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아침이 밝았다.
고진유가 객실 밖으로 나오자 많은 무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그들은 얼굴을 조금이라도 알리기 위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그들에게 고진유도 미소로 화답했다.
“화산도협님, 아침에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다음에 시간이 되면 하시지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본도의 일행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아…… 네에. 다음에 꼭 부탁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얼굴을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아쉬움과 다음에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돌아섰다.
‘유명한 것도 결코 좋지는 않구나.’
사람들을 억지로 만나 웃음을 짓는 생활이 좋지는 않았다.
고진유는 탁자에 앉았다.
후다닥!
점원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연장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화산도협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실수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손에는 일행이 주문하지 않은 차가 들려 있었다.
“화산도협님, 소인들이 차를 준비했습니다.”
“고맙소이다. 여기 두세요.”
점원은 차를 내려놓은 뒤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향이 좋군.’
고진유가 찻잔에 따를 때였다.
“진유 동생, 일찍 일어났구나!”
객실에서 내려오던 무혼신녀가 반갑게 고진유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객루 전체로 퍼져 나갔다.
“누님, 일어났습니까?”
“좋은 아침이네. 잘 잤는가?”
“앉으세요. 차 향이 좋습니다. 한 잔 드시지요.”
“난 술이 좋지만…… 여하튼 고맙군.”
무혼신녀는 자리에 앉으면서 주위를 살폈다.
“소연 동생은 어디 갔느냐?”
“조금 늦게 나오는 것 같습니다. 먼저 한 잔 드시지요.”
“좋지.”
그녀는 찻잔을 들어 한 입 마셨다.
구수한 맛이 입안에 퍼져 나갔다.
“괜찮은데?”
“오늘 중으로 무림맹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래? 이거 기대가 되는구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누님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에게? 부탁을?”
“무림맹에 가면 보면 아시겠지만 대부분 무림맹 인사들이 나이가 많습니다.”
“…….”
고진유의 부탁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들에게 반말하는 것이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싫다면 굳이 안 하셔도 됩니다. 편하실 대로.”
“……하긴 내가 워낙 젊어 보이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군. 알았다. 신경 좀 쓰도록 하마. 동생 얼굴도 있는데 누나라는 사람이 남들 보기에 개망나니 같으면 안 되겠지.”
“…….”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그녀의 대답에 고진유는 느낌이 왔다.
‘안 되겠구나.’
* * *
반나절을 거치면서 무림맹에 도착했다.
무림맹에 이미 소식이 전해진 터라 정문에서 독전호와 특사정화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진유가 말 위에서 내리자, 독전호가 빠르게 다가서며 고개를 숙였다.
“귀찮게 했군요. 조용히 오면 되는데.”
“아닙니다. 당연히 저희가 마중을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진유의 뒤로 마차에서 내린 두 명의 여인이 다가왔다.
“북 소저를 뵙습니다.”
“반가워요.”
독전호는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예전과 바뀌었다.
무림에 공식적으로 그들의 관계가 알려졌다.
고진유를 주군으로 모시는 이상 그녀는 주모가 되는 분이었다.
“이분은 제 누님입니다. 음…… 앞으로 독 단장님께 특별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특별히?’
고진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알겠습니다.”
우선 대답을 했다.
독전호는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독전호라 합니다. 부탁할 일이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고진하라 한다. 잘 부탁하지.”
“…….”
첫 만남에 반말.
독전호는 순간 당황했다. 그녀는 보기에 이십 대 후반처럼 보였다.
고진유와 시선이 마주쳤다.
미소를 띤 고진유의 표정을 보자 특별히 부탁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듯했다.
“누님께서 몸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혼자 누워 계셨던 분입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독전호는 그녀가 병상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진하 님께선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진유 아우가 아주 깨끗하게 고쳐주었지. 이제는 아주 튼튼하니깐 걱정 안 해도 된다.”
“다행이십니다.”
“고맙구나.”
독전호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독 단장님, 무림맹에는 별일 없습니까?”
“크게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없습니다. 제갈 군사님께서 무림맹을 잘 처리하고 계십니다.”
“제갈 형님이 워낙 똑똑한 분이 아닙니까.”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우선 맹주전을 바로 가도록 하죠.”
“바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독전호는 돌아서며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맹주전으로 간다.”
“넵.”
* * *
맹주전은 오랜만에 활발하게 움직였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시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제갈 군사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역시 섬세하시군..”
맹주전으로 들어섰서자 마치 자신의 집처럼 편안했다.
“……꼭 내 집 같네.”
“하하, 특사라고 하지 않았느냐? 현재 무림맹에 동생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는 것이 당연하니, 이번 기회에 맹주나 해보려무나.”
“누님, 제가 하고 싶다고 덜컥 맹주가 될 수 없지요. 그리고 이 피곤한 자리를 왜 합니까?”
“피곤하긴 뭐가 피곤하냐. 높은 자리에 올라서면 귀찮은 일은 전부 아랫사람에게 시키면 되지. 그리고 가끔 굵직한 일을 하나씩 해결해 주거라. 어려울 것 없어.”
