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유하랑의 내기는 강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유하랑의 내력이었다.
고진유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로 물러나세요.”
“조심해.”
묵경은 인양과 녹림야검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인양도 상대의 내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았다.
“고독기검의 내력이 저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중원오기라고 해서 천하오무보단 내력이 낮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동안 내력을 숨겼던 거야.”
“그래도 진유 형이 이길 수 있을 겁니다.”
“당연하지. 진유 아우는 지는 싸움을 하지 않아.”
그들은 고진유를 믿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도 고진유는 이길 거라 확신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실 난 벽화당 시절부터 절대로 지지 않는 법을 알았어.”
“그게 뭐냐고?”
“처음부터 질 것 같으면 싸우지 않는 거지.”
“아하하! 왜, 치사한 짓인 것 같지?”
“아니야. 상대에게 비굴하지 않게 도망치는 법을 익히면 돼. 하하하.”
‘형이 물러나지 않는다는 건 이길 수 있다는 거야.’
인양은 손에 힘을 주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우우우웅-
무형검이 울기 시작했다.
“화산도협, 본인의 검은 여의심검이라 한다.”
“네, 기억에 새기겠습니다.”
여전히 고진유에게선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여의심검이 무엇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고진유가 깜짝 놀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상대는 처음 듣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지도.’
여의심검이 어떤 무공인 줄 알았다면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하는 것으로 봐선 화산파에서 일부러 가르쳐 주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군.’
고진유는 이의검을 얼굴 앞으로 들어 일자로 펼쳤다.
그와 마주 서자 을지현이 생각났다.
‘장백산의 을지 어르신과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그분에 비하면 유하랑이 만들어낸 무형검은 문 앞에 겨우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화산도협, 본인의 검은 무형지검이라네. 막아보게.”
무형의 내기로 만들어진 백팔 개의 여의비검이 고진유를 중심으로 감싸며 쏟아졌다.
여의심검의 여의무허 초식.
팟팟팟팟팟-!!
무형지검이 그대로 고진유의 몸을 뚫을 듯 뻗어갔다.
채애애앵!
여의비검들이 사의검이 만들어낸 호신강막에 의해 가볍게 튕겨 나갔다.
유하랑의 눈빛이 순간 흔들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비록 한 초식이 막혔다고 해도, 고진유가 펼친 사의검은 너무나 완벽한 방어였다.
‘정확히 여의심검을 보며 막아낸 것인가?’
우연이라 해도 대단한 방어였다.
고진유의 눈을 노려보았다.
씨익.
그는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를 띠며 웃었다.
‘우연이 아니군. 내 공격을 제대로 알고 막은 거야.’
여의심검을 한 번도 보지 않고 바로 막아낼 수 없었다.
무형지검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면 절대로 방어가 불가능했다.
‘대체 어디까지가 본 실력인지…….’
유하랑은 무공을 받아내는 고진유를 보면서 전력을 다해 여의심검의 두 번째 초식을 재차 펼쳤다.
휘이이이익- 쉬이이이익-!!
무형지검에서 떨어지는 여의도장의 초식.
고진유가 서 있던 자리가 솟아올랐다.
연이어 유하랑의 여의무량의 초식이 더해졌다.
불쑥 튀어오른 바닥에서 허공으로 치켜 올라간 고진유를 향해 거대한 검으로 변한 무형강기검이 날아올랐다.
고진유는 장백산에서 을지현과 싸운 뒤 무(武)와 무(無)의 차이에 대해서 깨우치고자 했다.
‘과연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둘의 차이를 가르는 것은 무공을 펼치는 자아.
자아의 존재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살아야 했다.
삶의 의지.
생의 의지.
만물은 살아 있기에 변화를 받아들이고 변화한다.
스르르르르-
사의검이 움직이는 건 손이 움직이고 팔이 움직이며 몸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스걱-
유하랑의 무형지검이 사의검에 잘려 나가며 사라졌다.
“우욱……!”
유하랑의 가슴에 심한 통증이 일었다.
무형지검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심검뿐.
유하랑은 심검(心劍)에 의해 몸이 무너졌다.
“화산…… 도협. 언제 심검까지…… 익혔는가?”
“전 그것이 심검인지 모릅니다.”
“…….”
“단지 스스로 깨우치고자 했을 뿐입니다.”
유하랑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무공을 깨우치는 건 삼류나 하는 짓이었다. 절정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했다.
“크윽…….”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하루 정도면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여기까지 가본도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의 예입니다. 다음에는 누가 오더라도 다를 겁니다.”
