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소식을 들은 세 가주가 서문당소의 군막으로 찾아왔다.
고진유와 친협으로 알려진 세 사람과 연이어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묵경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문당소가 물었다.
“어디를 가려고 하느냐?”
“잠시 밖에 할 일이 있습니다.”
‘금방 온 녀석이 여기에서 무슨 할 일이 있다고?’
묵경의 표정을 보니 정말로 일이 있는 듯했다.
‘훗. 정말로 무작정 오지는 않았다는 것이군. 대단한 녀석들이야.’
“전 그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진유 아우와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그렇게 해라.”
묵경을 따라 인양과 녹림야검도 군막 밖으로 나왔다.
서문세가주의 군막 주위에는 많은 무인들이 모여들었다.
무림인들은 고진유와 세 명의 친협들을 성협으로 총칭하며 불렀다.
서문정이 다가왔다.
“내 거처로 가자.”
“나중에요. 먼저 진영을 구경해도 되겠소?”
“구경을?”
‘다니면서 잘난 체를 하겠다는 건가?’
서문정은 살짝 인상을 썼다.
“알았다. 네가 알아서 해라.”
“뭐요? 이상한 표정 짓지 말고 혹시 모르니 피독제나 복용한 뒤 잘 따라와요.”
“피독제를 복용하라고?”
무언가 있음을 안 서문정이 얼른 호주머니 안에 있던 피독제를 복용한 뒤 묵경의 뒤로 다가섰다.
“자아, 인양아. 어디 한번 돌아보자!”
“넵. 알겠습니다.”
* * *
하후강은 연신 감탄의 눈빛으로 고진유를 보았다.
‘역시…… 크게 될 인물이었어.’
예전에 보았을 때도 범상치 않았지만, 이른 나이에 무림 최고의 인물로까지 올라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화산도협께서 친히 돕기 위해 찾아오시니 마음이 놓이는구려.”
“하후 세가주의 말씀처럼 이상하게 걱정이 사라지는 듯하외다.”
동별광도 같은 심정이었다.
고진유는 일어나 그들에게 포권을 했다.
“고맙습니다. 무림맹 이군사께서 다급히 본도를 보내셨습니다. 원래 계획은 청룡군과 함께 올 생각이었지만, 도중에 급한 일이 생겨 합류하지 못하고 부득이 따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마 내일쯤이면 그들도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청룡군까지 도착한다면 이번 싸움은 훨씬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남방독문은 우리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고진유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휴우…….’
네 명의 가주들은 자신 있게 대답하는 고진유를 보면서 마음이 놓였다.
“방금 본도가 다급한 일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 일이 무엇인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리와 연관이 있는 일이었소이까?”
“그렇습니다. 이곳으로 내려오는 도중 누군가 본도를 찾아왔습니다. 적룡군과 광서팔문이 싸웠던 현장에서 생존자 한 명을 찾았다고 하더군요.”
“그게 사실이오?”
서문당소가 놀라며 물었다.
“네. 생존자를 만나기 위해 잠시 들렀다 오는 길입니다. 다행히 독에 면역이 강했던 분이시라 목숨을 건졌던 모양입니다.”
“혹시…… 당문대사를 말하는 것이오?”
“맞습니다. 그분께서 천운으로 살아계셨습니다.”
“하아, 천만다행이외다! 그의 몸은 어떻소이까?”
“지금은 회복 중입니다. 그분께서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알려주었습니다.”
가주들은 거의 숨소리도 내지 않을 정도로 집중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남방독문에서 독성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
네 명의 가주들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독성체의 존재가 얼마나 두려움을 주는지 알 수 있었다.
상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게…… 정말이오?”
“사실입니다.”
고진유의 대답에 서문당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상하다 생각했었소. 삼천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전부 중독을 당했다니 믿을 수 없었소이다.”
그들에게 독성체가 있었다.
두려움이 그들 사이로 밀려왔다.
남방독문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했던 것들이 모두 쓸모없는 셈이었다.
“독성체는 본도가 맡을 것입니다.”
“단신으로 말이요? 하지만 독성체는……!”
“본도가 독에 조금 면역이 되어 있습니다. 독물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좀 더 독이 강할 뿐 아니겠습니까.”
고진유의 말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독성체를 독이 좀 강한 독물로 표현하는 인물은 화산도협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화산도협, 정…… 말로 독성체를 상대할 수 있겠소이까?”
“더 좋은 방법이 없는 이상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본도가 나서야지요.”
“아…….”
고진유의 대답에 네 명의 가주들은 감동을 받았다.
살신성인(殺身成仁).
“소문처럼 정말로 무림성자로군요…… 화산도협, 고맙소이다.”
“그대는 무림의 진정한 등불이네.”
“맞소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인이외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고진유에 대해 칭찬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너무 과한 칭찬에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고진유의 존재에 그들에게 독성체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사라진 듯 보였다.
