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179화 (179/425)

179화

지이익-

동영이라 적힌 글자 위로 줄이 그었다.

“동영이 너무 쉽게 당했군.”

천문전주 나하중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소한 무림에 한바탕 혼란을 일으켜야 했거늘.’

중원 무림에 무림맹에 대한 불신을 심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한 듯 보였다.

복건성과 절강성은 오히려 무림맹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했다.

‘화산도협.’

문제의 모든 원인은 한 인물 때문이었다.

“천문자님.”

윤여림의 목소리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를 깨웠다.

“무슨 일인가?”

“동영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나하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지고 오게. 일을 망쳐놓고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군.”

윤여림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여기 있습니다.”

나하중은 서신을 곧바로 펼쳤다.

피식.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나타났다.

“미친놈. 죽고 싶은 모양이군.”

눈동자에서 살형기가 쏟아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앞으로 동영은 극일천과 손을 떼겠다고 하는군.”

“동영존이 그런 말을 했습니까?”

윤여림도 서신의 내용이 믿기지 않았다.

“누가 그 자리에 올려줬는지 잊은 듯합니다.”

“허어, 이거 참. 모든 것이 미쳐 돌아가는 모양이야.”

“원래 왜구 놈들이 뒤통수를 잘 치지 않습니까?”

“원래 그런 족속들이긴 하네만, 설마 감히 나에게도 덤벼들 줄이야. 어떻게 하면 좋을꼬?”

“소신이 마지막으로 경고를 보내겠습니다.”

스윽.

하지만 나하중은 손을 저었다.

“됐네. 한 번 돌아선 놈을 억지로 돌아 세울 필요 없지. 배신도 습관이 되는 법이니 굳이 귀찮은 짓 하지 말고 목이나 따도록 하게.”

“……죽이는 것입니까?”

“불가능한가?”

“아닙니다. 동영존의 최측근은 전부 본 천으로 돌아선 지 오래되었습니다. 명령을 내리시면 바로 움직일 것입니다.”

“바로 시행하도록.”

“전주님의 명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윤여림은 더 시킬 일이 없는지 잠시 기다렸다.

‘없군.’

그가 일어나려고 한 순간, 나하중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화산도협, 그놈이 남궁세가를 도와줬다고 하더군.”

“혈사천주가 청양을 미끼로 두고 직접 남궁세가 본진으로 올라갔던 모양입니다.”

“혈사천주 조탁. 제법인 인물이지. 잔머리가 보통이 아니야.”

“전주님, 혈사천에 들어간 본 천의 인물들이 전부 제거되었습니다.”

“사람을 믿는 놈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내쳐 버리니 쯔쯔…… 힘들 수밖에.”

나하중도 그에 대해서 잘 알았다.

“혈사천이 너무 날뛰고 있습니다. 본 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한 모양입니다.”

“괜찮네. 그가 우리를 안다고 해도 딴짓을 할 주제는 못 되지. 어떻게 됐든 남궁세가를 잘 상대해 주고 있지 않은가. 혈사천을 두고 보다가 너무 앞선다고 싶으면 정리하면 되고.”

“그의 곁에는 천살지인이 있습니다.”

“후후, 신경 쓰지 말게.”

“검황과 싸워 이긴 인물입니다. 만일 그가 본 천을 상대로 싸운다면…….”

“무공은 강할지 모르나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천살성의 기를 받아낼 수 있는 인간은 없네. 시간이 지나면 조만간 스스로 무너져 내릴 게야.”

“…….”

“그때 정리하면 되니 혈사천은 굳이 건드리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흑화전주는 지금 혼자 무슨 짓을 하면서 돌아다니고 있는가?”

“판 무장이 당한 뒤 육십사괘무장들을 모았습니다.”

“멍청한 놈…… 판 무장이 당한 것을 직접 봤으면서도 계속 같은 방법으로 싸울 생각인 겐가.”

나하중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때는 흑화전주가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라 믿었다.

근데 화산도협에게 당한 뒤 하는 짓을 보니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육십사괘무장을 본 천으로 복귀시키도록.”

“…….”

“화산도협의 무공은 육십사괘무장들이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넘어섰어. 전부 달라붙으면 혹시 모르네만, 그가 싸워줄까?”

나하중의 말이 맞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싸우지 않을 게 확실했다.

“싸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는가? 그건 상대에 대해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왜 자신이 졌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면 절대로 이기지 못해. 쯧쯧…….”

“흑화천주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육십사괘무장을 거두면 자신이 무엇을 할지 알 테지. 스스로 끝을 낼 것이다.”

나하중은 차갑게 말을 끊었다.

극일천에서는 냉정하게 그를 버렸다.

