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214화 (214/425)

214화

스윽.

무구천의 천주는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미소를 띤 환한 표정이 고진유를 반갑게 맞이했다.

“드디어 화산도협을 만나게 되는구려. 본인이 바로 무구천의 천주 도해령일세.”

“화산파 제자 고진유라 합니다. 천주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고진유은 공손하게 예를 다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그녀는 신기한 듯 고진유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대의 나이는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직접 보니 많이 어려 보이는구먼.”

천하오무에 이름을 올린 고진유를 직접 만나지 않았다면 나이가 많은 인물로 여겼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겨우 약관을 넘어선 나이였다.

고진유가 안으로 들어왔을 때도 내색은 안 했지만 생각 외로 너무 젊어서 놀랐다.

‘이 나이에…… 엄청난 인물이다.’

무림사에 약관을 넘어선 뒤 천하오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무인이 있었던가?

초일군조차 마흔의 나이를 넘어선 뒤 중원인들에게 무신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두 분은 편안하게 자리에 앉도록 하시오.”

“고맙습니다.”

도제가 먼저 자리에 앉은 뒤 고진유가 바로 뒤따라 앉았다.

“화인도 앉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화인도 곧바로 빈자리에 앉았다.

천주 도해령은 처음부터 무거운 대화보다는 가볍게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했다.

그녀는 미소를 띠며 고진유에게 물었다.

“화산도협께서는 본인의 제자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제자라고 하시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옆에 앉아 있는 화인이 본녀의 제자일세.”

“아, 죄송합니다. 수경봉께서 천주님의 제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본인이 알려주지 않고 무턱대고 물어봤네. 큰 실례를 했군.”

“그럴 수도 있지요. 괜찮습니다.”

고진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수경봉에 대해 물어보셨지요?”

“그렇네.”

“중원십봉의 명성에 타당한 분이라 생각이 듭니다. 뛰어난 제자를 두셨습니다.”

틀에 박힌 대답이었다.

“그것이 끝인가?”

“끝입니다.”

화인은 사내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제자를 떠나 객관적으로 봐도 오미화에 못지않은 미모를 지녔다.

‘여인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인물이 맞군.’

도해령 또한 고진유와 청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화산도협께서는 도사의 신분이라 여인을 멀리하시는 모양이구먼.”

“도사라서 멀리하는 건 아닙니다. 좋은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마음이 갑니다.”

“흠…… 화인은 마음에 가지 않는다는 뜻처럼 느껴지네.”

“만난 지 겨우 반시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하, 그렇군. 본인이 주책일세. 그대의 마음에 차는 여인이 있을지 궁금하군.”

“본도도 사내입니다.”

“좋아하는 여인이라도 있는 모양인가?”

“있습니다.”

“…….”

너무 솔직하게 대답하는 고진유를 보면서 도해령은 당황했다.

“그대가 좋아하는 여인이 누구인지 물어봐도 될까?”

“북소연 소저입니다.”

“북소연이라면…….”

도제가 중간에 나섰다.

“혈성존의 여식입니다.”

“이런, 지옥혈림의 여인이라.”

그녀는 바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진유와 지옥혈림의 관계에 대해서 천주 도해령은 잘 알았다.

“남녀 사이에는 국경조차 의미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렇군. 하나…… 지옥혈림이 그대 사부의 원수라 하지 않았는가?”

“그 부분까지 아신다면 본도가 사부님의 원수를 죽였음을 알고 계시겠군요. 지옥혈림이 원수라고 했던 건 서로 정확한 사정을 몰랐을 뿐입니다. 그리고 지옥혈림은 그동안 본도에게 충분하게 합당한 사죄를 했습니다.”

그의 사부를 사로잡은 뒤 지옥혈림에 넘긴 인물, 사마추를 고진유가 죽인 사실을 무구천 천주인 그녀도 당연히 알았다.

“이젠 가벼운 이야기는 다 나눈 듯하지 않습니까? 본도에게 본론을 말씀하셔도 됩니다.”

도해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겠군. 자기 생각에 명확한 성격을 지녔어.’

지옥혈림을 용서했다는 말에 천주 도해령은 고진유가 상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화산파의 제자라고 하지만 정파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철저히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도 아니었다.

‘대체 어떤 성격인지 모르겠구먼.’

그녀는 의문이 들었다. 어떤 방향으로 고진유를 상대해야 할지 망설였다.

도제를 통해 그를 부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철갑의 존재.

무구천은 철갑을 열 수 있는 극일천주의 피를 지니고 있었다.

철갑을 얻을 수 있다면 극일천과의 싸움에서 유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먼저 말문을 열었다.

“철갑을 지니고 있지 않은 듯하네. 중요한 물건이거늘.”

