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이릉채주 가효정은 양쪽 무릎을 모은 채 손은 가지런히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세상에 살면서 화산도협과 마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정파 무림의 수장, 무림맹주이기도 하지 않았던가.
“수채가 생각보다 깨끗합니다.”
산적이나 수적들이 지내는 산채나 수채는 더럽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아…… 네에.”
가효정은 긴장한 탓인지 목소리가 굳었다.
“채주는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 네에.”
“우린 지나가다가 들렀소이다.”
“……네에.”
아까도 생각했지만 이릉채는 지나가다가 들를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우린 형주로 가는 길이었소이다. 시간이 늦어 이릉에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왔는데, 살협이 여기에 녹림의 형제인 이릉채가 가까이 있다고 해서 잠시 인사차 오게 된 것이외다.”
“아…… 네에.”
무림맹 맹주의 그런 인사는 굳이 원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대답밖에 없었다.
“요즘 힘든 일은 없소이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사업에 큰 지장이 없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
장강수로채의 사업이야 도적질이 아닌가.
무림맹주가 그것을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터.
“요즘…… 딱히…… 일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고, 여기도 불경기군요. 안타깝소이다. 수하들이 먹고살아가려면 일이 잘돼야 할 텐데 말입니다.”
“……저희를 생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진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인사도 했겠다, 이곳에는 딱히 별일이 없다고 하니 그만 가보겠소이다. 아 참! 아는지 모르겠지만 극일천이란 곳에서 중원 무림에 정사를 가리지 않고 간자들을 심어 놓았지 않소이까. 혹시 여기에도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시지요.”
꿀꺽.
가효정은 침을 삼켰다.
미소를 띤 화산도협의 얼굴.
이건 확실했다.
‘……알고 있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갑자기 이 대목에서 극일천이 나올 리 없어.’
그의 말이 다시 들렸다.
“살협이 말하기를, 녹림대존도 극일천의 간자를 찾아내서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한 사람도 살려주지 않을 거라 했다더군요. 지금쯤 녹림에서도 간자를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겠지요.”
“그게…… 사실입니까?”
“음? 본도는 들은 대로 말을 했을 뿐입니다.”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하하, 채주만 아니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그럼 우린 이만 가보도록 하겠소이다.”
고진유가 일어나려고 하자, 가효정은 다급히 손을 뻗어 옷자락을 잡았다.
“자, 잠깐만!”
“…….”
고진유는 가만히 멈춘 채 그를 보았다.
“제가…… 화산도협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본도에게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가효정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야 했다.
분명 알고 온 게 확실했다.
수적 소굴에서 뭘 보겠다고 놀러 온단 말인가.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밝혀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할까…… 아니, 그 녹림에 바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녹림에 알린다는 게 뭡니까? 아! 혹시 만주채주가 극일천의 인물을 소개해준다는 내용인가요?”
‘헉……!’
가효정의 숨이 막힐 뻔했다.
놀란 표정에 커진 두 눈으로 고진유의 미소를 띤 얼굴을 보았다.
‘역시 알고 왔잖아!!’
가슴이 철렁거렸다.
만일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마, 맞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분명 말을 했습니다.”
“채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방금 본도가 말한 것처럼 만주채주가 극일천의 간자가 될 수 있겠군요.”
“그…… 렇습니다.”
“또 그의 꾀임에 넘은 간 자들이 누구이지요?”
이것 또한 알고 있는데 물어보는 거다.
“여섯…… 수채에서…….”
가효정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털썩.
그리고 그 자리에서 부복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채주가 본도에게 부복할 이유가 있소이까? 본도가 녹림의 사람도 아니지 않소?”
‘아…… 그런가?’
가효정은 엎드린 채로 움찔했다.
“살협 녹검 씨라면 모를까?”
가효정은 얼른 방향을 틀어 녹림야검 앞으로 부복한 채 다가섰다.
“살협님, 한 번만 용서를 해주십시오!”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을 보니 죽고 싶지는 않군.”
녹림야검의 목소리에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채주가 살고 싶다면 화산도협님의 말씀을 잘 들어라.”
“당연하지요! 고맙습니다, 살협님!”
그는 다시 고진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려운 건 없소이다. 내일 그들 만나는 자리에 우리도 함께하지요. 채주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가효정은 안심이 되었다.
‘휴우…… 살았어.’
* * *
이릉채에서 하루를 보냈다.
쿵쿵쿵!
건물의 바닥이 들썩거렸다.
