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태주평혈전.
동영이천군과 절강오문과의 결전은 반나절. 하루도 지나지 않아 싱겁게 승패가 났다.
화산도협 고진유와 함께 하나로 뭉친 절강오문은 적들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동영이천군의 진영은 태풍에 피해를 당한 뒤 이미 정상적으로 방어를 할 수 없었다.
본토에서 늘 겪었던 태풍이었으니,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큰 패착이었다.
그들이 진영을 구축한 곳은 넓은 대평야.
태풍을 막아줄 수 있는 엄폐물이 없어, 그대로 강한 바람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부상자들이 생겨났다.
천막과 군막들은 이미 사방으로 날아가서 원상태로 복구조차 하기 어려웠다.
군장 석천이 물러나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할 그때.
태주평 너머로 황색 먼지가 솟구치며 절강오문의 무인들이 쳐들어왔다.
동영이천군장 석천은 적의 수장을 잡고자 중앙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지만,
이내 알았다.
절강오문의 수장이 누구인지.
“화산도협!!!”
동영일천군과 동영삼천군을 몰살시킨 동영의 원수.
태주평의 혈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진유의 사의검에 동영이천군장 석천의 목이 잘렸다.
동영의 중원 침략은 모든 것들이 실패로 돌아갔다.
* * *
태주평의 혈전 후 이틀이 지났다.
고진유는 철갑을 가지고 무림맹으로 올라가기 위해, 안휘성을 통해 하남성으로 넘어가는 가장 빠른 길을 택했다.
그리고 네 명이 선주에 도착했을 때였다.
“흐음…….”
묵경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저놈들이 입고 잇는 게 천사적의(天邪赤衣) 같은데…….”
혈사천의 무인들이었다.
“혈사천이 왜 여기에 있지?”
“묵경 형, 저들이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건가요?”
인양도 혈사천 무리들을 보면서 물었다.
“여기는 남궁세가의 관할 구역이야. 남궁세가가 어떤지 잘 알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
“……문제가 있다는 것이네요.”
남궁세가의 문제는 이미 중원에 알려졌다.
많은 문제들 중 가장 큰 두 가지는, 천살지인에 의한 검황 남궁천문의 죽음과 화산도협에게 도전했던 남궁세가의 패배들이었다.
“진유 아우, 어쩔까?”
“굳이 부딪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하겠지?”
극일천과 싸워야 하는 마당에 혈사천까지 일부러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을 듯싶었다.
“맞아. 조용히 지나가도록 하자.”
네 명은 그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조용히 마을을 벗어나려 움직였다.
그때,
“어이…… 거기 누구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혈사천의 무리들 중 한 명이 그들을 본 것이다.
“진유 형, 우릴 찾는데요?”
“괜히 일을 만들 수 있으니 그냥 달리자.”
“네!”
휘이익!
네 명은 동시에 신법을 펼치며 앞으로 내달렸다.
“어어……! 저놈들……!!”
천사명광군 소속의 십오대주 이청유는 갑자기 도망가는 네 명을 보며 수상한 인물이라 확신했다.
“수상한 자가 도망간다!! 전방에 연락해서 모든 길을 막아라!!
“넷!!”
휘이이익!
수하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 * *
“생각보다 저들이 추격을 잘하네요.”
고진유는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가는 방향에서 주위를 포위하며 조금씩 좁혀 들어왔다.
“소면 나왔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탁자로 네 그릇의 소면이 나왔다.
“일단 먹고 생각하죠.”
“맛있겠어.”
일행은 여유롭게 길가에 세워진 간이 야외 식당에서 소면을 시킨 참이었다.
후루루룩.
“괜찮은데.”
“그러게요.”
고진유는 마지막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운 뒤 그릇을 내려놓고 주위를 다시 살폈다.
“순식간에 천라지망을 펼쳤어. 혈사천이 이 정도로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일 줄은 몰랐는걸.”
“안휘성을 차지하려고 남궁세가와 싸울 생각을 하는 곳이잖아. 수련을 많이 한 게 보여.”
묵경도 혈사천에 대해 인정했다.
“진유 아우, 근데 이렇게 계속 다닐 거야?”
세 사람은 충분히 천라지망을 뚫고 지나갈 수 있었다.
“무림맹으로 가는 길이 심심하지는 않겠네요.”
“…….”
재미로 생각하며 그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소면 그릇을 내려놓던 인양까지 멈칫거렸다.
“그냥 그 이유? 다른 큰 이유는 없고?”
고진유는 대답 대신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하긴. 이상하긴 했다.”
웅성웅성.
그때, 십여 명의 일행이 떠들썩하게 다가왔다.
그들은 등에 커다란 짐을 메고 있었다.
그들은 슬쩍 옆에 있는 일행을 살피더니, 한 명만 빼고는 인상이 좋았는지 그대로 앉았다.
