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발아래로 분홍의 마면군 치맛자락이 바람을 따라 움직였다.
힐끔힐끔.
사내들이 지나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몰래 쳐다보곤 했다.
‘이곳이 얼마만이지?’
오랜만에 찾는 곳이었다.
세월의 기억은 마치 어제처럼 느껴졌지만 예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화산파에서 내려온 무혼신녀는 곧장 호북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무창으로 들어선 뒤 황학루를 향해 천천히 올랐다.
호남의 악양루, 강서의 등왕각과 더불어 황학루는 강남의 삼대 명루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절경을 자랑했다.
‘음…….’
청연비하의 현판 아래를 지나치며 들어섰다.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여기에서 그를 처음 만났지.”
이곳에서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기다리게 될 줄이야.
화산파에서 내려온 그녀는 한 장의 서신을 받았다.
날짜는 없고 아지(鵝池)에서 보고 싶다는 글만이 적혀 있었다.
중원에 아지라 부를 수 있는 장소는 많지만, 두 사람에게는 특별한 곳이 있었다.
‘변한 게 없어.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군.’
그는 늘 그랬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건방질 정도로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실제로도 그는 모르는 게 없었다.
그녀는 아지로 천천히 걸었다.
스윽.
두 명의 사내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중 한 명의 사내가 머리카락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
“혼자 왔으면…….”
퍽! 퍽!
정확히 한 대씩 사내들의 얼굴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풍덩.
사내들은 공중으로 날아오른 뒤 아지에 빠졌다.
“앗! 사람이 빠졌다!”
“또 술 처먹고 빠진 모양이군.”
“그게 아니라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던데.”
“무슨 소리야.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물속에서 흐느적거리는 모습들이 재미있는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무혼신녀는 그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갔다.
사람들이 물에 빠진 곳으로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탓에 반대편은 조용했다.
백의노인의 긴 수염이 바람에 흩날렸다. 이마와 눈가에 주름이 진하게 보였다.
누가 봐도 생의 무게이자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노인의 눈빛만큼은 젊은 사내 못지않게 야망에 가득하며 빛을 냈다.
‘변하지 않았어.’
무혼신녀는 다가서면서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오랜만이네요.”
“허허허. 그대를 눈앞에서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천문전주 나하중은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 기억 속에 있던 그녀의 모습과 닮았다.
“연매는 본인의 기억 그대로이외다.”
“당신도 예전 그대로네요.”
“연매는 지나친 농담을 하시는구려. 난 이미 늙은 노부가 되었소이다.”
“당신의 겉모습이 아닌 속마음을 말하는 거예요. 그때도 당신의 눈빛은 늘 야망에 가득했지요.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은 게 신기하군요.”
“사람이 변한다면 죽는다고 하지 않소이까.”
“훗. 얼마나 오래 살고 싶은지 모르겠군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중원의 내 손에 넣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소이다.”
“당신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이 정도면 극일천이 중원을 손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이던데.”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오. 무림이 곧 본인의 뜻대로 되는 게 목표라고 할 수 있소.”
“극일천주를 모시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요.”
“지금은 모시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또한 사라질 것이외다.”
예전에도 극일천주를 죽이기 위한 무공을 주었다.
피식.
무혼신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군요. 내가 멍청했어요.”
“무슨 말이오?”
“그때 내게 극일천주를 죽일 무공을 준 의미. 다른 인물에게도 주었었군요.”
“맞소이다.”
나하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당신도 그를 죽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정말 대단해요.”
“후후후.”
그는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보고를 받긴 했지만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녀가 살아 있음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걷겠소이까?”
“나이도 많은 사람이 힘들지 않나요?”
“후후후. 아직까지는 당신을 업고 여기를 다닐 수도 있소이다.”
“남들이 보면 노망이 났다고 하겠군요.”
“노망이라…… 하긴 마음은 그대로이거늘 아쉽게도 몸뚱어리는 늙은 모양이외다.”
“남들이 보기에 겨우 육십 정도밖에 안 보이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세요.”
“클클클. 칭찬으로 듣겠소이다.”
나하중은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황학루를 거닐었다.
전방에 버드나무의 가지가 땅 아래로 축 처져 있고, 그 아래에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가 먼저 가리켰다.
“저곳에 앉겠소이까?”
“기억하는군요.”
