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반나절이 지나는 동안, 무림맹의 무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특사정화단은 금맹군을 급습한 뒤 한 명도 빠짐없이 포박헸다.
반항한 이도 있었지만, 작정하고 쳐들어온 특사정화단의 기세에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총관 범유도 수하들 사이에서 잡힌 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뿐이었다.
거의 이각 만에 특사정화단은 완벽하게 금맹군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금맹군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말이 퍼져 나갔다.
무림맹이 흔들거렸다.
극일천의 세력에 대해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일군사 사마추가 금관정에서 늘어진 채 특사 고진유에게 잡혔다.
그의 죄명은 맹주 황보강의 살인죄.
그리고 극일천의 간자였다.
무림맹의 모든 시선이 무림특사 고진유에게 향했다.
특사정화단에 의해 완벽하게 제압된 금맹군 소속의 무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무림옥에 갇혔다.
이후 특사정화단에서 또 다른 움직임이 있을 줄 알았지만, 그들은 어찌 된 일인지 조용했다.
고진유는 그동안 어떠한 설명도 없이 맹주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짙은 밤이 찾아왔다.
드륵.
맹주전에서 가만히 있던 고진유가 금맹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금맹전은 한 명의 인적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일군사 사마추의 집무실은 아직 그대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음…….’
주위를 살폈지만,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가 금맹전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깐.’
사마추의 책상에 앉았다.
중요한 물건일수록 항상 가까운 곳에 숨겨두는 법.
누구라도 사람의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여기밖에 없군.’
툭툭.
책상의 상판을 두드리자 상판 아래로 미세하게 소리가 울렸다.
한 자 정도의 두께.
손을 아래로 넣은 뒤 살피자,
덜컥.
손끝에 닿는 느낌이 났다.
‘여기 있군.’
고진유는 비밀 서랍을 당겼다.
안에서 열 개의 목갑이 보였다.
숫자가 적혀 있는 목갑들을 순서대로 열어보았다.
일(一)이 적혀 있는 목갑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냥 비어 있는 건가?”
이번에는 이(二)가 적힌 목갑을 열었다.
‘……이게…… 설마…… 고독?’
목갑 안에서 괴이한 벌레가 좌우로 움직이며 기어 다니고 있었다.
고진유는 나머지 목갑들을 모두 열었다.
마지막 십(十)이 적힌 목갑에는 말라 죽어 있는 고독이 있었다.
‘고독이 맞아.’
첫 번째 목갑에 왜 비어 있는지 알 듯했다.
“비겁한 인물이군. 자신은 죽기 싫다는 것인가?”
고독이 든 목갑은 그가 집법당주 반검형을 죽인 확실한 증거가 틀림없었다.
고진유의 입가에 웃음이 나왔다.
“후후, 다른 물건들은 중간에 정리할 수 있지만 이건 치울 수가 없었겠지.”
사마추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수를 둔 셈이었다.
금관정에서 그가 바로 잡힐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스윽.
고진유의 앞으로 잠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특사님. 그들이 몰래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그렇습니다.”
“훗, 사마추가 잡혔다고 하니 다급한 모양이군. 몇 명이나 움직이고 있죠?”
“다섯 명입니다.”
“누구누구입니까?”
“흑룡군장 남궁진, 백룡부군장 지학, 적호군장 태소묵, 수련관장 영공후, 용봉당주 공진대사입니다.”
“모두 명단에 있는 자들이군요.”
“그렇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소이까?”
“부식창고인 식재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곳에 비밀 장소가 있는 모양이군요.”
“그런 듯합니다.”
“좋소. 일단 그들이라도 잡으러 가야겠군요.”
“나머지 인물들은 그대로 두실 생각이십니까?”
“이번 건처럼 움직이는 놈들을 잡다 보면 한 놈씩 잡을 수 있겠지요.”
스윽.
고진유는 열 개의 목갑을 챙긴 뒤 일어났다.