털썩.
사내가 자리에 앉으면서 짐을 내려놓았다.
“아이고. 허리야.”
“허허허, 그 정도 가지고 엄살을 피우는 겐가?”
“그 정도라 했나? 이래 봬도 자네 짐보다 무겁다네.”
“한번 재볼까?”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인 듯한 중년 사내가 두 사람을 말렸다.
“그만들 하게. 내가 보기에 둘 다 비슷해 보이는구만. 그만하고 허기나 해결하고 빨리 가세나.”
봇짐 장사꾼들은 소면과 야채볶음을 시킨 뒤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혈사천에서 이번에 제대로 한 건 할 모양이지 않던가?”
“그러게. 진짜 청양을 칠 생각은 아니겠지?”
“청양에서 빨리 나오기를 잘했어.”
묵경은 장사꾼들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청양을 친다고?’
청양은 남궁세가 최후의 한계선이었다.
“이건 완전 대박인데? 혈사천에서 제대로 할 모양인가 봐.”
“무슨 말인가요?”
“방금 말 들었잖아. 혈사천이 청양으로 움직인다고 해. 그곳이 무너지면 바로 남궁세가고.”
“중요한 위치네요. 남궁세가에서 총력전으로 나오겠군요.”
“그렇다고 봐야지.”
혈사천과 남궁세가의 싸움.
정파와 사파의 싸움이기도 했다.
묵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궁세가를……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
“…….”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남궁세가가 무너진다면 정파의 힘이 너무 약해져.”
묵경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중원 무림에서 남궁세가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당장 그들이 어렵다고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다면 원래의 힘을 가질 수 있는 저력을 지닌 세가였다.
“굳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은 녀석이 있을 텐데.”
남궁무명이 생각났다.
그가 있으면 혈사천을 상대로 충분히 싸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 도움을 받을 것 같지 않고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혹시나 해서…….”
남궁세가의 입장에서도 고진유의 도움은 원치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어려움을 알고도 그냥 모른 체하기도 애매했다.
“알겠어요. 청양으로 가보죠.”
“고마워.”
묵경은 저번부터 남궁세가와 너무 깊게 부딪친 고진유를 보며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서문의 성을 버렸다고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조금이라도 중원세가의 일에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고진유는 건너편을 살폈다.
아직 혈사천의 무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반각이 지나기 전 모습을 드러낼 듯했다.
“거의 가까이 다가왔네요. 노는 건 여기까지 하죠.”
“하하하하. 저놈들이 실망하겠어. 잡았다고 생각했을 텐데.”
“다음에 놀아주죠. 갑시다.”
휘이익!
고진유가 먼저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묵경과 인양, 녹림야검의 신형이 사라졌다.
식탁에 앉아 있던 네 명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어억!! 귀신이다!!”
“대낮에 무슨 귀신인가?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그냥 무림인들이지 않는가.”
“어어어? 휴우…… 난 진짜 귀신인 줄 알았다고! 이번처럼 정말로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처음 봤단 말일세!”
* * *
묵경은 청양으로 향하면서 고진유와 함께 가게 된 이유를 어떤 식으로 남궁세가에 말해야 할지 걱정이 들었다.
막상 그들에게 가도 분명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의 사정이 힘들게 된 이유 중 한 가지가 앞서가는 고진유와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괜히 내가 가자고 하는지 모르겠군. 진유 아우와 더 사이가 나빠지면 안 되는데.’
휘익!
네 명의 신법은 시간이 흐를수록 중원인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루 정도면 청양에 도착할 것 같았다.
툭툭.
그때, 길가에 앉은 거지들이 전방에서 나무 막대기로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녹림야검의 눈매가 날카로워지며 거지들을 살폈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정파인에 대해 경계하는 습관이 남아 있었다.
‘개방이다.’
녹림야검의 예상대로 개방의 걸인들이었다.
“진유 아우, 개방이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봐선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모양이군.”
묵경은 앞으로 나서며 개방 걸인을 맞이했다.
“보아하니 우리를 기다린 것 같소.”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중년의 걸인이었다.
허리에 찬 세 개의 작은 풋대 자루.
삼결 분타주의 신분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누런 이빨을 보이며 인사를 했다.
“풍류옥협이시구려. 반갑소이다. 무호 분타의 주광걸이라 하외다.”
“개방의 협걸이시군요. 반갑소이다.”
“하하핫! 천하의 옥공자 풍류옥협에게 협걸이라 칭찬을 받으니 기분은 좋소이다.”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지요.”
묵경은 노련하게 칭찬을 늘어놓았다.
예전이라면 인사만 했겠지만, 고진유와 함께 많은 인물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가 상대를 올려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너무 표시 나는 듯해서 좋아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오히려 상대가 좋아하는 게 눈에 보였다.
