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묵경은 물론 인양과 녹림야검도 그녀의 앞으로 다가서면서 압박을 느꼈다.
고수일수록 더욱더 강해지는 무혼신녀의 무형기.
‘무신, 그분과 대등할 정도의 내력이라니.’
무신을 만나보았던 세 사람에게 그녀의 만남은 충격적이었다.
무혼신녀도 마찬가지였다.
“보통들이 아닌데? 역시 동생의 친협들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겠군.”
“누님을 뵙습니다. 묵경이라 합니다.”
묵경의 인사에 이어 인양과 녹림야검도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무혼신녀는 묵경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보았다.
“호오, 소문대로 잘생기긴 했어. 내가 본 사내 중 제일 잘생겼군.”
“고맙습니다.”
“자네와 저 꼬맹이가 진유 동생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라면서?”
“그렇습니다.”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 것을 아느냐?”
동면 전의 그녀 나이는 삼십 대 중반이었지만, 그래도 이십 대 후반의 여인처럼 보였다.
‘음…… 얼굴은 이십 대 후반처럼 보이는데…… 진유 아우가 훨씬 많다고 했지……?’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누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알아서 하거라. 갑자기 남동생이 두 명이나 더 생기는군.”
인양이 불쑥 앞으로 나서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예쁜 누님이 생겨서 기분이 좋습니다. 앞으로 제가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나도 앞으로 잘 부탁한다.”
무혼신녀도 살가운 인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묵경이 기분 좋은 듯 말했다.
“진하 누님, 첫 만남인데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혹시 술을 드실 줄 아십니까?”
“술? 난 조금밖에 못해.”
“…….”
고진유는 그녀의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마 못 마셔도 묵경보다 훨씬 잘 마실 게 확실했다.
“하나 묵경 아우가 사 준다면 조금은 마셔보지.”
“하하하! 알겠습니다. 누님을 위해서 최고급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묵경은 시선을 돌려 녹림야검과 마주쳤다.
“제가 바로 자리를 잡도록 하겠습니다.”
파앗!
녹림야검의 신형이 단번에 사라지며 붉은 기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졌다.
“오호, 살인무경을 제대로 익힌 것 같구먼.”
‘……뭐지?’
녹림야검의 신법을 보며 단번에 무공의 내력을 알아보았다.
묵경은 고진유를 놀란 시선으로 보았다.
[정체가 뭐야?]
[무구천의 아는 누님.]
[아하…… 무구천…….]
무구천의 아는 누님이라면 당연히 무공이 강할 것이었다.
* * *
오후 늦게 시작된 환영 자리는 자정이 넘을 때까지 이어졌다.
묵경은 얼굴은 이미 붉게 변했다.
“누님…….”
“왜?”
“술 조금밖에 못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조금 먹지 않았느냐? 왜?”
“아…… 닙니다. 꺼억.”
“더 마실까?”
“그러고…… 싶은데…… 밤손님들이 오는 듯합니다.”
묵경뿐만 아니라 인양과 녹림야검도 일어나서 상대할 준비를 했다.
그들도 이미 밤손님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일반 무인이라면 느끼지 못할 것이었다.
이미 그들의 기를 느낀 세 명의 내력에 무혼신녀는 다시 감탄하고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게 말이다. 딱 서너 잔 더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을 텐데.”
“보아하니 극일천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극일천은 강해.”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싸울 생각하는 것을 보니 이길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진유 아우가 말했습니다. 이긴다는 것보단 진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
무혼신녀는 바로 옆에 앉은 고진유를 쳐다보았다.
“상대에게 지는 게 아니라면 이기겠다는 뜻인 것 같은데, 아닌가?”
“이기겠다는 것과 지지 않겠다는 말은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지?”
“서로 비기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렇군. 서로 비기는 것도 있군.”
“거의 가까이 온 것 같으니 저희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상대가 제법 인원이 많은데 괜찮겠느냐?”
“이 정도면 저희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알겠다. 수고해라.”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시에 묵경과 인양, 그리고 녹림야검도 함께 움직였다.
휘이익!
네 명이 신형을 밖으로 날렸다.
‘어떤 놈이 움직였지?’
무혼신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천문전주 나하중이 보낸 서신에는 철갑의 행방에 대해서 찾아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천문전에서 굳이 사람을 따로 보냈을 것 같진 않고.’
벌컥.
그녀는 탁자에 마저 남아 있던 술을 부어 바로 한입에 마셨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심심했다.
“어떻게 싸우는지 구경이라도 한번 해 볼까?”
극일천을 상대로 싸우는 그들의 무공이 어떠할지 궁금했다.
자신의 몸속에 있던 탁기를 밀어낸 것만 해도 고진유의 내력이야 이미 판명되었다.
