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여명이 밝았다.
일행은 일찍이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화산파의 회음으로 향했다.
고진유는 서두르지 않았다.
“급하게 가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리 늦어도 날이 어둡기 전에 도착할 수 있어서 느긋하게 움직였다.
다각.
무혼신녀가 말을 몰아 고진유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기척에 고진유는 고개를 돌렸다.
“저에게 할 말이 있으십니까?”
출발하면서부터 그녀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어볼 게 있다.”
“무엇입니까?”
“혹시 내 몸에 손을 댔나?”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무혼신녀는 고진유의 얼굴을 보았다.
알면서 모르는 척 물어보는 표정.
‘역시…… 능글맞은 얼굴 보게.’
사실 이 녀석밖에 없었다.
동면에 빠지기 전까지 단 한 명도 자신의 몸에 손을 댄 인물을 없었다.
동면에서 깨어난 뒤 누군가 몸에 손을 댔다면 결론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것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탁기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그래서…… 어려운 일이 있다면 말을 하라고 했군.”
얼마 전, 무혼신녀는 천지쌍고독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머릿속에 든 고독은 억지로 끌어낼 수 없었다.
스스로 나오지 않는다면 빠져나오기 전에 자폭하는 게 천지쌍고독이었으니까.
때문에 그녀의 머릿속에 갇힌 천지쌍고독을 끄집어낼 방법은 시전자 외에는 불가능했다.
“충분히 꺼낼 수 있었지만 제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기로 고독을 막아놓았군. 몸속에서 더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렇습니다.”
“우선은 고맙다고 해야 하나?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
천지쌍고독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어.’
다른 사람 같았으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도 남았을 것이다.
무림맹까지도 같이 갔건만, 그는 어떠한 말도 묻지 않았다.
“별일 아닙니다. 진기로 막아놓았으니 혹시나 터진다고 해도 몸에는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다행이었다.
고진유는 탁기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고독을 진기로 완전히 감싼 채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게 놓아두었다.
“왜 그게 내 머릿속에 있는지 알고 싶지 않나?”
“극일천과 연관이 있겠지요.”
그녀의 머릿속에 고독이 있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처럼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낼 것을 알았으니까.
뒤에서 따르던 세 명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내 머릿속에 고독을 넣은 자는 극일천의 인물이다.”
“그럴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구천의 정보를 팔아먹은 나쁜 년은 아니란다.”
“…….”
간자가 아니라는 그녀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극일천에서 고독을 심은 대부분의 이유는 배신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간자가 아니라면 그들이 무슨 이유로 고독을 심을 수 있었습니까?”
“극일천주를 죽일 수 있는 무공을 주겠다고 하더군. 그 대가로 고독을 받아들였지.”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겨우 무공 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까?”
“무구천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무구천주도 허락을 했고. 오무천자의 숙명이기도 했지.”
“음…… 전부 대단하십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게 다를 뿐이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는 바와 같이…… 그 무공을 익히다가 그만 주화입마에 빠졌다. 더 웃긴 건 고독이 상단전에 영향을 줄지 몰랐던 게지.”
“극일천에서 계획한 것은 아닐까요?”
“그건 아닐 게다. 그도 극일천주를 죽이고자 했으니깐. 고독은 서로에 대한 약조였다. 내 머릿속에 든 고독을 죽인다면 그 또한 고독이 터질 테니까. 다만 다른 건, 그는 자유롭게 고독을 빼낼 수 있지만 난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도 쉽게 뺄 수는 없었을 게야. 내가 알아차릴 수 있었거든.”
그녀의 대답에 어떠한 상황인지 이해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극일천에서 연락이 왔지. 알고 있었겠지?”
“…….”
“나에게 고독을 준 놈이 아직도 살아 있더군. 근데 이해할 수 없는 건, 백 년이 지난 지금도 고독을 그대로 둔 상태라는 게야. 충분히 빼낼 수 있었을 텐데. 더구나 극일천에서도 제법 한자리를 차지하고선.”
“그가 누구입니까?”
“천문전주 나하중. 나야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게 놀랄 따름이다.”
“그가 무엇을 원했습니까?”
“당장 원하는 것은 없었다. 시간이 나면 한 번 만나자고 하더군. 물론 철갑 이야기도 적혀 있었고.”
“더는 고독에 대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고맙구나. 안 그래도 어떻게 할까 고민이 되었거든.”
“고맙긴요. 극일천의 간자가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훗. 만일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이 거짓이라면?”
무혼신녀는 고진유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저 나름대로 안배는 해 놓았습니다.”
“음……? 설마…….”
무혼신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큭. 이거…… 세상에 믿을 놈이 없다고 하더니만…… 동생이 그럴 줄은 몰랐군.”