자신의 실력이 강해질수록 상대를 칭찬하면 호감을 서너 배나 더 많이 이끌어낼 수 있었다.
주광걸도 마찬가지였다.
잘생긴 얼굴로 여자들이나 꼬신다는 풍류옥협에 대한 선입견이 단번에 사라졌다.
“역시 대개방의 정보력은 중원 최고이외다.”
“이거이거 풍류옥협께서 호탕한 사내일 줄은 몰랐소이다.”
개방의 인물들은 그들의 기질 때문인지 대체로 상대의 호탕한 성격을 좋아했다.
“크흠! 한 가지 소식을 전해 드리고자 왔소이다.”
“그게 무엇인지요?”
주광걸의 시선이 고진유에게 향했다.
“화산도협께 전해줄 말이 있소이다.”
“무엇입니까?”
고진유가 처음으로 한마디 했다.
묵직한 기운.
무형의 기가 주광걸의 전신을 감쌌다.
분명 압박이 느껴졌지만 부드러운 상대의 내기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천하오무와 동등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어.’
얼굴에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화산의 거인이야.’
부러웠다.
이제 막 약관을 넘었다고 한 나이.
최소한 반갑자의 세월 동안 화산파의 위명이 천하를 울릴 것이었다.
‘우리도…… 한때는 엄청났는데.’
그는 서신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무림맹에서 긴급하게 날아온 서신입니다.”
고진유의 기에 눌려 높임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렇군요. 힘들게 본도에게 전해주셔서 고맙소이다.”
고진유는 봉투를 받은 뒤 확인하지 않은 채 바로 가슴 안으로 넣어두었다.
“바로 보시지 않으십니까?”
“굳이 급한 게 아닌 듯싶어서요.”
“…….”
그도 눈치는 있었다.
함부로 알려져서는 안 될 중요한 내용인 게 확실했다.
“저희들은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주광걸님. 혹시 분타주님께 하나만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주광걸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무엇입니까? 본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척.
고진유는 포권을 했다.
“고맙소이다. 협의지도를 걷는 개방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군요.”
“하하하하!”
주광걸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린 청양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움직이는 방향을 보니 청양으로 가는 듯했습니다. 화산도협께서는 남궁세가와 혈사천의 소문 때문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지금 그들이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본 방에서 계속 주시만 하고 있습니다.”
“남궁세가에 개방에서 따로 도움을 주지 않은 모양이군요.”
“제가 알기로 남궁세가에서 아직 아무런 요청도 없습니다.”
‘남궁세가의 자존심이라는 것인가?’
분명 다른 문파의 경우였다면 충분히 도움을 청했을 것이었다.
그들은 대남궁세가이기에 자존심을 굽히며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청양으로 가는 혈사천의 정보들을 알고 싶습니다만…… 가능하겠습니까?”
“무림맹의 특사께서 요청하신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십니다.”
“그렇군요. 그럼 본도가 부탁하는 바입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알아본 뒤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주광걸은 기쁜 표정으로 사라졌다.
스윽.
개방의 걸인들이 사라진 뒤 품 안에 넣어두었던 봉투를 꺼냈다.
서신을 보낸 인물은 비맹군의 군사라 적혀 있었다.
이군사의 직인이 찍한 봉인을 뜯었다.
“비맹군사가 보냈군요.”
묵경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맹군사라면…… 사마 군사가?”
“잠시만요.”
고진유는 서신을 꺼낸 뒤 눈으로 읽었다.
피식.
입가에 짧은 웃음이 나왔다.
“맹주님도 대단하신 분이네요.”
묵경에게 서신을 보여주었다.
재빨리 받은 뒤 고진유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바로 읽어 내렸다.
“금맹군 제갈 군사의 사임을 함에 따라 이군사였던 사마 군사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이렇게 간단하잖아요.”
“아마도…… 제갈문 군사님께서 계책을 내신 게 아닌가 싶다.”
“잘됐네요. 바로 해결이 났습니다.”
묵경은 한 번 더 서신을 읽었다.
“제갈양 형님이 이군사의 보직에 올랐어. 워낙 뛰어난 인물이라서 언젠가는 한자리 받을 줄 알았지만 벌써 군사라니…… 빠르군.”
“그분이라면 잘할 수 있을 겁니다.”
고진유도 제갈양이 기억났다. 웃긴 사람이면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당연하지. 아마 지금쯤이면 비맹군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거야. 자신이 왜 이군사가 됐는지 이미 이해했을 테니. 그런데…… 사마추가 일군사가 되면 무림맹을 장악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겁니다. 실질적인 업무는 비맹군에서 대부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맹주께서 계속 주시를 할 겁니다.”
제갈양이 이군사가 되면서 무림맹의 일은 당분간 안심이 되었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겠지. 모든 시선이 이제 그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