휘익!
무혼신녀는 객잔에서 사라졌다.
* * *
고진유와 묵경, 인양과 녹림야검은 길 가운데에서 나란히 일자로 섰다.
어두운 밤.
시야는 어둠에 잠겨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무리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느껴졌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는 이상 보이는 즉시 끝을 내죠.”
세 사람은 고진유의 뜻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도망갈 줄 알고 열심히 달려오는군요.”
“저들을 알고 있었어?”
“며칠 동안 따라 다니기에 내기를 유지하면서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혼자서 싸우는 것보다 세 명이면 더 좋잖아요.”
“음…… 왜 세 명? 네 명이 아니냐? 넌 그냥 보고만 있겠다는 말인데?”
“맹주가 되면 굵직한 일만 하면 된다고 하던걸요. 그래서 전 한 놈만 잡을 겁니다.”
고진유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힘들게 싸우지 않기로 했다.
최대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놓은 뒤 수장을 끝장내는 쪽이 효율적인 듯했다.
“녹검 씨.”
“넵.”
“오른쪽에서 적의 진영을 치고 들어가세요.”
“알겠습니다.”
스륵.
녹림야검의 신형이 홍무를 남기며 사라졌다.
“좌측은 묵경 형이 맡아줘요.”
“알겠다.”
묵경 또한 신법을 펼치며 왼쪽으로 사라졌다.
고진유와 인양은 그대로 남아서 전방을 주시했다.
“인양, 우리는 중앙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동안 수련을 많이 했는지 봐야겠어.”
“네! 알겠어요.”
“적의 수가 많을 때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단번에 사기를 꺾어야 해. 알겠지?”
“넵.”
인양은 내력을 끌어 올리며 당장에라도 화산복호권을 펼칠 준비를 마쳤다.
‘크크크크. 겨우 네놈으로 우리를 상대하겠다는 것이군.’
우문전주 시도정은 수하들의 뒤에서 네 명의 존재를 향해 홍살기를 뿜어냈다.
그가 데리고 온 이백 명의 수하들은 우문전 최고의 양강무인.
이들이라면 화산도협을 상대하는 데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흑화전에서 당한 이유에 대해 조사를 마쳤다.
결론은 단순했다.
흑화전의 모든 힘으로 싸우지 않았다는 해답을 찾았다.
십무흑화와 흑화천군의 힘을 집중적으로 뭉쳐 싸웠다면 충분히 이겼을 것이었다.
그 후 우문전주 시도정은 극일천에서 나와, 기회를 만들기 위해 준비했다.
‘가장 좋은 기회는 혼자 있을 때였겠지만.’
하지만 화산도협은 상당히 약은 사내였다.
절대로 혼자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수하들이 다가서기 전에 항상 거리를 두며 피해 다녔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겨우 세 명의 친협이 있다고 자신만만한 모양이군.’
도망가지 않고 싸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시도정은 홍살기를 끌어 올리며 앞을 향해 소리쳤다.
“저놈들의 목을 베라!!”
파아아앗!
양강무인들의 움직임이 더욱더 빨라졌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며 달렸다. 오직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모두 죽이겠다는 것뿐.
이백 명의 눈동자는 살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우우우우웅-
그리고 선두에서 달리던 양강무인은 거대한 기의 진동을 느낀 순간.
뻐어어억!
무형의 벽에 부딪힌 그가 얼굴이 찌그러지면서 뒤로 넘어졌다.
뻐어어억!
뻐억!
그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선두에서 달렸던 십여 명의 양강무인들도 상황은 모두 같았다.
우르르르-
선두가 우르르 무너지며 뒤에 따르던 무리들의 움직임이 주춤거렸다.
스걱.
그와 동시에 양쪽에서 날카로운 검기로 인한 비명이 들렸다.
“커어억!”
“아아악!!”
묵경과 녹림야검의 기습에 양강무인들의 전열이 흩어졌다.
‘헉…… 언제 옆에서…….’
후방에서 수하들을 지켜보던 시도정은 수하들을 베는 모습을 지켜보며 경악에 빠졌다.
“흩어지지 말고 뭉쳐라!!”
하지만 이미 흩어진 전열은 다시 뭉쳐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전방에서 굉음이 터졌다.
콰아아앙!!
오로지 일권을 쏟아내며 앞으로 다가가는 인양의 화산복호권은 천권을 보는 듯했다.
뒤에서 따르던 고진유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좋아. 잘하고 있어.”
고진유는 칭찬을 하면서도 좀 더 강한 타격을 위해 가르침을 주었다.
“일권을 내딛는 발을 좀 더 강하게 눌러라.”
“넵. 알겠습니다!”
