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화산도협이 본 천에 찾아왔습니다.”
“하! 크하하하하!!”
머리를 조아린 수하의 말에 혈사천주 조탁이 대소를 터뜨렸다.
남궁세가에서 만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다.
‘한번 만나자고 했다고 바로 찾아올 줄이야! 미친놈이 아닌가.’
여기가 어디라고 무작정 찾아오다니.
조탁은 입가에 싸늘한 살기가 번져 나왔다.
“죽고 싶다면 죽여주면 되는 일이지.”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남궁세가에서 그를 만난 뒤 깨달았다. 언젠가는 둘 중 한 명은 서로에게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회는 항상 오는 게 아니었다.
올 때 가볍게 가지면 되는 것이다.
‘죽는 것은 내가 아니라 화산도협, 네놈이 되겠지.’
혈사천에 들어온 이상 쉽게 살아서 나갈 수 없다.
‘찾아오는 건 네 놈 맘이지만 나가는 것은 네 놈 뜻대로 되지 않겠지. 제 발로 굴러온 귀한 손님이니 하루 정도는 손님 대접을 해줘야겠지. 아암! 난 그래도 양심은 있는 편이지.’
“그를 혈빈정으로 안내하라.”
* * *
네 명은 혈사천 정문에서 곧바로 혈빈정으로 안내를 받았다.
혈사천 경내는 일반 무가들과 다르지 않았다.
“진유 형, 전 또 혈사천이라고 해서 뭔가 좀 다를 줄 알았습니다.”
“그러게.”
고진유는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다.
“녹검 씨, 녹림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음…… 이곳과 비교해 다를 게 없습니다. 그냥 산속에 있는 것 외에는 비슷한 것 같군요.”
“녹림이 그립진 않습니까?”
그가 녹림에서 떨어져 나온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아닙니다. 전 지금이 젤 좋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혹시 근처에 지나갈 일이 있다면 한번 가보는 것도 좋겠군요.”
“…….”
녹림야검은 살짝 당황했다. 전혀 가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여상하게 말하는 고진유를 보자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가끔 그냥 툭 던지듯 말하던 게 항상 그대로 되지 않았던가.
‘큰일인데…….’
녹림대존을 어떻게 볼지 벌써부터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혈빈정으로 가는 동안, 주위로 많은 사파인들이 구경하기 위해 나타났다.
벌써 화산도협의 소문이 혈사천 전체로 퍼져 나갔다.
고진유와 달리 세 사람은 혈빈정으로 가는 길에 이어지는 차가운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묵경 형, 저기 진유 형은 쏟아지는 시선이 아무렇지 않은가 봅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우리는 신경이 쓰이는데, 저놈은 표정을 보니 전혀 안 그런 모양이야.”
“전 무공이 강해져도 심장이 뛰는 건 똑같은 것 같습니다…….”
인양은 이제 이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지만,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묵경은 다시 고진유를 가리켰다.
“저건 천성이야. 간이 부은 게 아니라 없는 게 틀림없어.”
앞서가던 고진유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무슨 괴물입니까?”
“어…….”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안내를 따라 혈빈정에 도착했다.
주변을 살폈지만, 여기도 특별히 다른 건 없었다.
“사람의 선입견이라는 게 무서운 것이구만.”
“그렇죠.”
묵경도 최근 북해빙궁을 포함해 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정파인으로서 가졌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았다.
“진유 아우. 이곳에 머물도록 하는 걸 보니 당장 큰일은 나지 않겠어.”
“하루 정도는 대접을 잘 할 겁니다.”
“무슨 말이야? 하루라니?”
“내일까지는 우릴 손님으로 대접하는 거죠.”
“그다음은?”
“죽이고자 달려들겠죠?”
“하아아…….”
묵경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걸 알면서 여기에 들어온 거야?”
“어려울 거 있나요?”
고진유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말을 했다.
“하루만 대접하겠다면 우린 하루만 잘 대접받고 가면 되잖아요.”
“간다고?”
“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면 되죠.”
“풋.”
고진유의 말에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완전히 미친놈이라 여겼을 것이었다.
“혈사천에 하루 대접받고자 온 것은 아닐 테고…… 진짜 여기에 온 목적이 뭐야?”
“사숙님을 만나뵙고 싶어서요.”
“사숙이라면…… 화산제일검?”
“그분이 어떠신지 봐야 해요.”
“여기에 계셔?”
“네. 혈사천에 들어서면서 그분의 기를 찾았어요. 아마 그분도 제가 온 것을 아실 겁니다.”
“그렇구나. 난 또…… 혈사천주를 보기 위해 온 줄 알았네.”
