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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대도-226화 (226/425)

226화

바둑판에 돌을 놓는 순간 나하중의 손이 멈칫거렸다.

‘풀렸어.’

“……허허, 이거 참.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

천지쌍고독이 시전자의 뜻에 따르지 않고 사라졌다.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건가? 어떻게 된 일인지 찾아가 봐야겠군.’

그녀가 깨어났음을 안 뒤 한번 만나고 싶었다.

수하에 의하면 젊은 여인이라 했다.

동면에 빠졌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탁자 옆 동경을 들어 얼굴을 비춰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동경 속에 드러났다.

“많이 늙었군. 좋겠어.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면.”

백 년이 지나면서 잊혔던 그녀의 기억이 떠올랐다.

백지 위로 붓이 움직였다.

“은인은 옆에 있는가?”

나하중의 앞으로 사내가 내려섰다.

“그녀를 만나고자 한다. 화산에 있는가?”

“화산파에 들어간 뒤 다른 소식은 없었습니다.”

“그렇군. 최대한 빠르게 이것을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나하중은 그에게 서신을 건네주었다.

휘이익.

사내의 신형이 그의 앞에서 사라졌다.

나하중은 그녀를 만난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후후…… 웃기는군.’

백 년 동안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없었거늘.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한번 만나보면 알겠지.’

똑똑.

그때, 문밖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찾지도 않은 수곡자가 천문전에 찾아왔다.

‘일이 또 일어난 모양이군.’

이번에는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했다.

“수곡자입니다.”

“들어오게.”

수곡자는 들어선 뒤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안 좋은 일이겠지?”

“송구하옵니다.”

“괜찮네. 언제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었나?”

“…….”

“허허, 그냥 한 말일세. 무슨 일이지?”

“화산파에서 오던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전부?”

“그렇습니다.”

“모두 연락이 안 된다면 어떻게 확인할 방법이 없겠군.”

“송구하옵니다.”

수곡자는 그 말밖에 하지 못했다.

화산파의 사정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가지 않고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군.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은 모두 잡혔다는 뜻이겠지. 이번 일도 당연히 그놈 짓이고?”

“움직인 건 그가 맞을 듯하지만 전 보고에 의하면 화산파에서 밀화들이 움직였다고 했습니다.”

“밀화라…… 중원은 역시 만만하지 않다는 뜻이군. 이런 것들이 화산파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

“구대문파와 같은 대문파의 경우라면 비슷한 조직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극일천이 알려진 이상 열심히 찾고 있겠군. 하나 그들이 모두 잡힌다고 해서 우리에겐 별 피해가 없다는 게 중요하지. 후후후.”

나하중은 어차피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생각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중원 무림이 하나의 힘으로 모이지 않기 위해 하는 것.

나머지는 부수적이었다.

철혈궁의 경우처럼 극일천의 인물이 직접 사파의 수장이 된 것과는 달랐다.

화산파는 뜻을 하나로 뭉치지 못하게 만들 목적으로 간자를 보냈던 것이었다.

“그래도 아쉽기는 하군. 다른 곳도 아닌 화산파라면…….”

현 무림의 최고 문파는 화산파였다.

화산파의 뜻을 중원 무림이 따르고 있다는 뜻이다.

“차후 화산파처럼 다른 문파에서도 들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겠지. 우리의 존재가 알려졌으니 알게 모르게 움직이고 있을 게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상황이 좋지 않다면 물러나라고 연락해. 조만간 우리도 힘을 모아서 상대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지 않는가?”

“네. 곧바로 연락을 하겠습니다.”

“아 참…….”

나하중은 밖으로 나가는 그의 걸음을 잠시 멈췄다.

“우문전주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화산도협에게 한 번 당한 뒤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듯합니다.”

“허허, 흑화전주와 다르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그도 별다른 재주가 없는 모양이군.”

“처음은 어쩔 수 없지만 두 번째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글쎄? 과연 그럴까?”

나하중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흑화전주가 당한 것을 보면서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제법 머리를 썼다만은, 그 정도로 화산도협을 이길 수 없음을 모른다면 두 번째도 역시 똑같다.”

“…….”

수곡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극일천은 철저히 개인적으로 화산도협과 싸우고 있었다.

