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혈승존은 무심한 표정을 지었으나 나타난 네 명의 도사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혈인불과 혈장불이 당했다는 것인가?’
직접 그들을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털썩.
옆에서 싸우던 혈무불 또한 화산파 도사에게 쓰러졌다.
‘허어…… 이떻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뢰음사의 혈동삼불이 화산육협에게 완전히 당했다.
금당소부터 금장벽까지 사천당문에 놀아났다.
혈승존은 마지막을 장식할 자리를 둘러보았다.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았다.
‘……금장벽이라면 충분히 잠들기에 좋은 자리지.’
혈승존은 삶을 내려놓았다
파아아앗!!
원기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십이 성의 귀왕기를 뿜어냈다.
“홀로 가지는 않겠다. 누가 본존의 손에 먼저 죽고 싶지? 원하는 놈은 모두 덤벼라!!”
휘익!
그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혁자영과 장두총의 신형이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사형들은 생각이라고는 전혀 안 한다니깐!”
당우희도 곧바로 두 사람 뒤를 따랐다.
“후훗, 그건 사매도 마찬가지잖아.”
타아앗!
연자련 또한 당우희의 옆으로 붙으며 함께 달렸다.
네 사람이 쏟아내는 내기.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혈승존의 앞에서 터져 나왔다.
‘크윽…….’
혈승존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화산육협 개개인의 내력은 이미 그들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높았다.
그는 저들을 상대로 내력의 우위를 가질 수 없었다.
무공 또한 마찬가지.
완벽한 합공으로 펼친 무공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사형, 우리도 같이할까요?”
우종성의 옆으로 곽우가 다가왔다.
“좋아, 가자.”
* * *
일각 뒤.
혈승존의 가슴에 차가운 검이 박혔다.
“허억…… 비겁…… 하게…… 떼거리로 덤비다니…….”
“혼자 이길 수 없으면 함께 싸우는 게 맞지 않소? 이런 것조차 예상하지 못했다면 중원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소.”
우종성은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금장벽 아래로 수많은 죽음들이 펼쳐져 있었다.
“수장인 당신은 저들의 죽음을 안고 가시오.”
스걱.
우종성의 검기가 혈승존의 목을 지나갔다.
“커억.”
혈승존은 짧은 비명을 내며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멀리서 그 장면을 보던 당천독과 송풍자는 드디어 끝났음을 알았다.
“이건…… 저들만으로 대뢰음사를 물리친 듯하외다.”
“그렇소이다. 서장과의 싸움에서 승자는 화산육협이군요.”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나하중은 차를 들었다.
평상시와 같은 가벼운 움직임에 표정은 평온했다.
하나, 그의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새외무림중원혼돈계의 실패.
수십 년 동안 공들였던 계획이 산산조각 나며 틀어졌다.
“화산파…….”
동영과 남방독문, 서장 대뢰음사 모두 고진유와 그의 사형제들에게 당했다.
스윽.
나하중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의 옆에 선 두 명의 인물.
수곡자와 윤여림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먼저 수곡자가 말문을 열었다.
“중원 무림에 합당한 충격을 줘야 합니다.”
“합당한 충격이라…… 그게 무엇일꼬.”
“무림맹주를 손보는 게 어떠하십니까?”
“권왕을?”
의외의 대답에 나하중은 멈칫했지만, 담담히 다시 물었다.
“화산도협이 아니고?”
“지금까지 그를 상대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능력이 없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화산도협을 무신과 같은 인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음…… 당분간은 가만히 놓아두자는 것인가? 철갑은 어떻게 하고?”
“철갑 또한 당분간 그대로 두는 게 나을 듯합니다.”
“이유는?”
“무구천에서도 실패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 사실을 보건대 화산도협은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맞아. 그런 놈인 것 같군.”
나하중은 그의 말을 인정했다.
“철갑은 화산도협을 죽이지 않는 이상 무구천에서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후후후. 그런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지.”
혹시나 철갑이 무구천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했었다.
“그는 어디로 움직이고 있지?”
“무림맹으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흑화전주는 아직도 그 녀석을 따라다니고 있는 것인가?”
이번에는 윤여림이 나섰다.
“네, 그렇습니다. 홀로 움직이는 것을 봐서는 혼자 있을 기회를 노리는 듯합니다.”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겠지?”
“흑화전주의 무공에 신단을 복용한 상태에서 싸운다면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무신단은 만능은 아니다. 물론 내력을 얼마만큼 끌어 올리느냐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르지. 정신을 신단의 힘에 빼앗기지 않는다면 이름 그대로 완벽한 신단이니까. 그게 아쉬워.”
