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213화 (213/425)

213화

얼굴이 익숙했다.

“누군가 했소이다.”

“…….”

어둠 속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젊은 사내.

배조경은 그를 보면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미행을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화산도협.”

“느낌에 당신인 줄 알았소이다.”

“내가 뒤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간단하지 않소? 잘 따라왔으면 들키지 않았을 거요.”

“…….”

고진유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 맞는 말이군. 들키지 않게 미행을 했어야 했군. 모든 게 내 책임이었어.”

“알았으면 됐소. 앞으론 힘들게 따라다닐 필요 없으니 잘됐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니 대충 느낌에 극일천의 인물 같아 보였다.

“화산도협, 저자는 누구인가?”

“흑화전주라 하더군요.”

“음, 흑화전주 배조경이군.”

도제의 눈이 커졌다.

극일천의 십전.

그중 흑화전의 수장에 대해 도제가 알고 있었다.

“도제, 본인을 알고 있군.”

“그 정도는 기본이지 않나? 극일천에 대해서는 웬만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지.”

“크크크. 착각은 자유라고 하더니…… 겨우 첩자 몇 명 넣은 주제에 극일천을 전부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 마시오. 윤 총관을 우리가 모를 것이라 여기시오?”

도제의 신형이 짧게 멈칫거렸다.

“……알면서 가만히 두었다는 것인가?”

“일 처리를 잘하는 인물이라 하더이다. 그분의 말씀대로라면 좀 더 데리고 있다가 정리한다고 하더군.”

도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알면서도 곁에 둔 이유.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극일천에 대한 정보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도제의 굳어진 표정에 배조경은 비웃음이 나왔다.

“크크크. 뭔가 딱 느낌이 오지 않소? 망했다는…….”

“…….”

“사실 무구천도 대단하긴 하지. 그곳이 유일하게 본 천의 인물이 들어가지 못한 곳이긴 해. 그래서 본 천에서는 그를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지. 지금 의문이 들지 않소? 그를 통해 알았던 내용들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텐데?”

도제는 갑자기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극일천에 대한 알아냈던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고진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구천에서 그동안 무엇을 알았는지 모르지만 무작정 믿지는 않았을 텐데…… 안 그렇습니까? 그리고 극일천은 어차피 무구천에 대해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맞다. 그들은 우릴 모르고 있지.”

“게다가 무구천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극일천에 잠입한 인물이 잡혔을 경우 대처 방안도 충분히 세워놓았겠지요. 설마 그것까지 생각 못 했을 리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다. 그대의 말처럼 그가 잡힌다고 해서 본 천을 알 수 없다.”

“그럼, 걱정 안 해도 되지 않습니까?”

‘휴우…… 그렇군.’

도제는 가슴이 진정되었다.

충분히 문제가 없음을 알면서도 배조경의 말에 걱정이 되었던 게 이상했다.

‘저 녀석이…….’

배조경은 인상을 썼다.

혼란을 주고자 했던 게 실패했다.

고진유의 말이 다시 들렸다.

“그래도 잘됐군요. 흑화전주라면 최소한 극일천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

배조경은 어이가 없었다.

‘나를 잡겠다? 천만에. 내 입으로는 극일천에 대해 절대로 듣지 못할 것이다.’

그는 내력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화산도협, 본인과 마지막으로 검을 겨루어 보는 게 어떻겠는가?”

“마지막 부탁이라고 하니 들어줘야겠지요.”

“훗, 말이 그렇게 되는 것인가? 나 정도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군.”

“저번에 만났을 때 확실히 알겠더군요. 만약 당신이 본도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면 도망가지 않았을 테죠.”

“그때는 때가 아니었을 뿐이다.”

“과연 그랬을까?”

“…….”

고진유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없었다.

그때 확실히 이길 수 있었다면 도망가지 않았을 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화산도협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뒤를 따라다닐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역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군. 이 녀석을 이기기 위해서는 스스로 괴물이 되는 수밖에…….’

배조경은 입안에 넣어둔 신약을 목안으로 삼켰다.

“크으…… 화산도협, 네 말이 맞다.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 지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네놈을 이기기 위해 이성을 버리기로 했다.”

“……신단을 복용했나? 미쳤군.”

“이건…… 공마신단이다. 본 천에서 실패한 신단. 하지만 내력을 증폭시키는 데 이만한 신단은 없지. 문제는 내가 아닌 괴물이 된다는 것 외에는…….”

두두둑. 두둑.

