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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대도-216화 (216/425)

216화

다행이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탁기를 완전히 꺼냈다.

이제 한 고비는 무사히 넘어갔다.

지금부터는 자신의 문제였다.

고진유는 재빨리 바닥에 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중단전에 끌려 들어간 탁기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밖으로 나오기 위해 움직였다.

‘무조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해.’

탁기를 막기 위해 중단전의 한쪽 공간에 가두어 놓았던 사기와 마기를 끄집어냈다.

탁기는 새로운 먹이를 발견했다는 듯 사기와 마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세 개의 서로 다른 기가 싸우면서 혼합되며 하나로 섞이기 시작했다.

웅웅웅웅.

고진유의 가슴이 세차게 부풀어 올랐다.

하나 언제까지 부풀어 오를 수는 없는 법.

퍼어엉---!

중단전 안에서 하나로 섞인 기운들이 터지며 산화되어 퍼져 나갔다.

하지만 중단전을 완전히 감쌌던 하단전 내기에 미세하게 남은 탁기들은 중단전을 벗어나지 못했다.

‘휴우…… 됐다.’

고진유는 가부좌를 풀며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됐지?’

무혼신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백석 위를 보았다.

“…….”

무혼신녀가 백석에 앉은 채 고진유를 보고 있었다.

“끝났는가?”

“일어…… 나실 수 있습니까?”

“그대 덕분에.”

“아…… 네엡…….”

고진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움직이지 못한 채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랐다.

그녀의 상체는 여전히 가슴을 드러낸 채 그대로였다.

“…움직일 수 있으시면 왜…… 걸치지 않으십니까?”

“자네가 밟고 있지 않나?”

고진유의 양발 아래에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벗겨 놓았던 상의가 떨어져 있었다.

‘이런.’

다급하게 허리를 숙이며 바닥에 떨어진 상의를 주웠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린 채 건네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정신은 내가 없어야 되는 게 아닌가?”

그녀는 백 년의 동면에 들었다고 하나 삼십 대 중반의 나이였다.

게다가 그 나이가 될 동안 동정을 지켜왔다.

얼굴이 붉어지도록 민망한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내색하면 더 부끄러울 것 같았다.

무혼신녀는 뒤로 돌아선 고진유의 뒷모습을 보면서 상의를 걸쳤다.

“되었다.”

“오늘 일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당연한 말이로군. 내 몸을 봤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생각이었나?”

‘강적이네.’

나이를 떠나 처음 만나는 유형의 여인이었다.

고진유는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얼굴 표정에 미소가 비친 듯했다.

“왜 웃지? 그럴 생각이었던 모양이로군.”

“아닙니다. 무림에서 무혼신녀님 같은 분을 뵌 적이 없어 그렇습니다.”

“그것 또한 당연하다. 세상에 나보다 잘난 여인은 없을 테니.”

“…….”

고진유는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닮은 것 같네…… 나하고.’

그녀는 백 년의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했다.

“무림사에 대해 알고 있는 대로 말해봐라.”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따로 공부한 적이 없어서요.”

“화산파의 제자들은 따로 공부를 하지 않는가?”

“제자이긴 한데…… 정식 절차를 밟고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이제야 이해가 가. 정상적이라면 네놈이 뽑힐 리가 없지. 그럼 네 이야기나 한 번 해보아라.”

“나중에 하면 안 되겠습니까?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림사는 무구천의 천주께 물어보시면 잘 알려 드릴 것입니다.”

“됐다. 무림사 말고 그대 이야기나 해봐. 재미있어 보이는 이가 아닌가.”

고진유는 주위를 살폈다.

“……이왕 하려면 편하게 앉아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앉을 자리가 없는데? 여기 올라와서 앉아라.”

무혼신녀는 백석을 가리켰다.

“서 있는 것보다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백석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전 원래 고아 출신으로…….”

그리고 남에게 잘하지 않는 이야기를 꺼냈다.

한 번 말문이 트이자 거의 쉬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냈다.

어릴 때부터 무영도수의 명성을 얻은 시절. 그리고 무림에 발을 넣게 된 상황까지 생각나는 대로 말을 했다.

무혼신녀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경청했다.

중간중간에 오우, 같은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점점 빠져들었다.

“…….”

고진유는 잠시 말을 멈췄다.

“왜 멈추지?”

“제 이야기에 너무 감정 이입을 하시는 것 같아서요.”

“중간에 끊지 말고 계속하거라. 한참 흥미가 있었는데.”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거의 반시진 동안 얼굴을 마주 본 채 일방적으로 말을 했다.

“무림에서 꽤나 재미있게 보내고 있었군.”

