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비상위조차 조사하겠다는 고진유의 말에 사마추가 반박하듯 일어났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침묵에 잠겼다.
흥분한 사마추의 표정은 당장에라도 화산처럼 노기가 분출할 듯했다.
그에 반해 고진유는 여전히 평온했다.
“지금…… 무슨 저의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싶군.”
“일군사님,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왜 흥분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본인을 놀리는 것인가? 방금 한 말의 정확한 저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것이네.”
“전 있는 그대로 제 뜻을 알려 드린 것뿐입니다. 다른 네 분은 저에게 저의가 없다고 생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혼자서만 이상하게 보시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요.”
“……!”
사마추는 다른 네 명을 보면서, 순간 스스로 흥분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기분이 나쁘실 수 있겠지만, 제 뜻은 무림맹에서는 그만큼 성역 없는 수사를 한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고자 함이었습니다.”
“…….”
“그래야만 무림맹의 모든 이들이 공정하다고 생각할 게 아니겠습니까?”
고진유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저의와 자신이 받아들인 저의는 분명 다를 것이었다.
‘이 녀석…… 내가 거부할 수 없도록…… 역시 보고 있을 수 없어. 손을 먼저 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군.’
무림맹주를 죽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무리를 하더라도 이 녀석을 죽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사마추는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그의 표정은 불편해 보였다.
비상위를 소집한 의미는 사라졌다.
‘후후후. 사마추, 조금만 더 기다리시오. 당신의 가면을 벗겨 주겠소.’
사마추와 고진유는 말문을 닫았다.
회의는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았다.
서로 모인 자리에서 해야 할 말은 전부 다 했다.
제갈문은 분위기가 서먹해지기 전에 먼저 나섰다.
“이보시게, 일군사. 다른 안건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렇군. 회의가 끝난 것 같으니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도 되겠는가?”
“그렇게 하시지요.”
사마추가 원하던 대로 회의는 진행되지 않았다.
회의석상에서 일어나는 그들과 함께 따라 일어났다.
사마추와 달리 제갈문은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띠었다.
“허허허, 일군사 덕분에 좋은 시간을 가졌네.”
“살펴 가십시오.”
그들은 사마추와 짧게 인사를 나눈 뒤 금맹전을 나섰다.
홀로 남은 사마추는 밖으로 나간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눈동자에 살기가 가득했다.
고진유는 밖으로 나온 뒤 제갈문을 향해 돌아섰다.
“태상장로님, 장로전까지 가신다면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특사가 안내를 해주겠다면 영광이로군.”
금맹전 앞으로 나서기 전 공요대사, 황보유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께는 제가 오후에 따로 인사를 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게나.”
“나중에 보세.”
공요대사와 황보유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제갈문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제갈양을 보았다.
“넌 할 일이 많을 테니 가서 열심히 일하도록 하게.”
“아, 네. 알겠습니다. 나중에 보자. 오늘 잘했어.”
“고맙습니다. 나중에 찾아갈게요.”
제갈양은 고진유를 보고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곧장 비맹전으로 떠났다.
고진유와 제갈문은 태상전으로 산책을 하듯 천천히 걸었다.
제갈양이 떠나기 전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보아하니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구나.”
“사실 어제저녁에 잠시 만났습니다. 제가 이군사께 확인할 것이 있었거든요.”
“그런가? 혹시 특사에 관한 것이었나?”
“…….”
“바로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군. 허허허.”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녀석이 특사에 대한 법전 내용을 달달 외우고 있더구나. 의외라 생각했지. 무림맹의 군사가 되었다고 해서 법전을 외웠을 리 만무하다고 보았다네.”
“무림맹의 특사에 대해 정확히 알고자 했습니다. 제가 무림맹 내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먼저 알아야 그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좋은 결정이었네.”
“감사합니다.”
태상전으로 가는 길 사이로 많은 이들을 지나쳤다.
하지만 그들에게 제갈문의 존재는 쉽게 다가서기 힘든 인물이었다.
슬금슬금 피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고진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긴. 나라도 마주치기는 싫지.’
제갈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자네도 나와 마주치기 싫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세상에 태상장로님만큼 인자하신 분이 어디 계시겠습니까?”
“허허허, 맞네. 지금까지 세상이 나를 몰랐지. 자네만이 똑바로 알아주는구만.”
‘완전 귀신이네.’
어느덧 태상전에 도착했다.
“자신 있는가? 맹주를 죽인 놈들일세.”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자신 있습니다.”
“자네를 믿네. 일군사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무리한다면 지금이라도 잡을 수 있습니다만, 완벽하게 잡을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허허허. 다행이군. 앞으로 무림에 대해서 걱정할 이유가 없겠어. 언제든지 내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도록 하게나.”
