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고진유는 마부석에서 아래로 뛰어 내려섰다.
도복이 펄럭거렸다.
‘매화도의?’
아래에 내려선 젊은 도사.
연지호의 시선이 상대를 빠르게 살폈다.
“화산파……?”
“맞소. 본인이 북 소저가 말한 화산도협이라오.”
“……!!”
화산도협 고진유.
중원의 무림인이라면 그를 모를 사람이 없었다.
“그, 그대가 정말로 화산도협이오?”
“맞소이다. 그리고 본도는 미치지 않았소이다. 북 소저와 본도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이지요.”
북소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서로 좋아한다고 말을 했을 뿐 공식적으로 무림에 알려질 기회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입으로 소문을 낼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이번 기회에 알려지게 될 것이 확실했다.
“어떻게…… 어떻게……?”
“본도가 그녀를 좋아하면 안 되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대는 정파의 인물이 아니오?”
“좋아하는 감정 사이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
“시작합시다.”
“무, 무엇을……?”
“북 소저를 차지하기 위해서 사내답게 본도와 싸워야 할 게 아니오? 목숨을 걸고 합시다.”
‘목숨을? 나를 죽이려고?’
“……돼, 됐소!”
연지호는 싸우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상대는 무림최고의 인물 화산도협이었다.
“사실 난 그녀를 좋아하지 않소!”
“싸우지 않겠다는 거요?”
척.
연지호는 상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포권을 했다.
“만나서 반가웠소이다. 다음에 뵙겠소이다.”
그는 얼른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연지호는 한 가지 큰 문제가 남아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어이, 잠깐만.”
무혼신녀가 돌아선 연지호의 걸음을 붙잡았다.
“이봐, 어딜 가는 게야? 아직 나하고 계산할 일이 남아 있지 않나?”
“누구…… 신지?”
만일 그녀가 정말 북소연의 시녀라면 함부로 나서지 않을 것이었다.
“나? 본녀는 화산도협의 누나다. 고진하라고 하지.”
‘뭐?’
화산도협에게 친누이가 있을 줄은 몰랐다.
‘망…… 했다.’
미친년이라고 욕을 한 게 생각났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헛소리를 했습니다!”
“어허, 말로 때우려고?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느냐?”
“그럼……?”
“사과를 해서 봐주긴 하겠다만 한 수 때리긴 해야겠구나. 대거라.”
“아…… 한 수라면…… 알겠습니다. 한 수만입니다.”
“좋다.”
연지호는 가볍게 생각했다.
여자가 강해봤자 얼마나 강할까?
무혼신녀는 앞으로 천천히 걸었다.
처러렁-
그녀가 한 걸음씩 내걸을 때마다 내기가 흔들거렸다.
‘어…… 뭐지?’
연지호는 눈이 점점 부릅뜰 듯 커졌다.
“잠…… 깐……!”
다급하게 손을 뻗어 말을 했지만,
파앗----!!
이미 늦었다.
연지호의 눈앞에 백광이 터지면서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커어억……!”
연지호는 비명을 지르며 공중으로 떠올라 멀리 날아갔다.
* * *
‘흐음…… 무슨 일이지?’
천문전으로 들어가는 윤여림의 걸음이 무거웠다.
늦은 시간에 천문전주 나하중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원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아직까지 불이 커져 있는 집무실이 보였다.
‘이 시간까지…….’
중요한 일이 일어난 듯했다.
스윽.
윤여림의 앞으로 인영이 나타났다.
순간 그는 흠칫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구지?’
육 척을 넘어선 장신 사내.
사각형의 턱에 두꺼운 입술.
처음 보는 얼굴로 우직한 느낌을 주었다.
천문전에서 수십 년 동안 나하중의 곁에 있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윤여림.”
“…….”
“무구천의 간자.”
사내의 말은 단순했다.
불쑥.
그는 양손을 뻗어 윤여림의 어깨를 잡았다.
“욱……!”
사내의 강한 손아귀 힘에 뼈가 부러질 듯했다.
윤여림은 사내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간자는 죽어야 한다.”
쑤욱.
윤여림의 소매 안에서 단검이 빠져나와 사내의 복부를 향해 갔다.
하지만,
까아앙!
강한 소리를 내며 사내의 복부에서 단검이 튕겨 나왔다.
빠지지직.
사내는 양손에 힘을 주자 윤여림의 어깨뼈가 부서졌다.
“아아악!!”
윤여림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었다.
* * *
나하중은 자리에 앉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윤여림을 내려다보았다.
“금인, 깨워라.”
