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천주 도해령의 뒤를 따르면서 자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았다.
‘난…… 아직 멀었군.’
그녀를 보면서 무구천의 수장이 맞을까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외면은 결국 빙산의 일각일 뿐.
사람을 상대함에 있어 내면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서가는 그녀는 무인이었다.
그것도 아주 뛰어난 신법을 펼치고 있는 무구천의 천주.
스르륵.
도해령은 앞서 신법을 펼치면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대단한 젊은이야.’
정확히 두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고진유의 신형.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움직임에 완벽하게 맞추며 움직이고 있었다.
상대방의 내력에 맞춰 완벽하게 조절하지 않고서야 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오는 것은 어려웠다.
‘무공의 수준이 어떠한지 알 만하군.’
두 사람은 골목 사이를 어지럽게 지나쳤다.
마치 같은 장소를 빙빙 도는 기분이 들 정도.
다음에 온다면 혼자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그녀의 신법이 멈췄다.
골목 막다른 끝에 세워진 사당.
그녀가 다시 움직였다.
“잘 보고 따라오시오.”
“알겠습니다.”
사당에는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음…… 좌삼우이…….’
고진유는 유심히 그녀의 발걸음을 보면서 진법에 들어섰다.
슬쩍.
도해령이 잘 따라오는지 돌아보았지만, 고진유는 힘들지 않게 뒤를 따랐다.
생각보다 더 뛰어난 사내였다.
고진유는 사방에서 물컹거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공간으로 들어섰다.
먼저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한 번도 머뭇거리지 않고 뒤따라온 고진유를 기다렸다.
“잘 왔소이다. 이곳이 무구천일세.”
무구천의 인물이 아닌 외부인으로서는 그가 처음이었다.
도해령이 앞을 가리키자, 사당 뒤편에는 광장과 여러 건물이 펼쳐져 있었다.
“여긴…… 다른 세상입니까?”
“아닐세. 그대가 사는 세상과 같은 곳이지. 다만 진법에 갇혀 있는 게 다를 뿐이라네.”
“그렇군요.”
그녀는 앞장서며 건물 중 한 방향으로 향해 걸었다.
건물들을 지나가자 무공을 수련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무구수호군들이라네. 본 천의 다른 무인들과 달리 이들만이 무구천에서 수련을 하지.”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는 것이군요.”
“그렇다네.”
두 사람은 여러 건물을 지나 동굴 앞에 멈춰 섰다.
가까이 다가서는 것만으로 냉기가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였다.
‘엄청난 냉기야. 북해도 이보다는 덜 추웠는데.’
“이 추위는 진법 때문입니까?”
“동굴 안에 빙혼진법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지.”
“무혼신녀가 여기 안에 있다는 말이군요. 이 정도의 냉기라면 일반 사람들은 일각도 못 버틸 것 같습니다만…….”
“그대의 말이 맞네. 무턱대고 들어갔다가는 산 사람도 얼음 송장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냉기가 강하지.”
‘이 정도이면 백 년이 아니라 천 년이라도 얼은 채 그대로 있겠군.’
눈앞에서 직접 보면서도 신기하고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피부를 찌르는 냉기를 느끼자 너무 쉽게 허락한 게 아닌가 싶은 걱정이 앞섰다.
“이대로 들어가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추울 것 같습니다만…….”
“후후.”
춥다는 말과 표정에 천주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빙혼진법을 파훼시킬 걸세. 안으로 들어가면 무혼신녀가 있을 테니 부탁하겠네.”
“혹시 깨어나서 저를 공격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
고진유의 물음에 천주는 명확한 답을 할 수 없다는 듯 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 또한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미안하네. 백 년 전의 일이라…….”
“이런, 심각하군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만…….”
도해령은 허리 안쪽에서 신패를 꺼냈다.
“이것을 받게.”
둥근 청옥의 신패로 무구령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무구령패일세. 무구천주의 신분을 알려주는 신패이지. 만일 무혼신녀가 공격한다면 이 신패를 보여주게. 큰일은 당하지 않을 듯싶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고진유는 신패를 얼른 받은 뒤 곧바로 챙겼다.
“화산도협, 지금 빙혼진법을 파훼할 테니 준비하도록 하게.”
천주 도해령은 그 자리에서 바로 앉은 뒤 내력을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눈앞에 커다란 원형의 소용돌이처럼 백색의 냉기가 돌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냉기의 소용돌이는 점점 작아지면서 하나의 점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됐네. 안으로 들어가 보게.”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진법이 사라진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빙혼진법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 냉기는 주위에 남아 있었다.
‘어디에 있을까?’
동굴 안은 대낮 정도는 아니지만 이른 새벽, 여명이 나타나기 전과 비슷할 정도로 밝았다.