부채주 대웅이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거의 칠 척의 장신에 덩치는 말 그대로 태산만 했다.
고진유는 그를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녹검 씨. 저기 부채주의 보직이 잘못된 거 아닐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수적보다는 전형적인 산적에 많이 어울리는 것 같군요.”
대웅이 떡하니 고진유 앞에 다가섰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무림맹주이며 천하제일인이라 소문난 고진유에 대해서는 알았다.
“화산도협님, 안녕하십니까?”
목소리도 우렁찼다.
“부채주군요. 무슨 일인가요?”
“지금 만주채주가 오고 있습니다. 채주님께서 모시고 오시라 했습니다!”
“그렇군요. 소식을 전해줘서 고마워요. 채주에게 가서 알았다고 하세요.”
“넵. 알겠습니다!”
쿵쿵쿵!
대웅은 돌아서며 다시 뛰어갔다.
“인양아. 우리도 준비해 볼까?”
“여기 있습니다.”
인양은 준비한 옷을 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곧이어 만주채의 수적선이 도착했다.
처어억!
수적들이 이릉채로 내려섰다.
만주채주는 배에서 내려오면서 마중을 나온 가효정을 보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이릉채주, 밤사이 잘 생각해 봤소이까?”
“그렇소이다.”
“당연히 우리와 함께하기로 결정했을 것 같은데…….”
“동 채주, 아직은 아니외다. 어제 말한 대로 극일천에서 나온 인물을 보고 결정을 내리겠소이다.”
만주채주 동문동은 마음에 안 드는 듯 혀를 찼다.
“쯔쯔. 사람이 어째 믿지를 못하는지 모르겠군.”
“대사를 치르는 데 어떻게 함부로 하겠소이까. 하물며 이릉채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크크크, 목숨이 그렇게 아까워서야 앞으로 제대로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이다?”
“개죽음은 당하고 싶지 않소이다.”
“알겠소. 믿지 못하겠다면 그분을 소개해 줘야겠지.”
스윽.
만주채주의 곁으로 한 사내가 나섰다.
그는 앞으로 나서며 가효정을 향해 무형기를 흘려보냈다.
‘크윽…….’
사내의 무형기에 가효정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분이 극일천에서 나오신 분이오. 이릉채주는 확인을 직접 해볼 텐가? 아니면 누가 따로 확인할 사람이 있소?”
만주채주의 놀리는 듯한 목소리.
네깟 놈이 어떻게 확인을 하겠다는 건지 두고 보겠다는 말투였다.
“……내가 아니고 확인할 사람이 따로 있소이다.”
“크크크. 네놈 수하 중에 이분의 무공을 확인할 수 있는 자가 있다고?”
그는 어이가 없었다.
이릉채주가 정신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당장 확인한다는 놈을 데리고 오게. 어떻게 확인하겠다는 것인지 보고 싶구만.”
만주채의 입 사이로 여전히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하지. 앞으로 나오시게.”
스으윽.
그리고 이릉채주의 뒤에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놈인가?”
비실비실한 체격에 축 늘어진 어깨.
“그렇네.”
만주채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이놈은 내가 싸워도 이기겠구먼! 혹시 죽어도 괜찮은지 모르겠군?”
“괜찮다.”
“좋아! 이릉채주가 자초한 일이니 저자가 죽어도 난 모르네.”
“…….”
만주채주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스르르륵.
극일천의 사내가 앞으로 미끄러지듯 나섰다.
그의 입가에 살소가 흘렸다.
“그대가 본인의 무공을 확인하고 싶다고?”
“…….”
“간이 얼마나 부었는지 확인해야겠군.”
슈욱.
극일천 사내의 손이 상대의 가슴을 향했다.
당연히 가슴을 뚫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어……?’
상대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비켜 서 있었다.
그의 손이 허공을 지나쳤다.
“제법…… 이군.”
휘이익!
앞으로 뻗었던 손이 방향을 틀며 상대의 허리를 향했다.
스륵.
하지만 상대는 너무나 가볍게 손을 피해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누구냐?”
상대는 보통 수적이 아니었다.
고수가 틀림없었다.
“나? 녹림야검.”
그 말에 사내의 눈이 커졌다.
녹림야검은 화산도협의 친협이라 불리는 자가 아닌가!
“당신이 녹검살협이란 말이냐?”
“하하! 믿기지 않겠지만 내가 맞다.”
“당…… 신이…… 어떻게 여기에?”
