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소축의 목이 잘렸다.
‘젠장…….’
신의반의 기운이 단숨에 빠졌다.
밝은 미래를 약속했던 그의 죽음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이놈들이 이렇게 약했다고?’
아니, 그가 보여준 무공은 강했다. 녹림대존의 무공보다 훨씬 강한 무공이기에 믿은 것이다.
하지만 믿음이 깨졌다.
공마령인이 된 수하들은 하나둘씩 바닥에 쓰러졌다.
“어이, 신의반. 세상은 원래 뜻대로 되지 않아.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지.”
신의반 앞으로 소소경의 잔백검이 다가왔다.
“크윽…….”
그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가슴을 뚫고 들어온 잔백검을 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그대로 있을걸…….’
쿠우웅.
앞으로 쓰러지는 신의반의 표정에 후회가 가득했다.
* * *
녹림의 풍운은 지나갔다.
녹림대존 독영한은 그들만으로 조촐하게 감사의 자리를 만들었다.
“좋은 일도 아니라서 이 정도 자리를 만들었소이다.”
“괜찮습니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약속대로 적당한 수준으로 주면 됩니다.”
소소경은 술을 마시다가 물었다.
“형님, 뭘 준다는 말이오?”
“이것저것 합해서 돈으로 퉁 치자는 말이지.”
“아…… 하. 맹주는 엄청 돈을 좋아하는구려. 녹림야검의 일 때도 그렇고.”
“제일 간단하지 않습니까. 서로 부담도 안 되고.”
“맹주는 얼마나 원하시는 게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그래도 어느 정도 기준이 있어야지 않겠소? 그래야 우리가 줄 수 있을 게 아니겠소.”
“음. 황금 천만 냥 정도면…….”
“에이, 도둑……!”
소소경은 말끝에 욕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황금 천만 냥이 누구 애 이름인가? 세상에 그만큼 가지고 있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
“녹림의 가치가 황금 천만 냥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본도가 그 돈으로 녹림을 사고 싶소이다.”
“…….”
‘황당한 인물이야. 역시.’
그가 밉지 않았다.
독영한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 참…… 지금까지 살면서 웃긴 말들을 많이 들었지만 방금 무림맹주가 했던 말처럼 웃긴 건 처음이오. 녹림을 돈으로 산다는 게 사실이오?”
“살 수 있다면 말입니다.”
“녹림을 사서 어디에 쓸 생각이시오?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외다.”
“사용할 곳은 많지요. 우선 혈사천도 정리를 해야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군요.”
“혈사천과 무슨 문제라도 있소이까?”
“당분간 조용하게 지냈으면 하는데 요즘 너무 눈치가 없는 것 말입니다.”
“크하하하!!”
독영한은 대소를 터뜨렸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웃음이 나왔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혈사천주가 좀 문제이긴 하지요. 어릴 때 제대로 못 배워서 그렇소이다.”
“그를 잘 아는 모양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많이 만났던 사이라 어떤 성격인지 잘 알고 있소이다. 혹시나 그를 상대한다면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큰일이니 조심하는 게 좋소이다. 워낙 뒤통수를 잘 치는 인물이라 본인도 항상 조심하고 있지요.”
“알겠습니다. 그를 만날 때 늘 유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스윽.
독영한은 술잔을 들었다.
“맹주, 극일천과 싸울 때 녹림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달려가겠소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만간 연락이 갈지 모르겠군요.”
“하하하. 또 바로 승낙할 줄은 몰랐소이다.”
그는 술 한 잔을 마신 뒤 녹림야검을 보았다.
녹검당의 살수였던 그가 중원 최고 중의 인물로 거듭났다.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녹림야검, 한잔 받게.”
“고맙습니다.”
녹림대존이 권하는 술잔.
녹림야검은 두 손으로 그의 잔을 받았다. 예전이었다면 같은 술자리에서 나란히 겸상을 할 신분이 아니었다.
독영한은 술을 따르면서 물었다.
“자네의 뿌리가 어디인지 잘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잊지 않았다니 다행이네.”
그는 술을 따른 뒤 이번에는 고진유를 보았다.
“맹주, 녹림야검은 꼭 돌려주었으면 좋겠소이다. 우리에게도 중요한 인물이니.”
“녹검 씨의 몸값만 주신다면 언제든지 돌려 드리지요.”
“황금 일백만 냥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건 저번에 알려주었던 몸값입니다. 지금은 더 올랐습니다.”
“……얼만가?”
“얼마 안 됩니다. 황금 이백만 냥을 당장 주신다면 보내 드리겠습니다.”
“쯧쯧, 도둑놈 심보가 아닌가? 차라리 내가 대신 인질을 하겠네.”
