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209화 (209/425)

209화

대명호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두 번째 글귀.

‘다섯 개의 달.’

오월용수의 뜻을 풀어야 했다.

고진유가 산동루에서 가만히 누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명호에서 오(五)가 들어가는 모든 지명들을 찾아봐 주세요.”

독전호에게 내린 명.

오월이 가리키는 뜻은 지리적 이름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대명호 주위에는 숫자 오와 연관된 장소가 없었다.

‘숫자가 아니라면…….’

호숫가를 천천히 걸었다.

아침에 보았던 버드나무의 하늘거리는 잎들이 검은 그림자처럼 바람에 흔들거렸다.

호수 위에는 뱃놀이하는 배 하나 없이 하늘에서 비치는 달빛만이 흐를 뿐이었다.

고진유는 무작정 앞을 보며 걸었다.

그의 뒤를 북소연과 도제가 따랐다.

“아함…….”

도제는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따분해진 그는 걸음을 멈추며 앉을 곳을 찾았다.

“언제까지 돌 생각이지?”

목소리에 약간 귀찮은 음색이 묻어 있었다.

“여기 최소한 한 바퀴는 돌아봐야지 않겠습니까?”

“어두워서 주위가 보이지도 않는군. 차라리 낮에 돌아다니는 게 더 낫지 않은가.”

“힘들면 여기 계십시오. 우린 한 바퀴 돌고 오도록 하죠.”

도제는 잘됐다고 생각했는지 눈에 보이는 대로 걸터앉았다.

“알아서 해라.”

“쉬고 계십시오.”

고진유는 뒤에 따라오는 북소연을 보았다.

“전 괜찮아요.”

그녀는 고진유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얼른 대답했다.

고진유는 다시 움직였다.

“도제께서는 쉰다고 하시니 우리만 다녀옵시다.”

“네. 알겠어요.”

그녀는 바로 고진유의 뒤를 따랐다.

도제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두 남녀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사귀는 것 같은데…….흐음. 하긴 사귄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겠지.”

고진유와 북소연에게 어둠은 길을 걷는 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림인들은 일반인들보다 특히 안력이 높았다.

“대명호에 오면 쉽게 찾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렵네요.”

“그러게요. 저도 수하들에게 시켜 혹시나 오(五)가 들어간 지명이나 건물을 찾도록 했는데 없다고 하던걸요.”

“오월은 평범한 뜻이 아닌 모양이군요.”

그녀도 고진유의 말에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두 사람은 대명호에 들어섰던 장소까지 돌아서 왔다.

“우리가 처음 들어섰던 석교에 도착했어요.”

“흐음. 결국 대명호를 한 바퀴 다녔지만 찾지 못했군요.”

고진유는 아쉬웠다.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는 실마리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저벅저벅.

그때, 어둠 속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무인들과 비슷한 가벼운 발걸음이 아니었다.

허리를 구부린 채 등불을 든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놀래라.”

노파도 어둠 속에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깜짝 놀랐지만, 젊은 사내와 여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그녀는 앞이 어두워 두 명의 남녀가 무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르신께선 이 시간에 어디를 가십니까?”

“잠깐 기도를 하고 다녀왔다네.”

“기도를 하시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보통은 낮에 기도한다네. 근데…… 무슨 일인지 무림인들이 너무 많아서 함부로 들어올 수 없더구먼.”

“아…… 그들 때문에 낮에 가지 못하셨군요.”

무림인들이 낮에 얼마나 많이 나돌아 다녔는지 모르지 않았다.

노파로서는 당연히 쉽게 들어설 수 없었을 터.

“그런데…… 대명호에 사당이 있었습니까? 제가 한 바퀴 돌아봤는데 못 봤습니다.”

“사당이라고 따로 부르는 곳은 아니네. 무숙왕께서 나라를 세우기 전 좋아하시던 장소지.”

무숙왕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다.

“그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기 불빛이 보이는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보였다.

“저곳이 어디입니까?”

“증제라는 제방이라네. 오월국의 무숙왕께서 저곳을 좋아하셨다고 하지.”

“오월국이요?”

고진유는 놀라 노파에게 재차 물었다.

“방금 오월의 무숙왕이라 하셨습니까?”

