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주명진과 양군경은 현 상황에 대해 말이 없었다.
무혼신녀는 아무리 봐도 이십 대 후반처럼 보였다.
백 년 전의 전대 무인이 눈앞에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고진유에게 들은 이야기를 쉽게 믿을 수 없었지만, 거짓이 아님을 두 사람은 알았다.
주화입마에 의한 백 년 동안의 동면.
고진유가 그녀의 탁기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무혼신녀는 동면 상태에서 결국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을 터.
장문전은 자연스럽게 침묵에 빠졌다.
조용한 두 사람을 보며 무혼신녀가 한마디 내뱉었다.
“그렇게 된 게다.”
머리는 이해하겠으나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특히 그녀의 반말은 들었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주련?”
“네, 알겠습니다.”
양군경은 먼저 장문전으로 그녀와 함께 찾아온 이유를 알 듯했다.
‘혹시나 모두 모인 자리에서 장문인에게 반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다면 좋게 생각하지 않았겠지.’
장문인과 자신이 사전에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당황하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
“선배님께서 본 문에서 지내시는 데 불편한 것이 있다면 호정에게 말씀하십시오.”
“불편한 이는 내가 아니라 장문인하고 자네겠지.”
“…….”
‘자네…… 라.’
양군경은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아…… 네, 아니…… 아닙니다.”
주명진은 말을 더듬는 양군경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크크크. 저 모습 오랜만이네.’
예전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에 그들에게도 무서운 분이 계셨다.
‘도진 사형이 유난히 무서워하시던 분이 계셨지.’
양군경은 갑자기 실실 웃는 듯한 표정을 하는 장문인을 보았다.
“크흠, 장문 사제. 왜 그런가?”
“우리 예전 생각이 잠시 났소이다. 몰래…….”
“어허! 쓸데없는 소리 한다.”
양군경은 눈치가 빨랐다.
수련생의 신분일 때 일을 끄집어내고자 하는 것을 양군경이 얼른 막았다.
고진유는 두 분을 보면서 여전히 변함이 없음을 알았다.
장문전에 모인 네 사람은 한 시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화산파에서 이틀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다.
이틀째 되는 날, 대전에 모여 간소하게 공식적인 환영 인사를 마쳤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전에 모이지 않았던 화산파의 도인들은 천매관으로 찾아와서 개별적으로 축하 인사를 전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천매관은 예전처럼 조용해졌다.
고진유까지 포함해서 오랜만에 모인 일곱 명의 사형제들과 묵경과 인양, 녹림야검, 그리고 무혼신녀까지 함께 술자리를 만들었다.
“에이…… 술판을 펼쳤으면 제대로 해야지. 이게 뭐냐?”
“앗. 언니, 걱정 마세요.”
당우희는 옆에 앉은 무혼신녀의 팔짱을 끼면서 바짝 붙어 섰다.
당우희는 그녀가 마음에 무척 들었다.
충격적인 첫 만남이었다.
많은 인물들이 모인 자리에서 장문인에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반말을 하는 모습.
엄숙한 자리이기에 난리가 날 법도 하건만, 이상하게도 당사자인 장문인과 집법당주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두 사람의 뜻밖의 행동에 다른 인물들 또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 모두 고진유의 누님으로 소개받은 여인이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혼신녀는 바짝 붙은 당우희가 싫지 않았다.
오래전 그녀의 친동생도 그랬다.
‘언니가 좋다면서 항상 팔을 껴안는 것을 좋아했지.’
기억은 마치 어제 같았지만 세월은 백 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호경 사형이 담아 놓은 술을 가지고 올 거예요. 서안장가가 표국으로 유명하지만 술 양조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이거 기대되는데…….”
두 여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두총과 함께 군성창이 술독을 하나씩 들고 나타났다.
“오…… 향이 좋은데.”
멀리서부터 주향이 천매관으로 퍼져 나갔다.
장두총은 술독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드디어 매화주가 완성됐다!”
오 년 동안 묵혀 놓았던 매화주의 주화(酒花)가 활짝 피었다.
묵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술독 곁으로 다가섰다.
“장난 아닌데? 향만 느껴도 벌써 매화에 취할 것 같은걸.”
“묵 형님, 제가 최선을 다해 빚은 술입니다.”
“크으, 두총 아우는 길을 잘못 들어섰군. 무도(武道)가 아니라 주도(酒道)로 갔어야 했어.”
“하하하. 한 잔들 마셔보십시오.”
장두총은 매화주를 한 잔씩 돌렸다.
천매관에 모인 그들의 술잔이 모두 채워지자 우종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끌벅적하던 그들의 자리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오늘 우리의 모임은 호정 사제를 위한 축하의 자리이네. 호정 사제, 일어나게.”
고진유는 술잔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에 앉은 이들.
모두가 자신의 동료들이며 가족들이었다.