“연매와 함께 있으니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구려.”
두 사람은 버드나무 아래 의자에 앉았다.
“그동안 많이 자랐네요.”
무혼신녀는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잡았다.
예전에 그녀가 알고 있던 것들을 보면서 백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갔음이 느껴졌다.
“정말로 시간이 많이 흘렀어요. 이제야 실감이 날 정도로…….”
“연매, 괜찮소이까?”
그녀는 시선을 돌려 나하중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잘 적응하는 중이지요.”
“다행이외다.”
“요즘 많이 힘든 모양이지요?”
“허허. 힘들다라……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렇지 재미있게 지내고 있소이다.”
그는 무림맹주 고진유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연매가 보기에 맹주는 어떠하더이까?”
“음, 당신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어허…… 바로 그런 말을 할 줄 몰랐소이다. 칭찬을 안 하는 연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무림맹주는 대단한 사내이긴 하군요.”
“극일천이 무너지게 된다면 무구천이 아니라 진유 동생에게 당할 수도 있겠어요.”
‘진유 동생?’
나하중은 정색했다. 무림맹주와 친분을 보여 주고자 하는 그녀가 싫었다.
“……잘 알겠소이다. 그 녀석에게 당하지 않도록 좀 더 조심해야겠구려. 아니…… 오히려 그가 조심해야 할 것이외다.”
피식.
무혼신녀는 실소가 나왔다. 그녀가 아는 그는 남의 말을 안 들었다.
“연매는 왜 그런 표정을 짓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당신을 보니 마음이 정리되는군요.”
“무엇을 말이오?”
“이젠 당신과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
나하중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고독은 어떻게 처리한 것이오?”
“진유 동생이 간단하게 처리하더군요.”
그는 천지쌍고독에 대해 잘 알았다.
그녀가 한 말대로, 처리하고 싶다고 해서 간단하게 없앨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리고 계속 기분 나쁜 것이 있었다.
“왜 그를 동생이라 부르시오?”
“혹시 질투하는 건가요?”
“…….”
고진유에 대한 질투보다는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이 기분 나빴다.
극일천과 완전히 선을 긋고 있었다.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오?”
연매란 말 대신 무혼신녀를 당신이라 불렀다.
“본인이 무구천의 오무천자인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오무천자라…… 잘 알겠소이다. 확실하게 말해 줘서 고맙소이다.”
“깔끔하게 서로 대하는 게 좋지요. 예전에도 나를 좋아한다더니 지저분하게 딴 여자나 만나고.”
“……알고 있었소?”
“정말 내가 바보인 줄 알았나 보군요. 휴우…… 이제야 가슴이 시원하네요. 그때 이 말을 하고 나서 동면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스르륵.
나하중의 손이 그녀의 목을 향해 다가갔다.
“못된 버릇이 또 나오는군. 하긴 제 버릇 죽을 때까지 못 고친다고 하더니. 꼭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이네요. 당신은 방금 나를 죽이고자 했어요.”
무혼신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옆으로 물러났다.
“…….”
“나도 싸우고 싶지만 오늘은 그냥 물러가도록 하죠. 백 년 만에 처음 만난 날 서로 죽이고자 싸울 필요는 없지 않나요?”
나하중은 아쉬운 표정으로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알겠소. 좋은 만남이었소. 우리 사이가 예전처럼 되었다면 좀 더 좋았을 게요.”
“천만에.”
타앗!
그는 다시 한 번 더 물러났던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파아아앙!
하지만 그녀 또한 그가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부딪친 공간이 부풀어 오른 뒤 터졌다.
‘이런, 망할.’
나하중은 눈앞에 번쩍이는 섬광폭에 의해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핏핏핏핏-
곧바로 무혼신녀는 양손에서 지강(指罡)을 펼쳤다.
그는 뒷걸음질을 빠르게 하면서 지강을 하나씩 막아냈다.
퍽퍽퍽퍽퍽.
휘익.
나하중의 허리로 향해 마지막 지강이 날아왔다.
‘쯧…….’
그는 호신강기를 일으키는 동시에 허리를 틀었다.
파앗!
지강은 겨우 비껴 냈지만 마치 검에 베인 듯 상처가 났다.
“…….”
그는 백의로 퍼져 나가는 붉은 피를 만졌다.
“어이가 없군.”