“알겠습니다. 살펴 들어가십시오.”
“수고하게나.”
마치 손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처럼 고진유를 다독인 제갈문이 안으로 들어갔다.
스윽.
제자리에서 그가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던 고진유는 돌아서며 맹주전으로 향했다.
‘우선 미끼부터 던져볼까?’
* * *
-삼성혈전계.
혈사천과 천검궁의 싸움을 일으킨 뒤 무신과 천살지인, 그리고 화산도협을 잡는다.
나하중은 결정을 내렸다.
“클클클…… 완벽한 때가 온 것 같군. 시작해 볼까?”
무신 초일군과 천살지인이 싸우기 위해서는 천검궁과 혈사천의 싸움이 시작되어야 했다.
“윤 총관, 계획대로 잘 되어가고 있는 건가?”
“혈사천에서 워낙 의심이 많아서 힘들었지만 제대로 물은 것 같습니다.”
“혈사천주 조탁, 이 녀석이 두더지 같은 놈이라 상당히 의심이 많지. 하지만 또 욕심은 더럽게 많다네.”
“맞습니다. 욕심이 그의 의심을 뛰어넘었습니다. 당연히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혈사천의 욕심에 천검궁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겠지.”
나하중은 삼성혈전계에 대해 확신했다.
천검궁과 혈사천은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함정에 빠질 것이었다.
“지금쯤이면 그들은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좋아. 재미있겠어. 우린 싸움 구경이나 하면서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나하중은 무림맹에 대해 물었다.
“그놈은 무림맹에 들어간 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맹주전의 친위호위대를 특사정화단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윤여림은 무림맹에서 올라온 소식을 빠짐없이 알려주었다.
“훗. 그곳도 재미있게 돌아가는 모양이군.”
“무림맹 특사의 신분 때문에 복잡한 모양입니다.”
“무림특사를 거의 무림맹주와 비슷한 권한을 가지도록 인정했다는 건 그놈을 맹주로 선출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무림맹주로 추대하는 것보다, 특사의 신분이라면 무림맹 중도에 선 인물들도 부담 없이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군. 맹주가 죽은 뒤 영사가 무림맹을 장악할 줄 알았거늘…… 실패한 듯 보이는군.”
“만일 무림맹이 그에게 완전히 넘어간다면 새롭게 대비하셔야지 않겠습니까?”
“꽤…… 큰 공을 들여서 작업한 것을 버리는 것은 아까운데 말이지…….”
“전주님. 무림맹을 그에게 그냥 주기에는 아깝지 않습니까?”
“당연히 아깝지. 허허, 한바탕 피바람이라도 불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후후후…… 우선 무림맹에서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 지켜보도록 하세나. 그다음 본 천이 움직이도록 하지.”
“전주님의 명령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윤여림은 고개를 숙였다.
* * *
다각. 다각.
육두사륜 마차 위로 천검궁기(天劍宮旗)가 펄럭거렸다.
중원무림제일세력 천검궁의 천궁마차가 관로를 따라 움직였다.
천궁마차 앞뒤로 기마대가 호위를 했다.
마차 안에는 천검궁주 무신 초일군의 다섯 번째 제자인 금하희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환했다.
“이거라면 사부님께서 좋아하실 거야.”
그녀는 손에 든 두루마리를 보았다.
보름 전.
호림산장의 장주가 우연히 전대장문인의 물건을 정리하다가 한 장의 지도를 발견했다.
장주 인주동은 처음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술자리에서 친분이 깊은 회남문가의 가주 문직에게 지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문직은 지도에 적힌 글자 중에서 기련곡이란 글을 찾아냈다.
그는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굴에 표현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척하면서 지도를 팔도록 유도했다.
평소 같았으면 인주동은 그냥 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이상한 태도를 보면서 지도가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안하네. 전대장문인의 유품이라서.”
“괜찮네. 내가 고지도를 모으는 취미가 있어서 요청한 것이니…… 혹시 다음에 생각이 나면 연락을 주게나.”
문직은 빨리 자리를 물러났다.
그리고 그날, 야밤에 호림산장을 찾아가 지도를 훔치는 도중, 깨어난 인주동을 죽였다.
황금지도를 훔친 문직은 완전범죄로 착각했다.
자신을 본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 황금지도에 대한 소문이 비밀리에 안휘성 전체에 퍼져 나갔다.
“황금지도는 황금무동을 가리키고 있다.”
황금무동에 대한 소문.
기련곡의 위치가 그려져 있는 지도의 존재.
