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복주객잔으로 들어선 두 사람이 한쪽 자리로 움직였다.
“어! 왔어?”
묵경은 술잔을 든 채 함께 다가오는 고진유와 북소연을 반겼다.
그는 평소의 얼굴이 아니었다.
“요즘 풍류옥협을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어 하는 여인들이 많은데…… 변용을 하셨네요.”
“워낙 잘생긴 얼굴이라서 조용히 지낼 때는 이러고 다니는 게 편하지요. 북 소저도 본인의 얼굴을 보지 못해 아쉽겠지만, 어쩔 수 없소이다. 앞에 앉으시오.”
인양과 녹림야검이 일어나 묵경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마워요.”
북소연은 자리에 앉으면서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드디어 중원에 이름을 알리는군요. 언젠가는 알려질 것이라 여겼어요.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당신도 축하해요.”
“고맙소.”
벌컥!
녹림야검도 기분이 좋은지 한입에 술잔을 비웠다.
“이분에게 얼마 빚졌다고 했죠? 우리가 사고 싶은데.”
“황금 구천구백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구 냥을 지금 당장 일시불로 주면 데리고 가도 좋소.”
고진유의 말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안 주겠다는 말이잖아요.”
“그런 말은 안 했소이다. 돈을 주면 데리고 갈 수 있소. 만일 지금 안 산다면 다음에는 또 오를지도 모르오.”
“됐어요. 저도 술이나 한잔 주세요.”
“포기가 빠르군요. 아까운 기회였는데. 원래 좋고 비싼 것은 지금 살 때가 가장 싼 가격이라는 것을 모르오?”
“다음에 참고할게요.”
고진유는 그녀에게 술 한 잔을 따라 부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곧바로 한입에 술잔을 비웠다.
“잘 마시는군요.”
“호호호. 이 정도는 보통이죠.”
“더 마시겠소?”
“당연히.”
고진유는 다시 그녀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크으, 대단한 분이 따라주는 술이라 술맛이 좋군요. 오늘 여기 객잔에 있는 술은 전부 다 마실 거예요.”
“마음대로.”
다섯 명이 술을 마신 지 거의 한시진이 지났다.
그녀의 말대로 탁자 주위엔 이제 빈 술병이 셀 수 없을 만큼 쌓여 있었다.
“북 소저는 오늘 어디서 잘 거요?”
“자긴 뭘 자요? 밤새워야죠.”
“…….”
북소연의 얼굴은 이미 붉게 변해 있었다.
“네 분…… 모두 도망가면 안 돼요. 난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딸꾹!”
“허…… 피곤한 여자구만.”
묵경은 술병을 들고 그녀의 술잔에 술을 계속 부어주었다.
“근데! 제가 못생겼나요?”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못난 얼굴도 아니외다.”
“그렇죠? 난 진짜 못난 줄 알았잖아요!”
휙!
북소연은 갑자기 옆으로 돌리며 고진유를 가리켰다.
“야!! 내가!!”
핏.
고진유는 순간 손가락을 튕겨 그녀의 아혈을 눌렀다.
그러고는 정신을 잃은 채 옆으로 넘어지는 그녀를 재빨리 받친 후 손을 흔들었다.
“빨리 나오시오.”
휘이익!
객잔으로 흑의를 입은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많이 취했소이다. 저기 위에 객실이 있으니 데리고 가서 재우시오.”
“…….”
흑의 사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하는 거요?”
“저희는 공녀…… 아니, 대주님의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저희 대신…….”
“허? 괜히 재웠네. 그럼 묵경 형이…….”
“재운 사람이 데리고 가야지. 난 됐다.”
“그냥 깨울까요?”
“시끄러워질 텐데? 빨랑 올라가라.”
스윽.
고진유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가볍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인을 안았다.
이 층 객실로 올라가 침상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자 흑의 사내들이 고개를 숙였다.
“혈은 풀어놓았으니 괜찮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고진유는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뭐야? 그냥 왔어?”
“……하아.”
“아하하! 농담이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지?”
“뭐…… 그렇죠.”