천천히 걸으면서 살피자,
반짝.
멀리 백색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
‘저기…… 에 뭔가 있는데?’
고진유는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멈칫.
가까이 다가선 고진유는 걸음을 멈췄다.
빛의 정체는 백색의 돌이었다.
그 위에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무혼신녀.’
냉기를 뿜어내는 여인.
평평한 백색의 돌 위에 누워 있는 그녀가 눈을 뜨고 있었다.
“누구냐?”
“……!”
‘주화입마를 입었다고 했는데?’
갑자기 말을 걸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당연하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혹시나 말이 통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왜 걱정을 했지?”
“괜한 오해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착한 일 하려다가 괜히 다칠 수 있는 상황인지라.”
“착한 일이라는 게 뭐지?”
“주화입마를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제가 아는 주화입마가 아닌 모양이군요.”
“주화입마라…… 내력을 운기하다가 못 움직이게 된 것도 주화입마이긴 하지.”
“조심하시지요.”
“흥. 웃긴 놈이군.”
처음 보는 놈에게 조심해서 운기행공을 하지 그랬냐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내가 동면에 들어선 지 몇 년이 지났느냐?”
“백 년이라고 하더군요.”
“천만다행이군. 빙혼진법의 효력이 미치는 기간이 백 년이었지.”
고진유는 좀 더 가까이 다가서려 하자,
“그대로 멈춰라. 발밑에 그려진 원 안으로 무작정 들어오면 죽을 수 있다.”
“…….”
그녀의 말대로 백석 주위에 원이 그려져 있었다.
“네가 누구인지 신분을 밝히는 게 좋겠군.”
“화산파 제자 고진유라 합니다.”
“네놈이 도사라고? 전혀 도사다운 말투가 아니거늘.”
“저도 도사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고진유는 천주에게 받은 신패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오기 전 천주님께 받은 것입니다. 무구령패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나쁜 놈은 아닙니다. 걱정 마시지요.”
“…….”
무혼신녀는 잠시 조용해졌다.
“바닥에 보면 십이지신이 새겨져 있다. 덩치가 큰 놈부터 차례대로 누르면 된다.”
“오…… 신박하네요.”
고진유는 바닥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정을 한 듯 진(辰)을 제일 먼저 눌렀다. 이어 두 번째로 축(丑)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저…….”
“뭐냐?”
“헷갈려서 그렇습니다. 호랑이가 큽니까, 아니면 소가 큽니까?”
“……요즘은 화산파에서 어떤 기준으로 제자를 받는지 모르겠군. 당연히 소가 더 크지 않느냐?”
“아하…… 호랑이가 작군요.”
“…….”
“그럼…… 호랑이가 큽니까? 말이 큽니까?”
“……됐다. 그냥 가라.”
“죄송합니다. 호랑이를 직접 본 일이 없습니다.”
호랑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말에 무혼신녀는 이해하기로 했다.
“하아…… 내가 부르는 대로 눌러라. 오인해미술신유묘사자. 됐느냐?”
“감사합니다.”
툭. 툭. 툭. 툭…….
고진유는 십이지신의 형상을 하나씩 눌렀다.
스으으윽.
백석 주위에 흐르던 기가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진유는 가까이 다가선 뒤 얼굴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젊은 놈이군.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약관을 넘었습니다.”
“허, 화산파에서…… 이런 녀석이 나오다니 믿을 수 없다. 복받았군.”
“사조님께서도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놈 사부는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지?”
“사부님께서는 극일천에 의해 돌아가셨습니다.”
“극일천에서? 어떻게 된 일이지?”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고진유는 누워 있는 무혼신녀를 자세히 보았다.
“무혼신녀께서 움직이지 못하시는 게 주화입마 때문입니까?”
“주화입마라고 할 수도 있겠지. 운기를 하면서 무리를 한 게 이렇게 되었다.”
“무구천에서 해결을 하지 못했습니까?”
“그때 해결했다면 내가 백 년 동안 동면에 들어갔겠느냐?”
“…….”
“그때 천주께서 말씀하셨지. 내 몸 안에 퍼져 있는 탁기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사내의 내력이 필요하다고. 동정을 지킨 사내.”
“…….”
“난 틀렸다고 생각했다. 과연 나를 뛰어넘는 내력을 지녔는데 동정을 지킨 멍청한 사내는 없을 것이라 봤으니까.”
“……제가 멍청한 놈이긴 합니다. 근데 왜 동정을 지켜야 합니까?”
“웃긴 놈이군. 나 또한 동정의 몸이기에 음(陰)이 섞인 사내의 내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희한한 일도 다 있습니다.”
“하아…… 세상에는 네가 모르는 일이 천지다. 굳이 전부 알 필요도 없고. 그건 그렇고, 지금까지 정말 여자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것이냐?”
