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천주 도해령은 당황했다.
철갑을 버렸다는 그의 말을 믿을 뻔했다.
“화산도협, 너무하는군.”
“그건 천주가 먼저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지.”
“무혼신녀님…….”
그녀는 무혼신녀가 한 말 때문에 얼굴이 붉어지도록 당황했다.
알리고 싶지 않은 치부가 드러난 듯 부끄러웠다.
“철갑이 중요하긴 한 모양이군. 천주가 내 도움을 바라는 것을 보니.”
“죄송합니다.”
천주는 고개를 숙였다.
무혼신녀가 중재를 하려는 듯 고진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에게 철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다. 서로 사이좋게 있는 자리에서 여는 건 안 되겠는가?”
“무구천에서 저에게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시면 알 겁니다.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면 벌써 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가? 무슨 말인지 알겠네. 강압적으로 나왔다면 그대 성격으론 주고 싶어도 주긴 싫었겠지.”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마음이 넓어서 그렇지.”
“…….”
아무리 봐도 자신과 너무 닮았다.
어쨌든 고진유는 이곳에서 더는 할 일이 없었다.
“철갑에 대해서는 서로 시간을 가지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 하거라. 서로 급한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대가 잘 숨겨놓았다고 하니 극일천에 빼앗기는 일도 없겠지.”
무혼신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천주님께 부탁할 일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천주에게 부탁이라니?”
“깨어나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역시…… 그댄 공사가 확실해서 좋군. 여길 나가면 어딜 가려는 것인가?”
“무림맹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무림맹이라…… 혹시 나도 따라갈 수 있나?”
“…….”
그녀는 백 년 동안 동면에 빠져 있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그것도 자면서 열 번이나 지나갔다.
얼마나 많은 곳이 변했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무림맹으로 가실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같이 가는 게 부담스러운가?”
무혼신녀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그거야…… 그리고 무림맹에 누구라고 소개를 해야 할지 곤란하지 않습니까.”
“음…… 그대, 고아라고 했지? 그럼 어릴 때 헤어졌던 누나를 찾았다고 하면 되겠구먼.”
“……설마 진담은 아니시겠지요?”
“본녀는 언제나 진심일세. 내가 나이가 너무 들어 보이지는 않을 텐데.”
“그건 아니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십 대 후반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얼굴에 백 살 넘은 할머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 음…… 이름은 고진하라고 하면 어떤가. 천주도 괜찮겠지?”
“무혼신녀께서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천주 도해령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좋았다.
그의 옆에 있다면 철갑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알아낼 수 있을 듯했다.
“무혼신녀님의 존재는 우리 세 명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백 년 만에 일어났으니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을 것 같군.”
그녀는 기분이 좋은 듯 연신 미소 지었다.
백 년 전 그녀에게 흥미 있는 일은 오직 무공 수련밖에 없었다.
좀 더 강한 내력을 얻기 위해 새로운 무공을 다급히 익히던 중 주화입마에 빠질 정도로 말이다.
“천주, 이제 따로 볼일은 없나?”
“네. 그렇습니다.”
무혼신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무구천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진유 아우, 빨리 일어나게.”
“……아…… 예에…….”
고진유는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휘익!
“잠깐만.”
무혼신녀는 손을 들어 점소이를 불렀다.
후다다닥!
점소이의 목에 걸쳐져 있던 수건이 휘날렸다.
“술 가지고 와.”
“네에……?”
“젊은 놈이 귀가 먹었나? 술 가지고 오라고.”
그녀는 검미에 힘을 주었다.
‘무, 무슨 대낮부터…… 술을 동이째 들이마시고 있어?’
벌써 열 병째가 넘었다.
고진유는 망설이고 있는 점소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알겠습니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요.”
“빨리 뛰어가서 가지고 와라. 어서!”
그녀의 성화에 못 이긴 점소이가 다시 내달렸다.
이틀 전.
고진유와 무혼신녀는 북경에서 떠나온 뒤 하남으로 빠르게 내려왔다.
“술들이 왜 이리 순해졌나?”
“그렇습니까?”
“취기가 돌지 않아.”
“그건 무혼…….”
고진유는 말을 하려다가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는 슬쩍 돌렸다.
“누님이…… 술이 강해서 그럽니다.”
“흥.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순해서야…… 쯧. 옛날이 좋았는데.”
잠시 뒤, 점소이가 양손으로 커다란 술병 항아리를 가지고 왔다.
타악!
그러고는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무혼신녀의 눈빛이 빛났다.
“진작 이렇게 가지고 오지. 마음에 드는구나.”
그녀는 호주머니를 뒤지며 은전 하나를 꺼냈다.
“이건 수고비.”
“아이고! 고맙습니다!!”
방금 전까지 인상을 썼던 점소이의 인상이 단번에 환하게 펴졌다.