“난 식재소에 바로 갈 테니 잠영께서는 독 단주와 청룡군장을 찾아가서 사실대로 밝히세요.”
“청룡군장이 움직여 줄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라면 당연히 움직일 것이외다. 곧바로 흑룡군과 백룡군, 적호군을 제압하도록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휘익.
잠영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럼…… 나도 가볼까?’
* * *
무림맹의 삼대금지는 맹주전과 무림옥, 그리고 마지막으로 식량을 저장한 식재소.
식재소는 화재를 대비해 삼 층의 석재 건물로 지었다.
세간에 알려진 문은 오직 일 층 정문뿐.
스윽.
고진유는 식재소 건물 위로 내려섰다.
지붕 또한 석재로 막혀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구조였다.
‘하여튼 이자들은 머리는 좋아.’
툭툭.
고진유는 발끝으로 지붕 바닥을 두드렸다.
토오옹.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를 찾았다.
‘여기군.’
고진유는 통로의 문을 옆으로 열었다.
삼 층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보였다.
어둠만이 있는 밀실 공간 안에서, 쇳소리의 목소리가 울렸다.
“결정해야 할 것 같소.”
“삼소, 무슨 결정을 한다는 것입니까?”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당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먼저 칠 것인지 결정을 내리자는 거요.”
“승산은 있겠소이까? 일소가 당했소이다.”
삼소의 쇳소리가 짜증 난다는 듯 쉭쉭거렸다.
“그건 일소가 멍청해서 그런 것이다. 십소가 잡혔을 때 진작 우리가 먼저 움직였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우리 모두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이오?”
“이소. 당연한 말이오. 그대와 사소께서 특사정화단을 맡으시오. 그리고 칠소께서 이군사와 태상장로전을 담당하면 될 것이오.”
“삼소, 우린 무엇을 하면 되겠소?”
“그대는 본인과 함께 십문십가의 수장들을 모은 뒤 정리하면 되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움직이는 걸로 합시다.”
“알겠소이다. 삼소, 그대의 뜻을 따라 움직이겠소이다.”
다섯 명의 인물들은 당장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그때였다.
그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역적모의를 하는 것이오?”
“……!!”
“흐음, 똑바로 서보시오. 어두워서 얼굴이 잘 안 보이는구려.”
“네놈은…… 화산도협?”
삼소의 쇳소리가 공간에서 울렸다.
“당신 목소리가 특이해서 알겠군. 수련관장 영공후 아니오?”
“……!”
삼소는 흠칫거리며 말문이 막혔다.
“어,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알았지?”
“멍청하군. 무림맹이 바보인 줄 알았나? 당신들이 간자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기에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 뿐이오.”
삼소는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큭, 혼자서 우릴 상대할 자신이 있는 모양인가 보군.”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지금 내가 무엇을 들고 있는지 알고 있소?”
“……?”
“아하, 잘 안 보여서 모르겠군. 본도는 방금 금맹전에서 나오는 길이오. 우연히 일군사 사마추가 숨겨 놓았던 물건을 찾았소이다.”
“……!!!”
그들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그 안에 열 개의 목갑이 있더이다. 귀한 물건 같아서 열어보았더니 안에 이상한 게 들어 있더군요.”
고진유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은 온몸에 긴장이 되었다.
목갑에 무엇이 있는지 그들은 알고 있었다.
‘망할…… 잊고 있었다.’
무림맹에 잠입한 그들의 배신을 방지하기 위해 일소는 고독을 심어놓았다.
“처음 보는 것인데, 하나씩 들고 다니기 귀찮아서 여기 주머니 안에 모두 넣었지요. 이것들을 모두 죽이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소?”
삼소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졌다.
고독을 고진유에게 빼앗길 줄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현재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
고독이 든 주머니를 화산도협에게서 빼앗아야 했다.
“지금 본인이 여덟 마리 중 한 놈을 잡았소이다.”
“…….”
“당신들의 운이 얼마나 좋은지 한 번 볼까?”
