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기련곡의 전설.
무영도수 시절부터 가장 관심을 가진 전설.
늘 죽기 전에는 꼭 황금무동에 가보리라 다짐했었다.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
물론 황금지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재미있겠어.’
극일천만이 알 수 있을 뿐.
북소연은 즐거워하는 고진유를 보았다.
미소를 짓는 눈동자에서 천진난만한 순수함이 보였다.
‘이거였어.’
그를 보면서 깨달았다.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다.
처음 고진유를 만났을 때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가 좋아졌다.
상대는 화산파의 제자.
더구나 그의 말에 의하면 사부를 죽인 철천지원수 사이였다.
그런데도 그를 볼 때마다 싫은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났다.
그의 무공이 뛰어나서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고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분은 순수해.’
그는 사람을 대할 때 오직 사람만을 볼 뿐이었다.
주위 환경과는 상관이 없었다.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음…… 안 될 건 없지만 바쁘지 않소?”
“제가 보기에 바쁜 분은 당신인데요.”
“이제 특별히 바쁜 건 없소이다. 제일 중요했던 일을 마쳤소.”
“중요한 일이란 게…….”
북소연은 무언가를 짐작하고 눈을 크게 떴다.
“사부님의 원수를 본도의 검으로 갚았소이다.”
얼마 전 무림맹에서 극일천의 인물들을 일망타진한 그였다.
극비였지만, 북소연은 고진유가 직접 사마추를 직접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슬쩍 떠보듯 물었다.
“원수라는 게……?”
“후후, 알면서 물어보는군요.”
“…….”
“괜찮소. 무림맹처럼 거대한 세력이라면 소문을 전부 통제하기 불가능하겠지요.”
“아…… 네에. 그럼 그분의 원수를 갚았으니 다른 계획은 없다는 것인가요?”
“다음 할 일은 큰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극일천을 말씀하시는 모양이군요.”
“맞소.”
극일천이라면 정말로 큰 원수가 맞았다.
“혹시 원하신다면 그 일에 우리도 도움을 줄 수 있어요.”
“북 소저의 성의는 고맙게 받아들이겠소이다.”
“원래는 한 번 거절하는 게 보통이잖아요.”
“난 그런 거 모릅니다.”
개봉성에서의 일은 마무리가 되었다. 고진유는 성곽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우리도 떠나도록 하죠.”
“어디로 가면 되나요?”
“기련곡에 따라온다고 하지 않았소?”
“……알겠어요. 떠날 준비를 하겠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 *
개봉성 정문 앞에서 떠나지 않은 사내.
대부분의 군중들은 황금지도를 베낀 뒤 뿔뿔이 흩어졌다.
‘미쳤군.’
흑화전주 배조경은 커다랗게 달려 있는 지도를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이건…… 진짜잖아.”
그가 알고 있는 진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벽에 걸린 기련곡 지도는 진품에 있는 지도를 똑같이 베껴 놓았다.
진품이나 마찬가지인 황금지도는 극일천에서도 기보에 해당하는 물건이었다.
“대체 왜 이것을……?”
배조경은 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금지도가 아니고서는 천검궁과 혈사천을 동시에 움직이게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굳이 진짜를 보낼 이유는 없었을 텐데.
‘가짜도 아니고…… 완전 미친 게 아닌가. 만일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배조경은 한참을 지도 아래에서 떠나지 않았다.
천문전주는 사소한 계획을 세우더라도 이유 없이 행동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뭔가 있는 게 분명해.’
황금지도를 계속해서 보던 배조경의 눈빛이 순간 의아하게 변했다.
‘뭐지? 이건…….’
몇 번이나 본 후에야 발견한 것.
원본과 다른 게 하나 있었다.
기련곡의 위치를 알려주는 마지막 글자가 달랐다.
“……크큭, 그러면 그렇지. 그가 어떤 인물인데…….”
배조경은 상황을 보며 흥미가 솟구쳤다.
“크하하, 과연 누가 비밀을 풀지 궁금하군.”
* * *
여섯 마리의 적혈마가 이끄는 혈림대거.
지옥혈림의 최고 인물들만이 탈 수 있다는 마차였다.
“좋군요. 그런데…… 너무 과하지 않소?”
“편안하지 않나요?”
그녀의 말처럼 마차 안은 흔들거림이 없을 정도로 편안했다.
“그렇긴 하지만…… 흐음…… 하긴 본도는 얻어 타는 입장이니. 맘대로 하시오.”
편안하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고진유는 시선을 돌려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했다.
툭툭.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사부의 원수 사마추를 죽인 이후, 마음속에서 다급함이 사라지며 허한 느낌마저 들었다.
화산에서 내려온 이후, 늘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였다.
화산파도 사형들로 인해 점점 위명이 올라서고 있었다.
‘당분간은 사형들이 계시니 내가 할 일도 없을 테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보물을 찾는 것도 괜찮겠어.’
고진유의 생각처럼 이제 무림에서 어느 곳도 화산파를 무시할 수 없었다.
천하화산제일문삼년지계.