“공녀님, 원하는 게 있으시면 소인에게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알겠다. 수고해라.”
돌아서는 점소이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고진유는 술을 벌컥벌컥 마시는 그녀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동안 술을 못 마셔서 어떻게 참았습니까?”
“동생도 재미있는 말을 잘하는군.”
“뭐…… 그렇긴 합니다.”
“내가 제일 먼저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게 뭔지 아는가?”
“설마 술 생각은 아니겠죠?”
“맞아. 정신을 차리자마자 술 한 잔 마셨으면 했지.”
“대단하십니다.”
그녀는 주절거리면서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잔을 아래로 내려놓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 술 마시는 거 처음 봐?”
“누님…… 그냥 보는 겁니다.”
“내가 이상하게 생겼느냐?”
“그게 아니라…… 대낮부터 술을 그렇게 마시는데 신기하게 안 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흐음…… 그런가? 동생이 그렇다고 하니 내가 한 번 봐주마.”
벌떡!
그때, 건너편에서 덩치가 큰 사내가 일어났다.
“어디서 여자가 술주정을 하고 있어?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구만!”
핏!!
덩치 큰 사내의 이마로 술잔이 날아갔다.
털썩.
“커억!!”
사내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앞으로 쓰러졌다.
“못생긴 게 어디서 난리냐. 술맛 떨어지게. 또 한 번 더 나서는 놈이 있으면 이번에는 죽는다.”
객잔이 싸늘하게 변했다.
무혼신녀는 술잔을 다시 찾았다.
“잔이 없구나. 술잔 가지고 오너라!”
스윽.
그때, 그녀의 앞으로 가느다란 여인의 손길이 다가왔다.
“여기 있습니다.”
“어허…… 그대는 누구냐?”
술잔을 내려놓은 여인.
고진유는 무구천에서 나온 뒤 바로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북소연은 환하게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북소연이라고 해요.”
“북소연? 아하, 동생이 좋아한다는 여인이 너로구나.”
“동생?”
북소연은 시선을 고진유를 보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눈빛으로 물었다.
“북 소저, 오셨습니까? 고진하 누님입니다.”
“고…… 진하 누님? 혹시 친누나라는 말인가요?”
북소연의 물음에 무혼신녀가 대답했다.
“맞다. 백 년 전에 잃어버렸던 누님이지.”
‘배, 백 년 전? 대체 무슨 말인지…….’
고진유는 일어난 뒤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오.”
“아…… 고마워요.”
무혼신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어라? 진짜 좋아하는 사이가 맞구나.”
“…….”
북소연은 자리에 앉으면서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공자님의 누님이시니 언니라고 부르면 될까요?”
“좋은 단어구나. 나도 동생이라고 부르도록 하지.”
“네, 언니.”
“한잔할 테냐?”
“좋지요. 공자님께 술 한 잔 얻어 마시기 힘들었는데 언니는 처음 만나자 마자 술을 권해 주시는군요.”
“왜? 동생이 안 사 주느냐? 제법 돈도 많던데 짠돌이였나?”
“정말 그러게요.”
채애앵!
두 여인은 술잔을 부딪쳤다.
시간이 지나자 객잔의 술은 그녀들이 전부 마신 듯했다.
“하하! 오랜만에 기분 좋게 마셨다!”
“저도…… 기분이 좋아요.”
‘난리 났군.’
고진유는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며 밖을 내려다보았다.
* * *
혈림대거 안이 시끄러웠다.
그녀들과 함께 앉아 있던 고진유는 마부석 위로 자리를 옮겼다.
어제저녁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던 두 여인은 아직도 할 말이 많은지 마차 안에서도 떠들기 시작했다.
“하하! 과연 그랬구나. 둘이 천생연분이구먼. 어떻게 그런 사이에서 좋아하는 사이가 될 수 있는 거지?”
“제가 매력이 있잖아요. 이 정도면 오미화나 중원십봉보다 훨씬 더 여인으로서 괜찮은데…….”
“사람들 눈이 썩어서 그런 모양이다. 동생이라면 중원 최고의 여인이지.”
“언니, 고마워요.”
고진유는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점점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저어…… 화산도협님.”
“왜 그러시오?”
마부석에 함께 탄 사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여쭈어볼 게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그게…… 정말로 저희 아가씨와 사귀시는 게 맞습니까?”
“문제가 있소? 지옥혈림에서 좋아하지 않소이까?”
“그게 아니라…… 저희는 알고 있는데 다들 안 믿는다고 해서 말입니다.”
“아…… 하하, 설마 내기를 한 건 아니겠지요?”
“…….”
동료들에게 화산도협 고진유와 북소연이 좋아하는 사이라고 말해도 도통 믿질 않았다.
“내가 맞다고 해도 그들에게 확인이 될까 싶군요.”