“극일천에서 나온다고 하기에 누군가 싶어서 기다렸지.”
휘익!
사내는 만주채주를 노려보았다.
“헉……! 저, 전 아닙니다! 전혀 몰랐습니다!”
“애꿎은 남을 탓하고 있군. 똑바로 못한 자신을 탓해야지. 안 그런가!”
“……!!”
사내는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녹검살협이 있다면 화산도협이 곁에 있을 것이었다.
‘여기에서 빨리 물러나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이릉채에서 도망가야 했다.
하지만 이곳은 한 번 들어오면 배를 타고 가지 않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이봐, 겨우 당신 실력으로 녹림대존님을 이기겠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하하하!”
“…….”
파앗!
사내는 기습을 해 녹림야검의 곁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양손에서 흑강의 장력이 뿜어져 나오며 녹림야검을 단숨에 녹이고자 했다.
“어디서 더러운 독장을……!”
예전이었다면 녹림야검은 독기를 참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을 것이었다.
우우웅-
하지만 살인무경의 살성이 움직이면서 순간적으로 호신강기를 만들어냈다.
퍽퍽퍽!
독장이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밖에서 막혔다.
휘익.
그와 동시에 녹림야검의 허리에서 빠져나온 녹수검이 그의 가슴 앞으로 지나갔다.
‘허억.’
몸에 닿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멍청한 놈. 방금 분명히 허점을 보였는데……!’
사내가 재차 공격하려는 순간.
가슴에서 따뜻한 것이 흘러내렸다.
‘뭐지?’
손으로 만져 보았다.
벌겋게 묻어나오는 피.
‘어…… 어…….’
느낌은 전혀 없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다.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휘청…….
몸이 중심을 잡지 못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을 움직여 보았지만 결국 바닥에 무너졌다.
털썩.
이대로 죽는 것인가?
살고 싶었다.
‘허리에…… 그것을…….’
신단을 복용하면 여기서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뒤적거렸지만.
“신단을 찾는 모양이군.”
“……!!”
“굳이 힘들게 찾을 필요는 없다. 바로 죽을 테니.”
녹수검이 번쩍거리며 아래로 움직였다.
스걱.
그의 목이 베어졌다.
마지막이었다.
* * *
만주채주 동문동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앞에 젊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극일천의 무인을 죽인 녹림야검이 아니었다.
“본도는 고진유라 하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부복한 그의 눈이 커졌다.
‘무림…… 맹주…….’
중원 무림은 어느덧 고진유를 가리켜 화산도협이란 명호보다 무림맹주라 부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소?”
“…….”
“본인은 그대의 죄에 대해 벌을 줄 수 없소이다.”
“……!”
만주채주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당장 죽지 않는 건가?’
하지만 뒤에 나오는 고진유의 말에 몸이 굳어졌다.
“다만 극일천이라면 말이 다르지. 본도는 극일천의 간자는 극일천의 인물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소이다.”
“……!”
“당신이 장강수로채의 인물이라고 하나 본도가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말이지요.”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허어, 목숨이 아까운 사람이 어찌 반역을 할 생각했는지 모르겠군. 반역하는 순간 목숨을 내걸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는 거요?”
“……저, 저희들은…….”
“됐소. 변명은 필요 없소이다. 다만…… 혹시 우리가 모르는 게 있다면 정상 참작이라도 되지 않겠소이까?”
그는 고진유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살 수 있는 기회를 그가 주었다.
“그, 극일천의 그가 말하기를 장강수로채에서 반기를 들어도 녹림에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녹림대존이…… 그도 모르게 서서히 중독이…… 되었을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극일천에서 그를 중독시켰다는 말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중독이 되었을 것이라고만 들었습니다…….”
“다른 말을 들은 것은 없소?”
“네에…… 그에게 들은 건 그 말밖에 없습니다.”
“……알겠소. 본도는 약소대로 당신을 죽이지 않겠소.”
“고…… 고맙습니다……!”
만주채주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죽지만 않는다면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수적을 그만두고 얼마든지 잘살 수 있으리라.
“그런데…… 다른 사람의 생각은 그게 아닌 모양이구려.”
“예? 그게 무슨…….”
녹림야검이 옆으로 나왔다.
“녹림에게 반역하고도 살 생각을 하다니 웃긴 녀석이군.”
“……!!”
“반역자는 목을 내어놓아라.”
놀란 만주채주가 머리를 드는 순간, 녹수도가 그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툭.
만주채주의 목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