대로 막았다.
하지만 그녀의 내력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했다.
“아이고!”
그녀의 힘에 뒤로 넘어졌다.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수적 놈이 본녀인 검화봉 앞에서 잘난 체를 했단 말이더냐?”
‘검화봉?’
전대부의 얼굴이 굳어졌다.
상대가 중원십봉이면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검을 막아내긴 했지만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
“이번에는 네놈의 목을 따주겠다!”
아진화는 검에 내력을 올리며 내리쳤다.
봉황의 날갯짓이 바람을 일으키며 전대부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젠장……!’
극성으로 다한 그녀의 검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채애애앵!
‘뭐지?’
그때, 전대부는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검을 가볍게 막아낸 사내를 보았다.
“한 성질 할 줄 알았지만 앞뒤 구별도 못 하는 개망나니일 줄은…….”
“네놈이…… 물러나지 못할까?”
“검후봉이라…… 중원십봉도 사람 나름이었어.”
녹림야검의 무시하는 눈빛에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파앗!
녹림야검을 향해 또 한 번의 봉황팔검식이 펼쳐졌다.
여덟 개의 봉황이 날아오르며 그의 급소를 향해 날아갔지만, 녹림야검은 전혀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걱.
정확히 한 치 앞까지 날아온 여덟 개의 봉황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언제 출수가 되었는지 모를 녹수검이 어느덧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아진화의 눈이 커졌다.
상대가 절대무공을 지녔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당…… 신…… 누구…… 이지요?”
“녹림야검.”
“……!!”
녹림야검.
녹검살협이라 불리는 그의 이름은 중원을 휩쓸고 있었다.
“당신이……?”
“선장은 잠깐만 와보시오.”
녹림야검은 그녀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던 선장을 불렀다.
“아…… 네에…….”
“동릉채에 줄 건 주고 보냅시다.”
“아, 예에, 알겠습니다.”
선장은 들고 있던 상납금을 동릉채주에게 건네주었다.
“채주. 가서 몸조리나 잘하시오. 여긴 내가 알아서 하겠네.”
“노, 녹림야검님을 뵙습니다!”
“우리가 바빠서 다음에 인사나 합시다.”
“넵. 알겠습니다.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나시면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요.”
“그렇게 하세나.”
소문으로 듣던 녹림야검의 무공을 직접 눈앞에서 보았다.
검후봉의 무공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저분들이…….’
동릉채주는 배 위에서 내려다보는 인물들을 보았다.
두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
그사이 분명 무림맹주가 있을 것이었다.
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진화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그녀의 시선도 특등석에서 내려다보는 인물들에게 향했다.
‘살협과 함께 있다면…….’
고개를 돌리고 시야에서 사라진 사내가…….
‘저…… 사람이…… 무림맹주였어.’
* * *
배 안은 웅성거렸다.
손님들 중 누군가 현 상황을 알아보았다.
녹림야검과 함께한 일행 중 무림맹주 고진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일반석 한구석에 앉아 있던 아진화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다 벌떡 일어났다.
“대사형, 어디 가시려고요……?”
“내가 가서 따져야겠어.”
“네? 무슨 말씀입니까?”
“나를 놀리기 위해 신분을 숨기는 척했잖아. 안 그래?”
“……그건…… 아니지 않을까요?”
“뭐라고? 아니라고?”
그녀의 독기가 담긴 목소리가 나왔다.
“아, 아닙니다.”
“됐어. 난 올라가야겠어.”
그녀는 화가 난 걸음으로 일반석을 나섰다.
“어떻게 하지? 현주야, 빨리 가서 말려야지 않아?”
네 명의 여인들이 걱정이 되었다.
“우리가 어떻게 말려. 대사형 성질을 잘 알잖아. 오히려 잘됐어. 이번 기회에 세상에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
“……그건 그렇지만…….”
아진화는 특등석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섰다.
‘바로 가서 따지고 내려오는 거야!’
긴장된 몸을 풀며 계단을 오르기 위해 첫발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딱 거기까지만이다.”
‘이 목소리는…….’
무림맹주과 함께 있던 여인.
“왜 오는지 모르겠지만 올라오는 순간 나한테 맞는다.”
“…….”
“내 말이 허튼소리로 들린다면 맘대로 해도 좋다.”
아진화는 이대로 물러나기 싫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번처럼 일이 안 된 적은 없었다.
모든 일이 제 뜻대로 이루어졌다.
‘괜찮아. 난 검후봉이야. 중원 최고의 여인이라고…… 그도 나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싫어하는 척하는 것일 거야.’
그녀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머리 위로 무혼신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미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