“그리고…….”
고진유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른 이야기가 있소이까?”
“먼저 본도가 하는 말에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알겠소이다.”
가주들은 서로 마주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고진유는 적룡군과 광서팔문의 진영에서 일어났던 일을 당하정에게 들은 그대로 알려주었다.
남방독문과 싸우기 전, 진영에서 갑자기 독물들이 나타난 사실.
그 탓에 진영이 흩어지면서 똑바로 대응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독성체를 맞이해야 했다.
“내통자…… 아니, 변절자가 있었다는 것이군요.”
네 명의 가주들은 무슨 의미로 고진유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는지 이해했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독물들이 순식간에 공간을 뚫고 나타날 리 없습니다.”
가주들의 표정들은 좋지 않았다.
여기서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하후강은 걱정이 앞섰다.
“화산도협, 만일…… 우리 진영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큰일이지 않소이까?”
“지금 밖에서 묵경 형과 함께 제 동료들이 독물이 있는지 찾는 중입니다.”
서문당소가 또 한 번 놀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 아이가 어떻게 독물들을 찾는다는 것이오?”
“기다려 보시지요. 지금쯤이면 슬슬 나타날 때가 되었군요.”
그때였다.
웅성웅성.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렸다.
“다행이네요. 묵경 형이 발견한 모양입니다.”
“……!!”
“가서 보시지요.”
서문당소가 먼저 다급히 군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상관후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의 거처에 숨겨놓았던 독물들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수백 마리의 독물들이 독을 뿜어내지도 못한 채 인양과 녹림야검의 초단음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형님, 뭐 하고 있어? 어서 저놈들을 사라지기 전에 베어야 해!”
“어, 어…… 떻게 하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서문정의 목소리가 떨렸다.
“뭘 어떻게 해요. 무조건 도망 못가게 베라니깐!”
“그, 그렇지, 방호…… 대, 방호대!!”
서문정이 독물들을 베면서 소리쳤다.
후다다닥!!
곧바로 방호대가 나타나 도망가는 독물들을 함께 처리하기 시작했다.
묵경은 떨고 있는 상관후를 노려보았다.
서문정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의 얼굴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상관후. 이런 게 왜 네놈 거처에서 튀어나오는 거지?”
“……그게…….”
변명하려고 했지만 그의 거처에서 독물들이 나온 것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없었다.
수많은 시선이 상관후를 노려보았다.
휘이이익!
상관세가주 상관호가 내려섰다.
그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네…… 네놈이……!!”
“아버지…… 아, 아닙니다…….”
“그럼 이것들은 뭐지? 왜 네놈 거처에서 남방독문의 독물들이 나온 것이더냐?!!”
“그, 그, 그건…….”
너무나 명백한 증거에 상관후는 목소리를 떨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상관호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뿐만 아니라 상관세가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변절자가 상관후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털썩.
상관후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노오오옴!!! 감히 누구더러 아버지라 부르더냐!! 적혈군과 광서팔문의 삼천 명이 전멸당한 것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네놈은 우리 모두를 죽이고자 했다……!”
“저는 몰랐습니다! 도, 독물만 풀어놓으면…… 중독만 될 뿐 죽이지 않을 것이라…… 해서…… 근데…… 저도…… 과, 광서에서 모두가 죽었다는 말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려워서……!”
“하아…… 이 멍청한 놈아. 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들은 것이더냐?”
“공…… 령신단을…… 받았습니다. 내공을 증…… 진되는…….”
“하……!!”
아들이 최근 급격하게 내력이 강해진 이유를 알았다.
‘……모든 게 내 잘못이다. 내가 저 아이를 부추겼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서문세가가 부러웠다.
비록 서문의 성을 버렸다고 했지만, 여전히 풍류옥협은 서문세가의 아들이었다.
상관후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서문세가가 부럽다는 말을 했다.
‘미안…… 하다.’
상관호는 검을 잡았다.
그의 죽음으로 상관세가의 결백을 주장해야 했다.
휘익!
상관후의 목을 베기 위해 검을 펼쳤다.
“……!!”
설마 그가 아들의 목을 직접 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채애애앵!
그 순간, 상관호의 검이 중간에 막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아무리 죽을 짓을 했다고 해도, 아버지가 어찌 아들의 목을 벤다고 하십니까?”
고진유가 그의 검을 쳐내며 앞으로 나섰다.
“화산도협…… 이놈은…….”
“가주님, 진정하시지요. 본도가 보기에 그 또한 정확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같습니다. 남방독문과 싸워 물러나면 될 뿐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머지 뒷일은 무림맹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 믿었겠지요.”
“이놈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문을 배신했소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화가 나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를 죽여 상관세가의 결백을 주장하시려고 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
“전 상관세가를 믿습니다.”
“화산도협…….”