무혼신녀의 모습은 이미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재빨리 내력을 올려 그녀를 찾았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쳇. 연매, 잘 들으시오. 다음에 만나게 되면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게요. 오늘은 옛정에 보내주는 것이니 그렇게 아시오.”
휘익.
나하중은 돌아선 뒤 황학루를 떠나갔다.
스으윽.
그때, 황학루를 떠나간 줄 알았던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 사람이 더 비겁하게 변한 것 같잖아.”
그를 만나면서 설마 했던 생각이 그대로 맞았다.
그녀는 더 미련이 없었다.
“예전이라면 극일천을 절대로 이기지 못할 거리 생각했겠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 나를 죽이고자 할 때 확실해졌지. 당신은 그 아이를 두려워하고 있어. 늘 자신만만했던 당신은 이젠 의심하고 있는 거야. 과연 극일천이 중원 무림을 이길 수 있을까.”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뭔가 기분이 개운해지고 있었다.
“며칠 떨어진 건데 그 녀석이 보고 싶군. 지옥혈림에 소연을 만나러 간다고 했지?”
무창에서 형주까지 거리는 얼마 멀지 않았다.
스르르륵.
무혼신녀의 신형이 움직이면서 사라졌다.
* * *
호남에서 한 가지 소문이 중원에 나돌았다.
녹림에 관한 소문이었다.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녹림에 숨어들었던 극일천의 간자에 의해 녹림대존이 중독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무림맹주 화산도협에 의해 해독하고 극일천의 간자들을 몰아냈다는 소문이었다.
“정말로 바쁜 사람이야.”
북소연은 얼굴에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에 올라온 보고서에는 무림맹주에 관한 일이 적혀 있었다.
화산파에서 오던 도중 중간에 다른 곳으로 빠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중요한 일이 생겼음을 알았지만 녹림에 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똑똑.
문밖에서 추혼대의 수하가 찾아왔다.
“아가씨, 명주입니다.”
“들어와.”
흑귀 명주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무슨 일이지?”
“정문에서 그분께서 오신 것 같습니다.”
“그분이라면?”
“무림맹주의 누님이십니다.”
벌떡.
북소연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가 오셨다고?”
명주는 북소연을 호위했던 수하들에게 그녀의 존재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의 반응을 보자 정말로 무림맹주의 누이가 맞는 듯했다.
“소인이 모시고…….”
명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북소연은 이미 밖으로 달리고 있었다.
콰아앙!!
지옥혈림의 본전 앞에서 거대한 폭음이 일어났다.
‘환장할 일이군.’
서흑신왕 북안궁은 어이가 없었다.
며칠 전부터 본전에 방문했던 그는 마침 밖으로 나가려고 하던 찰나였다.
그리고 정문에서 흑귀들을 세워놓고 훈계를 하는 여인을 보았다.
다른 장소도 아닌 본전 앞에서 수하들이 외부인에게 야단을 맞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수하들이 공손하게 대하지 못한 듯했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 법.
그녀에게 몇 마디 하지도 않았다.
“이보시오. 소저. 수하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남의 집에 왔으면 조용히 있는 게 좋겠네.”
“지금 나를 추궁하는 것인가?”
“…….”
“보아하니 높은 양반 같은데 어떠한 잘못이 있는지 확인부터 안 하고 수하 편을 드는 것을 보니 지옥혈림도 그저 그런 곳이군.”
북안궁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지만 수하들 앞에서 서흑신왕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반말로 훈계까지.
북안궁은 그때, 참거나 상대가 누구인지 먼저 물었어야 했다.
“어허, 말이 짧구나!”
그게 시작이었다.
서너 초식을 겨루면서 상대의 무공 수위가 어떠한지 알았다.
대체 이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가볍게 휘두르는 손짓에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손짓 하나에 내가 밀려나다니……!’
북안궁은 그녀에게 다급히 물었다.
“그대는 대체 누구요?”
“알아서 뭐 하게?”
“거참 젊은 사람이 어른에게 너무 함부로 말을 하는구려!”
“하아…… 피곤하네.”
무혼신녀는 앞으로 얼마나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싶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휘이이익.
그때, 정문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저 아이가 왜?’
북소연이 무슨 이유로 정문에 빠르게 나오는지 모르는 북안궁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어어어어언니이이이!”
그녀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덥석.
북소연은 무혼신녀를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