“음? 그렇네. 그분께서 젊은 시절 오월국의 태조가 되시기 전, 몇 년 동안 이곳에서 지내셨다고 하셨지.”

고진유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오월용수의 뜻을 알아냈어.’

증제의 제방 아래에 황금무동이 있을 것이었다.

“어르신, 고맙습니다.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홀홀, 젊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기분이 좋구만.”

고진유는 노파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북 소저, 찾았소이다.”

“그런 것 같네요!”

오월(五月)이 가리키는 뜻이 오월(吳越)임을 그녀도 단번에 이해했다.

“한번 가볼까요?”

휘이익!

고진유와 북소연은 신법을 펼치며 증제를 향해 나아갔다.

* * *

용수(容水).

증제에 가까이 다가선 고진유는 내력을 거두어들였다.

“혹시 모르니 여기부터서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게 좋겠소.”

끄덕.

북소연도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음…… 이곳 아래에 있다는 말 같은데…….’

증제의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대명호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제방인 줄 알았는데, 호수와 바로 맞닿은 장소에 지어진 제방이었다.

이곳이 황금무동이 맞다면 제방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가 분명 있을 거라 확신했다.

‘제방 아래에 숨겨놓을 생각을 하다니…….’

만약 뚫어놓은 황금무동이 무너져 물이라도 들어온다면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 틀림없었다.

멈칫.

고진유는 순간 몸이 떨렸다.

‘이런 미친놈들.’

황금충은 살인자가 아니었다.

그는 돈을 좋아하고 황금을 사랑하던 인물이었다.

보물을 숨긴 뒤 굳이 사람들을 끌어 모아 뒤 수장시킬 광인이 아니었다.

‘황금지도는 가짜였던 거야.’

수많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죽음의 지도였던 것이다.

“북 소저, 이자들은 정말로 미친놈들이외다.”

고진유는 그녀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려주었다.

잠시 뒤 그녀의 표정도 화가 나 있었다.

“어떻게 하죠? 증제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

그녀가 한 말은 이미 산동루에서 도제와 나누었던 대화였다.

황금무동을 찾아온 그들에게 제방이 무너질 테니 들어가지 말라고 말려도, 그들이 순순히 들을까?

그렇다고 제방을 무너뜨릴 수도 없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다면 극일천에서 제방을 터뜨리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최대한 우리가 막을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그들이 어디를 폭발시킬지 모르잖아요.”

“극일천에서 나타나기를 기다려야죠.”

“알…… 겠어요. 당장 내일부터 감시하도록 할게요.”

“조만간 중원에 황금무동의 위치가 알려지게 될 겁니다. 중원인들이 보물을 찾기 위해 황금무동에 들어가는 순간 제방을 터뜨린다면…….”

“아아…… 정말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수장시키려고 하네요.”

“오늘은 이만 가도록 하죠.”

“알겠어요.”

고진유와 북소연은 증제에서 물러났다.

* * *

도제는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대명호를 충분히 돌아볼 시간이 지났건만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벌떡.

그는 자리에서 다급하게 일어났다.

“설마…… 이놈이 나를 두고 간 건 아니겠지?”

“도제님, 제가 어떻게 혼자 두고 말없이 가겠습니까?”

“……!”

어둠 속에서 목소리와 함께 고진유와 북소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느냐?”

“딱히 보이는 건 없었습니다.”

“그래? 하긴 쉽게 찾을 수 있었으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찾지 못했을 리 없겠지.”

“그만 가시죠.”

“못 찾았다면서?”

“내일 와서 다시 찾으면 됩니다.”

“흠. 하긴 너무 급하면 될 것도 안 될 테니.”

“맞습니다. 그럼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휘이이익!

고진유와 북소연은 바로 신법을 펼치며 사라졌다.

도제도 빠르게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 * *

천문전주 나하중은 중원에서 올라온 보고를 받았다.

“아쉽군.”

혈사천과 천검궁과 싸우도록 만들려고 했던 첫 번째 계획이 무산되었다.

“그놈…… 참으로 잘 벗어난단 말이지.”

천검봉 살해 계획.

이공자 종택이 실패한 것은 의외였다.

“풍류옥협. 이놈들의 무공도 생각 외로 강하군.”

흑사마검이 당했다는 보고가 잘못 올라온 줄 알았다.

“실패한 건 어쩔 수 없지.”