대칸의 명에 의해 중원의 수많은 보물들과 무공서들이 숨겨져 있는 비밀 장소.
중원인들은 그곳을 오래전부터 황금무동이라 불렀다.
퍼져 나가던 소문은 천검궁의 귀에까지 들어섰다.
그리고 어떠한 일에도 나오지 않던 천검궁이 움직였다.
오제자 금하희가 천검기마단을 이끌고 안휘성으로 나온 것이다.
많은 무인들이 황금지도를 탐냈지만, 천검궁의 무력 앞에서는 버틸 수 없었다.
최종적으로 승자는 천검궁이었다.
“기련곡의 비밀을 풀 수만 있다면…… 그들을 이길 수 있다.”
그녀는 기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만족했다.
덜컹.
그때, 마차가 속도를 줄이며 급작스럽게 멈추었다.
금하희가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오공녀님, 전방에 수상한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어디를 말하는 거지요? 정확히 보고를 하세요.”
“죄송합니다. 곧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쳇.”
분명 황금지도를 노리고 나타난 무리들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두 눈이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덜컹!
문을 세게 열고 밖으로 나온 그녀가 천검기마대를 멈추게 한 전방의 무리들을 노려보았다.
기마대주 화무평이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저들은 혈사천입니다.”
“흥. 지저분한 곳에서 찾아왔군.”
사파 최고의 문파가 눈앞에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두려움을 주지 못했다.
천검궁에게 혈사천의 존재는 대수롭지 않았다.
“적의 인원은 대충 얼마인가요?”
“앞에 나타난 것으로 봐서는 최소 오백 명 정도입니다.”
“오백 명이라면 본 궁의 기마대가 쉽게 상대할 수 있지 않나요?”
“오공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소신이 바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화무평이 말고삐를 당겨 앞으로 나설 때였다.
둥둥둥둥!
천궁마차 주위로 북소리가 울렸다.
금하희의 눈썹이 점점 치켜 올라갔다.
그들 주위로 나타난 혈사천의 무인들이 천검기마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휘익!
혈사천의 무리 사이에서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인은 규비인이라 한다.”
“오호라, 당신이 혈광검이란 말인가요?”
중년 사내의 정체는 혈사천의 혈사멸명당주 혈광검 규비인이 틀림없었다.
“그렇다. 오늘 본인이 운이 좋구려. 중원십봉인 천검봉 금하희 소저를 여기에서 만나게 되다니. 하하하.”
“혈광검께서 무슨 일 때문에 천검궁의 길을 막으시나요?”
“길을 막은 게 아니다. 본인에게 그 물건만 돌려주면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고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겠소이다.”
‘여기에도 도둑놈이 있군.’
혹시나 했지만 역시 혈사천에서도 황금지도를 노리고 있었다.
“만일 본녀가 이것을 주지 않겠다면 싸우게 되는 것인가요?”
“당연한 말을 하는군. 둘 중 한 명은 죽게 되겠지. 물론 죽는 것은 내가 아니라 천검봉, 그대가 되는 것이지. 크크크.”
규비인의 입가에서 괴소가 흘렸다.
채애앵-
그녀는 허리에서 검을 뽑고 천궁기마대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전원 검을 들어라!”
채애애앵!
수십 자루의 검이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혈사천의 사파인들을 향해 돌진.”
두두두두-
기마대가 동시에 전방을 향해 달려 나갔다.
* * *
안휘성에서 다급하게 급보가 도착했다.
“이건 또 뭐야?”
제갈양은 급보를 읽으면서 단번에 인상을 썼다.
혈사천과 천검궁이 맞붙은 사건이었다.
“혈사천 이놈들은 왜 자꾸 망나니 같은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남궁세가와 한바탕 싸우더니 이번에는 천검궁과 부딪쳤다.
두 세력이 부딪힌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천검궁의 오공녀가 실종되었다.
거기에 그들이 싸운 이유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황금무동.
“기련곡의 위치가 그려진 황금지도라…… 흠…… 이게 진품이 맞다면 목숨을 걸만큼 싸울 일이긴 하지.”
무림맹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무림맹 일도 처리가 안 됐는데. 신경 쓸 일이 많아지고 있군. 내 팔자야.’
또한 천검궁과 혈사천의 일이기에 가만히 두고 보면 안 될 일이었다.
만에 하나, 누군가 두 곳을 붙게 만들었다면.
“황금지도에, 하필이면 혈사천과 천검궁이 맞붙었어. 이건 완전히 진유 아우를 노리는 거잖아.”
제갈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맹전은 나선 그는 다급히 맹주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