사내가 앞으로 나오며 윤여림의 머리 위에 차가운 물을 부었다.
“허억……!”
윤여림은 눈을 뜨며 정신을 차렸다.
“윤 총관, 정신을 차렸으면 고개를 들어보게.”
윤여림은 고개를 들어 나하중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 저를 처리할 모양이군요.”
“예전부터 들킨 것을 알았다면 왜 도망을 가지 않았지?”
“……그동안 전주님을 모셨습니다. 비록 무구천의 사람이었지만 마지막은 전주님께 목숨을 맡기고 싶었습니다.”
“멍청한 놈. 죽을 짓을 하는군.”
“죄송합니다.”
“…….”
수십 년 동안 옆에서 많은 일들을 도와준 인물이었다.
윤여림이 사라진다면 누가 귀찮은 일들을 처리할지 걱정이 될 정도로 말이다.
“내가 극일천으로 넘어오라고 한다면?”
“제가 승낙을 하더라도 전주님께서는 살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역시 나를 너무 잘 아는군.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배신이지. 한번 배신한 놈은 두 번 세 번 배신하거든.”
“전주님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미안할 건 없다.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
스윽.
나하중은 백색의 수염을 쓸어내렸다.
“어차피 족쳐도 무구천에 대해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겠지?”
“그렇습니다.”
“이젠 우리도 움직일 때가 되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부터 먼저 해결하고자 하시는 게 아닙니까.”
“자네만 처리하는 게 아니네.”
“전부 알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후후후…… 당연하지 않겠나. 우리가 모를 거란 생각은 안 했을 것이라 보네.”
“맞습니다.”
윤여림은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이 들켰다면 나머지 무구천의 인물들도 들켰을 게 당연했다.
그들 또한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었다.
“그만 잘 가게나. 그동안 고생 많이 했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면, 자네들을 정리하는 건 우리가 움직일 때가 되었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네.”
“…….”
“무구천에서 멍청한 짓을 했더군. 가만히 죽어야 할 사람을 살렸어. 고맙게도…….”
‘뭣이? 무구천에서 살렸다고?’
머릿속에 한 명의 여인이 생각났다.
윤여림은 다급하게 그를 보았다.
“후후후, 놀란 모양이군. 하긴 놀랄 수밖에 없겠지.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일천에서 본인 외에는 없으니까.”
“어떻게 살아 있는지 알았소이까?”
툭툭.
“여기…….”
나하중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얼마 전에 깨어났더군. 그래서 알았지.”
“…….”
“백 년 전에 펼쳤던 잠입문계(潛入蚊計)가 실패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지금에서야 성공할 줄은 몰랐군.”
‘큰…… 일이다. 설마 그녀가…….’
“극일천주를 이길 수 있는 무공을 던져 주었더니 마음이 바뀌었던가. 근데 우습게도 시작도 하기 전에 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에 빠졌지. 어떻게 깨어났는지 모르겠지만 고마울 따름이야.”
‘큰일 났다…….’
따악!
나하중은 더는 할 말이 없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파아앗-!
사내가 윤여림의 목을 향해 대도를 떨어뜨렸다.
그의 목이 단번에 잘려 나갔다.
“…….”
나하중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비록 적이라고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수발을 들어준 수하였다.
“정중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해라.”
나하중은 일어난 뒤 돌아서 나갔다.
* * *
천문전으로 들어서자 그의 앞에 인영이 나타났다.
“그대가 여기에 무슨 일로 왔는가?”
“나하중 님, 제가 못 올 곳을 왔습니까?”
우문전주 시도정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었다.
짙은 주향이 흐르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요화주입니다. 기분도 좋지 않을 실텐데 큰맘 먹고 꺼내 왔지요.”
“……들어오게나.”
“그럴 줄 알았습니다.”
나하중은 그를 여의정으로 데리고 갔다.
가는 도중 술상을 미리 준비하도록 윤여림을 부를 뻔했다.
그가 있었다면 말을 꺼내기 전에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허허…… 없으니 불편하군.’
그를 대신해서 수곡자를 천문전으로 올렸다.
“수곡자에게 전해서 여의정에 술상을 차려오도록 하게.”
허공으로 전한 목소리는 곧바로 수곡자에게 전해질 것이었다.
여의정에 도착 후 일각이 되기 전에 술상이 차려졌다.
시도정은 요화주의 뚜껑을 열었다.
“흐음. 좋군.”
“특상품입니다. 좋은 날 마시기 위해 구해놓았는데…… 오늘 같은 날에 마시기에도 좋을 듯합니다.”