“전 오늘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무림맹주 권한 대행이 된 것이 때문이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분들이 함께 모여 있지 않습니까.”
고진유는 언제나 가족과 동료를 위한다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우선 오늘 우리의 첫 번째 잔은 우리의 동료이자 형제였던 파숙을 위해 들겠습니다.”
“파숙을 위하여.”
“파숙을 위하여.”
채애앵!
그들 모두 단숨에 첫 잔을 비웠다.
인양과 군성창은 얼른 비어 있는 잔을 재빨리 재웠다.
고진유는 다시 술잔을 들었다.
“두 번째 잔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우리를 위해 들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솟구치는 화염 속에서도, 살을 베는 날카로운 살풍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을 우리를 위해 잔을 들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종성이 먼저 선창을 했다. 그 뒤를 이어 모두 술잔을 들어 올렸다.
“우리를 위하여!”
“위하여!”
그들은 두 번째 잔을 비웠다.
천매관이 매화주 향으로 점점 물들어 간 지 반시진이 지나고,
스윽.
무혼신녀의 앞에 누군가 술병을 내밀었다.
고진유의 사형 중 한 명.
“뭔가?”
“제가 한 잔 따르겠소이다.”
“고맙군.”
그녀는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술을 따르는 혁자영을 쳐다보았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귀밑에서 턱으로 내려오는 날카로운 턱선이 강렬한 사내다운 인상을 주었다.
무혼신녀는 술을 채운 잔을 한입에 마셨다.
휙.
그녀는 빈 잔을 혁자영에게 내밀었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는 법이지. 한잔 받게.”
“고맙소이다.”
혁자영은 그녀의 잔을 받았다. 술잔을 넘치도록 술이 채워졌다.
그 또한 한입에 술을 마셨다.
그러고는 빈 술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
뜬금없는 혁자영의 말에 무혼신녀는 멍해졌다.
주위에 있던 사형제들도 혁자영이 먼저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예전에 당우희가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사형은 어떤 여인이 좋아요?”
“자신감이 강한 여인.”
“저도 강한데?”
“후후, 그런 강함이 아니다. 세상을 눈아래로 내려다보는 강함.”
“그런 여인이 있을까요?”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무혼신녀가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를? 왜?”
“관심이 있다는 데 이유가 있습니까?”
“음…… 그렇긴 하지만. 나를 좋아할 만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다.”
“진하 님을 보면 자신감이 느껴집니다. 그런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모습이 좋습니다.”
“이거 특이한 성격이군. 근데…… 내가 관심이 없다면?”
“그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상대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들겠다는 뜻이라면 좋지 않아.”
“그 뜻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포기하지 않고 관심을 보이도록 노력하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생각 외로 나이가 많아.”
“그것 또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단순한 녀석이군.”
무혼신녀는 미소를 지었다.
“내 기분을 나쁘게 할 생각이 없겠다고 하니 알아서 해라.”
“고맙습니다.”
* * *
고진유는 우종성과 천매관으로 들어선 뒤 나란히 앉았다.
모두 술자리를 마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오랜만에 만난 탓인지 그들의 이야기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오늘 밤새울 것 같군.”
“그러게 말입니다.”
스윽.
우종성은 가슴 안에서 얇은 명부를 꺼냈다.
“장문인께서 주셨다. 그동안 밀화(密花)에서 조사한 내용이야. 한 번 읽어 보아라.”
“…….”
고진유는 그가 준 명부를 한 장씩 넘겼다.
“그동안 이 명부에 적힌 인물들을 조사했다. 대부분 명부의 내용과 일치하더군.”
고진유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열 명이라…… 많군요. 생각보다.”
“그렇지? 더구나 의외의 인물까지. 생각지도 못한 사람도 있고.”
“이들이 전부인가요?”
“밀화에서 찾아내지 못한다면 더는 없다고 봐야겠지.”
“열 명이나 찾아낸 것을 보면 다행이긴 합니다.”
고진유는 명부를 덮고는 곧바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휴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화산파의 가족들이었던 그들을 잡아내야 했다.
안타깝지만 화산파를 위해서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극일천의 존재가 중원 무림에 알려진 이상 정리를 하는 게 맞았다.
“사형, 한 번에 끝을 내는 게 좋겠지요?”
“그게 좋겠다. 언제 움직일까?”
“지금이 좋겠어요.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가 움직이기 편합니다.”
“사제다운 생각이다.”
우종성의 보기에도 자신들이 당장 움직일 것은 아무도 생각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하자. 지금 바로 움직이도록 하지.”
결정을 내렸다면 빠른 실행할 차례였다.
우종성은 먼저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 술자리는 그만하도록 하자.”
“대사형도 참……! 여기서 그만두는 게 어디 있어요.”
당우희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호청 사매, 오늘만 날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에게 밤새도록 마시는 모습을 보이면 좋지 않을 것 같기도 하구나.”
“흐, 네에…… 알겠어요.”