충분히 힘을 모아서 싸운다면 중원 무림은 언제든지 무너뜨릴 수 있었다.

왜 함께 싸우지 않는 것인지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하나 그에게 묻지 못했다.

그는 지시한 내용 외에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의문을 밖으로 내뱉는 순간 마음이 변했다고 믿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천문전주는 남을 믿지 않았다.

“궁금한 것은 됐으니 그만 나가보게.”

“알겠습니다.”

수곡자는 바로 물러났다.

‘후후, 속으로는 얼마든지 딴생각을 해도 좋지. 하지만 말이라는 건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지.’

스윽.

나하중은 수염을 길게 쓸어내렸다.

* * *

화산파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연화봉의 도당인 상궁으로 오르는 두 명의 인영.

양군경과 고진유는 엄숙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양군경이 위패 앞에 서서 아뢰었다.

“조사님께 고하나이다. 화산파 제자 도진의 사손이며 허진의 제자인 호정, 이 아이가 본산을 천하제일문으로 이루었습니다.”

슥슥.

양군경은 공손하게 위패를 향해 절을 했다.

“호정도 조사님께 절을 하거라.”

“네. 사조님.”

고진유도 앞으로 나와 위패를 향해 절을 했다.

‘후후후.’

고진유의 모습에 그는 세상에 더는 부러울 게 없었다.

천하제일인이 사손이 아닌가.

중원 무림에 나가서 한마디만 해도 모두에게 부러움을 받을 것이 확실했다.

“네가 약속한 대로 본 문을 천하제일문으로 만들었구나. 장하다.”

“사조님, 중원인들이 본 문을 천하제일문이라 해도 전 아직 멀었다고 봅니다. 극일천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완벽하게 천하제일문이라고 할 수 없을 듯싶습니다.”

“그래. 그들을 상대할 때는 항상 몸조심해야 한다. 네가 강한 것은 알지만 모든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는 법. 네 뒤에는 항상 화산파가 있다는 것을 잃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사조님의 말씀을 항상 가슴에 새겨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툭툭.

양군경은 그를 안으며 등을 두드렸다.

‘사조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제 손으로 끝을 볼 것입니다.’

* * *

화산파를 내려갈 시간이었다.

원래는 사형제들과 함께 무림맹으로 함께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공백이 생긴 화산파에서 모두가 빠져나올 수 없었다.

한 달 뒤 무림맹에서 만나기로 한 고진유는 화산파에 올라왔을 때 그대로 묵경과 인양, 녹림야검과 함께 떠나기로 했다.

무혼신녀는 이미 이른 아침에 화산을 내려간 뒤였다.

스윽.

고진유는 산문까지 내려온 뒤 돌아섰다.

화산파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게 아쉽지만 중원 무림에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이곳에 온 건 스스로 만족하지 않으나 화산천하제일문의 약속은 이루었다는 확인을 위해서였다.

남은 것은 극일천과의 싸움.

기약 없는 싸움이 될 것이었다.

산문으로 배웅하겠다는 사형제들을 말렸다.

어차피 한 달 뒤에 무림맹에서 만나게 될 테니까.

네 사람은 우선 화산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화산으로 올라가기 전 맡겨놓은 말을 찾아야 했다.

그들이 향할 목적지는 호북성의 형주였다.

* * *

시도정은 고민에 잠겼다.

왜 이렇게 일이 꼬였을까?

충분히 연구하고 완벽하게 계획대로 이루어졌다고 확신했고, 드디어 화산도협과 마주쳤다.

본 계획은 혼자 있을 때 포위하여 그를 죽이거나 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느 선까지만 유지한 채 더는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마치 일부러 놀리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

친협이라 불린 세 명과 합류한 뒤에야 일정하게 유지되었던 거리가 좁혀졌다.

세 명, 아니, 여인까지 합치면 네 명이었다.

수가 좀 늘었어도 이백 명의 양강무인으로 화산도협을 재빨리 처리하면 된다고 여겼다.

근데…….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후퇴했다.

실패한 원인을 찾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 없었다. 너무 완벽했다.

처음 계획과 달라진 건 친협들의 존재뿐.

“맞아. 원인은 그들 세 명이었어. 그놈들만 없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는데…….”