“안 됩니다. 금액 차이가 너무 나서 제가 손해입니다.”
“…….”
독영한은 자존심이 상했다. 얼마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물어봤다가 더 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쳇. 돌려주지 않겠다는 말이군.”
“아닙니다. 방금 녹검 씨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녹림의 사람이라고. 그리고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명품은 지금 살 때가 가장 싸다고 말입니다.”
“그럼 시간이 지나면 더 가격이 올라간다는 말이오?”
“가격도 가격이지만 계속 이자가 늘어나는 것도 같이 아시면 됩니다.”
“…….”
독영한은 진지한 고진유의 표정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알겠소이다. 필히 데리고 올 테니 그동안 잘 부탁드리겠소이다.”
“그건 녹검 씨가 알아서 잘하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맹주와 비슷한 사람은 만나보지도 못했소이다.”
“그렇습니까? 전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봅니다.”
“허어…… 지금 농담으로 말한 게요?”
“전 농담은 못합니다.”
독영한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에 대해 알게 되었다.
가장 인간적인 사내.
고지식한 정파의 도사가 아닌 어느 정도 세속의 때가 묻은 평범한 사내가 맞았다.
다만 그는 무공이 아주 강한, 평범한 청년이었다.
“보통 맹주를 위하여.”
독영한은 술잔을 들며 한마디 했다.
‘후후후.’
고진유는 미소를 띠며 그와 술잔을 부딪쳤다.
* * *
이른 아침.
고진유는 홀로 성심원 앞에 멈추었다.
“여기인가?”
녹림에서 내려온 뒤 주국을 만나고자 곧장 성심원으로 내려왔다.
녹림대존을 단번에 해독시킨 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그에게 약의전에 가는 게 어떠한지 물어볼 수 없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먼저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성심원으로 들어섰다.
백의중년인, 성심원의 총관이 다가오면서 고진유를 살폈다.
“어떻게 오셨소?”
“몸이 좋지 않아서 왔습니다.”
“음…….”
총관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아래위를 살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도 읊는다는 말이 있듯 성심원에서 총관을 맡은 지 십 년이 넘었다.
성심원으로 찾아온 환자를 보면 대충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어디가 아프오?”
“몸에 열이 많이 나서 찾아왔소이다. 듣기로 성심원의 원장님께서 의술이 뛰어나다고 하더군요.”
“잘 찾아오셨소. 본원의 원장님께서는 중원 최고의 의원이외다.”
“바로 접수가 되겠습니까?”
고진유는 물음과 동시에 그의 손에 얼른 황금 한 냥을 건네주었다.
총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나타났다.
“접수는 당연히 되고말고요. 바로 따라오시오.”
“고맙습니다.”
고진유는 그를 따라 곧바로 성심원장실로 향했다.
이미 앞에 두 명의 환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총관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먼저 들어가시지요.”
“아닙니다. 별로 바쁜 건 없으니 저분들이 끝나는 대로 상담을 받겠습니다.”
“아, 그럼 그렇게 하시오.”
총관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스윽.
고진유는 기다리는 사람들 옆에 앉았다.
마른 몸매를 지닌 의원이 맥을 잡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가볍게 환자의 혈을 두드리고 있었다.
‘타혈법인가?’
혈맥이 막힌 자리를 뚫기 위해 타격을 하면서 풀어주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내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환자의 맥을 통해 막힌 부분을 찾아낸 듯했다.
‘묵경 형 말처럼 의술이 뛰어나네.’
방금 타혈법 하나만으로도 원장의 의술이 어떠한지 알았다.
스윽.
치료를 하던 원장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안에 있으면서도 밖의 상황을 보고 있었다.
총관이 환자를 직접 데리고 오는 경우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주국은 알면서도 눈을 감아 주었다.
하지만 그가 데리고 온 사내는 앞으로 오지 않고 순서를 기다렸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특이한 사람이군.’
주국은 한 명씩 환자들의 치료를 마쳤다.
그리고 고진유의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겠군. 그대는 내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튼튼한 것 같네.”
“몸은 튼튼할지 모르겠지만 요즘 너무 신경 쓸 게 많아서 머리가 복잡합니다.”
“…….”
머리가 복잡해서 의원을 찾아왔다는 고진유의 대답에,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보아하니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소. 본인에게 볼일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바쁘지 않다면 마칠 때 찾아올 수 있겠소? 총관에게 말해놓을 테니 곧장 들어오면 되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물러났다.
‘음…… 누굴까?’
주국은 밖으로 나가는 고진유를 보면서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다.
많은 환자들을 만나 몇 마디만 나누어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보는 눈이 생겼다.