“…….”
“원래 사람은 자기 능력에 맞는 자리에 앉는 게야. 동생은 싫다고 해도, 성격으로 봐서 무림맹주가 딱 체질이더군. 은근히 돈 좋아하고 뒤끝도 조금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정의로운 면도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약은 면도 있지 않은가.”
“그것과 무림맹이 무슨 상관인지 잘…… 그리고 저에 대해서 어찌 단번에 아신다고 그러십니까.”
“동생인데 누나가 모르겠는가? 그리고 무림맹주가 원래 그런 자리지 않느냐. 독 단장, 안 그래?”
“…….”
독전호는 갑자기 물어보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고진유도 인정했는지 반박하지 못했다.
고진유는 역공하듯 그녀를 보며 물었다.
“제가 무림맹주에 어울리면 누님은 어디에 어울립니까?”
“나? 나 정도의 무공이라면 당연히 무림 최고의 검후. 절대고금제일 검후가 딱 내 자리이지.”
“음…… 하긴 그 정도가 되어야 누님에게 맞는 자리이겠지요.”
‘검후?!’
독전호는 두 남매의 대화를 곁에서 들으면서 한 가지 깨달았다.
검후가 어울린다고 말하는 누나나 당연히 맞다고 인정하는 동생.
‘두 분은 확실히 친남매가 맞군.’
짜악!
무혼신녀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마침 할 일이 생겼다.”
“갑자기 말입니까?”
“예전에 하려고 했었는데 내 몸에 일이 생겼지 않느냐. 그때 못했던 일을 해야겠어.”
“그 일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고진유의 콧등에 주름이 생겼다.
“방금 말했잖아. 검후가 되어야겠구나.”
“…….”
“좋은 생각이지?”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검후에게 도전하려면 검각까지 가야 합니다.”
“흠…… 그건 귀찮구먼. 예전이라면 당장에 갔을 텐데…… 지금은 너무 나이가 많아서 힘들군. 포기해야 하나?”
“아닙니다. 진하 님께서 당연히 검후가 되실 수 있습니다. 소인이 응원하겠습니다.”
“오……! 독 단장은 사람이 좋군.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용기가 생기잖아. 앞으로 내가 잘 봐주겠다.”
“……감사합니다.”
독전호는 오랜만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멋진 분이시다.’
* * *
고진유는 맹주전으로 나와 제갈양을 만나기 위해 나섰다.
독전호가 호위를 위해 동행하고자 했지만, 고진유는 무림맹에서 나가기 전까지 무조건 무혼신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 명을 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제갈양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진유 아우, 어서 오게.”
“제갈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낼 게 있나. 하루 온종일 무림맹에서 보내는 거지.”
“형님 때문에 무림맹이 빠르게 정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훗. 그래도 알아주니 고맙군.”
제갈양과 고진유는 탁자로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앉도록 하게.”
“고맙습니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앉았다.
“황금무동의 일은 잘 처리했어. 동생이 아니었다면 무림에 큰일이 생겼을 거야.”
“다행히 운이 좋았죠.”
“동생에게 겸손은 안 어울려. 잘난 맛에 살잖아. 안 그래?”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네요. 소문이 제대로 난 모양입니다.”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자네를 자세히 아는 사람 외에는 아직은 잘 모르고 있으니까. 하하!”
“후후, 그거 다행이네요.”
“이번 기회로 극일천이 완전히 알려졌어. 앞으로 무림은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조용하게 움직였던 것과 다르게 움직일 텐데.”
제갈양은 걱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극일천의 움직임은 미미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게 확실했다.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상황입니다. 늦고 빠르고는 시간 차이일 뿐이지요.”
“그들과 붙는다면 이길 자신은 있나?”
“그건 제가 물어봐야 할 질문 같은데요?”
오히려 되묻는 질문에 제갈양은 생각에 잠겼다.
‘이길 자신이라…….’
고진유에게 물어봐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봐야 할 문제였다.
“으, 내가 자신이 없으면 안 되겠지?”
“하하, 자신이 없는데 싸우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죠.”
“넌 자신이 있는 모양인가 보구먼?”
“전 한 번도 자신이 없을 때는 없었습니다.”
고진유가 아닌 다른 인물이 이런 말을 했다면 자만이라 했을 것이다.
제갈양은 고진유의 얼굴을 보았다.
‘대단한 녀석이긴 해. 극일천이 어떠한지 알면서도 주눅이 들지 않다니. 가장 힘들 이 녀석도 자신감이 있다는데 내가 자신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되는군.’
그는 이제는 스스로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아 참, 네가 없는 동안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눈 게 있다.”
“우리끼리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비상위와 십문십가. 그리고 장로들.”
“혹시 저와 관련된 내용입니까?”
“맞다.”
“어떤 내용입니까?”
“별건 아니고, 극일천이 중원 무림에 알려진 이상 무림맹 체제를 비상위로 계속 돌려선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요?”