고진유가 술잔을 들었을 때였다.
‘……누구지?’
객잔으로 들어서는 두 명의 중년 사내가 들어섰다.
그들의 신형에서 가공할 신위가 쏟아져 나왔다.
화르르륵!
네 사람은 동시에 몸에 깃든 주기(酒氣)를 태웠다.
“후후후, 드디어 만났군. 보아하니 축하주를 마시는 모양인가?”
웃음을 띠며 다가오는 그들은 흑화전주 배조경과 판진모였다.
스윽.
배조경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오늘은 적의를 보이지 않아도 된다. 인사만 할 생각이거든. 우리가 누구인지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겠지?”
“서로 인사할 필요 있겠소? 바로 시작하면 될 것을.”
“크크크, 역시 기가 죽지 않는군. 사내라면 그 정도는 돼야지.”
배조경은 상대의 배짱이 마음이 들었다.
탁자 주위에는 술병이 잔뜩 쌓여 있었다.
“오늘 술이 마지막이 될 테니 마실 수 있을 때까지 마시게.”
“술값이라도 내주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어떻겠소?”
“하하하하! 웃긴 녀석이군.”
“갑자기 술맛이 떨어져서 그만 자야겠소이다.”
고진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는 건 좋은데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말게.”
“당신들이 겁나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그냥 술이나 마시는 게 어떻겠소? 돈이 없다면 당신들 술값은 본도가 내 주겠소이다.”
슈우욱-
배조경의 신형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손이 뻗어왔다.
“못된 습관이 있구려.”
고진유는 다가오는 그의 손을 가볍게 옆으로 쳐냈다.
슈욱. 슉.
배조경이 연이어 목덜미를 잡기 위해 반대편 손을 뻗었지만,
탁탁탁!
이번에도 마찬가지.
고진유는 여전히 제자리에 선 채 상대의 손을 계속 쳐냈다.
‘전부 막아내는군.’
그는 인상을 쓰며 뒤로 물러났다.
“화산도협, 천조혈수를 손쉽게 막아내다니 생각 이상이군.”
“물러나는 걸 보니 그만둘 생각이오?”
“오늘은 여기까지. 아까 말한 대로 인사만 할 생각이었으니까.”
“맘대로 하시오.”
고진유는 피식 웃고는 일행과 함께 객실로 올라갔다.
계단 끝에 올라서자 묵경이 객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괜찮겠어? 지금까지와는 달리 상당히 강해 보이던데?”
“저들 입장에서 보면 우리도 강해 보일 텐데요. 그렇지 않았다면 인사고 뭐고 바로 우리를 죽이려고 했을 겁니다.”
“그렇겠지? 짜식들…… 우리가 겁나긴 하지.”
“막상 나를 상대해 보니 어떻게 할지 애매했을 겁니다. 그들이 예상했던 것과 달라 보였겠죠.”
인양과 녹림야검은 미소를 지었다.
고진유와 함께하면서 두 사람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공이 급격하게 늘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자신들의 몸에서 일어났다.
“의제권협, 녹검살협의 위명을 받을 정도라면 앞으로는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알겠어요!”
“도협님, 알겠습니다.”
“그럼 푹 자고 내일 아침에 봅시다.”
스으윽.
고진유는 객실에 들어온 뒤 침상에 누웠다.
“……원래 사람이 그렇게 가볍나?”
눈을 뜬 채로 멀뚱히 천장을 보다가 손을 위로 들었다.
‘참 나, 내가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이고, 잠이나 자자.’
고진유는 옆으로 몸을 뒤척거리며 휙 돌아누웠다.
* * *
벌떡!
북소연은 침상에서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뭐야?!”
그러고는 놀라 굳은 채로 주위를 살폈다.
“여긴 왜……?”
어제저녁 일이 생각났다.
“씨이…….”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고진유에게 점혈을 당한 뒤 기절했다.
“밖에 누구 없나?”
“아가씨, 남묵입니다.”
“들어와!”
드륵.
문을 열고 흑의 사내가 들어섰다.
“어떻게 된 일이야?”