‘삼년지계. 시간은 아직 많으니 천천히 가는 거야.’
북소연은 밖을 내다보는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았다.
움직이지 않는 고진유의 눈동자.
허공에 머무는 시선은 멀리 풍경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당신이 왜 나에게 잘해주는지 되돌아보고 있었소이다.”
스윽.
고진유는 시선을 돌려 그녀와 마주쳤다.
쿵쿵.
북소연은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갑자기 그의 말에 어떻게 대답을 할지 몰랐다.
“…….”
“우리가 처음 만났던 순간까지 생각해 봤지만 그런 상황은 없었소이다.”
“…….”
“그렇군요. 상황이 아니라…….”
‘아니라……?’
그녀는 그가 어떤 말을 할 것인지 마음을 졸였다.
“결국 본도가 잘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소이다. 천하제일인이 될 본도에게 잘 보여야 그대의 지옥혈림에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군요.”
“……아…… 잘 생각했네요.”
“역시 본도의 추측이 맞았구려.”
‘이런 바보 멍충이…….’
이번에는 북소연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후후후.’
고진유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소저의 아버지 혈성존께서는 어떤 분이시지요?”
“아버지는 좋은…….”
북소연은 멈칫했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떻게 알았나요?”
“본도가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했소? 지금까지 그대를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을 것 같소이까?”
“…….”
“소저는 무림 최고의 세력이 어디라고 생각하시오? 바로 무림맹이더이다. 중원의 모든 문파들에 대한 기록이 모여 있었지요. 끊임없이 새로운 사실들이 무림맹에 올라와 정리되고 있더군요.”
고진유는 맹주전에 있으면서 무림맹에 대한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조직이 개편되기 전 비맹전 산하 소속인 비서원에서 작성된 수많은 내용들.
각 문파의 사소한 문제들까지 기록하며 정리하는 부서였다.
고진유는 그곳에서 지옥혈림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지옥혈림의 수장 지옥혈존. 중원인들은 그를 가리켜 혈성존이라 부르지요. 그분의 성함은 북조궁. 지옥혈림의 전신은 호북 형주의 북명신가라고 적혀 있더군요.”
“…….”
“지옥혈림으로 오십 년 전 개명하면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더군요. 혈성존은 이대 지옥혈존이며, 슬하에 오남 일녀의 자녀가 있지요. 그중 일녀는 지옥혈림의 극소수들에게만 얼굴이 알려져 있는 가운데 무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라 적혀 있더군요.”
“대단…… 하네요. 그런 것까지 무림맹에서 조사하는 줄은 몰랐어요.”
“본도도 마찬가지외다. 괜히 무림맹이 아니지요.”
“그래서 부담스럽나요?”
“전혀. 본도는 신경 안 씁니다.”
“신경 써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래야 하는 거요?”
“…….”
“알겠소. 소저가 원한다면야.”
“……됐어요. 맘대로 하세요. 그건 그렇고, 지금 가는 방향이 맞나요?”
북소연은 더는 그 부분에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는지 황금지도에 관해 물었다.
“틀린 것 같습니까?”
“기련곡이라면 북원으로 가야 하지 않나요?”
“소저의 말이 맞소이다. 이 지도가 대칸의 기련곡을 가리키는 것이라면요.”
북소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칸의 기련곡이 아닌 또 다른 기련곡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본도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군요.”
“맞아요. 황금지도가 대칸의 기련곡이 아니라면 누구의 무덤이라는 거죠?”
“대도의 세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두 개의 기련곡이 있다는 말이 있었소이다.”
“기련곡이 두 곳이란 말인가요?”
“그렇소이다.”
“그럼…… 지금 가는 기련곡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칸의 기련곡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맞소이다. 대칸의 기련곡이 아니라 두 번째 기련곡. 황금충의 보물이 숨겨져 있는 장소이지요.”
“음……?”
황금충이 누구인지 안다.
오백 년 전의 인물인 중원 전국상국의 국주 태금천.
중원 상계의 황제라 일컫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전국상국은 사라졌다.
그녀도 아는 내용이었다.
“전국상국의 국주를 말씀하는 건가요?”
“맞습니다. 이상하게도 그가 죽은 뒤 전국상국의 모든 것들이 중원에서 한순간에 사라졌죠. 그때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고 그들을 찾아보았지만,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무림사에 보니 그 뒤로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고 적혀 있었어요.”
“그럴 겁니다. 무림에서 완전히 사라졌지요. 그 후 우리들 세계에서 흘러나온 소문으로는, 황금충이 죽으면서 자신의 무덤에 모든 재산을 묻어놓으라고 했다더군요.”
“…….”
“처음에는 그의 무덤을 황금무동이라 불렀다고 하더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련곡으로 바뀌었던 모양이지만.”
“황금충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야사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아마 대부분 중원인들은 모르고 있을 겁니다. 사실 그 소문이 사실인지도 확인할 수 없으니.”
“기련곡이 두 곳이란 건 이해했어요. 근데 당신은 지도가 대칸이 아닌 황금충의 기련곡인지 어떻게 아셨나요?”