‘한데 이번엔 모르겠어. 마치 하늘처럼……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을 받다니…….’
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 밖으로 나간 사내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객잔에서 고진유를 기다리는 세 사람.
“여기다!”
묵경은 안으로 들어선 고진유를 불렀다.
“그는 어때?”
“괜찮네요.”
“맞지?”
묵경은 그에 대해 잘못 본 게 아니라며 킬킬 웃었다.
“환자들을 보느라 바빠서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했어요.”
“알겠다. 나중에 갈 때 같이 갈까?”
“그러죠.”
이후 일행은 객잔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
해가 어두워질 쯤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볼까요?”
“좋아.”
네 사람은 객잔에서 나와 성심원으로 향했다.
마칠 시간이 지났는지 성심원 안에는 환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후다다닥.
멀리서 총관이 빠르게 달려 나왔다.
그는 묵경과 함께 들어온 고진유와 동시에 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이 아시는 사이였습니까?”
“맞소이다. 원장께서는 안에 계시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니네. 바쁜 사람인데 볼일을 보게나. 우린 그와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다네.”
“아…… 네에. 알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주국은 안으로 들어서는 네 명의 사내들을 보았다.
묵경과 함께 오는 고진유를 보면서 궁금증이 풀렸다.
‘무림맹주였어.’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라 여겼거늘.
중원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심원에서 밖으로 잘 나가지 않은 편이지만 무림맹주에 대해서는 그도 소문을 많이 들었다.
‘젊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보면서도, 무림맹주라고 하면 나이가 많은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그의 젊은 모습을 보면서 다시 놀랐다.
무림최고의 인물.
정파 무림맹의 맹주에 올라선 중원 최고의 사내였다.
“정식으로 인사하겠습니다. 고진유라 합니다.”
“주국이외다. 뛰어난 청년인 줄 알았지만 그대가 무림맹주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소이다.”
“속이고자 한 건 아닙니다. 기분이 나빴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외다. 맹주께서 그러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먼저 주국이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무림맹의 맹주께서는 어인 일로 멀리 이곳까지 오셨소이까?”
“이번에 큰 도움을 주신 일에 대해 감사함을 전하고자 왔소이다.”
“다행히 해독제가 잘된 모양이군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긴 했소이다.”
“모든 게 원장님께서 큰 도움을 주신 덕분입니다.”
“아니외다. 풍류옥협께서 귀한 약재들을 구해준 덕분이지요. 본인은 딱히 크게 한 일은 없었소이다.”
“원장님께서는 겸손하시는군요. 재료가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해독제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지요.”
“무림맹주께서 그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외다.”
주국은 양손을 모은 채 허리를 숙였다.
“그래서 원장님께 제안을 할 것이 있습니다.”
“제안을?”
무림맹주의 제안이라니 궁금했다.
“제안이라는 게 무엇이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원장님을 무림맹에 모시고 싶습니다.”
“……!”
주국은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에 멈칫거렸다.
‘나를…… 무림맹에?’
무림맹이 어떠한 곳인 줄 안다.
정파 무림인이라면 꼭 가보고자 하는 무림 최고의 성지가 아닌가.
다만 자신은 무림인이 아니었다.
그는 맹주의 뜻밖의 제안에 어떻게 대답할지 망설였다.
다시 고진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본도가 보기에 원장님께서는 뛰어난 실력을 지니셨습니다. 이곳에서 지내기에 아까울 정도로 말입니다.”
“음……맹주께서 본인을 좋게 보아 주시니 고맙소이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무림맹에 들어가기에 본인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소이다.”
“약의전에서 일하실 분께서는 굳이 무공을 익힐 필요가 없습니다. 그 점이 걸린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약의전이라 하셨소이까?”
“그렇습니다.”
주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약의전이라.
의원이라면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무림맹의 약의전이라 했다.
그곳에는 많은 의학 서적들과, 일반 의원들이 평생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할 귀한 약재들이 쌓여 있다고 들었다.
그 또한 의원이기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음……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이까?”
“무엇입니까?”
“만일 무림맹에 간 뒤 그만두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면 되겠소이까?”
“계약에 따라서 그만두면 됩니다.”
“어떻게 계약을 하는 것이외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무림맹에 가면 군사께서 알려주실 겁니다.”
“그렇군요.”
“딱히 어려울 건 없습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주국은 해독제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오랜만에 흥분이 될 만큼 기분이 새로웠다.
성심원은 이제 자리를 잡아 웬만한 환자들은 현재 있는 의원들로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다.
주국은 결정을 내렸다.
“본인이 어떻게 하면 되겠소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