“그를 포기하신다면 철갑을 가만히 둘 생각이십니까?”

“후후후. 누가 포기를 했다는 겐가?”

“가만히 두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열지 못하지 않습니까?”

나하중은 미소를 띠며 윤여림과 시선이 마주쳤다.

“물론 그 물건을 열 수 있는 이는 세상에서 두 사람밖에 없지.”

“…….”

“천주님과 나.”

나하중은 상자를 책상 아래에서 꺼냈다.

책상 주변의 온도가 순식간의 낮아졌다.

스윽.

나하중이 상자를 열어젖혔다.

냉기가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세상에 이보다 차가운 기운을 가진 투명체는 없었다.

‘빙정……!’

나하중은 빙정 옆에 든 물건을 가리켰다.

“이게 뭔지 아는가?”

붉은 액체가 든 병을 꺼냈다.

“이것이 바로 천주님의 고귀한 피.”

나하중은 붉은 액체 병을 윤여림의 눈앞에 들어 올렸다.

“난 이런 게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지. 근데 말이야. 또 누가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더군.”

“그……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공공. 이자가 철갑을 만드는 데 필요했던 그분의 피를 누군가에게 몰래 빼돌렸다고 하더란 말이야.”

“……그자가 왜 그런 짓을 했습니까?”

“난들 알겠나? 다만 예상하건대, 천공공이 무구천의 인물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더군. 클클…….”

“무구천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네. 그래서 나온 결론은 철갑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라는 것이지.”

“…….”

나하중은 세 명이라는 말에 강조를 하며 비소를 지었다.

“알겠는가? 왜 철갑을 찾아야 하는지?”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철갑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윤여림을 내려다보는 나하중의 눈빛이 싸늘했다.

‘후후후. 무구천, 조만간 만나게 될 것이다.’

* * *

주구 단성현의 초입.

안휘성을 넘어 하남성으로 들어섰다.

기분 탓인지 또 다른 느낌의 땅이었다.

“진유 아우, 여기부터가 하남 땅이군.”

“빨리 들어섰네요.”

인자왕을 정리하자 혈사천의 추격은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마을 분위기는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 끝에는 커다란 고목나무가 뻗어 있었다.

‘흠.’

그런데, 고목 아래 생각지도 못한 두 명의 인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고진유 바로 뒤에서 걷던 세 사람도 그들을 보았는지 앞을 가리켰다.

“저들은…….”

“청미화와 고독기검이 왜?”

인양과 묵경이 한마디씩 했다.

‘철갑 때문이겠지.’

그들이 고진유 앞에 나타난 이유는 간단했다.

무구천이 원하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철갑 외에는 없었다.

“질긴 사람들이야.”

고진유는 중얼거리면서 고목으로 걸었다.

유하랑과 조여하는 다가온 네 명의 사내들을 반겼다.

“오랜만입니다.”

“반갑네, 화산도협.”

고진유가 대표로 인사를 했다.

“여기에서 두 분을 만나게 될 줄 몰랐습니다.”

“허허허. 화산도협은 우리가 전혀 반갑지 않은 모양이군. 우릴 귀찮아하는 것 같네.”

“정확하게 보신 듯합니다.”

“…….”

고진유가 직설적으로 대답할 줄은 몰랐다.

조여하가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너무하시네요. 어떻게 그런 식으로 대답하죠?”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본도를 찾아온 용건이 뭔지 아니까요.”

그녀는 슬쩍 고진유의 몸을 살폈다.

그들이 원하는 물건인 철갑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지만, 그의 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선을 옮기자 인양과 녹림야검이 어깨에 메고 있는 봇짐이 보였다.

‘저들이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

고진유는 슬쩍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

“무슨 말을 하든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았으면 합니다.”

유하랑이 곁으로 다가왔다.

“이보게, 화산도협. 우리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눠보세나.”

“잠시 시간을 내드리지요.”

“고맙네. 어디에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가?”

“여기가 좋아 보입니다. 사람들도 없고 조용하네요.”

“그렇게 하지.”

세 사람은 고목 아래에 나란히 앉았다.

묵경과 인양, 그리고 녹림야검은 그들과 떨어진 곳에 앉아 휴식했다.

인양이 먼저 물었다.

“철갑 때문에 저러는 거죠?”

“그렇겠지. 무구천이라면서 극일천에 대항하는 세력이라고 하잖아.”

“정말로 극일천에 대항할 수 있을까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저들 말로는 충분히 견제된다고 하더군.”

“근데…… 철갑도 열지 못하면서 굳이 가지고 가려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러게 말이다.”

“혹시 철갑을 열 방법이 있는 게 아닐까요?”

“열 방법이라…….”

세 사람의 시선은 고목 아래에 집중되었다.