예전 같았으면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에 대해 인정하는 순간 흥미를 느꼈다.

진심으로 다해 싸워서 이기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생각대로 진행될 뿐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화산도협과 마주치면서 계획했던 일들이 빗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살아 있다는 느낌.

화산도협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신을 보면서 삶을 느끼고 있었다.

‘황금지도를 중원에 던졌다. 이번에는 어떤 반응을 보여주겠느냐?’

만약 종택이 금하희를 죽이고 천검궁에서 황금지도를 회수했어도,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뒤 재차 중원에 뿌릴 생각이었다.

다행히 고맙게도 무림맹이 알아서 그 일을 해주었다.

‘멍청한 놈들…….’

하지만 황금지도의 비밀을 제대로 풀 수 있는 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대명호로 모여들도록 미끼를 하나씩 던지기로 했다.

그러자 자신의 뜻대로 대명호에서 물고기들이 낚이고 있었다.

“후후후. 이젠 마지막 글귀를 알려줘야 할 시간이군.”

중원 무림인들을 한곳에 모아 수장시킬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재미있겠어. 내가 직접 그 장면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하중은 앞에 선 사내를 보았다.

“한데 윤 총관은 별로 좋은 표정이 아니구먼.”

“아닙니다. 소인은 혹시나 증제가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뿐입니다. 다른 곳까지 물에 잠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훗.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그곳만이 물에 잠길 뿐이다. 그리고 제방이 무너진다고 해도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지 않은가. 자,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두 번째 글귀의 뜻을 알리도록.”

“……네. 알겠습니다.”

“대명호에 모인 놈들이 모두 들어간 뒤 터뜨리면 된다. 알았나?”

“명…… 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윤여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 * *

고진유는 대명호에서 돌아온 이후 산동루에서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층에서 한 번도 내려오지 않고 차를 마시며 쉴 뿐이었다.

‘허어…….’

도제는 맞은편에 앉은 고진유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보았다.

몇 번 눈빛을 마주 보았지만 은근슬쩍 피하는 듯 보였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는 먼저 고진유에게 말을 던졌다.

“할 일이 없는 모양이지?”

“피곤해서 잠시 쉬고 있습니다.”

“…….”

무림 최고의 인물이 피곤하다는 말을 툭 내지르고 있었다.

“진담인가?”

“농담은 아닙니다.”

“자네가? 돌도 씹을 먹을 나이에.”

“깊고 많은 생각을 하다 보니 몸이 피곤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반나절을 지켜봤지만 고뇌에 빠진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내가 보기에 자네가 한 일이 차 마시고 누워서 쉬고, 중간에…… 그 뭐냐.”

“소학입니다.”

“그래, 갑자기 공부를 했지. 책을 보면서 깊고 많은 생각을 했는가?”

“도제님은 할 일 없이 종일 저만 따라다녔습니까?”

“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못 보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아…… 그것도 그렇군요.”

도제가 보기에 고진유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자신에게 도전할 때의 눈빛은 패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서 그런 패기가 보였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다다-

그때, 계단으로 빠르게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대명호에 나가 있던 특사정화단의 수하였다.

독전호가 그에게 보고를 받은 뒤 다가왔다.

“특사님, 황금무동의 위치가 알려졌습니다.”

“어디라고 하던가요?”

“증제. 제방 아래에 있을 거란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독전호는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함께 있던 도제가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네. 제방 옆에 있는 수계 아래로 수상한 사람들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고진유의 인상이 구겨졌다.

극일천에서 어떻게 황금무동을 무너뜨리려는지 알았다.

“독 단장께서 그 장소를 자세히 살펴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독전호도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음…… 정말로 이 녀석 말처럼 갑자기 황금무동의 위치가 소문이 났군.’

도제는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하는 내용을 들은 뒤 확인차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황금무동이 어디에 있었는지 미리 알고 있던 것 같군. 맞는가?”

“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군. 알고 있었다…… 왜 나에겐 이야기를 안 했지?”

“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맞아. 할 이유는 없지.”

도제는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냥 두겠다더니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아니 그런가?”

“할 수 있는 일만 한다고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호…… 과연 그랬던 것 같군. 알겠네.”

도제는 말문을 닫고 의자에 앉아서 고진유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당분간 이 녀석만 지켜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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