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혈화전으로 향하는 명주의 발걸음이 불편한 듯 엉성했다.
‘아…… 내가 왜 이러지?’
마음이 급했다.
두 여인은 혈화전 뒤편 후원에서 쉬고 있었다.
후원을 들어서기 전부터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명주는 모퉁이를 돌기도 전, 급하게 북소연을 향해 소리쳤다.
“아가씨…… 아니, 대주님!”
그는 흥분했는지 말이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
“무림맹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앗, 언니! 그분께서 오셨어요.”
“좋겠네.”
명주의 목소리를 들은 북소연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일어나며 후원으로 들어서는 고진유를 보았다.
“북 소저, 오랜만이외다.”
고진유는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그녀의 뒤에 있던 무혼신녀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멋대가리 없는 놈. 좋아하는 연인에게 오랜만이 뭐냐?”
“언니, 그래도 도도한 느낌이잖아요.”
“쯔쯔, 너도 눈꺼풀에 뭐가 씌었구나. 하긴 지금 모든 게 좋아 보이겠지. 이해한다.”
고진유는 먼저 다가선 북소연과 인사를 나누었다.
“오는 도중에 잠시 볼일이 있었소이다. 늦어서 미안하오.”
“오셨다면 됐어요.”
북소연은 그가 온 것만 해도 고맙고 좋았다.
무혼신녀가 한 걸음 나섰다. 그녀는 친누나처럼 간단하게 물었다.
“왔느냐?”
“네, 누님. 갔던 일은 잘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이나?”
“얼굴이 좋아 보입니다.”
“훗. 네 말대로 잘 정리했다. 이젠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동생이나 따라 다녀야겠어.”
“그렇게 하시죠.”
툭.
그녀는 고진유의 가슴을 가볍게 건드렸다.
“고맙다. 들어가자.”
“알겠습니다.”
* * *
일각도 지나기 전에 지옥혈림 경내 전체에 고진유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무림맹주 화산도협 고진유의 방문.
며칠 전에는 그의 누나라는 여인이 먼저 방문했다.
지옥혈림의 모든 시선은 혈화전으로 향했다.
혈화전 앞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었다.
혹시나 밖으로 나오면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고진유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저벅저벅.
혈화전으로 가까이 다가서는 삼십 대 후반 정도의 사내.
거의 직선으로 꺾인 턱 전체에 시커멓게 자란 수염과 단단한 사내의 넓은 어깨가 강인한 느낌을 주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꿀꺽.
명주의 목에서 소리가 났다.
‘일공자…….’
눈앞에 다가선 사내의 정체는 혈성존의 첫째 아들이자 특혈당주 북진이었다.
명주는 빳빳하게 굳은 몸에 목소리조차 떨며 긴장했다.
“특혈당주님, 어서…… 오십시오.”
“명 부대주, 막내에게 연락을 넣게.”
“죄송합니다. 잠시 기다리셔야겠습니다.”
북진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단번에 거절당할 줄이야.
명주는 그가 화를 내기 전에 혈화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얼른 설명했다.
“지금 혈성존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 혈화전으로 절대 출입을 금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네, 그렇습니다.”
“……하긴. 상대가 무림맹주의 신분이라면 지옥혈림의 수장이 먼저 찾아보는 게 예의겠지.”
“…….”
“언제 들어가셨나?”
“방금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군. 언제 끝날지 모르나?”
“미리 점심을 함께 드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길어질 것 같습니다.”
“알겠다. 여기에서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겠군.”
그분의 명을 어기고 혈화전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저어…… 혈성존님께서 돌아가시면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주겠나? 명 부대주가 신경을 써 준다면 고맙군.”
“아닙니다. 힘든 걸음을 하셨는데 돌아가시게 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경우가 밝아서 마음에 들어. 그대를 믿고 특혈당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수고하게나.”
“나중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명주는 고개를 숙인 채 혈화전을 떠난 북진의 뒷모습을 살폈다.
‘하아, 무림맹주가 대단하긴 하군.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은 일공자까지 나타나게 만들다니.’
그는 뒤를 돌아서며 혈화전 안을 보았다.
* * *
혈성존 북조궁은 혈화전에 들어선 뒤 가장 먼저 고진유와 독대했다.
나란히 마주 보며 앉은 인물 중 북조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대를 어떻게 부르면 되겠소?”
“편한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맹주보다는 화산도협이라 부르는 게 서로 편하게 대화를 할 것 같소이다.”
“좋습니다.”
“우선 화산도협께 그분의 죽음에 대해 사과의 말을 먼저 하겠소이다. 본 문의 수장인 본인이 정식으로 사과하는 바이외다.”
북조궁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허리를 숙였다.
고진유도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혈성존님의 사과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부로 귀문 지옥혈림과 본 문 화산파의 은원은 사라졌습니다.”
“고맙소이다.”
북조궁과 고진유는 서로 마주 보며 포권을 했다.