“현재 신단도 불안정하다는 것입니까? 소신이 보기에 거의 완벽하다고 보입니다만…….”
“마지막 한 단계가 모자라네. 지금까지 만든 것은 다른 놈들에게 사용하는 게 맞아. 후후, 자네라면 신단을 복용할 수 있겠는가?”
“…….”
윤여림은 대답을 똑바로 하지 못했다.
“결과를 아니 복용하지 않겠지. 그래서 내가 원한 건 완벽한 신단을 만드는 제조법이었어.”
나하중의 표정에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신무신단과 공마신단을 만든 인물은 무림맹 약의전주인 편휴.
중원 최고의 약의로 알려진 천령약의 편후가 신단을 제조했다는 사실을 중원인들은 몰랐다.
“쯧쯧, 아쉽구나. 죽이지 않고 살려줬어야 할 인물이었거늘.”
철갑 속에 든 세 가지의 물건.
그중 하나가 천령약의가 제조한 신무신단의 완벽한 제조법이었다.
제조법을 받은 후, 약의전주 편휴를 죽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혹시나 그가 마음이 변해 신무신단과 공마신단의 비밀을 무림맹에게 알리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으니까.
“윤 총관. 혹시 다른 곳에 몰래 그 제조법을 놓아두지 않았을까?”
“송구합니다만 그때 그의 거처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신단에 대해서 어떠한 내용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음…… 그의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지?”
“결혼하지 않아 그에게 자식은 없습니다. 다만 곁에서 함께했던 제자가 한 명 있습니다.”
“제자라……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허창의 장각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군. 사람을 보내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한번 찾아보도록.”
“죽이는 것입니까?”
“그건 알아서 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바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저희는 그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수곡자와 윤여립은 천문전을 나섰다.
홀로 남은 나하중은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겼다.
‘흠……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군.’
신단만 완벽하게 제조한다면 언제든지 극성으로 신단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스르르륵.
그때, 천문전으로 들어서는 기가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나하중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천주님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그렇습니다.”
“…….”
나하중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혹시 본인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권왕의 목숨을 끊고자 하십니다.”
방금 전 그들이 결정을 내린 내용과 같았다.
“……설마 이미 보내신 것은 아니겠지?”
“맞습니다. 천주님께서 멸군인을 보냈습니다.”
나하중의 표정이 단번에 변했다.
‘천주님께서 직접 움직이신다?’
멸군인을 보냈다면 권왕의 목숨은 이미 끝이었다.
급격한 변화는 똑바로 상황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화산도협의 존재에 계획이 어긋났다.
권왕이 죽는다면 더욱더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으로 변할 것이었다.
‘왜…… 말없이 보내셨는지 모르겠군. 우릴 믿지 못하고 계신 것인가?’
* * *
침주에서 출발한 고진유와 일행은 무림맹으로 곧장 향했다.
하남성 정주로 올라가는 길에 사천성에서 일어난 소문을 들었다.
“서장을 완벽하게 물리쳤다는군!”
묵경은 전황을 바꾼 화산육협에 대한 소문을 자세히 풀며 뿌듯해했다.
“사형들이 잘 처리할 것이라 믿었어요.”
“진유 아우, 이제 그럼 새외 세력들은 모두 처리가 된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북해의 빙궁주가 결정을 잘 내린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새외무림 중 오직 북해빙궁만이 중원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다각다각.
두 사람 곁으로 백마를 탄 북소연이 다가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나요?”
“별 이야기 안 했소이다. 그저 새외무림이 잘 해결되었다고 했소.”
“축하드려요. 또 한 번 화산도협과 친협에 대해서 무림을 진동시켰어요.”
“축하라고 할 건 없소. 무림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외다.”
북소연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방금 고진유에게 들은 말이 너무 우스웠다.
“방금 저를 웃기려고 한 말이죠?”
“맞소.”
“…….”
오히려 담담하게 인정하는 고진유의 대답에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북 소저, 여하튼 고맙소이다. 당 숙부를 위해 마차까지도 마련해 줘서 말이외다.”
“호호호. 대단한 건 아니에요.”
“그럼, 본도에게 부탁할 게 무엇이오?”
“그건 아직. 나중에 이야기할게요.”
“좋소. 그리고…… 혹시나 해서 당부하지만, 본도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하지 않겠소이다.”
“알겠어요. 그런 걱정은 안 하게 할 테니 마음 놓으시길.”
고진유는 분명하게 말을 했다.