“날이 어두워지는 대로 사숙님을 뵙고 오겠습니다. 그 뒤 여기를 빠져나가죠.”
“알겠다. 그 전엔 대접을 잘 해준다고 하니 실컷 먹기나 해야겠군.”
“하하, 그렇게 하세요.”
저녁이 되자 고진유의 예상처럼 최후의 만찬이라도 되는 듯, 상다리가 부서질 만큼의 음식들을 대접받았다.
거하게 한 상 대접을 받은 일행은 혈빈정에 누워서 하루 저녁을 편히 보내는 중이었다.
스윽.
혈사천의 하늘이 어둠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갔다 올 테니 준비들 하고 있어요.”
“그분을 잘 만나 뵙고 오도록 해.”
휘이이익!
혈빈정에서 고진유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스르르르-
고진유는 혈빈정을 나온 뒤 오직 한 방향을 향해 달렸다.
경내에서 움직이는 고진유의 기를 혈사천의 사파인들은 한 명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곳인가?’
어둠 속에서 건물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혈사천의 건물 중 가장 어두운 느낌이 드는 전각.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군.’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사파인이라 해도 이곳 천살전만큼은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주위에 흐르는 살성의 기가 사파인들조차 몸서리칠 정도로 내상에 영향을 주었다.
‘사숙님께서 저곳에서 지내시는구나.’
고진유는 예감은 맞았다.
천살전에 가까워질수록 천살성의 기운이 가득했다.
구우우웅-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듯 텅 빈 공간처럼 비어 있었다.
꿈틀.
어둠 속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고진유는 천천히 그림자 속으로 한발을 내디뎠다.
“역시…… 호정이로구나.”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에 갇힌 채 들린 목소리.
화산제일검 독소응이 틀림없었다.
“허민 사숙님.”
그의 앞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슈우우욱-
고진유의 앞으로 내기가 쏟아지며 걸음을 막았다.
“그만 멈춰라.”
“사숙님……!”
“내 모습을 너에게 보여주긴 싫다.”
“…….”
“이곳에는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사숙님께서 잘 계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난 잘 지내고 있다.”
“다행입니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고맙군. 내 걱정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본 문 모두가 사숙님을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그…… 렇구나.”
독소응의 대답에서 수많은 그리움이 느껴졌다.
“예전에 내가 준 검은 잘 지니고 있느냐?”
그에게 받았던 사사검을 말하는 것이었다.
“항상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잘했다. 언젠가는 필요하게 될 것이다.”
“사숙님.”
고진유는 그의 기에 상관없이 안으로 움직였다. 그가 원하지 않았지만, 보고 싶었다.
“허어. 들어오지 말라고 했건만.”
“……죄송합니다.”
독소응의 모습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의 전신은 붉은 눈동자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한눈에 봐도 괴인의 모습이었다.
철컥.
독소응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사지가 철쇄로 묶여 있었다.
“……혈사천주의 짓입니까?”
“놀랄 것 없다. 만일을 위해 내가 묶어놓은 것이다.”
“…….”
“직접 얼굴을 보니 좋구나.”
그의 얼굴에 미소가 보였다.
고진유는 그를 향해 절을 했다.
“사숙님을 뵙습니다.”
“하하…… 네 소문은 익히 들었다. 잘하고 있더구나.”
독소응은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무림에서 화산도협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마다 좀 더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사숙님, 몸은 어떠하십니까?”
“아직 참을 만하다. 하지만 더는 참기 어려울지도 모르겠구나.”
“혹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본 문이 천하제일문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숙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꼭 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와 사숙인 독소응과의 약속.
천하제일문이 된 화산파를 독소응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검황과 싸우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혈사천주의 뜻도 있지만 그와는 개인적 일이었다. 전대 화산제일검이셨던 도무 사숙과의 약속 때문이었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고맙구나.”
“사숙님을 직접 뵙게 되어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나도 그렇다. 이젠 이곳을 떠나도록 해라. 혈사천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서 나가면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문파의 수장이라면 대범해야 하거늘. 그자는 속이 좁은 인물이지.”
“그런 것 같더군요.”
“그만 가보도록 해라. 오늘 만나서 반가웠다.”
“사숙님, 다음에도 뵙도록 하겠습니다.”
고진유는 천살전을 떠나기 전 한 번 더 큰절을 올렸다.
밖으로 나온 고진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무거웠던 가슴이 그를 보고 난 뒤 조금 가벼워졌다.
* * *
혈사천주 조탁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불안한 마음과는 달랐다.
멀리서 급하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천주님, 암영입니다.”
“무슨 일이지?”
“방금 혈빈정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벌떡!
혈사천주는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그들이 왜? 무슨 일이 생겼는가?”