“제가 웬만해서는 남을 잘 못 믿는 성격이라서요. 지금이라면 믿었겠지만 그때는 그만큼 신뢰가 없지 않았습니까.”
“더 독한 놈을 만난 게 아닌가 모르겠어.”
고진유는 그녀의 머릿속에 든 고독을 시전자와 상관없이 조종할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만일 내가 딴짓을 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하아…… 냉정한 동생이로군.”
“죄송하지만, 세상이 영 못 미덥지 않습니까.”
“되었다. 난 정말로 동생처럼 좋게 봤는데 넌 그게 아니었구먼.”
“아닙니다. 누님이 간자가 아니라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습니다.”
“쳇. 능구렁이 같은 네 녀석의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스윽.
두 사람의 대화에 묵경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어, 누님, 진유 아우는 믿어도 좋습니다. 사실 아우가 말을 쌀쌀하게 하는 편이지만 속마음은 하늘처럼 넓고 바다처럼 깊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가?”
“좋은 녀석입니다.”
묵경은 슬쩍 앞서가는 고진유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얼마 만에 오는 길인지.
무림맹으로 가기 위해 화산파를 나선 지 일 년이 넘었다.
드디어 저 멀리 화산의 산문이 나타났다.
“훗…….”
고진유는 웃음이 나왔다.
굳이 산문까지 내려올 필요는 없는데.
형유 무관 출신인 군성창을 비롯한 다섯 명이 눈이 빠지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속가제자인 그들의 복장은 매화 문양을 한 경장 무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도사가 아니기에 도복을 입고 지낼 수는 없었다.
그에 연자련은 그들을 위해 특별히 매화 문양이 든 무복을 만들어 주었다.
처음 무복을 받았을 땐, 화산파라는 소속감에 그들 다섯 명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얼마 전, 북해에서 헤어진 무림맹주 화산도협 고진유가 화산파로 올라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성창 또한 산문으로 올라오는 고진유를 보았다.
“그분께서 오셨다……!”
녹림야검은 산문에서 기다리는 다섯 명 중 군성창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와 가장 많이 정이 들었던 모양인지, 손까지 번쩍 들어 흔들었다.
군성창은 앞으로 달려 나오면서 녹림야검을 향해 손을 들어 화답을 했다.
휘이익!
다섯 명이 고진유 앞에서 멈췄다.
그들의 얼굴은 달랐지만 표정만은 같았다.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화산파로 올라온 고진유를 맞이했다.
“화산도협님을 뵙습니다!”
동시에 소리친 다섯 명의 목소리가 산문 주위를 울렸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고진유는 한 명씩 손을 잡으며 그들과 재회를 나누었다.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전부 수련을 열심히 한 모양입니다.”
“넵, 화산도협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수련했습니다.”
“후후, 고생들 많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섯 명은 고진유와 인사가 끝난 후 뒤에 남은 세 사람과 인사했다.
화산파로 들어선 일행은 경내로 들어서기 전 제일도문 앞에 멈췄다.
제일도문 앞에 화산파의 삼대 제자들이 고진유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문인의 명에 의해 삼대제자만이 고진유를 환영하도록 했다.
화산 삼대제자의 대사형 우종성 뒤로, 혁자영과 장두총, 곽우, 연자련과 당우희가 나란히 선 채 고진유를 맞이했다.
그들의 분위기는 엄숙했다.
처억.
고진유는 홀로 천하제일도당(天下第一道黨)의 현판 아래에 섰다.
스윽.
붉은색 기둥 앞에서 검을 뽑은 그가 현판을 받치는 두 개의 기둥을 향해 천천히 사의검을 올렸다.
팟팟팟팟.
고진유는 사의검을 가볍게 움직이며 한 자씩 글자를 새겼다.
화산고금천하제일문(華山古今天下第一門).
서로 다른 느낌의 아홉 글자.
한 글자마다 화산매화검법의 무리(武理)가 담겨 있었다.
기둥에 새겨진 글자.
천하제일도 아닌 고금천하제일이라.
광오했다.
하지만 화산도협이기에 가능했다.
화산파 삼대제자들의 얼굴에는 감동이 밀려왔다.
채애앵!
우종성은 화무검을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삼대제자들도 검을 들어 위로 솟구치며 함성을 외쳤다.
“와아아아아-!!”
제일도문에서 떨어진 장소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 명의 도인, 장문인 주명진과 양군경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녀석들을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저 녀석이…… 끝내는 성공했소이다.”
“그러게 말이네.”
“화산파에서 무림맹주를 배출한 게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거의 백 년이 된 듯하군.”
“도진 사형, 호정이 맹주도 되었는데 조용히 넘어가는 건 그렇지 않소?”
“축하는 당연히 해주면 되지 않겠나. 다만 조용히 넘어가세. 허자배 제자도 아니고 삼대제자들이니…… 게다가 저 녀석도 시끄러운 것을 원하지 않을 걸세.”