“……그건 생각을 못 했습니다.”
고진유의 말대로 동료들에게 확인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잠깐 멈추시오.”
“아…… 네에.”
사내는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혈림대거를 멈추었다.
두두두두-
잠시 뒤, 전방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혈림대거를 따르던 혈귀들이 순식간에 앞으로 나와 호위를 섰다.
“저들은 누구요?”
멀리서 한 무리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적강철문(赤鋼鐵門)입니다.”
“지옥혈림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까?”
“그건…….”
사내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모양이군요.”
“그, 그게…… 적강철문의 삼공자가 아가씨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쫓아다닙니다.”
“……그렇군요. 북 소저는 어떤가요?”
“당연히 싫어하십니다! 만나기 싫다고 하시는데, 그가 혈성존님께 귀찮을 정도로 찾아간다고 하더군요.”
“한 여자를 좋아하는 건 이해하겠지만, 굳이 싫다는 여자를 귀찮게 따라 다니는 건 아니군요.”
“네, 맞습니다.”
적강철문의 무리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따각따각.
무리 중 한 사내가 말을 몰며 다가왔다.
“저자가 삼공자입니다.”
길게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날카로운 눈매에 얇지만 굳게 닫힌 입술이 상당히 고집이 강하고 욕심이 많아 보였다.
연한 청의 자락에 붉은색 신발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삼공자 연지호는 앞을 가로막은 흑귀들을 노려보았다.
“어허. 비키지 못할까?”
“삼공자, 물러나시오.”
당연히 호위대는 제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스윽.
연지호는 허리에 찬 검을 잡았다. 살기가 단번에 나왔다.
“죽고 싶은 건 아니겠지?”
“지금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것이오?”
호위대주 흑나찰 변용도 내력을 끌어 올렸다.
“이것들 봐라? 또 한 번 본인이 시원하게 칼춤을 보여줘야 정신을 차릴 것 같군.”
그의 검이 검집에서 반쯤 나올 때였다.
“호위대는 물러나시오.”
고진유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호위대가 옆으로 물러나자 연지호는 비웃음을 지었다.
“크큭, 진작 비킬 것이지. 꼭 내가 힘을 보여줘야 하는지 모르겠어.”
연지호는 말에서 내려선 뒤 혈림대거를 향해 걸었다.
“북 소저, 어서 나오시오! 그대의 남자, 연지호가 왔소이다.”
덜컹.
혈림대거의 문이 열리며 북소연과 무혼신녀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처음 보는 무혼신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하하. 이번에는 괜찮은 시녀를 데리고 다니는구려.”
“나?”
무혼신녀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어이, 지금 본녀보고 한 말인가? 이거 살다 보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을 다 보는구먼.”
“…….”
무혼신녀의 말에 이번에는 그가 잠시 멍해졌다.
“미친년이 어디서 함부로 말을 하는 거냐? 당장 네년의 목을 베어 버리……!”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북소연은 벌컥 화를 냈다. 눈에서 당장에라도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요?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하하! 본 공자가 바보인 줄 아시오? 북 소저가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 안 한 줄 아는 모양이군요.”
“아니, 대체 누가 없다고 그래요? 말해봐요. 당장 그를 지옥도로 보내 버릴 테니.”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녀였다.
“정말로 있단 말이오?”
“그렇다니까!”
“그가 누구요? 내가 직접 그를 봐야겠소.”
“그를 봐서 뭘 하려고요?”
“싸워야지 않겠소. 본인의 강함을 그대에게 보여주겠소! 강한 자만이 미인을 차지할 수 있소이다.”
“거참……! 만일 당신이 진다면요?”
“그럴 일이 없소. 본인이 드디어 소문주에 올랐소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아시오? 그만큼 본인의 무공이 강하다는 것이외다. 말해보시오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요?”
“화산도협! 그분이 누구인지 알고는 있겠죠?”
“뭐?”
연지호는 방금 이상한 이름을 들었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방금 화산도협이라 했소?”
“뭘 놀라요?”
“크하하하하!!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동안 가장 웃긴 말을 들었소이다. 화산도협이 미쳤다고 당신을 좋아한다 말이오?”
북소연은 기분이 나빠졌다.
“뭐야, 이건……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화산도협이 왜 사파 중에서도 쓰레기라고 하는 지옥혈림의 당신을 좋아하겠소. 차라리 다른 인물이라면 모를까.”
휘익!
그 순간, 연지호의 옆으로 기가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재빨리 손을 뻗으며 날아오는 것을 낚아채고자 했지만,
딱!
“크억!”
그의 이마에 맞고 떨어졌다.
연지호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보았다.
‘이건…….’
붉은색 야채.
말에게 주는 당근이었다.
연지호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소리쳤다.
“어떤 놈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