“혈빈정에서 그들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뭣이? 네 놈 모두?”
타앗!
그는 문을 잡아당겨 열고는 수하를 향해 소리쳤다.
“화산도협과 친협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새끼들이…….’
혈사천주의 신형이 쏜살같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그가 혈빈정에 도착한 시간은 반각도 걸리지 않았다.
콰아앙!!
문이 부서질 듯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이미 사람의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에서 이곳을 지켰지?”
처억.
사용대주 평규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소신이 사방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지켰습니다만…… 죄송합니다.”
“대체 어떻게 지켰기에 한 놈도 아니고 네 놈이나 사라지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지? 분명 근무를 똑바로 서지 않았다.”
“천주님, 그건 아닙니다. 소신이…… 커억!”
평규는 짧은 비명을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혈사천주는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당장 그놈들을 찾아라! 저주협을 아직 지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조건 저주협에서 그놈들을 잡을 것이다!”
“넵. 알겠습니다.”
* * *
고진유와 묵경, 인양과 녹림야검은 저주협을 통과한 지 이미 반각이 지났다.
혈사천의 사파인들은 저주협을 지나가는 네 명의 기를 찾아낼 수도 없었다.
“하하하하! 오랜만에 속이 다 시원하군,”
묵경은 지나쳐 온 저주협을 돌아보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우선 저주에서 떨어지는 게 좋겠어요. 혈사천에서 지금쯤이면 우리가 없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겠지?”
“당연히요. 가는 도중에 만나면 어쩔 수 없고요.”
우선 저주에서 나가는 게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갑시다.”
어둠 속을 뚫고 네 명의 신형이 사라졌다.
스윽.
그리고 네 명이 사라진 자리에 인자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후후. 네놈들이 아무리 잘 숨어서 도망 다닌다고 해도 나를 벗어날 수 없다. 혈사천에 네놈들의 위치를 알려줘야겠어.’
* * *
고진유는 앞을 달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벌써 세 번째면 확실하군.’
우연이 아니었다.
분명 혈사천의 추격을 피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혈사천의 무리들이 정확히 방향을 알고 나타났다.
“묵경 형, 우리 위치를 혈사천에 알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릴 따라다니는 동영인이 범인이겠군.”
“알아서 나타날 때까지 가만히 있으려니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군요.”
“괜한 짓을 해서 수명을 단축시키는 걸 보니 멍청한 게지.”
“그럼 잡아볼까요?”
인자왕은 네 명을 따라다니면서 혈사천에게 정보를 알려주었다.
‘대단한 놈들…….’
그런데 혈사천의 포위망을 세 번이나 뚫고 나갔다.
네 번째도 마찬가지.
한 번의 접촉도 없이 혈사천의 포위망을 뚫고 나갔다.
“쳇. 진짜 내가 나서야 하나?”
“맞아. 진작 당신이 나서야지.”
“……!!”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다가왔는지 몰랐다.
“네놈들은 나를 잡지 못해.”
퍼어엉!!
인자왕은 술법과 함께 연기를 사방으로 뿌리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퍼어억!!
허공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모습을 감추었던 그의 육중한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디서…… 나타났지?’
인자왕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앞으로 다가온 녹림야검을 보았다.
“연기 속으로 몸을 숨기는 거군. 난 또 정말로 대단한 술법인 줄 알았잖아.”
펑펑펑!!
인자왕은 더 큰 폭음과 연기를 터뜨리며 사라졌다.
퍽퍽퍽!!
이번에도 허공에서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커어억…….”
녹림야검과는 충격이 달랐다.
인양의 화산복호권에 그의 내부 장기들이 뒤틀렸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그의 옆으로 고진유와 묵경이 내려섰다.
“당신 웃긴 인물이군. 전혀 싸울 생각을 하지 않잖아. 제대로 도망도 가지 못하면서. 안 그래?”
“…….”
“우리를 죽이고자 동영에서 온 게 아닌가? 그럼 우리를 기습하고 죽여.”
고진유의 물음에 인자왕은 소리쳤다.
“난 인자왕이다. 인자는 인자의 방식대로 싸우는 법. 우린 몰래 숨어서 싸워야 한다.”
가장 자신 있게 싸워야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믿음.
“허어…… 이런 멍청한 인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고진유가 황당한 웃음을 지을 때였다.
퍼어어엉!!
인자왕이 다시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기 위해 인자술을 펼쳤다.
“어딜 가? 다 보여.”
휙!
사의검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쳐 갔다.
“동영을 누가 겁난다고 하는지 모르겠네. 오로지 정해 놓은 대로 움직이는 멍청이들밖에 없어.”
가슴에서 피를 흘리는 시체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툭.
숨이 멈춘 인자왕의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