빠지지이익!
고진유는 손에 든 고독을 한 마리 발로 밟았다.
고독이 밟혀 눌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헉!’
‘커억!’
다섯 명의 그들은 숨이 끊어지는 듯한 신음을 내며 주위를 살폈다.
짧은 시간이 지나갔다.
“하아…….”
그들 다섯 명은 서로를 보면서 안심했다.
다행히 그들의 고독이 아닌 듯했다.
“음…… 여기에 한 사람도 죽지 않군요. 어떻게 되는지 구경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군요. 이것들을 전부 죽이면 고독으로 죽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소이다.”
화르르르-!
고진유의 손에 든 주머니가 불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둠에 잠겼던 공간이 밝아졌다.
당황한 표정을 짓는 다섯 명의 얼굴이 나타났다.
한데,
“망할 놈……!!”
그들의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삼소. 영공후는 노기가 솟구쳤다.
불에 탄 주머니 안에는 고독이 들어 있지 않았다.
“화산도협,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것인가?!”
“아니, 이 정도에 화를 내면 안 되지 않소? 당신들은 수십 년 동안 무림맹을 가지고 놀았거늘. 유식한 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지 않소이까?”
“그 물건은 어디에 있지?”
“내가 그것을 가르쳐 줄 이유는 없소이다. 당신들이 극일천의 간자라는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물건인데.”
“크크크. 지금 착각하고 있군. 여기에서 나갈 수 있을까? 차라리 우리를 죽였으면 네놈에게 좋았을 것이다.”
“누가 착각하는지 모르겠군. 본도가 아무런 생각 없이 혼자 온 것 같아 보입니까? 당신들은 본도를 죽일 수 없소. 반시진 안에 나가서 고독을 가진 그를 찾지 못한다면, 모두 죽을 테지요.”
“상관없다. 네놈을 죽일 수 있다면 우린 죽어도 된다.”
“흐음. 대단한 충성심이군요. 그렇다면 본도를 죽여보든지.”
파앗!!
고진유는 불을 껐다.
다시 그들이 서 있던 공간은 어둠 속으로 바뀌었다.
‘괴도에 있을 때 생각이 나네.’
괴도의 동굴로 들어가서 어둠 속에 서 괴충들과 싸웠던 기억이 났다.
빛 하나 없던 동굴에서도 오로지 소리 하나만으로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며 움직였다.
어둠은 움직이는 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작해 볼까.”
타앗!
고진유는 옆으로 움직이면서 사의검을 뽑았다.
“화산도협!! 어딜 가느냐?”
사의검이 빠져나오는 소리를 향해 사소 태소묵이 검을 내찔렀다.
하지만 검 끝에 닿는 느낌은 없었다.
스걱.
무엇인가 잘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아악!!”
사소 태소묵의 비명이 울렸다.
검을 쥔 팔이 잘려 나간 채로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사소, 사소!”
이소는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이소, 조용히 하게. 저놈은…….”
스걱.
또 한 번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이소. 남궁진의 허리를 스치며 사의검이 지나갔다.
“욱…… 이 새끼가…….”
가만히 당할 수는 없었다.
“모두 내 뒤로 물러나라!!”
휘이익!
칠소 지학은 재빨리 남궁진 뒤로 움직이려고 했다.
척.
그때, 누군가 가까이 다가선 뒤 팔을 잡은 채 남궁진의 맞은편으로 밀었다.
‘어…… 어…….’
그는 휘청거리며 몸을 바로 세우려고 했다.
남궁진은 뒤에 다가선 네 명의 기를 느꼈다.
“됐다. 이놈, 죽어라!!”
좁은 공간에서 펼치는 남궁진의 무공.
팟팟팟팟팟.
밀실 공간에서 앞으로 뻗어 나가는 검기를 피해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머…… 멈……!!”
칠소 지학은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고자 했지만 수많은 검기가 그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커어어억…….”