두 사람은 미소를 띠며 자리에 앉았다.
“흠흠.”
북조궁은 헛기침을 했다.
뭔가 할 말이 있었지만 쉽게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에게 할 말이 있으시면 편안하게 하셔도 됩니다.”
“알겠소이다. 그대에게 묻고 싶은 건 딸아이를 둔 부모로서 하는 말이오. 연아, 그 아이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오?”
“네, 그녀를 좋아합니다.”
‘좋아한다라.’
그는 고진유의 말에 기분이 좋았지만 애써 표현을 하지 않았다.
재차 질문이 이어졌다.
“그 아이는 그대도 알다시피 사파의 여인이오. 무슨 뜻인지 알고 있소이까?”
“그게 문제가 되십니까?”
“음……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겠소? 워낙 정파인들은 말들이 많다고 보는데…….”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말이 없겠지만 혈성존께서 걱정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 세상이 조용해지면, 분명 그 문제를 꺼내면서 시끄럽게 만들 겁니다.”
북조궁은 의외였다.
그가 그런 것까지 미리 생각하고 있을 줄 몰랐다.
그건 정파인들뿐만 아니다. 사파인들 또한 마찬가지.
급할 때는 간과 쓸개도 빼다 주지만 막상 아쉬운 게 없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꼬투리를 잡으며 달려드는 게 사람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그런 자리에는 미련 없습니다. 시끄럽기 전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면 될 뿐이지 않습니까.”
북조궁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그는 달랐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내려놓을 줄은 아는 진정한 사내인 듯했다.
그때 고진유의 말이 다시 들렸다.
“그렇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땐 주더라도 받을 건 두 배, 세 배로 받아야지요. 바보처럼 그들이 하는 대로 해주면 나중에 힘들 테니까요.”
“…….”
북조궁은 방금 생각을 정정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려놓을 줄 아는 게 아니라 필요가 없으니 인심이 좋은 듯 주는 척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에 따른 보상까지 챙기겠다는.
북조궁은 고진유를 보면서 잘살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또 다른 질문은 없습니까?”
“됐네. 그대에게 물어볼 건 이젠 없네. 이번에는 그대가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보도록 하시게.”
“극일천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이거 참.”
북조궁은 검미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극일천에 관한 질문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지옥혈림과 극일천의 관계.
중원 무림에서 이 사실에 대해 아는 인물은 당사자 외에는 없었다.
“어떻게 알았소?”
고진유는 피식 웃었다.
북조궁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순간 당황했다.
“이런…….”
어이가 없다는 말투가 순간 나왔다.
넘겨짚는 말에 당한 것이었다.
“약았소이다.”
아무리 똑똑한 인물이라도 사실을 어떻게 추리했을까.
극일천과 지옥혈림과의 관계를 무림에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고진유의 대답이 웃겼다.
“그냥 추측해서 해본 말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극일천이라면 그동안 방해를 많이 했던 지옥혈림에 대해 반응을 분명 보였을 것입니다. 근데 전혀 그런 보복행동을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아, 의심이 들 만하군.”
북조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무림맹주 화산도협에 대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소한 것이라 여겼던 것조차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이런 인물이니 그동안 극일천에서 고생한 것이겠지.’
“우린 예전에 그들과 동맹을 맺었을 뿐이오.”
“동맹이라면 정확히 어느 부분까지를 말하는 것입니까?”
“별거 없소. 그들의 일에 우린 관여하지 않고 그들도 우리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
“음…… 이해가 안 가는군요. 북 소저가 지금까지 저를 도와준 일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그 아이는 모르고 있소이다. 본 문에서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을 아는 인물은 본인과 첫째뿐이라네. 물론 딸아이가 안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건 없소만.”
“그들과 동맹을 맺은 이유가 있습니까? 지금도 동맹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까?”
북조궁은 잠시 머뭇거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낼지 마음속으로 정리를 했다.
“음…… 그대는 혹시 본 문의 전신이 어디인지 아시오?”
“북명신가라고 들었습니다.”
“맞소이다. 선친께서 북명신가를 버리고 지옥혈림으로 새롭게 개파하셨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소?”
“알고는 있지만 저에게 물으시는 걸로 봐서, 무림에 알려진 내용과 다르다는 말이군요.”
고진유는 이곳으로 오기 전 녹림야검에게 그 이유를 들었었다.
“중원에 알려진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본 문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외다.”
“저 또한 그 이유를 듣고 북명신가에 대해 실망했습니다. 외압에 의해 새롭게 이름을 바꿀 정도면 차라리 싸워 멸문을 당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하하, 그대의 말이 맞소이다. 무당파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북명신가는 약하지 않소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였습니까? 혹시 극일천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역시…… 그대는 똑똑한 사람이오. 맞소이다. 북명신가의 이름을 버리고 지옥혈림이 된 것은 극일천 때문이 맞소이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북명신가와 극일천 사이에 일어난 비사.
