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170화 (170/425)

170화

고진유는 사의검을 잡은 채 서서히 다가오는 먹구름을 노려보았다.

마치 상대 무공이 두려워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 뒤에서 지켜보던 인양이 다급히 묵경에게 물었다.

“형이 왜 움직이지 않죠?”

“상대가 상승무공일수록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 인양도 앞으로 강한 상대를 만나면 느끼게 될 거야.”

“…….”

“저들처럼 절대무공을 펼치는 무인에게는 허튼 동작이 곧 죽음이지. 인양과 녹검 씨도 자세히 봐야 해. 고수들의 한 수가 움직이기 전에 어떤 싸움을 하는지. 이게 진짜 중요한 공부지.”

묵경의 말을 따라, 그들의 숨소리 하나까지 머릿속에 기억하려는 듯 인양과 녹림야검은 눈을 떼지 않았다.

쿡.

고진유가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이다.’

스르르릉-

사의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면서 자줏빛 검광을 비췄다.

화르르륵-!

매화가 하늘거리며 검은 먹구름 사이로 하나씩 흘러 들어갔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은 이미 탈형을 넘어 무형으로 들어섰다.

콰아앙!!!

두 개의 기가 부딪히면서 굉음을 토해냈다.

주르르륵-

판진모의 신형이 일 장 뒤로 미끄러지며 물러났다.

‘이 녀석의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순간 저도 모르게 고진유의 무공에 감탄이 나왔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간단하게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한 번의 부딪힘에 상대의 무공이 어떠한지 깨달았다.

‘승패의 결정은 누가 강한지가 아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나뉘는 것이다.

판진모 또한 같은 생각을 했다.

그 역시 쉽게 나서지 못하고 망설였다.

타아앗!

고진유가 먼저 움직였다.

호충신법 또한 이미 형(形)을 벗어 던졌다.

한 발 내디디면 그것이 호탄신법이고 공결신법이었다.

파앗-!!

판진모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그가 사의검을 찔렀다.

“욱…….”

판진모 역시 절대무력을 지닌 절대무인.

장강으로 밀어내며 사의검을 막고자 했다.

선수필승(先手必勝).

완벽한 공격과 완벽한 수비.

결국 공격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짧은 차이로, 판진모가 펼친 장강이 늦게 반응했다.

‘젠장……! 암흑장강이 뚫렸어!’

그는 가슴으로 파고들어오는 사의검을 보며 다급히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부상을 각오해야 했다.

휘이이익!

그때, 언제 그의 곁에 다가섰는지 배조경이 다급히 검을 휘두르며 사의검을 막아냈다.

챙!!

고진유는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며 나란히 선 판진모와 배조경을 보았다.

“혼자 안 되겠다면 둘이서 덤벼도 상관없소.”

“……!!”

판진모는 얼굴이 붉어졌다.

치욕적인 말을 들었다.

한참이나 어린 녀석에게 모욕을 당했다.

고진유의 표정이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아아악!!”

그때, 주위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흑화전 호위대의 비명.

배조경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소!! 어떻게 된 것이냐?!”

하지만 곧바로 대답해야 할 호위대주 잠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잠소!!”

“아아악!”

“크윽…….”

계속해서 잠소를 불렀지만 수하들의 비명 소리만 계속 이어질 뿐.

그는 재빨리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호위대는 내 주위로 모여라!”

곧바로 오십여 명의 호위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잠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호위대주 잠소의 죽음이 확실해졌다.

“누구 짓이지? 어떤 놈이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까?!”

배조경은 살기가 솟구쳤다.

스으으으으-

고진유의 옆으로 인양과 녹림야검이 모습을 나타냈다.

“난 또 극일천이라고 해서 엄청 강할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별 볼 일 없군.”

“산적 놈이 감히 본인의 수하를 죽이다니……!”

“산적이 죽이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몰래 숨어 우리를 덮치려고 하는데 당신 같으면 보고만 있겠소?”

“네놈들을 필히 죽일 것이다.”

“본도도 마찬가지외다. 당신들은 이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은 한 모두 죽게 될 것이오.”

파아아앙-!!

고진유는 하단전과 중단전의 내력을 완전히 개방했다.

쏴아아아아아---!!!

두 개의 단전이 폭발하면서 거대한 기의 폭풍이 전방으로 휘몰아쳤다.

“서로 끝장을 봐야 하지 않겠소?”

그들을 노려보는 고진유의 눈동자에서 빛이 쏟아졌다.

패왕기를 담은 패왕명안(霸王冥眼).

패왕은 오로지 전진만 있을 뿐.

물러남이 없었다.

‘우우욱.’

흑화전주 배조경은 기세가 꺾였다.

십무흑화가 당하고, 흑화전의 수하들이 당한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약관의 나이에 겨우 화산파 삼대제자의 신분.