푹.
인양이 발바닥에 힘을 주자 바닥이 두 치 아래로 파였다.
그리고 복호지풍(伏虎之風)의 초식.
쏴아아아아-!!
십 성의 풍자결에 전력을 다한 일권에서 폭풍을 일으켰다.
“으으으으아아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양강무인들이 뒤로 밀려났다.
‘크윽.’
시도정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백 명의 수하들이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밀려나는 모습에 당황했다.
‘이…… 정도로 강하다고?’
흑화전이 계획을 잘못 세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생김새처럼 성격 또한 깔끔하면서도 단순했다.
“전원 후퇴하라!!”
시도정은 결정과 동시에 뒤로 사라졌다.
타아아앗!
양강무인들도 기다렸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고진유는 인양의 뒤에서 상대의 수장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빠르군.”
평소에 많은 훈련을 했는지 죽은 자를 제외한 모두가 빠르게 도망갔다.
묵경은 멀리 사라진 방향을 보면서 다가섰다.
“웃긴 녀석들인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어.”
“저도요.”
싸우다가 그만둔 느낌을 받은 세 사람이었다.
“또 올까?”
“글쎄요. 이렇게 당했는데 또 오겠어요? 왔으면 좋겠는데…….”
인양은 요즘 들어 싸우는 게 좋았다.
“당연히 오겠지. 걱정 안 해도 돼.”
“진유 형, 이유가 있습니까?”
“자존심이 많이 상했거든. 그동안 한 번도 지지 않았던 자들이야. 무너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찾아올 수밖에.”
“그럼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인양아, 한 가지만 항상 기억해.”
“아! 잘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자만하지 말라는 말씀이시죠?”
“맞다. 그들이 우리에게 당한 건 언제든지 이길 수 있다는 자만심이 한몫하는 것도 있다.”
“넵. 꼭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 * *
무혼신녀는 멀리서 극일천의 우문전을 상대로 싸우는 친협들의 무공을 보았다.
‘극일천의 저놈들도 보통이 아니거늘.’
손쉽게 몰아낸 세 명의 실력은 생각한 것보다 더 강했다.
‘이 녀석들…… 평소 모습과는 전혀 다르군.’
게다가 고진유는 싸우지도 않았다.
뒤에서 세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했다.
물론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적의 수장을 한 번에 노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을 게 확실했다.
다행히 상대는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한 뒤 후퇴했다.
만일 도망가지 않았다면 크게 당했을 것이었다.
무혼신녀는 싸움이 끝난 것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근데…… 예전 같지는 않은데?’
백 년 전 극일천의 무인이라면 도망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을 터.
‘약해졌나?’
아니지. 극일천에서 절대로 그럴 일은 없어.
‘그렇다면……!’
무혼신녀의 시선은 객잔으로 돌아오는 네 사람 중 한 명을 향했다.
‘화산도협 고진유. 극일천이 약해진 게 아니라 저 녀석이 강하다는 말이군. 드디어 극일천에도 천적이 생기는 것인가?’
수백 년이 지나 무림에 극일천의 뿌리를 흔들 수 있는 인물이 태어났다.
‘이래야 재미있지.’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백 년 전.
그녀는 무구천의 최고 무인인 오무천자의 이름으로 극일천의 야망을 부수고자 했다.
무구천은 강하다고 자부했다.
하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무구천의 힘으로 그들의 행보를 막을 수 없다. 영원히 이길 수 없을 거야…….”
그때의 절망감이란…….
그렇게 무림에서 나간 어느 날, 기운이 빠진 자신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사내는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신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대하는 그의 모습은 고고하면서도 예를 갖추고 있었다.
내력이 없었다면 완벽한 유생이라 생각했을 터.
어느 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극일천이라 신분을 밝혔다.
그때의 충격이란…….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접근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화를 내며 자리를 떠나기 직전, 그가 제안했다.
극일천주를 죽일 수 있는 무공을 주겠다고.
그는 주군을 죽이고자 그녀를 찾은 것이라고.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사내는 오직 극일천주를 죽이면 된다고 할 뿐, 다른 부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공을 넘기는 대신 한 가지 제약을 걸었다.
천지쌍고독(天地雙蠱毒).
그녀는 어리석게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고독 정도는 알고 있는 이상 충분히 제어가 가능하다고 여겼으니까.
사내에게 무공을 받은 그녀는 폐관에 들어서 수련을 했다.
하지만 수련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가 준 무공은 상단전을 이끌어 내는 심공.
천지쌍고독이 주화입마를 일으킬 줄은 예상조차 못했다.
결국 그녀는 무구천주에 의해 백 년의 동면에 빠졌다.
그리고 정확히 백 년 뒤, 다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