“제가 봐도 꽤 흥미롭게 살고 있는 듯합니다.”

“극일천에서 화가 많이 났겠어. 그대가 제대로 판을 엎어버렸으니. 앞으로 많이 힘들 거다.”

“신경 안 씁니다. 하나씩 상대해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나에게 부탁하면 내가 도와주마.”

“무혼신녀님께서 도와주신단 말씀이십니까?”

“왜? 내가 약할 것 같나?”

“아닙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나 뵙던 무인들 중 가장 강해 보입니다.”

“훗. 당연하다. 난 무구천의 오무천자 중에서도 제일 강했다.”

“…….”

아무리 봐도 자신과 비슷했다.

‘음……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면서 이런 느낌을 받는 걸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황당한 느낌?

고진유는 어쩌다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어차피 무구천의 목적은 극일천의 일을 방해하는 거다.”

“도와주신다고 하니 거절은 안 하겠습니다.”

“주는 건 잘 받아먹는 성격이군. 좋은 자세로다.”

“고맙습니다.”

고진유는 더는 동굴 안에서 할 일이 없는 듯했다.

“그만 나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갈 때 나가더라도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

“…….”

무혼신녀는 내력을 끌어 올렸다.

“백 년 만에 일어났는데 몸이 제대로 돌아왔는지 확인은 해봐야 할 것 같구나. 어떠냐?”

“좋습니다.”

“난 다른 건 몰라도 무공에 대해서는 대개 진지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지요.”

“비무를 하자고 해서 겁부터 주는 것이냐?”

“……제가 속이 좁은 놈은 아닙니다.”

“하하, 그럼 한번 몸을 풀어볼까?”

* * *

백석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양쪽으로 물러났다.

스윽.

무혼신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 위로 기가 모이면서 검을 만들어냈다.

“어때. 멋있느냐?”

“무형검을 이리 쉽게 유형화시키는 분은 처음 봅니다.”

“내가 잘났으니 어쩔 수 없지. 먼저 공격하겠다.”

휘리리릭!

그녀는 백석의 끝을 가볍게 밟은 뒤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그와 동시에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무형검강이 고진유의 향해 날아왔다.

타악!

고진유의 검집을 건드리자 사의검이 위로 솟구치며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빠르게 사의검을 잡은 뒤 매화검강으로 그녀의 무형검강을 베었다.

스가아앙-

고진유의 바로 앞에서 무형검강이 날카롭게 잘려 나갔다.

“흠. 이 정도 매화 향기를 낼 수 있는 화산파의 검이 있을 줄 몰랐군. 이 세대의 화산파는 정말로 복받았구나.”

“이번에는 제가 선공하겠습니다.”

“얼마든지.”

파앗-!!

고진유는 호충신법을 펼쳐 그녀의 눈앞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번쩍.

좌우로 휘두른 사의검.

마치 그녀가 방금 전에 보여주었던 공격과 같았다.

‘하, 진짜 웃긴 녀석이군. 똑같이 나오시겠다?’

무혼신녀 또한 고진유가 보여주었던 방식대로 막아내고자 했다.

그녀의 가슴으로 향해 다가온 사의검의 검강을 베기 위해 무형검을 내리쳤다.

파아아앗-!!

서로 부딪히기 전에 사의검의 검강이 사라지면서 먼지처럼 퍼졌다.

‘약은 놈. 당했구먼.’

무혼신녀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완벽한 허초에 당했다.

이 녀석이 제대로 말은 안 했지만 무림에서 보통 놈이 아닐 게 분명했다.

스걱.

가느다랗게 잘려 나가는 소리.

무혼신녀의 발아래로 잘린 상의 자락이 흘러내렸다.

“네놈, 내 가슴을 좋아하는구나.”

휘익!

고진유는 재빨리 돌아섰다.

설마 겉옷 하나만 입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잊었습니다.”

“여기에는 이 옷밖에 없다. 이러고 나갈 수는 없겠는데.”

고진유는 얼른 매화도의를 벗어 손만 뒤로 뻗었다.

“잠깐만이라도 이것을…….”

* * *

천주 도해령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동굴 밖에서 지켜 섰다.

혹시나 누군가 안으로 들어간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안으로 들어간 고진유가 제대로 했는지 궁금했다.

무혼신녀는 주화입마를 입었다고 알려졌지만, 정확히 어떠한 상황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오직 전대 천주가 알려준 내용이 전부일 뿐.

찌이이잉-

그때, 기의 파동이 동굴 벽을 타고 밖으로 들렸다.

“무슨 일이지?”

직접 보지 못했지만 분명 내력에 의한 기의 움직임이 틀림없었다.