“근데 허창으로는 왜 가세요?”
“당 숙부가 말하기를, 그곳에서 무림맹 약의전주의 제자가 의원을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약의전주라면…… 천령약의(天靈藥醫)을 말하시는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묵경이 대답했다.
“맞소이다만…….”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요?”
“그라면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천령약의 편휴 말이에요.”
고진유와 묵경은 북소연의 말에, 어떠한 사연이 있음을 알아챘다.
“우리가 모르는 일이 있는 모양이군요?”
“오래전 일이 생각났어요. 도협의 사부께서 무림맹에서 철갑을 얻은 날이 천령약의가 죽은 날이었죠.”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소?”
“무림맹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큰일인데 너무 조용하게 처리가 된 듯해서 본림에서 관심을 가졌어요.”
“그는 어떻게 죽었소이까?”
“공식적으로 천수가 다했다고 무림에 알려졌죠. 하지만…… 직전까지만 해도 건강했어요.”
“음…… 그에게 뭔가 비밀이 있었다는 말이군요.”
“그에 대한 소문이 있었어요. 묵 대협도 들어본 적이 있지 않나요?”
묵경은 곰곰이 생각하다 잊고 있던 소문을 떠올렸다.
“설마 신약음의(新藥淫醫)를 말하는 거요?”
“네. 맞아요.”
“형, 그게 뭡니까?”
고진유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한때 사파 사이에서 유행하던 환단이 있었어. 단번에 내공을 증진시켜 준다면서 말이야.”
‘내공 증진? 환단?’
고진유는 순간 극일천의 신단이 바로 생각났다.
“그걸 만든 인물을 신약음의라고 불렀어. 그가 만든 환단은 효과는 좋았지. 다만 복용하는 순간 절대로 끊지 못한다는 게 큰 단점이었어. 점점 이성도 잃는다는 문제도 있었고.”
“지금도 그 환단이 나옵니까?”
“사파에서는 계속해서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긴 하는데, 실질적으로 몸에 문제없이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지금은 거의 외면당했다고 할까?”
끄덕.
고진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약음의의 정체가 천령약의인 게 확실하게 밝혀졌습니까?”
“아, 그건 아니야. 신약음의를 추적하기 위해 무림맹에서 조사를 했지만 밝혀진 것은 없다고 들었어. 그에 대해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여하튼 의심을 받던 그가 그날에 죽었다는 거죠?”
“나도 죽었다는 소문만 들었지 그날일 줄은 몰랐어.”
무림맹에서 극일천의 인물과 사부가 만났던 그날, 그 자리에서 천령약의 편휴가 죽었다니.
분명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옥혈림에서 알아낸 게 있습니까?”
“아쉽게도 무림맹에 들어갈 수 없으니, 의심은 들었지만 도중에 그만두었어요.”
“그렇군요.”
극일천의 신무신단과 공마신단.
그리고 신약음의가 제조했다는 환단의 존재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쉬워요. 그때 좀 더 깊게 조사를 했다면 좋았을 것을. 그때는 극일천에서 신단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거든요.”
북소연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살짝 묻어 나왔다.
“혹시 장각에 있다는 제자의 이름이 어떻게 되오?”
“성은 장 씨요, 이름은 고라고 부르고 있어요. 호는 중경으로 부른다고 해요.”
“장고? 천인명의(天人名醫)를 말하는 것이오?”
묵경도 그의 명성을 익히 들었다.
그가 천령약의의 제자일 줄은 또 몰랐다.
고진유는 생각이 잠겼다.
정말로 그가 극일천의 인물이라면?
그의 죽음이 타살이라면?
분명 그의 죽음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으리라.
다만 아쉬운 건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었다.
“그를 만나보면 우리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게.”
* * *
무림맹주 황보강은 기분이 좋았다.
새외무림을 완벽하게 제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만 아쉬운 건 무림맹에서 직접 관여한 곳은 남방독문뿐이라는 것.
‘크흠, 아쉽긴 하지만, 어찌 보면 네 곳 모두 화산파가 새외무림을 완벽하게 제압한 게 맞지.’
북해빙궁과 직접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중원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도 알고 있었다.
그때,
흠칫.
짧고 강한 기가 느껴졌다.
‘여기까지 들키지 않고 들어왔다.’
맹주전까지 다가선 인물들.
어림잡아 수십 명이 집무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맹주전을 호위하던 무인들이 죽은 것이 아니었다.
‘젠장…… 오늘은 운수가 좋지 않겠어.’
다가오는 기척들이 살기를 감춘 채 외부에서 점점 좁혀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