“…….”
“그럼,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유하랑의 곁으로 조여하가 다급히 다가와 부축했다.
“숙부님! 괜찮으신가요?”
“하루만 지나면 괜찮을 것 같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는 일행이 벌써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화산도협의 무공이 숙부님을 이겼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허어,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이라고 했거늘. 세상의 이치를 거슬릴 수는 없겠지.”
“하지만…… 숙부님께서는 무구천의 오무천자(五武天者)이십니다.”
“오무천자라고 하더라도 절대무적은 아니니라. 나 또한 사람이거늘. 강한 자가 이기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우선 본 천에 연락을 하자꾸나.”
“네, 숙부님.”
“혹여 본 천에서 그에게 강압적으로 하면 안 될 것이니, 오늘 일을 그대로 보고하도록 해라. 지금 생각해 보니 그에게 처음부터 우리 요구만 계속한 듯싶구나.”
“숙부님, 제가 그를 만나서 다시 부탁을 해보도록 하겠어요.”
“또 만나겠다는 말이더냐?”
“…….”
조여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하랑은 돌아선 그녀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 * *
단성현에 들어선 뒤 식사를 위해 객잔을 찾았다.
탁자에 앉아 음식을 시킨 지 반각도 지나지 않았다.
후다다닥!
객잔 안으로 한 무리의 걸인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빠르게 주변을 살핀 뒤 한 방향으로 다급하게 움직였다.
“화산도협님.”
걸인의 목소리에 객잔이 순식간에 웅성거렸다.
걸인의 허리에는 삼결의 풋대자루가 걸려 있었다.
“무림 비맹군 정후조 소속의 흥개입니다.”
묵경이 바로 나섰다.
“비맹군이라면 제갈양 형님께서 보내셨소?”
“네, 풍류옥협님. 이군사님께서 다급히 보내신 게 맞습니다.”
“무슨 일이오? 우린 이미 무림맹으로 가는 길이거늘.”
흥개는 얼른 품 안에서 서신을 꺼냈다.
“여기 이군사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건 어찌 알았소?”
“숨어 다니지 않고서는 하남성에서 개방 제자의 눈을 피할 곳은 없습니다.”
묵경은 서신을 고진유에게 전해주었다.
고진유는 서신을 뜯어 읽었다.
-남방독문을 상대하기 움직였던 무림맹의 적룡군 일천 명과 광서팔문의 이천 명, 총연합 삼천 명 전멸.
생존자 없음.
‘삼천 명 모두가 전멸이라고?’
아무리 상대가 강하고 한들 삼천 명이 전멸당할 수 없었다.
고진유는 서신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전멸 원인으로 중독에 의한 독살이 추정됨.
남방독문은 전체 수는 적지만 극강의 독을 지닌 독물들을 부릴 수 있다는 점이 무서웠다.
제갈양이 보낸 서신의 내용은 길었다.
남방독문의 극강 독물을 상대하기 위해 적룡군과 함께 사천당문 출신 당문 대사 당하정과 열화문을 함께 보냈다.
제갈양의 예상대로라면 충분히 남방독문을 상대할 수 있어야 헀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반대였다.
-아우께 부탁하네. 청룡군과 함께 남방독문을 막아주게.
“형, 여기…….”
고진유는 서신을 묵경에게 건넸다.
“이거 또 내려가게 생겼군.”
제갈양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남방독문이 중원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미안하지만 잠시 밖에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혼자 결정 내릴 일이 아니군요.”
“아…… 네에. 알겠습니다.”
네 명은 객잔 뒤편으로 나왔다.
“진유 아우, 심각해.”
묵경은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남방독문의 독이 대단합니까?”
“충분히 대비했다면 괜찮았어야 정상이야. 게다가 당문대사가 함께했고 열화문까지 갔다면 분명 전멸을 당할 정도는 아니었어. 게다가 제갈 형님이 그냥 보냈을 리가 없어. 독물에 대비해 피독제까지 준비했겠지.”
“독에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괜찮았을 거란 말이군요.”
“정확한 상황을 모르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 삼천 명 전멸은 이상해.”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 겁니다.”
“무슨 말이야?”
“삼천 명을 단번에 중독시킬 수 있는 독을 만든 게 틀림없어요.”
“저어……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녹림야검이 손을 들었다.
“말을 해보세요.”
“오래전 일이지만 녹림대존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방독문에서 독성체(毒聖體)의 전신을 찾고 있었다는 말을 말입니다.”