“지니고 다니기에 불편해서 숨겨 놓았습니다.”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철갑을 잘 숨겨 놓았는지 모르겠군. 사마추를 잡았다고 하나 무림맹엔 여전히 숨은 자들이 많이 있을 걸세.”

“알고 있습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무구천의 인물들도 있을 테지요.”

“…….”

“철갑은 본도가 아니면 찾을 수 없는 곳에 잘 숨겨놓았습니다. 맹주전을 샅샅이 뒤져도 절대로 찾지 못할 겁니다.”

“맹주전에는 숨겨 놓지 않았다는 말이군.”

“당연하지 않습니까? 본도가 자리를 비우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맹주전에 숨기지는 않을 테지요. 정말로 누군가 맹주전을 뒤지고 있다면 머리가 나쁘다고 볼 수 있겠군요. 그런 머리라면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고진유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마치 비웃는 듯한 웃음처럼 느껴졌다.

“무림맹 전체를 뒤져도 찾지 못할 겁니다. 천주님께서는 극일천에서 찾아낼 수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군. 다행히 철갑에 대해선 걱정 안 해도 되겠어.”

천주와 도제는 서로 난감한 시선으로 마주 보았다.

고진유가 없는 사이에 무림맹을 뒤져 꼭 찾아내도록 명을 내렸다.

“이번엔 본도가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게.”

“무구천에서는 철갑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본 천에서 알고 있다고 해서 굳이 알려줄 이유가 있다고 보는가?”

“…….”

고진유는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입니다. 본도도 대충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게 정말인가? 열어보지 않은 이상 알지 못할 텐데?”

도제가 먼저 관심을 보였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눈치가 백단입니다.”

“화산도협,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

“…….”

“왜 말이 없는가?”

“본도가 굳이 알려줄 이유가 있습니까?”

“알고 있다는 것이 거짓말이군. 굳이 우리에겐 격장지계를 쓸 필요는 없다네.”

“본도가 얻을 게 무엇이 있다고 격장지계를 쓰겠습니까. 어차피 철갑을 여러분께 줄 생각이 없습니다.”

“…….”

“본도의 말을 안 믿는 것 같으니 한 가지가 말씀드리지요. 그 안에 천령약의와 연관이 된 물건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맞습니까?”

천주와 도제, 그리고 화인까지 고진유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과연 대단하네. 철갑을 열어보지 않고도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는군.”

“이제 천주님께서 본도를 만나고자 한 이유를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설마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천주는 도제를 시켜 고진유를 직접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철갑 때문에 일부러 불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굳이 그것만으로 무리하게 얼굴을 보여주며 만날 이유는 없었다.

“한 가지 부탁을 하고자 하네.”

“싫습니다.”

고진유는 부탁이 무엇인지 듣지도 않고 단칼에 거절했다.

도제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보게, 무슨 부탁인지 듣지도 않았네.”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본도에게 부탁이 있었다면, 철갑은 접어둔 채 처음부터 말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건…….”

“본도가 당연히 들어주리라 생각한 건 아니시라 믿습니다. 만일 그런 생각이었다면 본도를 너무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닌지요.”

“…….”

“부탁한다는 말 외에 본도에게 할 말이 없다면 그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화인은 그만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다.

“이봐요. 당신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우리를 무시하는 것인가요?”

“……무시라. 그럴 수 있겠군요.”

척.

고진유는 일어난 뒤 그녀에게 포권을 했다.

“본도의 뜻이 소저에게 그런 식으로 느껴졌다면 미안하오. 사과하겠소이다.”

뒤이어 천주와 도제에게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큰 실례를 했습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나가는 길을 아니 나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윽.

그러자 이번에는 천주가 일어나며 허리를 숙였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오. 부탁하는 입장에서 본인이 잘못 생각한 것 같네.”

“사부님……!”

화인은 화들짝 놀랐다.

괜히 자신 때문에 사부인 천주가 사과를 한 것처럼 보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대가 부탁을 승낙할지는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결정을 내렸으면 좋겠구먼.”

“……알겠습니다. 부탁이 무엇인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고진유와 천주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 * *

천주는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화산도협, 그대에게 부탁하기 전에 물어볼 것이 있네.”

“개인적인 일입니까?”

“그렇네.”

“그렇다면 여기 두 분은 듣지 않았으면 합니다.”

고진유는 굳이 개인적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 생각을 못 했군. 도제께서는 화인과 함께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면 고맙겠소.”

“알겠습니다.”

도제와 화인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방에는 단둘만 남았다.

고진유가 먼저 물었다.

“부탁이 무엇인지 말씀하시지요.”

“……본 천에는 최고의 무인이라 할 수 있는 오무천자(五武天者)가 있네. 도제와, 그대가 알고 있는 고독기검께서 오무천자이지. 그중 최고의 오무천자는 무혼신녀(武魂神女)라 할 수 있네.”