“다시 맹주 체제로 가기로 한 거지. 강력한 추진력을 내야 할 시기잖냐.”
“누가 추대되는…… 아니, 그 전에 말할 게 있는데 전 나이가 너무 적습니다.”
씨익.
제갈양은 미소를 지었다.
‘왜 이런 웃음을…….’
뭔가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무림맹에서 무슨 말이 오간 건가 싶었다.
“네가 방금 한 말처럼 비상위에서도 그런 의견이 나오긴 했다. 그래서…….”
“그래서요?”
“잠시 동안 무림맹주를 정하기보다 권한을 가진 대행 체제가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지.”
“대행 체제가 무슨 말입니까? 그런 게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 게 있어. 뭐랄까? 직함이 맹주 대행이라고 해도, 하는 일은 맹주나 똑같아. 걱정 안 해도 된다.”
“……제가 왜 걱정을 합니까?”
“흐응, 그렇구나. 걱정을 할 줄 알았는데.”
“잠깐 이해가 안 되는데…… 혹시 저보고 방금 대행…… 그 뭐시기를 하라는 말인가요?”
“어. 맹주직은 아직 어리다고 해서 우리가 생각해 낸 방법이지. 딱 좋지?”
“무림맹주, 아니, 대행 체제를 너무 쉽게 정하는 게 아닙니까? 그리고 전 할 일이 많습니다.”
“극일천을 상대하는 일?”
“그것도 있지만, 화산파를 천하제일문으로 만드는 일이 먼저입니다.”
“이미 중원인들은 화산파를 천하제일문으로 알고 있는데. 그거라면 벌써 끝난 거야.”
“사파와 마도는 아직 아닙니다. 그리고 천검궁도 있고…….”
“진유 아우가 착각하는 게 있구나. 천하제일문은 중원 모든 문파와 싸워 이겨야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중원 무림인들이 인정하며 불러주는 것이지.”
“그런…… 흠…… 그래도 화산파의 힘으로 아직 한 건 없는데요?”
“전쟁에서 최고의 승리는 적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스스로 허리를 굽히며 패배를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지. 지금 중원 무림에서 화산파와 싸우고 싶어 하는 문파가 있을까?”
고진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맞는 듯했다.
“참……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끝나 버렸다니 재미없군요.”
고진유는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그러면서 입가에 웃음이 나왔다.
사부와의 약속.
사숙과의 약속.
사조와의 약속.
약속한 기한 내에 혹시나 지키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그분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진유 아우,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는 무림을 위해 싸우는 것도 괜찮잖아?”
“갑자기 의욕이 없어지네요.”
“……아 왜.”
“화산에 잠시 다녀와야겠습니다.”
“그곳엔 왜?”
“사조님과 장문인님을 만나 뵙고 와야겠습니다. 그리고 오는 길에 사형들도 함께 오는 게 좋겠어요.”
“화산육협과 함께 오겠다는 말이지?”
“극일천이 나온 이상 사형들의 힘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건 맞아. 지금은 한 명이라도 무공의 고수들이 아쉬울 때이지. 그들이 무림맹에 온다면 큰 도움이 되고 남을 테니. 언제 떠날 생각이냐?”
“며칠 쉬다가 가도록 하죠.”
“그렇게 해라. 그럼 나중에 맹주전에 따로 연락할 테니 기다리고 있어.”
“……뭘 하는데요?”
“맹주 권한 대행 취임식을 해야지. 그게 해라고 해서 말로 되는 게 아니잖아. 하하하!”
“…….”
* * *
무림맹 대광장에 수많은 무인들이 관중석에 모였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단에 올라온 두 명의 인물에게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제갈양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림맹의 동도 여러분. 본인이 먼저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겠소이다.
오늘 이 자리에 만든 이유는 여러분에게 드디어 무림맹의 가장 지엄한 자리에 올라설 인물을 알려 드리고자 함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현 무림은 역사상 가장 위험한 순간에 놓여 있습니다. 만일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무림은 먼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게 될 테지요.
이에 본인과 함께 무림맹의 많은 인사들이 의논을 했습니다. 그리고 비상위 체제로 돌아가는 무림맹을 계속 이대로 둘 수 없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무림맹과 무림을 위해 맹주 권한 대행을 완벽하게 맡을 수 있는 인물.
화산도협 고진유 대협을 맹주 권한대행으로 모시고자 하는 바입니다.
여러분께서 만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화산도협께 큰 함성과 박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갈양은 고진유를 가리켰다.
‘휴우…….’
고진유는 연단 중앙으로 나섰다.
그리고 사의검을 천천히 뽑은 뒤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본도가 그대들에게 약속하겠소. 무림의 정의를 위해 한 목숨 바치겠소이다.”
“와아아아아아--!!”
“화산도협 만세!!”
“무림맹 만세!!”
“무림맹주 만세!!”
무림대광장은 단숨에 함성과 박수 소리로 가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