“이번 싸움은 상관세가가 선봉에 서 결백을 주장하십시오.”
고진유는 돌아서며 주위에 모인 무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소이까? 상관세가의 결백을 믿어주겠습니까?”
“……하후세가는 믿습니다.”
“서문세가도 믿습니다.”
“유성검가도 마찬가지외다.”
세 명의 가주가 대답했다.
“와아아아-!!! 화산도협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주위에서 동시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호남사문의 무인들은 고진유에게서 진정한 대인의 풍모를 보았다.
상관호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화산도협, 고맙소이다.”
“아닙니다. 이런 일은 어쩔 수 없습니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서로 불신을 해야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믿어야지 않겠습니까.”
고진유의 목소리는 주위로 퍼져 나갔다.
서로 믿어야 한다는 말.
잠시 뒤, 무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고진유는 무릎을 꿇은 상관후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준 건 신단이 아니라 마약이외다. 복용할수록 몸을 망치게 되지요. 일순간은 내력이 강해질지 모르나 점점 복용 주기도 짧아지게 될 겁니다.”
“……나도 당신들처럼 강해지고 싶었을 뿐이었소.”
“잘못 알고 있군요. 무공이 강하면 그저 싸움을 잘하는 것뿐이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란,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외다.”
“…….”
“당신 눈에 내가 강해 보이는 건 내가 잘 싸워서 강한 게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나아가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착각한 것이외다.”
상관후는 고개를 숙인 채 고진유의 말을 되새겼다.
‘마음이 강해야 한다고?’
그의 말이 맞았다.
마음이 약했기에 그들의 말에 현혹이 되었다.
뚝. 뚝.
머리를 바닥에 닿은 채, 상관후는 눈물을 흘렸다.
* * *
청룡군이 도착했다.
군장 황보성은 미리 도착해 있던 고진유를 만났다.
그리고 남방독문에 대한 사실들을 들었다.
“독성체라…… 상당히 귀찮은 존재이긴 하오.”
“가주들께도 알렸지만, 독성체는 본도가 처리하겠소이다.”
톡톡.
황보성의 옆에 앉은 백의 사내.
그는 청룡군의 군사로 황보성과 함께 내려왔다.
고진유는 그와 만난 순간 인사를 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단번에 알았다.
제갈세가의 인물.
그는 이군사 제갈양의 사촌 동생이었다.
“화산도협 덕분에 본 군이 유리하게 되었습니다.”
“군사께서 좋은 방법이 있는 모양이군요.”
“싸움의 승패는 지피지기라 했습니다. 이것 외에는 없지요.”
그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남방독문은 현재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린 저들이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해올지 알고 있지요.”
“그것을 이용하자는 것이군요.”
“네. 맞습니다. 강영이란 지형은 사실 방어하기 위해 좋은 장소는 아닙니다. 만일의 사태에 후퇴할 수 없는 곳이지요.”
“음…… 그렇군요. 어떻게 진영을 옮겨야 하겠소이까?”
“하지만 굳이 옮길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우린 도망을 갈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제갈수천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남방독문을 대항할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전 계획이 나올 때마다 가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쯤 철괘가 나오게 되면 화산도협께서 독성체를 상대하시면 됩니다. 그 이후는 우리 모두 총력전으로 남방독물을 몰아내면 될 것입니다.”
“본도는 군사의 계획대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가주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습니다. 제갈 군사의 계획대로 하겠습니다.”
네 명의 가주들도 모두 찬성을 했다.
이젠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 * *
‘크크크크……!’
독문주 염산의 입가에 괴소가 나왔다.
멀리 호남사문과 청룡군의 연합 진영을 보았다.
호남사문은 광서팔문과 무력 차이가 있었지만, 그는 두렵지 않았다.
‘크큭, 근질근질하구만.’
이미 무림과 한번 싸워본 결과 완벽하게 만족했다.
수많은 독물과 독공을 펼치는 수하들.
그리고 철괘 안에 든 존재.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었다.
그때, 그의 옆으로 희인이 다가왔다.
“문주님,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선봉은 천독당의 독물들이 나설 것입니다.”
“좋군! 좋아! 천독당이 놈들과 붙는 동시에 저들 내부에서도 한바탕 시작되겠지?”
“저놈들은 왜 독물들이 자신들의 진영에서 나타나는지 모르고 죽을 겁니다.”
“내가 이래서 사람을 못 믿고 독물을 믿는 것이지. 이놈들은 배신을 안 하거든.”
“…….”
“아, 놀라지 말게. 희인, 자네는 내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니까.”
“문주님, 감사합니다.”
“자자, 그럼 곧바로 철괘를 움직일 준비를 하자고.”
“넵.”
희인은 철괘를 향해 돌아섰다.
‘내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라고? 넌 이번 일이 끝나면 나에게 목이 잘릴 텐데……? 하하하하!’
그의 얼굴에 살소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