“그건 아니죠. 저도 사내입니다. 당연히 많이 만나봤습니다.”
“여기에 올 정도면 무림에서 거의 적수가 없을 정도일 텐데, 여인들이 가만히 둔 게 이상하군.”
“제가 상당히 까다로운 사내라서요.”
“하하!”
무혼신녀는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백 년 만에 만난 사내가 웃긴 녀석일 줄은 몰랐다.
그녀는 처음과 달리 긴장이 풀렸다.
“무혼신녀님, 이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는지는 아느냐?”
“몸속에 잠겨 있는 탁기를 밀어내면 끝나는 일이 아닙니까?”
“맞다. 내 몸속에서 탁기를 몰아내면 된다. 하지만…….”
“저를 의원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 무혼신녀님을 환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다.”
“실례하겠습니다.”
고진유는 백석 위에 누워 있던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처음에는 목석을 잡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음…… 전혀 반응이 없는데…….’
매화진기를 손을 통해 그녀의 혈맥을 따라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저항을 받았다.
‘대체 이 기운들은 뭐지?’
매화진기가 그녀의 몸 안에 들어가자 갑자기 나타난 탁기들이 단숨에 공격을 한 뒤 사라졌다.
고진유는 손을 뗀 뒤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후우…….”
“힘들겠는가?”
“사실대로 말을 한다면 이런 경우는 처음 봤습니다.”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되네. 본녀는 백 년이나 살지 않았는가?”
“그러게 말입니다.”
“…….”
“하지만 여기에서 물러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고진유는 결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보다 타인의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잘못된다고 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신녀님의 몸속에 든 기운이 어떠한지 알았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치료를 시작하면 둘 중 하나는 사라질 것입니다. 곧바로 시작하면 신녀님께서 힘들 것입니다.”
“참아야지 않겠는가.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어차피 잘못되어도 죽기밖에 더하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눈을 감으시면 좋겠군요.”
스르르-
무혼신녀가 눈을 감는 동시에 상의가 흘러내리고 나신이 드러났다.
만일 그녀의 몸이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움찔거렸을 것이다.
고진유는 하단전과 중단전을 모두 개방하고, 그녀의 가슴에 양손을 내려놓았다.
백 년 동안 빙혼진법에 의해 동면했던 몸에, 뜨거운 열기가 고진유의 손을 통해 전해져 왔다.
우우우웅-
양손으로 통해 가슴으로 들어선 진기가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슈우우우욱.
고진유는 억지로 진기를 전신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기다린다. 일부러 불리한 장소로 갈 이유는 없어. 급한 건 이놈들이다.’
단전을 압박할 수 있는 위치에 외부의 진기가 모여 있는 것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었다.
고진유의 예상은 맞았다.
탁기가 사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 방에…… 몰아내야 한다.’
두두두두-
탁기들의 공격은 거칠었다.
그녀의 가슴에 모여 있는 매화진기의 원정을 흡수하기 위해 파고들기 시작했다.
“우욱…….”
무혼신녀는 고통을 참아냈다.
가슴이 터져 나가는 아픔에도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버텨냈다.
그녀의 가슴에 손을 댄 고진유의 두 팔도 떨렸다.
‘엄청나게 지독하다.’
끊임없이 공격하는 탁기에 몸이 무너질 것 같았다.
‘좀…… 더…….’
고진유는 최대한 버티면서 참아냈다.
쿵- 쿵- 쿵-
탁기들의 공세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녀의 전신에 퍼져 있는 탁기들이 전부 모여 최후의 공격을 위해 달려들었다.
‘지금……!’
주화입마를 당한 상대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탁기를 밖으로 밀어내는 게 정상이지만, 고진유는 바로 계획을 변경했다.
탁기가 너무 강했다.
백 년 전이었다면 탁기를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 년의 동면 상태에서도 탁기는 동면에 빠지지 않았다.
그녀의 몸속에서 힘을 기르고 있었다.
천주 도해령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단숨에 잡아당긴다.’
고진유는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
그녀의 몸에 깃든 탁기를 흡수해 중단전에 끌어당긴 뒤 가둘 것이었다.
파아앗-!!
매화진기를 넓게 펼치며 보자기에 묶듯이 탁기를 가두었다.
쿵! 쿵! 쿵!
탁기가 빠져나가기 위해 매화진기를 계속해서 공격했다.
흐으으읍.
고진유는 양손으로 흘려보냈던 매화진기를 빠르게 끌어당겼다.
‘우우욱.’
매화진기에 감싸인 탁기는 그녀의 몸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기 위해 반발했지만, 결국 고진유의 중단전으로 빠르게 끌려 들어갔다.
파앗--!!
순간 고진유의 손이 떨어지며 뒤로 물러났다.
‘됐다……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