북조궁은 어쩔 수 없이 북명신가가 지옥혈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 선친께서 처음 보는 사내의 방문을 받았소이다. 그리고 그와 비무를 했소. 선친의 말씀으로는 사흘 동안 먹고 자는 시간 외에 싸웠지만 승패가 나지 않았다더군.
하지만 결국 선친께서는 그에게 지고 말았다고 하더이다.
싸움에서 이긴 그가 말하기를 극일천이란 곳에서 왔으며, 북명신가와 함께 하고 싶다고 했소이다. 선친께서는 그의 제안을 반대했소. 이유는 사내가 말한 극일천의 뜻이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었지.”
“무림의 멸문입니까?”
“맞소. 선친께서 무림 멸문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동참하지 않으면 북명신가의 모든 인원을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더군요.”
“…….”
“하지만 선친은 잘못된 일에는 굴복하지 않았소이다. 그러자 그가 다른 제안을 했소. 그 또한 천주에게 보고를 해야 하니, 대신 이름을 버리고 지옥혈림으로 개명하라고 말이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자는 북명신공을 원했소이다.”
“북명신공을? 그것을 그들에게 주었습니까?”
“선친은 북명신공보다는 사람을 선택했소이다.”
“대단한 분이시군요.”
고진유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을 택한 그에 대해 감동을 받았다.
“극일천은 두 가지를 받은 이후 서로 관여하지 않겠다는 협약을 했소이다. 기한은 오십 년 동안으로 정했지요.”
“오십 년이라면…… 지나지 않으셨습니까?”
“작년에 정확히 오십 년이 지났소이다.”
지옥혈림에서 도움을 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올해부터는 지옥혈림과 극일천은 동맹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떻소? 이제 모든 궁금한 게 풀렸소이까?”
“네. 잘 알았습니다. 앞으로 혈성존께서는 그들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본인 또한 선친께서 하신 것처럼 할 생각이오.”
“그분께서 하신 것이라면?”
“내 사람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이제는 그대도 본인의 사람이지 않소이까?”
고진유는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장인어른. 그리고 앞으로는 말을 낮추셔도 됩니다.”
“…….”
북조궁은 잠시 멈칫거렸다. 그러고는 그의 뜻밖에 말에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흐음. 이거 참…… 적응이 안 되는구려.”
지금의 기분이라면 그는 조용한 곳에 가서 목이 터지도록 웃고 싶었다.
웃음을 애써 참으며 고진유를 보았다.
다섯 명의 아들놈들 뒤에 낳은 막내딸.
그에게는 너무나 귀한 딸이지만 중원 무림에서 지옥혈림을 쓰레기 집단으로 평하기에 명망이 좋은 사내를 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 화산도협과 사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믿지 않았다.
서로 원수지간처럼 죽이고자 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으니.
그런 남녀가 좋아한다는데 어찌 쉬이 믿을 수 있었을까.
“크흠, 흠, 이보게. 한 번 더 불러주면 안 되겠는가?”
“장인어른이란 말입니까?”
“하하하! 됐네.”
북조궁은 더는 바랄 게 없었다.
그는 중원 최고의 사내가 아닌가.
딸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이보다 기쁜 일이 없었다.
“앞으로 극일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게. 내가 알아서 다 하겠네.”
“아닙니다. 지금처럼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굳이 그들의 신경을 거슬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극일천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네.”
“그들도 저를 똑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똑같이 생각한다?”
고진유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극일천을 상대로 이보다 더 잘 싸운 인물이 있었던가.
무신 초일군조차 그들에게 당한 뒤 천검궁이 봉문에 빠졌음을 알고 있었다.
‘맹주는 이미 무신 초일군을 넘어섰어.’
현 무림 최고의 인물은 고진유가 확실했다.
“알겠네. 자네 뜻대로 하게. 혹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부탁해도 된다네.”
“북 소저에게 늘 부탁을 받고 있습니다.”
북조궁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물어볼 말이 생각났다.
서흑신왕 북안궁이 말하기를 고진유의 누나인 그녀에게 일초지적도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가 정말 친누나가 맞는가?”
“누님은 맞습니다만 친누나는 아닙니다.”
“그렇군. 혹시 그녀의 신분에 대해 알 수 있겠나?”
“혹시 무구천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네. 무구천의 인물인가?”
“누님은 무구천의 오무천자입니다. 예전에 누님을 무혼신녀라…….”
“허어? 방금 무혼신녀라 했는가?”
북조궁은 너무 급한 나머지 말을 끊으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맹주, 무혼신녀는 백 년 전의 인물이라네. 어떻게 그분이라고 하는가?”
“믿기지 않겠지만 누님은 그분이 맞습니다.”
“……!!”
고진유의 표정과 대답은 농담이 아니었다.
고진유는 곧바로 그녀와 어떻게 만났는지 알려주었다.
북조궁은 고진유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중원에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많다고 들었지만 도저히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될 일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