방심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의 모습은 보는 순간 마음을 놓게 만들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무작정 달려들어 싸워서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얼마 전 별호를 얻은 의제권협과 녹검살협의 무공은 계산에 넣지 못했다.

그가 고진유와 한 번 부딪친 짧은 순간에 호위대 오십이 당하지 않았던가.

‘여기에서 싸우는 것은 개죽음이다. 기회를 엿봐서 싸워야 해.’

그들이 동영삼천군을 이겼다고 했지만 복건삼문연합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복건삼문연합이 이긴 것이었어.’

배조경은 물러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화산도협, 방금 일은 미안하게 됐군.”

판진모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여, 여기서 끝을 보려는 것인가?’

그의 기세에 배조경이 오히려 놀랐다.

“잠깐, 오늘은……!”

“배 전주는 그만 뒤로 물러나라. 싸워도 내가 싸우고 죽어도 내가 죽는다.”

배조경은 검미에 두꺼운 주름이 잡혔다.

‘끝났어.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군.’

그의 목소리와 표정에서 말릴 수 없는 강한 의지를 읽었다.

“배 전주, 내가 저 녀석에게 당할 것 같은가? 난 육십사괘무장의 동인이다.”

판진모는 누구보다 강한 자부심으로 극일천에서 살아왔다.

폐관을 마치며 자신의 상대가 될 만한 인물은 극일십우(克日十宇)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난…… 강하다.”

우우우웅-

판진모는 단전을 통해 원기까지 끌어냈다.

내기가 거의 두 배 이상으로 솟구친 백멸천장(白滅天掌)을 양손에 끌어냈다.

“화산도협. 마지막으로 재미있게 놀아보겠는가?”

“당연히.”

고진유는 그의 도전을 받아주었다.

‘일초식의 승부에 서로 목숨을 건다.’

한 번 출수되면 중간에 멈추거나 상대에게 관용을 베풀 수 없다.

그 순간 자신이 죽을 수 있으니까.

사의검을 세우며 천천히 앞으로 겨누었다.

상대의 강한 기와 부딪친 사의검이 반응했다.

찌이이이잉-

점점 짙어지는 자줏빛의 검신에서 검명이 울렸다.

‘둘 중 한 명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판진모는 두 손을 위로 올렸다.

‘천주님 또한 인정한 나의 마지막 공격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을 무(無)로 만들 것이다.

하늘이 점점 백색으로 변해가며 고진유를 덮기 시작했다.

쉬이이이익-

그의 손에서 빠져나간 사의검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자색 빛을 내며 솟구친 사의검은 어느덧 수백 수천 개의 검기를 만들어냈다.

팟팟팟팟팟팟--!!!

백색 하늘을 뚫고 올라간 검기가 거대한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소낙비가 쏟아지듯 판진모의 머리 위로 사의검의 검기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웅!!

백색으로 변했던 하늘은 원래의 푸른 하늘로 돌아와 있었다.

그 아래, 온몸이 축 늘어진 채 죽은 판진모의 신형이 쓰러졌다.

사의검은 이미 고진유의 손으로 돌아와 있었다.

휘이익!

배조경의 신형은 이미 멀리 사라졌다.

“어떻게, 그대로 둬?”

“이미 꼬리를 내린 적을 뒤쫓을 필요는 없어요.”

“흐음, 그렇지.”

묵경은 차갑게 변한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강한 인물이야. 내가 싸웠다면 졌을 거다.”

중원 무림에서 과연 그를 이길 수 있을 무인이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운이 없었다.

“저도 운이 좋았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스스로를 의심만 하지 않았다면, 승패는 어떻게 될지 몰랐을 겁니다.”

고진유는 허리를 보았다.

상의가 찢어진 곳에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다쳤어?”

“스치기만 해서 참을 만합니다. 다행히 뼈는 괜찮은 것 같아요.”

“다행이군.”

퍼렇게 물든 고진유의 허리를 보면서 묵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싸우면서 네가 이 정도로 다친 적은 없었는데.”

“그러네요. 내가 의심하면서 망설였다면 오히려 당했을 겁니다.”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무공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저들과 함부로 붙는 게 아니군. 저자 꼴 나겠어. 인양과 녹검 씨도 알겠지?”

“명심할게요.”

“넵. 명심하겠습니다.”

휘이익!

그때, 떨어진 장소에서 구경하던 북소연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가장 먼저 고진유의 허리에 시선이 멈추었다.

“괜찮은가요?”

“보시는 바와 같이. 튼튼합니다.”

“그런 것 같지 않아 보이네요. 퍼렇게 변했어요.”

그녀는 여전히 고진유의 허리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루만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 근데 북 소저 속은 괜찮소이까?”

“그 정도 마시고 속이 아프면 술을 끊어야죠.”

“음…… 자주 마시나 보군요.”

“그럭저럭 마시죠. 그건 그렇고 어제 나를…….”

“그만 돌아갑시다. 아침부터 과하게 몸을 움직였더니 허기가 지는군요.”

휘익!