도해령은 당장에라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마음을 조아리며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다.

한참을 보던 그녀의 시선에 두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일남일녀.

사내는 화산도협 고진유가 분명했다.

그 뒤로는 매화도의를 걸친 여인이 나오고 있었다.

‘성공했구나……!’

도해령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데…… 왜 도의를 입고 계시지?’

그때, 힘이 느껴지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굴 안에서 고진유와 나누었던 목소리와는 달랐다.

“그대가 천주인가?”

‘이런.’

도해령은 순간 잘못한 것을 알았다.

“천주 도해령입니다. 무혼신녀님을 뵙습니다.”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대가 천주라고 해서 본인에게 존대를 받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제가 어찌 무혼신녀님께 존대를 받겠습니까. 편안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무혼신녀는 허리를 바로 일으키는 도해령을 보았다.

“무구천의 천주 자리에 여인이 앉아 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 그대를 무시하는 말이 아니네.”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 되겠지.”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고맙구나. 백 년이 지나도 잊지 않고 나를 살려주지 않았는가.”

“옥체에는 이상이 없으십니까?”

“화산도협 덕분이다.”

무혼신녀는 옆에 선 고진유를 가리켰다.

“그가 없었다면 난 얼은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겠지.”

펄럭.

그녀는 입고 있던 매화도의를 슬쩍 건드렸다.

“천주, 혹시 입을 만한 옷이 있겠는가?”

“아…… 네에. 저를 따라오시지요.”

무구정사의 현판 아래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무혼신녀는 바닥까지 길게 내려온 분홍의 마면군에 투명할 정도의 백색 저고리가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지었다.

천주 도해령은 한 번 더 고진유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화산도협, 고맙네. 본 천에 원하는 게 있다면 말을 해보시게.”

고진유가 무구천에 원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괜찮습니다. 좋은 경험을 한 것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게 좋은 경험이었나?”

두 사람의 대화에 무혼신녀가 불쑥 끼어들었다.

“…….”

고진유는 피식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무혼신녀님께서도 좋은 경험이지 않으셨습니까? 언제 그런 경험을 해보실 수 있겠습니까. 두 번 다시는 하지 못할 일이지요.”

“하하핫!”

무혼신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천주 도해령은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무혼신녀가 기분이 좋아 보이니 다행이라 여겼다.

백 년이나 지난 뒤 깨어난 그녀였다.

만일 자신이 그녀의 경우라면 우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화산도협, 본인이 혼자 결정을 내릴 수만 있다면 철갑을 열 수 있는 극일천주의 피를 주고 싶소.”

“…….”

고진유는 뜬금없이 철갑에 대해 말을 꺼낸 천주의 뜻을 파악했다.

‘늙은 여우군.’

무혼신녀의 앞에서 철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생각대로 무혼신녀는 덥석 미끼를 물었다.

“천주, 그게 무슨 말인가? 철갑이라는 게 무엇이지?”

도해령은 기회라고 여겼는지 글을 보고 읽는 듯 막힘없이 설명했다.

“요약하면, 극일천에서 찾고자 하는 물건이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천주는 철갑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는 모양이지?”

“네, 알고 있습니다.”

“뭔가?”

“…….”

그녀는 무혼신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눈빛으로 고진유를 가리켰다.

“그렇군. 극비에 해당하는 물건이구나.”

“네. 맞습니다.”

무혼신녀는 시선을 돌려 고진유를 보았다.

“그대가 철갑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무도 모르게 철갑을 버렸습니다.”

고진유의 말에 도해령은 화들짝 놀랐다.

“화산도협, 잠깐만…… 정말로 철갑을 버렸다는 것인가?”

“믿기지 않습니까?”

고진유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도해령의 눈동자가 흔들거리며 목소리가 떨렸다.

“그걸…… 왜 버렸지?”

“간단합니다. 철갑은 나에게 계륵 같은 존재입니다. 굳이 지니고 다니다가는 피곤해질 수 있는 물건이지요. 열쇠인 그의 피도 구하지 못할 것 같아, 이왕이면 모두가 가질 수 없도록 버렸습니다.”

“아…… 하…….”

천주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하하하하!!”

그때, 무혼신녀가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천주 도해령은 당황한 시선으로 대소를 터뜨린 그녀를 보았다.

무혼신녀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가르쳐주듯 말을 했다.

“천주, 지금 그 말을 믿고 있나?”

“……!”

“제 사부의 목숨과 같은 철갑을 버린다? 그대는 절대로 그럴 인물이 아니지. 화산도협, 아니 그런가?”

무혼신녀는 거짓말한 게 들켰다는 듯 환하게 미소를 띠는 고진유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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