양군경은 장문인과 달리 담담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보다 더 기쁘고 즐거웠다.
‘허진아, 보고 있느냐? 네가 보낸 저 아이가 얼마나 대견한지 모르겠다.’
그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 있었다.
“하하…… 장문 사제, 그만 가세나.”
“알겠소이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떠나기 전 고진유를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 * *
고진유는 장문인과 사조님이 제일도문에 몰래 오신 사실을 알았다.
가장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었다.
“대사형, 장문전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우린 천매관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무혼신녀를 보았다.
장문인과 사조님에게는 그녀에 대해 알려주는 게 좋을 듯싶었다.
“누님, 함께 가시죠.”
“그럴까?”
무혼신녀도 삼대제자들과 있는 것보다 고진유와 함께 움직이는 게 더 낫다는 여겼다.
고진유와 그녀는 바로 장문전으로 향했다.
일각이 지나자 전방에 장문전이 나타났다.
정문 호위가 다가오는 두 남녀를 보았다.
가까이 다가오자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호정 사제!”
“호초 사형이군요. 호위당에 배정을 받으셨네요.”
“사제가 왔다는 소식은 들었다. 나도 나가보려고 했는데 호위당이라서…… 축하한다.”
“고맙습니다. 안에 들어가 봐도 될까요?”
“장문인님을 뵈러 왔군. 들어가도 돼.”
“고맙습니다.”
“저어…… 근데 이분은?”
“아, 제 누님이십니다. 장문인님과 사조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도진 사조님도 안에 계시지요?”
“두 분이 함께 계실 거다.”
“알겠습니다.”
호초는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곧 고진유는 무혼신녀와 함께 장문인실 밖에 도착했다.
“장문인님, 호정입니다.”
“들어오너라.”
“알겠습니다.”
드르륵.
고진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뒤에 무혼신녀가 따랐다.
장문인과 양군경은 일어난 채 고진유를 반겼다.
“호정, 어서 오너라.”
“두 분께 먼저 절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고진유는 그 자리에서 절을 했다.
“두 분께서는 만수무강하셨습니까?”
“허허허. 우리야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밖에서 힘들게 다니는 호정, 네가 더 어려움이 있었겠지. 그만 일어나도록 해라.”
“고맙습니다. 사조님.”
양군경은 일어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고진유를 두 팔을 껴안았다.
등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사손지간의 정을 나누었다.
‘못 보던 사이에 등도 더 넓고 단단해졌구나.’
양군경은 고진유와 떨어지면서 안으로 함께 들어선 여인을 보았다.
고진유가 함께 들어온 무혼신녀를 가리켰다.
“두 분께 소개해 드릴 분이 계십니다.”
스윽.
무혼신녀가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 만나서 반갑네.”
“……!”
장문인과 도진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반말 인사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장문인은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다시 물었다.
고진유의 누님이라 들었기에 화를 내진 못했다.
“소저, 방금 우리에게 한 말씀이오?”
“맞아.”
“……허허. 이거 참.”
두 사람은 웃음만이 나왔다.
“그대가 호정의 친누이라고 하나 함부로 말을 낮춰서 하는 게 아닌가 싶소이다만…… 우린 나이가…….”
“나이 때문이라면 내가 훨씬 많단다.”
“…….”
분명 장난이라고 생각한 두 사람이 화가 나려고 할 때였다.
고진유가 얼른 그들 사이에 나섰다.
“두 분께 잠시 제가 드릴 말이 있습니다.”
“……그래, 무엇이더냐?”
“이분은 제 친누이가 아닙니다. 백 년 전 무림에서 활동하셨던 무혼신녀이십니다.”
“뭐, 뭣이라……?!”
장문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무혼신녀.
백 년 전 중원 최고의 여고수.
검후조차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 했던 절대무인이었다.
고진유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 이냐?”
“네. 그렇습니다.”
이십 대 후반의 얼굴.
하지만 중원에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많다.
장문인 주명진과 양군경은 큰 실례를 할 뻔했다.
척.
동시에 포권을 했다.
“무혼신녀님을 뵙습니다. 저희가 큰 무례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되었다. 화산파라 그런지 빠르게 받아들이는군. 제법이야. 도명이 명류였던가? 강초상을 알고 있나?”
“…….”
“그분은…… 전전대 장문이십니다.”
“그래? 젊었을 때부터 똑똑한 사람이었지. 한자리할 줄 알았는데 장문인을 했구나. 명류가 애들을 잘 키웠어. 어른에 대한 존경도 보이는 것을 보니.”
“고, 고맙습니다.”
백 년의 세월이 지났기에 화산파 제자라도 명류 도인의 본명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무혼신녀가 확실했다.
주명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상석으로 그녀를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