“이곳 정리는 날이 밝는 대로 하면 되니깐 다들 모여라. 할 이야기가 있다.”
“…….”
그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사이 고진유는 밖으로 나갔다.
“마무리를 짓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됐어. 딱 알맞게 마셨다.”
“제가 거처까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오호, 할 일이 있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이 시간에 네놈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중요한 일이겠군.”
“극일천의 간자를 처리할 것입니다. 딱 적당한 시간입니다.”
“…….”
무혼신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가장 완벽하게 급습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 번에 화산파에 숨어든 간자를 잡겠다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알겠다. 볼일을 봐라. 난 알아서 가마.”
“괜찮으시겠습니까?”
“신경 쓰지 마라.”
“알겠습니다. 내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해라. 먼저 간다.”
무혼신녀가 먼저 천매관을 나섰다.
고진유는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우종성의 설명을 들었는지 모두 이미 취기가 사라졌다.
“사제, 우린 준비가 끝났어.”
“좋아요. 각자 누구에게 갈지 정하도록 하죠.”
화산파에 숨어든 열 명의 간자들.
그리고 열 명의 인원이 천매관에 모였다.
일부러 맞춘 듯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우종성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는지, 고민조차 하지 않고 한 명씩 그들에게 잡아와야 할 인물을 알려주었다.
“정확히 인시에 시작한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이 되기 전에 모두 끝날 것이었다.
고진유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당부했다.
“조심하시고, 잡을 때 확실해 잡으세요. 정에 이끌려 기회를 주면 안 되는 거 아시지요? 그들은 어떻게 움직일지 모릅니다.”
“알았다. 명심하마.”
“그럼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휘익!
천매관 밖으로 열 명이 동시에 움직였다.
* * *
무력상궁당.
화산파 세 개 무력당 중 선봉 무력당이었다.
어둠 속을 지나 상궁당으로 들어선 움직임.
고진유가 맡은 인물은 상궁당의 당주 허종 도인이었다.
열 명의 간자 중 허종 도인의 무공이 가장 강한 것은 아니었다.
간자의 경우 평소에 알려진 무공과 차이가 있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우종성이 그를 잡기 위해 고진유를 보낸 이유는 신법 때문이었다.
상대가 화산사절 중 신절 허종 중순형이었으니까.
화산파에서 그의 신법을 따라잡을 수 있는 인물은 고진유 외에는 힘들었다.
그리고 다른 건물과 달리 화산파 세 곳의 무력당은 기관이 펼쳐져 있었다.
무력당 중 한 곳인 상궁당으로 완벽하게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진유가 제격이었다.
스르르르-
고진유는 상궁당 주위에 있는 호위들의 시선을 뚫고 안으로 들어섰다.
‘저기에 있군.’
안으로 들어선 고진유는 신절 허종 도인의 내기를 쉽게 찾아냈다.
건물 안에도 호위를 서고 있었지만, 허종 도인의 방으로 들어가는 고진유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휘리리릭!
바람 소리가 들렸다.
‘으음…….’
침상에서 잠을 청하던 중순형은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눈을 뜨면서 몸을 일으켰다.
침상에 앉아 잠시 그대로 멍하니,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였다.
“일어났습니까?”
‘헉!’
중순형은 몸이 굳어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기습……!’
그는 이내 기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만일 기습이었다면 깨우지 않고 바로 죽였을 테니까.
어둠 속에서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누구지?”
“호정입니다.”
“……화산도협 고진유?”
순간 중순형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진유를 호정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정체를 스스로 밝혔다.
“극일천의 간자가 맞군요. 호정 사질이라 부를 줄 알았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놀라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어설프게 변명을 하던 그는 고진유가 대답이 없자 이번에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보게, 호정! 내가 그들의 간자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이 일을 당장 장문인께 보고해야겠구나!”
“증거는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간자라고 밝힌 분은 제가 아니라 장문인께서 밀화를 통해 직접 알아낸 것이니까요.”
“자, 장문인께서?”
중순형은 몸이 무너지는 듯했다.
‘젠장…….’
가만히 있다가 당했다.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잡힐 수밖에 없었다.
‘우선 여기를 벗어난다.’
장문인이 알고 있다면 화산파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파앗!
화산신절이라 불릴 만큼 그의 신법을 절륜했다.
‘나를 따라잡을 수는 없…….’
쿠우웅.
순간, 커다란 벽에 부딪치는 듯한 충격이 터졌다.
“커어억!”
몸이 뒤로 밀려나면서 앞을 보았다.
그의 앞이 기막으로 막혀 있었다.
“도망부터 갈 생각을 하는군요.”
“……!”
중순형은 다시 신형을 날렸다.
“그건 안 되죠.”
타앗!
고진유는 신법을 펼치며 중순형의 앞으로 나섰다.
그보다 한 발 빠르게 일권이 그의 얼굴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