“오무천자가 강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백 년 전, 무혼신녀인 그녀가 무공을 위해 폐관에 들어갔다가 그만 주화입마에 빠졌네.”

“……방금 백 년 전이라 했습니까?”

“그렇다네.”

“백 년이 지났다면…… 죄송하지만, 그분은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전대 무구천의 천주께서 주화입마에 빠진 무혼신녀를 살리기 위해 빙혼진법을 펼쳐 동면상태로 만들어놓았네. 그날 이후 죽지 않은 채 지금까지 그대로 있지.”

“백 년이나…… 가능하다는 것입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일세. 무혼신녀는 보통사람과는 다른 특이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지.”

“극일천이나 무구천이나 정말 대단하군요.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할 일을 하는 곳입니다.”

고진유는 무엇을 부탁할지 충분히 예상이 되었다.

무혼신녀의 존재.

무구천에서 부탁하는 것은 분명 무혼신녀와 연관이 있을 것이었다.

“백 년 전 당시 주화입마에 빠졌던 무혼신녀는 이른 시일 내에 치료해야 했지. 하지만 유일한 방법이 그 당시에는 없었다네.”

“지금은 그 치료법이라는 게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네. 무혼신녀는 오직 천주의 명을 따를 뿐이며 최강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 동정을 유지해야 했다네.”

“…….”

“주화입마에 빠진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녀와 같은 동정의 사내만이 가능하지.”

“흠…… 동정의 사내라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많겠지. 하나 큰 문제가 있네. 무혼신녀의 내력을 능가하는 사내여야만 가능하다는 것이었지.”

“무혼신녀의 내력이 얼마나 강한 것입니까?”

“도제보다 훨씬 더. 최소 두 배 정도는 넘을 것이라 예상이 되네.”

동정을 지닌 사내에 내력까지 높아야 했다.

‘없겠군. 내가 봐도 난 특별한 경우니까…… 한데…… 내가 부탁을 들어준다고 하면 동정이라는 게 알려지…… 아…… 음…….’

고진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부탁하네. 그대가 아니라면 무혼신녀는 더는 존재할 수 없다네.”

“계속 동면할 수 없는 것입니까?”

“올해가 마지막 백 년째라네. 만일 올해의 기한을 넘긴다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지. 백 년 동안 수많은 무인들을 살폈지만 그녀를 살릴 수 있는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네. 무신 초일군조차 동정일 때는 내력이 약했지. 내력이 높아졌을 때는 동정을 잃은 상태였고.”

“……좋습니다. 무구천의 부탁을 들어드리지요.”

천주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그때 고진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하지만 공짜로 부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

단번에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이런 큰 부탁을 당연시 여기진 않으셨겠지요. 본도의 생명에도 위험이 따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주화입마에 빠진 무림인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시전자 또한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화산도협, 무엇을 원하는가?”

“그의 피를 달라고 하면 안 주겠지요?”

“…….”

천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혼신녀가 중요한 건 맞지만 철갑의 열쇠를 줄 수는 없었다.

“그대가 계속해서 그것을 원한다면 본 천은 무혼신녀를 포기할 수밖에 없겠지.”

“무혼신녀보다 중요한 게 철갑이라는 말이군요. 절대로 남에게 줄 물건이 아니니 꼭 들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본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인가?”

“부탁은 들어드리겠습니다. 대신 다른 것을 받도록 하지요. 하나 철갑을 굳이 열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철갑이 꼭 필요한 사람은 보아하니 극일천과 무구천 같으니까요.”

고진유는 호기심이 났다.

백 년 동안 동면 상태에서 살아 있다는 게 궁금했다.

혹시나 그의 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물어봤지만 포기를 못 하는 무구천이었다.

“빙혼진법을 펼친 곳이 어딥니까? 가시죠.”

“…….”

“또 문제가 있는 겁니까?”

그녀가 멈칫했다.

“그게 아니네. 그곳은 무구천의 지하에 펼쳐져 있네.”

“아. 본도가 그곳을 중원에 알리게 될까 걱정이 되신 모양이군요.”

“…….”

천주 도해령은 다시 대답이 없었다.

“그게 문제가 된다면 무혼신녀를 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아닐세. 그대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구먼.”

천주는 결심을 했다.

도제에게조차 알려주지 않은 무구천의 본진.

무구천이 존재한 이후 타인과 함께 들어가기는 처음이 될 것이었다.

스윽.

도해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인의 뒤를 똑바로 따라오도록 하게.”

샤르르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완벽한 신법이다.’

그녀의 움직임은 호충신법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럼…… 나도 가볼까.’

파앗!

고진유도 사라진 그녀의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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