그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세 명의 친협들을 떼어낸 뒤 고진유 혼자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방법을 생각해 냈다.

‘진법이다.’

적당한 장소에 시도정은 무영칠금진(無影七擒陣)을 펼쳤다.

아무리 내기에 민감하더라도 무영칠금진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림자조차 가둘 수 있는 진법.

육도십이진법에 통달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풀 수 없을 것이었다.

시도정은 혼자서 화산도협이 오기를 기다렸다. 완벽하게 잡기 위해 수하들조차 멀리 떨어뜨렸다.

드디어 멀리서 화산도협의 모습이 보였다.

고진유는 걸음을 멈췄다.

나무 뒤로 숨어 있는 기척을 느꼈다.

“그만 나오는 게 좋겠소.”

“…….”

스윽.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 본 얼굴이었다.

“우리 만난 적이 있지 않소? 아하, 저번에 도망갔던 사람이군.”

“화산도협. 나를 놀리는 것인가?”

시도정은 인상이 구겨졌다.

고진유는 주위를 살폈다. 그 외에는 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혼자서 나타난 이유가 있겠지요.”

“진유 아우, 함정인가?”

묵경이 다급하게 물었다.

“저자의 표정을 보니 여기에 믿을 만한 짓을 한 모양입니다. 조심들 하세요.”

묵경과 인양, 녹림야검은 내력을 빠르게 올려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크크크. 눈치는 빠르군. 당연히 함정이 네놈들 주위에 펼쳐져 있지.”

“당신도 위험할 텐데.”

“글쎄, 과연 그럴까?”

시도정이 뒤로 물러나는 동시에 신형이 사라졌다.

“진법이다. 모두 움직이지……!”

고진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 명의 신형이 사라졌다.

“휴우…….”

벌써 진법이 움직였다.

고진유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내기를 끌어 올리며 주위에서 흐르는 기운을 살폈다.

진법에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은 함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잘하고 있을 거야. 그들을 믿고 집중하면 돼.”

다급하게 진법을 파훼시키려고 해서는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스르르륵-

시야를 가렸던 안개가 흩어지듯 사라지고 앞이 보였다.

혼자 진법에서 빠져나왔다기보다는 고진유를 가둔 진법만이 풀린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묵경과 인양, 그리고 녹림야검은 가만히 선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고진유의 앞으로 방금 사라졌던 시도정과 함께 수많은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산도협, 드디어 혼자군.”

“…….”

살기를 드러내며 다가오는 무인들.

저번에 당했던 일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스르릉-

고진유는 허리에서 사의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내가 혼자가 되기를 기다린 모양이군.”

“크크크. 우리를 보면서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지?”

척!

시도정의 뒤로 삼백여 명의 무인들이 다가섰다.

저번보다 일백 명의 무인을 충당시켰다. 그는 자신 있었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더라도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소?”

“저들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모양인데 안에서는 절대로 파훼할 수 없다.”

시도정은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죽여라.”

휘이익!

삼백여 명의 인물들이 고진유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고진유를 향해 사내가 빠르게 달렸다.

오직 죽이겠다는 신념 하나만으로.

하지만 사내는 상대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들이 상대하는 인물은 화산도협 고진유였다.

나이 약관에 무림맹주가 된 중원 무림의 최고 무인.

그의 검이 천천히 움직이고,

스걱.

눈앞이 번쩍거렸다.

‘뭐지?’

사내는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몸이 기울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쿠우웅!

고진유의 사의검에서 뻗어 나온 수많은 매화 잎들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사의검의 자줏빛 검신이 춤을 추었다.

호충신법을 펼치며 이어지는 사의검 뒤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타아아앗!

고진유는 그 자리에서 떠올랐다.

휘날리던 매화 잎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거대한 굉음을 냈다.

콰아아아앙!!

삼 장 정도의 땅이 파였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연이어 두 번의 굉음이 터지면서 양강무인들은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스르륵.

고진유는 그들 사이 공간이 벌어졌다.

‘저기 있군.’

수하들 사이에서 인상을 쓰고 있는 시도정을 찾았다.

파앗!

고진유는 신법을 펼치며 시도정 앞으로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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