“독성체? 그게…… 시, 실존한다고?”
묵경은 화들짝 놀랐다.
“그렇습니다.”
“묵경 형, 독성체가 뭔가요?”
“그게 뭐냐면…… 쉽게 말해서 아우가 혈사천에서 만난 그분이 내뿜는 살성처럼, 태어날 때부터 독성을 뿜어낸다고 보면 돼.”
“독성이…… 엄청 강한 모양이군요.”
“나도 들은 말이지만 독성체의 주위 반경 십 장 내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조건 중독이 된다더군.”
“허…… 엄청나네요. 정말로 녹검 씨의 말처럼 독성체가 그들에게 존재한다면 보통 일이 아니겠군요.”
“보통일이 아니라 무림의 재앙 수준이다.”
“독성체가 중원으로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무조건 막아야 하는 거네요.”
“아마도…….”
무조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묵경도 가야 하는 것을 알았지만, 독성체가 사실이라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우리 의견을 모으도록 하죠. 녹검 씨부터 먼저 대답하세요.”
“……전…… 도협님을 따르겠습니다.”
“그것도 좋은 대답이네요. 인양은?”
“독성체가 궁금해서요. 전 찬성입니다.”
“겁나지 않아?”
“형하고 같이 가는데 겁이 날 게 있나요?”
“후후후. 맞다.”
이미 두 사람은 찬성이 나왔다.
묵경이 굳이 반대해도 갈 수밖에 없었다.
“허! 이왕 갈 거라면 대범해야지. 좋아. 나도 내려가는 걸로. 정말로 독성체가 있는지 확인해 보자고.”
“좋습니다. 우선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무림맹으로 가죠.”
* * *
남방독문의 기세는 당당했다.
광서에 올라온 뒤 무림맹의 적룡군과 마주쳤다.
적룡군 일천 명과 광서팔문의 이천 명.
삼천 명의 무림맹 무인들은 자신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독문주 염산은 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속이 너무나 시원했다.
중원 무림의 변방이라 하며 무시를 얼마나 당했던가.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었다.
독성체가 존재하는 이상 중원무림은 남방독문의 이름만 들어도 떨 수밖에 없을 터.
“희인. 그 아이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척.
독문주 앞에 다가온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그분께서는 여전히 철괘에서 나오지 않고 계십니다. 충격이…….”
“쩝, 충격이라…… 뭐, 처음이니 당연히 그럴 수도. 하지만 중원 놈들은 예전부터 우리를 벌레만도 못하게 취급했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가 됐을 뿐이지! 아무 소리 말고 똑바로 잘 보고 있도록!”
“알겠습니다.”
“호남성의 무림 놈들은 어떻게 하고 있지?”
“호남오문에서 강영으로 모인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크크크. 우린 편하군. 그들이 알아서 무림의 정보들을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맞습니다.”
“근데…… 혹시 나중에 우리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니겠지?”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기존의 무림을 없애는 게 목적이라 하셨습니다. 중원은 관심 없으니 호남과 광서, 귀주, 운남이 본 독문의 손에 들어올 것입니다.”
“나도…… 그 말을 믿긴 해. 그래도 혹시나 염려가 되잖아. 괜히 일만 하다가 중원에서 쫓겨날지 누가 알아?”
“문주님. 그런 느낌이 들면 지금이라도 내려가시면 됩니다.”
“어허! 내가 내려가고 싶다고 했냐?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소신도 그런 걱정이 되긴 하지만 지금까지 한 것만 해도 손해 본 것은 아니라도 봅니다. 그동안 당했던 복수를 무림맹에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크크크크, 그렇지. 앞으로 계속 더 많이 복수를 할 것이고. 희인, 그대의 말을 따르는 게 맞았어.”
독문주 염산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빨리 재촉들 해서 호남으로 올라가도록 해라.”
“넵. 알겠습니다.”
희인은 독문주의 군막에서 곧바로 물러났다.
씨익.
입가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제법 똑똑하군. 토사구팽을 당할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을 보면.’
희인은 철괘로 된 마차를 보았다.
‘아쉽군. 저놈이 내 말을 듣는다면 좋았을 텐데…….’
독성체는 오직 독문주 외에는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았다.
독문주가 어릴 적 그의 은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우선 호남까지 정리한 후 독성체를 거둘 수 있도록 연구를 해봐야겠어.’
독성체만 가질 수 있다면 자신의 입지가 높아질 수 있었다.
“후후후. 그 전에 호남의 무림 놈들부터 정리해 볼까?”
희인은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