배조경의 육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단전에서 내력이 폭발하며 흘러나온 공마령기에 몸이 부풀어 올랐다.

“크크크크…….”

괴음을 내며 그의 이성은 점점 사라져 갔다.

오직 배조경에게 남아 있는 것은 육체뿐.

그의 두 눈은 이미 살기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파앗!

괴물로 변한 배조경의 움직임은 전광석화였다.

터억!

고진유의 앞에 다가선 그의 손이 어깨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한 손이 고진유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제대로 맞는다면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사라질 게 분명했다.

슈우우욱----

배조경의 손이 마치 얼굴을 통과할 듯 앞으로 밀려 나갔다.

“……!!”

바로 전에까지만 해도 앞에 잡혀 있던 고진유의 신형이 사라졌다.

고진유는 탈각신을 펼친 뒤 사의검을 휘둘렀다.

까아아앙!

배조경은 강한 충격에 뒤로 밀려날 뿐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신단을 복용하면 육체도 강해지는군.”

“크르륵…….”

뒤로 물러났던 배조경은 괴음을 지르며 몸이 튕겨졌다.

고진유를 향해 바짝 다가선 그가 무형기를 쏟아냈다.

파앗!

고진유는 사의검을 빠르게 세우며 자줏빛 검막을 펼쳤다.

쿠우우웅!

배조경의 무형기가 검막을 때렸다.

‘우욱. 강해…….’

고진유는 사의검에 십 성의 내력을 끌어냈지만 괴력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

슈욱!

슈우우욱!

배조경은 승기를 잡았다고 여겼는지 검막을 부수기 위해 연이어 무형기를 뻗어냈다.

콰아앙!! 콰아아앙-!!

그의 무형기가 검막과 부딪힐 때마다 강한 진동이 울렸다.

‘반격할 시간을 안 주는군.’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 채 오직 한 가지밖에 모르는 것처럼 배조경의 공격은 단순했다.

도제는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공마신단이 실패한 신단이라고 하나 극성으로 무공을 올리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군. 이성을 다시 원래대로 돌이킬 수는 없는 게 문제이지만…….’

그들의 싸움은 치열했다.

쿠웅.

고진유는 앞으로 강하게 한발 내디뎠다.

이제 충분히 상대의 힘을 알아냈다.

“크아아아-!!”

배조경은 내력으로 뒤로 밀리자 괴성을 지르며 전신의 힘을 끌어냈다.

그의 공격이 잠시 멈칫거렸다.

‘지금이다.’

방어만을 했던 고진유에게 반격할 틈이 생겼다.

파앗!

호충신법을 펼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보통의 경우 상대의 위로 움직이는 건 많은 허점이 노출되기에 피해야 했다.

하지만 고진유는 단점을 버리고 장점인 가장 강한 일검을 내리치기 위해 공중으로 몸을 솟구쳤다.

쉬이이이익!

머리 위로 올린 사의검의 주위로 자줏빛 검강이 태양처럼 커졌다.

‘검강이…… 저렇게 크다니……!’

도제는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파파파파--!!!

천천히 내려앉는 검강은 배조경을 향해 자줏빛 폭우를 쏟아냈다.

그가 아무리 금강불괴라고 해도 검강의 폭우를 막아낼 수 없었다.

퍽퍽퍽퍽퍽!

배조경은 반격도 하지 못한 채 전신에 자줏빛 검강이 박혀들었다.

스걱.

그리고 사의검이 공간 사이에 벌어진 결을 따라 떨어지면서 배조경의 목을 베었다.

털썩.

목과 함께 배조경의 시신이 바닥에 넘어졌다.

덜덜.

도제의 손이 떨렸다.

‘대명호에서 본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진유의 진정한 무공.

도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의 무공이라면 극일천에서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도제는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극일천에서 왜 그를 제대로 상대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겁을 낼 만도 했군. 이 녀석과 싸운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화산도협…… 우리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들과 싸워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제는 죽은 배조경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화산도협, 극일천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지 않았나?”

“괴물로 변한 이상 죽일 수 있을 때 죽여야 합니다. 이놈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방심하면 안 됩니다.”

도제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지만 고진유는 아니었다.

그가 아니어도 극일천의 인물들은 많이 있을 것이었다.

“그대의 무공을 보니 과연 천하오무에 오를 만하군. 본 천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을 줬으면 좋겠네.”

“순수한 도움을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고마운 일이군. 다음에 한번 부탁해보도록 하지.”