고진유는 그녀를 스치며 휙 지나갔다.

‘저…… 사람이……!’

* * *

콰아앙!!

탁자를 내리친 배조경은 두 손이 부들거렸다.

‘망할 새끼…….’

흑화전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렸다. 자신을 지키는 호위대주 잠소마저 죽었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판진모가 누군가.

육십사괘무장의 수장이었다.

‘그가 일대일의 싸움에서 질 줄은 예상조차 못 했어.’

아마 극일천의 모든 인물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었다.

앞으로 극일천에서 그를 함부로 죽이고자 달려들지 못할 것이었다.

화산도협과 싸운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필가도에서 동영일천군의 선발대 일천 명과, 유문협에서 동영삼천군의 오천명 과 맞선 녀석이었다.

상대의 인원에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

극일십우가 아니고서는 무공으로 화산도협을 이길 수 있는 개인은 없을 것임을 확신했다.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하는 수밖에. 이것도 안 된다면 마지막까지 생각해야 하겠군.’

“충경.”

“넵, 전주님.”

“지금 당장 육십사괘무장들에게 연락을 띄워라. 그들의 수장이 화산도협에게 당했다고 한다면 올 수 있는 무장들은 모두 몰려올 것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휘익!

사내의 신형이 빠르게 사라졌다.

* * *

매화관의 수련장은 강한 열기로 가득했다.

관장인 매선향 학경을 대신해 삼대제자 우종성이 수련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수련관을 울렸다.

“화산의 검이 화려하다고 하나 때로는 간결해야 하는 법이다.”

“넵! 대사형!!”

매화관의 수련생들은 함성을 지르듯 대답했다.

“사제들이 펼치는 오행검의 묘리는 상생의 검. 하나가 부족하면 다른 하나에서 끌어오면 된다. 무공을 펼치는 데 완벽한 건 없다. 모자라면 채우고, 또 부족하면 도와주면 된다.”

파아아앗-!!

우종성이 화궁검화의 초식을 펼치자 화무검의 끝에서 검화가 솟구쳤다.

가공할 위력에 수련생들은 존경의 눈빛으로 변했다.

휘익!

그때. 매화관으로 두 명의 도사가 빠르게 들어섰다.

“대사형!”

“호민, 호경.”

우종성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

웬만해서는 수련 시간엔 동시에 찾아오지 않던 두 사람이었다.

“자유 수련을 하도록.”

“알겠습니다!!”

우종성은 손짓으로 매화관을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중요한 일인가 보구나.”

“호정 사제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화산파에 돌아온 뒤 고진유에게서는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

“무슨 일이지?”

“동영에서 중원에 쳐들어온 모양입니다.”

“사제의 소문은 들었다.”

복건성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동영과 싸운 일은 화산파까지 소문이 전해졌다.

곽우는 한 장의 서신을 보여주었다.

서신을 읽던 우종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동영뿐만 아니라 새외 전체에서 중원으로 들어왔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심각하군.”

“사제가 우리에게 직접 연락을 할 정도면 심각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무림맹에서 나서지 않는다면 사천 무림은 스스로 그들과 싸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사천 무림이 힘을 합친다면 서장 정도는 이기지 않겠느냐?”

“복건성의 경우처럼 연합을 한다면 가능할 겁니다.”

“다른 문제가 있다는 말이군.”

“서신에 적힌 내용처럼, 무림맹에서는 이 일을 모를 것이라 합니다.”

고진유가 서신을 분명 이유 없이 보내지 않았을 터.

“호정 사제가 원하는 건 우리가 서장을 맡아달라는 뜻이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호민, 우리가 나서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보느냐?”

“당연합니다. 무림맹이 못한 일을 본 문이 대신 하는 것입니다. 복건성의 경우처럼요. 사제는 이 점을 알고 있습니다.”

장두총이 한 번 더 거들 듯 말을 더했다.

“중원인들에게 화산파의 위명이 단번에 올라갈 것입니다!”

“흠…… 그렇구나.”

우종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께서는 알렸느냐?”

“사제의 서신을 가지고 온 자가 무조건 저를 만나야 한다고 했답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고 계실 것입니다.”

“후후, 그 녀석답구나. 아무도 못 믿는다는 것이지. 나도 조용히 만나 뵙고 와야겠다.”

장두총이 슬쩍 물었다.

“준비하는 겁니까?”

“비밀리에.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움직여야겠지.”

“전부 연락할까요?”

“그건 호경, 네가 맡아라.”

“그렇게 하죠.”

“호민에겐 중원을 나갈 준비를 부탁하마.”

“불편한 것이 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곽우는 다시 중원으로 나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사천 무림이 당하기 전에 빨리 가는 게 좋겠구나.”

결정을 내리자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지시하는 우종성의 행동은 마치 고진유를 보는 듯했다.

‘예전이라면 우물쭈물하셨을 텐데…….’

그의 변한 모습을 보며 곽우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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