유하랑과 조여하는 마주 앉은 고진유를 보면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화산도협, 그대가 철갑 때문에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잘못 알고 계십니다. 별로 힘들지도 않았고, 전혀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그런가? 난 힘든 줄 알았네.”

“본도가 가지고 다니기에도 어렵지 않습니다. 철갑을 빼앗으려고 하면 누구든지 상대해 주면 되더군요.”

“…….”

철갑을 주지 않겠다는 강경한 거부의 뜻을 돌려 말하고 있었다.

“그 물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

“철갑을 누가 만들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여는 방법도 알고 있겠군.”

“…….”

고진유는 대답하지 않고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두 분은 철갑을 어떻게 여는지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네.”

“저번엔 그런 이야기를 본도에게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건…….”

유하랑은 당황했는지 대답을 똑바로 하지 못했다.

“철갑을 열 방법을 아신다고 하니 잘 아시겠군요. 무구천 또한 철갑을 얻는다고 해도 열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네. 우린 철갑을 얻으면…….”

유하랑은 말을 하다가 멈췄다.

뭔가 큰 비밀을 이야기할 뻔한 모습.

“철갑을 어떻게 여는지 아는 분이 열 수 있다고 한다는 것은…….”

“…….”

“극일천주의 피를 가지고 있는 겁니까?”

고진유의 말에 두 사람은 흠칫거렸다.

“정말인가 보네요. 무구천에서 그의 피를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대단한 곳입니다.”

“맞네. 무구천은 그대의 생각처럼 대단하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안 됩니다.”

고진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기분이 나쁜 듯 조여하가 불쑥 끼어들었다.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안 된다고 하시는군요.”

“그런가요?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

그가 재빨리 사과를 할 줄 몰랐다.

들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좋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이제 더는 할 이야기가 없는 것 같으니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잠깐만요!”

조여하가 다급하게 일어나려던 고진유를 잡았다.

“소저는 본도에게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철갑을…….”

고진유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말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우리에게 주세요.”

“안 됩니다.”

고진유의 눈빛은 차가웠다.

조여하가 똑바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왜, 왜 안 된다는 건가요? 철갑을 열 수 있는 곳은 본 천밖에 없는데요.”

“철갑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하지만 본도는 그것보다 철갑, 그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주지 않으면 무구천에서 직접 나설 수도 있어요.”

“얼마든지. 극일천과도 싸우는데 무구천과도 싸우지 못할까요?”

고진유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는 두 사람 곁을 떠나면서 한마디 했다.

“언제든지 철갑을 노리는 것은 좋습니다만 극일천처럼 목숨은 장담 못 합니다. 본도는 분명 말을 했습니다. 나중에 왜 죽였는지 따지면 서로 피곤할 것 같군요.”

휘릭!

고진유는 신법을 펼치며 일행 곁에 내려섰다.

“그만 갑시다.”

“그래? 저들 얼굴을 보니 서로 이야기가 잘 안 된 것 같네.”

“원래부터 말이 잘 안 통하는 곳이더라고요.”

고진유가 먼저 움직이자 세 사람이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고진유의 앞을 유하랑이 막아섰다.

“화산도협, 미안하게 됐네. 이대로 떠날 수는 없다네.”

“이해합니다. 서로 뜻이 맞지 않는다면 무인에겐 좋은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부탁하네. 그 물건을 줄 수 없겠나?”

“원래 생각하신 대로 하시지요.”

“그렇군. 안 된다는 말이군. 하나 난 그 물건을 가지고 가야 하네.”

슈우우우욱-

유하랑은 전신의 내력을 끌어냈다.

오른손 끝에 내기로 만들어진 무형검이 오 장의 길이로 솟구쳤다.

‘대단하시군.’

그의 내력을 보니 힘겨운 싸움이 될 듯싶었다.

“싸우기 전에 해줄 말이 있네. 내가 가진 본래의 실력은 중원에 알려진 실력보다 열 배나 강하다네.”

“…….”

“허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구먼.”

“아닙니다. 믿습니다.”

“나를 보는 표정이 그대로인데…….”

“하하,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습니까?”

“허허허, 그렇군. 화산도협, 그대의 말이 맞아.”

“왜 지금까지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으셨는지 물어봐도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괜한 호승심으로 무구천의 임무를 망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네.”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내 본 실력은 검황과 비교해도 못지않네.”

“기대되는군요.”

유하랑은 그가 스스로 포기하기를 바랐지만, 여전히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군. 내 검이 매섭다고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

파아아앗-!!

유하랑의 전신에서 퍼져 나간 내기.

그가 무림에 나선 뒤 처음으로 끌어 올린 극성의 무허공심법(無虛空心法).

무형검이 그의 손안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