씨익.
고진유는 그녀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궁금한가요? 그럼 오백 냥.”
“…….”
그녀는 이런 엉뚱함이 좋았다.
“농담이오.”
“아니에요.”
슥.
그녀는 왼손가락에 끼고 있던 동(銅)으로 만든 반지를 빼서 내밀었다.
“당장 오백 냥은 없고, 이건 어떤가요?”
“중요한 반지가 아니오? 농담이ᄋᅠᆻ는데.”
간단한 무늬조차 없는 모양의 반지.
그녀가 끼고 있기엔 초라해 보였다.
“……알겠소. 나중에 오백 냥을 주면 돌려주겠소이다.”
고진유는 그녀에게 받은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끼웠다.
“괜찮아 보이오?”
“잘 어울리네요. 그럼 말해보세요.”
“우선 여기 지도를 펼쳐 보시오.”
그녀는 바닥에서 탁자를 올린 뒤 황금지도를 펼쳤다.
“오호. 여기에 이런 기능도 있었소이까?”
고진유는 황금지도보다 탁자가 올라온 게 더 신기했다.
“지도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보이오?”
“전혀…… 모르겠어요.”
그녀는 이미 황금지도를 수없이 살폈었지만, 숨어 있다는 게 뭔지 알지 못했다.
“잠깐만 실례하겠소이다.”
고진유는 일어난 뒤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을 펴 보시오.”
“…….”
스슥.
북소연의 손가락이 지도에 닿은 뒤 그림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이건…….’
금(金)이란 글자가 나타났다.
“정말로 그게 맞나요?”
“맞소이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소유인 모든 물건에 금이란 표시를 했다고 전해지더군요.”
“아하…… 그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뒷골목 세계에서 떠돌던 말이니 잘 모를 겁니다.”
“…….”
북소연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여전히 고진유의 손에 잡혀 있었다.
“저어…… 손을…….”
“이런, 미안하오.”
고진유는 손을 놓은 뒤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민망한지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지만 이내 고진유의 목소리에 깨어졌다.
“황금충의 고향은 산동 제남이었소.”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무영도수 시절에 한탕 해보고자 열심히 공부를 했지요.”
“흐응, 잘 안 된 모양인가 봐요?”
고진유는 눈을 흘기면서 그녀를 보았다.
“벽화당의 생활을 정리한 뒤 그곳으로 가려고 했소이다. 근데 누구들 때문에 못 갔지요.”
“…….”
그녀가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가 왜 자신을 그렇게 쳐다봤는지 이유를 알았다.
“미안하게 됐네요. 그때는 저희도 의뢰를 받아서…….”
“됐소이다. 지나간 일인니…….”
그때 흑귀에게 잡히지만 않았다면 연주에서 모든 일들을 정리한 뒤 황금무동을 찾기 위해 산동성으로 넘어갔을 것이었다.
고진유의 설명은 다시 이어졌다.
“그가 살아 있을 당시 친한 사람들에게 가끔씩 황금무동을 만들었다고 자랑한 적이 있다고 했ㅅ소이다. 물론 그 장소가 어디인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하지만.”
“음…… 잠깐만요. 이해가 안 되는 게, 그가 죽었을 당시보다 기련곡은 훨씬 더 뒤에 생기지 않았나요?”
“맞소이다. 대칸의 기련곡에 대한 소문이 나돌기 전에는 황금무동이라 계속 불렸죠. 그러다가 시간이 흐른 뒤 황금무동을 기련곡이라 불렀다고 하더군요. 이름은 어떻게 부르든지 상관이 없기에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기련곡이라 부르게 되었소이다.”
“이 지도가 대칸이 아닌 황금충의 기련곡 지도인 줄 알았다는 건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냈다는 뜻인가요?”
“황금충 태금천의 기련곡을 가리키는 지도라는 것을 안다면 글귀의 뜻을 충분히 풀 수 있어요.”
황금지도에 적힌 첫 번째 글귀.
기련일월(起輦日月).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 글귀의 두 글자를 보면서 대칸의 기련곡을 가리키는 지도라고 오해를 했던 것이지요.”
“처음부터 잘못됐으니 풀 수 없었던 것이네요.”
“후후후. 맞습니다. 여기 기련이란 말 그대로, 수레를 처음으로 끌었다는 뜻입니다.”
“아…… 하, 그렇다면 황금충인 그가 처음으로 장사를 했던 곳이겠군요.”
“맞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사업을 위해 소표국을 열었던 장소. 바로 산동성 제남이죠.”
“이 지도를 가지고 제남에 가서 지형도가 비슷한 곳을 맞춰보면 되겠어요.”
“그 지도는 이젠 필요 없어요. 자신이라는 표식을 한 낙서일 뿐입니다.”
“…….”
그녀의 시선이 글귀에 집중했다.
“일월은 무엇인가요?”
“제남은 처음이라. 도착해서 찾아보면 나오지 않겠습니까?”
“알겠어요. 일단 제남으로 가도록 해요.”
다각다각.
고진유와 북소연을 태운 혈림대거가 산동성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