“자네가 신경을 써주니 고맙군.”
“한잔 받으십시오.”
시도정은 그의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랐다.
“요화주의 향은 중원 최고의 주향이라고 하더니…… 거짓이 아니로구먼.”
나하중은 술잔 가득 채운 술을 잡으며 들어 올렸다.
“잘 마시겠네.”
그는 우선 향을 음미한 뒤 가볍게 입을 대고 맛을 느꼈다.
그러고는 한입에 술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크으…… 좋군.”
우울했던 가슴이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괜찮습니까?”
“좋아. 역시 요화주가 본인의 가슴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또르르르-
시도정은 다시 그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연거푸 세 잔을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들어보도록 하지.”
“나하중 님께서 원하시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문전주 시도정이 천문전에 찾아온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심각한 듯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할 수 있겠는가?”
나하중은 그를 보면서 흑화전주 배조경이 생각났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잘못되어도 본 전에만 문제가 될 뿐. 혹시 걱정하실지 모르겠지만, 흑화전주와는 다를 것입니다.”
“걱정은 무슨…… 그대가 알아서 하게. 난 그저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겠네.”
시도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후후후. 이번 일만 성공하면 천문전 보다 우문전의 이름이 더 많이 들리게 되겠지.’
그는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나하중은 이미 틀렸다고 확신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녀석이…… 꿈을 꾸고 있군.’
* * *
화산도협에 대한 소문은 하루에도 끊임없이 회자됐다.
그리고 또 다른 소식이 중원 무림에 흘러나왔다.
화산도협 고진유와 사귄다는 한 여인의 신분이 문제였다.
지옥혈림의 혈성존의 독녀.
북소연이 바로 화산도협의 연분으로 소문이 난 여인이었다.
“아…… 다행이다.”
안도의 목소리.
옆에서 듣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속 시원하게 내려간 기분.
“묵경 형, 정말이네요! 나중에 진유 형을 만나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그러게 말이다. 일이 이런 식으로도 풀리는구나. 하하하! 이젠 부담 없이 무림맹으로 돌아가도 되겠어.”
묵경과 인양, 그리고 녹림야검이 천검궁에 들어선 지 하루가 지났다.
전날 늦게 들어선 탓에 곧바로 유운정으로 안내를 받았다.
세 사람은 날이 밝는 대로 천검궁주를 만나기로 했다.
천검궁주.
그가 어떠한 무인인가?
천하오무의 최강자 무신 초일군이다.
중원무림인들은 그를 가리켜 천하제일인이라 칭송했다.
세 사람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중원 무림에서도 그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존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인물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저어…… 들어가도 될까요?”
문밖으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드륵.
문을 열고 천검봉 금하희가 들어섰다.
치맛자락이 바닥을 스쳤다.
‘흐음.’
평상시와 다르게 경장을 입지 않았다.
연붉은빛을 내는 저고리가 그녀의 입술 색깔과 비슷했다.
묵경은 미소를 띠며 곧바로 칭찬을 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높았다.
“금 소저를 보니 소문이 잘못된 것 같소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대는 중원십봉이 아니라 오미화에 어울리는 듯하군요.”
“……!”
고금에 예쁘다는 말을 하면 좋아하지 않는 여인이 없다고 했다.
묵경의 칭찬에 그녀의 얼굴이 단번에 붉어졌다.
‘역시…… 묵경 형은 여인들의 너무 잘 안다니깐.’
인양도 그녀를 보며 빠르게 칭찬을 거들었다.
“묵경 형의 말씀이 맞는 듯합니다. 제가 만나본 오미화 두 분과 비교해도 아름다움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권협까지…… 고맙군요.”
그녀는 인양까지 나서며 칭찬을 하자 웃음이 나왔다.
“제가 오랜만에 이런 옷을 입었거든요. 어색해 죽는 줄 알았는데 괜찮다고 하시니 다행입니다.”
“당연히 괜찮지요. 경장 차림은 강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가끔 금 소저의 미모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복장도 좋다고 생각됩니다.”
“묵경 님께서 너무 말씀을 고맙게 해주시네요.”
“아닙니다. 진실은 언제나 감출 수 없는 법이지요.”
“고마워요. 아 참……! 사부님께서 세 분를 초대했습니다. 저와 같이 가시지요.”
“알겠습니다. 무신님을 뵙는다고 하니 긴장이 되는군요. 가시지요.”
묵경은 호흡을 크게 한 뒤 앞선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일각 뒤.
그들은 무신전이 보이는 정문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