* * *

도제와 고진유의 움직임은 무림인들 사이에서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그들은 하북성으로 들어선 뒤 곧장 북경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함께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무구천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전히 말을 꺼내지 않았다.

북경으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 멀리 나타났다.

관문 앞에서 군사들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나를 따라오게.”

도제는 관문 병사들에게 곧장 다가서더니 허리에서 작은 신패를 보여주었다.

관문 병사의 눈이 커지면서 허리를 숙였다.

“들어가세나.”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그의 뒤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이군.’

하북팽가에 들른 적이 있기에 북경은 낯설지 않았다.

“무구천이 북경에 있을 줄은 전혀 예상 못 했습니다.”

“사람들의 예상을 깨어야지 본 천의 비밀이 잘 지켜지지 않겠나.”

예전 하북팽가에 가는 도중 미세하게 느꼈던 기운.

‘이들이었어. 그때 찾을 듯하면서 찾지 못했던 기운.’

이제는 어디에서 나온 기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로 주위에서 흐르는 기를 느꼈다.

‘이번에는…… 어디에 있는지 알겠군.’

도제는 점점 사람들이 많은 중심가로 걸었다.

넓은 대로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쳐 갔다.

“여기로 오게.”

도제는 대로에서 골목길로 빠졌다.

마치 다른 공간에 들어선 듯 주위가 조용해졌다.

‘진법인가.’

방금 옆으로 빠져나온 대로를 보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다.

상천장원(上天莊園).

고진유는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위의 장원이라…… 여기가 맞군.’

도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갈까?”

푸른색의 양쪽 기둥 사이로 굳건하게 닫혀 있는 정문.

장원의 한쪽 문에는 수천(守天)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도제가 먼저 문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자 안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구우우웅-

열린 문 앞에서 환하게 빛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신비한 곳이야.’

“뭐 하고 있나? 들어오게.”

“네.”

고진유는 그를 따라 정문을 넘어섰다.

환하게 흐르던 빛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장원의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정원 속에는 나무들의 조경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장원은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이곳 주인께서는 상당히 단아한 성품을 지닌 분이시군요.”

“어찌 그런 생각을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긴 무구천이라고 하기보단…… 잠시 쉴 수 있는 장원 같은 곳이군요.”

“맞다. 본 천의 인물들도 무구천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네.”

“도제님도 마찬가지이시군요.”

“그렇다.”

“그렇게 수하들을 믿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

고진유의 나지막한 말을 들으면서도 도제는 가만히 있었다.

두 사람은 정원을 지나 상천전으로 향했다.

고진유는 그곳 앞에서 백의여인이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먼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도제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이군.”

그녀는 시선을 돌려 고진유를 향했다.

“이분께서 화산도협이신가 봅니다.”

“그렇다네.”

스윽.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무림 영웅이신 화산도협님을 뵙사옵니다. 소녀는 화인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고진유라 합니다.”

고진유도 가볍게 포권을 했다.

‘흐음…….’

그녀는 살짝 아쉬운 표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자신의 이름을 들었는데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중원십봉의 수경봉(秀景鳳) 화인.

자신의 얼굴을 모를 수는 있지만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사내라면 중원십봉에게 최소한 관심을 보이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가 청미화 조여하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소문이 맞나 보네.’

도제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바로 알았다.

“화인은 중원십봉의 수경봉이라네.”

“아,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제가 여인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요.”

“그랬던가? 북 소저와는 편안하게 지내는 사이가 아닌가.”

“그녀와는 생사를 두고 지낸 사이입니다. 미운 정 고운 정까지 든 사이라 특별합니다.”

화인은 말을 하면서 미소를 짓는 고진유의 모습을 보았다.

“화산도협의 사랑을 받는 그녀는 좋겠군요.”

그녀는 부럽다는 듯 웃더니 곧바로 안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흐음…….’

안으로 들어서자 여인의 향기가 느껴졌다.

처음에는 안내하는 화인에게서 나는 줄 알았지만 바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화인이 문 앞에 도착한 뒤 안에 보고했다.

“천주님, 도제님과 화산도협께서 도착했습니다.”

“그분들을 모시도록 하게.”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문밖으로 들려왔다.

드르륵.

“안으로 드시지요.”

고진유는 도제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 무구천의 천주가 여인이었어.’

환하게 밝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맞이하는 중년 여인.

“천주님을 뵙습니다.”

도제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도제께서 수고하셨소.”

“천주님의 명이라면 당연하지 않겠소이까.”

“고맙소이다.”

도제와 짧게 인사를 한 그녀가 고진유의 앞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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