지학은 전신에 수십 개의 검기 자국을 남긴 채 목숨이 끊어졌다.
아쉽게도 남궁진은 죽은 자가 지학인지 알지 못했다.
“이제 됐소이다. 아무리 화산도협이라 해도 절대로 본인의 검을 벗어날 수 없소.”
“크크크. 이소. 수고했소이다. 귀찮은 놈을 드디어 우리가 죽였소.”
그들은 고진유를 죽였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들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구경 했소이다. 근데 죽은 자가 본도가 아니라서 아쉽게 되었구려.”
남궁진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목 뒷덜미가 싸늘해졌다.
그뿐만 아니었다.
삼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죽인 인물이 누구인지 확인하고자 했다.
“사소, 칠소, 팔소…….”
“나 여기 있소.”
“나도…….”
사소와 팔소가 빠르게 대답했다.
‘그럼…… 당한 건 칠소 지학이다.’
파앗!!
삼소 영공후는 몸을 날려 벽에 붙어 섰다.
“모두 벽에 붙어 서시오.”
그의 말을 따라 세 명이 동시에 벽에 붙었다.
“이젠 당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전부 보이는군요.”
스윽.
고진유는 오른쪽 벽에 붙은 남궁진의 앞으로 다가섰다.
“흑룡군장 당신이 극일천의 인물일 줄은 예상 못 했소. 남궁세가에서 아쉬울 게 뭐가 있다고 가문을 버리고 극일천에서 내민 구렁텅이에 들어갔소? 이해가 가지 않는군.”
“…….”
뚝. 뚝.
그의 허리에서 피가 떨어졌다. 사의검에 베인 부상이 생각보다 깊었다.
바닥으로 고개를 내리는 순간 고진유가 움직였다.
“이소, 앞을……!”
삼소의 다급한 외침에 남궁진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미 고진유의 사의검이 견정혈을 찌른 뒤였다.
털썩.
남궁진은 온몸에 기력이 빠져나가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이번에는 호충신법을 펼친 고진유가 공진의 앞으로 다가섰다.
“성불을 하셔야 할 분이 어찌 지옥에 가시고자 하오.”
“물러…… 나라!!”
퍼어어엉! 퍼어어엉!!
공진은 당황한 표정으로 나한십팔수를 연이어 펼쳤다.
하지만 벗어 던진 허물만을 맞힐 뿐 신법을 펼친 고진유를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
“허어. 그러다가 여기 전체를 부수겠소이다.”
쿠우욱.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공진의 견정혈에 사의검의 검기가 파고들어갔다.
공진의 몸속에 흐르던 내력이 완전히 잘려 나갔다.
“아아악!”
공진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연이어 두 명이 당하자 남아 있던 사소와 삼소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한쪽 팔이 잘린 사소는 도저히 싸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중원 무림에 적호군장 태소묵은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고 소문이 난 무인이었다.
하지만…….
예전의 적호군장 태소묵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지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소만이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밖에 나가서 싸웠다면 일방적으로 안 당했을 텐데.’
삼소 연공후는 그를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화산도협, 졌다. 하지만 이것을 명심해라. 무림맹의 존재는 본 천의 앞날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영향이 없다는 분이 무림맹에는 왜 들어왔소?”
“그건…….”
“원래 싸움의 기본은 적의 수뇌부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오? 극일천이 무림맹에 들어온 건 그만큼 중원 무림이 뭉치는 것을 겁내는 것이라 보고 있소.”
“…….”
“후후후.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본도의 말이 맞다는 뜻이겠군.”
“크윽…… 화산도협, 혼자서는 죽지 않을 것이다!!”
우우우웅-!!
영공후는 내력을 단숨에 끌어 올렸다.
공간에 함께 있는 모두와 자결하고자 함이었다.
“누구 맘대로.”
피이이잇!
고진유의 손에서 빠져나간 사의검이 한 줄기 빛줄기를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퍼어억!
사의검은 그대로 영공후의 목을 관통한 뒤 벽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