“그가…… 아가씨를 안고 여기에 모셨습니다.”
‘나를 직접?’
“그는 어디에 있지?”
“일 층에 있을 것입니다.”
휙!
그녀는 곧바로 객실을 나섰다.
멈칫.
아래를 보다가 계단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저들은……!’
산동성의 봉래포구에서 봤던 사내들이 틀림없었다.
배조경이 고진유를 보며 반갑게 인사하고 잇었다.
“잘 잤는가?”
“그쪽은 잘 잔 모양이군.”
“후후후. 나야 당연히 잘 잤지. 자네들은 잘 잤는가 모르겠군. 오늘 죽을지 몰라 상당히 겁이 났을 텐데.”
“사돈 남 말 하시네. 어젠 쫄아서 물러갔으면서. 지금 붙을 생각이 없으면 조용히 하시오.”
녹림야검은 눈에 힘을 주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허어…… 이번에 이름깨나 날렸다고 겁을 완전히 상실했군. 죽고 싶은 모양이지?”
스윽.
녹림야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녹검 씨, 원래 빈 수레가 시끄러운 법이지요. 식사나 마저 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그는 다시 앉으면서 피식 웃었다.
“이 자식들이…… 당장 밖으로 나오지 못해?”
파앗!
배조경은 노기를 순간 치밀어 올랐다. 동시에 살기를 뿜어냈다.
상대가 강한 것을 안다.
방심해서 달려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화산도협과 그의 동료들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조용하게 밥을 못 먹겠네.”
고진유는 수저를 내려놓고 씩씩거리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겠소이다. 원한다면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게 좋겠군. 앞장서시오.”
휘이익!
그들은 객잔에서 곧바로 사라졌다.
이 층에서 다투는 모습을 내려다본 북소연도 급히 움직였다.
“우리도 가자!”
“아가씨, 안 됩니다.”
흑의 사내는 바로 그녀를 제재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위험합니다. 방금 그자들은 엄청난 고수들입니다. 그리고 저자들뿐만 아니라 백여 명 정도의 무인들이 숨어서 따르고 있었습니다.”
“남묵 아저씨. 그들이 강한 건 나도 알아. 어쩌면 아버지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걱정 마. 내가 관상 하나는 잘 보잖아. 그는 요절할 상이 아니에요.”
“아가씨, 혹시나 다치기라도 하신다면…….”
“괜찮으니까 어서 가요. 이러다가 재미난 구경을 놓칠 수 있다고.”
“아…… 네에.”
흑의 사내도 또한 화산도협과 극일천 소속의 무인과 목숨을 건 싸움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 * *
객잔에서 나온 그들은 십 장의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 마주 보며 내려섰다.
고진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었다.
“많이도 데리고 왔군요. 조심들 하세요.”
“훗. 어제 우리를 보고 겁이 났겠지. 혹시 질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배조경과 판진모의 인상이 차갑게 변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당해보지 않았던 무시였다.
“이왕 데리고 왔으면 전부 나오라고 하시오. 구경만 할 건 아니지 않소?”
처어억!
판진모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화산도협, 철갑을 곱게 내어준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철갑이라. 그건 이제 본도에게 없소이다.”
“무슨 말이지?”
“천공공도 없는 마당에 열지도 못할 철갑을 굳이 힘들게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소.”
“……그래서 철갑을 어떻게 했다는 말이지?”
“버렸소이다.”
고진유는 두 팔을 앞으로 내보였다.
“무슨 말이냐? 네놈이 철갑을 버릴 리가 없다!!”
배조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지금 우리가 철갑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고진유 뒤로 묵경과 인양, 그리고 녹림야검도 손을 올려 철갑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정…… 말로 버렸다고? 그걸 어디에 버렸다는 거지?”
“아무도 못 찾는 곳에 던져 버렸지.”
“……!!”
배조경의 얼굴에 다급함이 느껴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철갑은 무조건 찾아야 했다.
“그곳이 어디냐?!”
“후후후, 그걸 가르쳐 줄 거라 생각하나?”
고진유는 그들의 표정을 보면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저…… 새끼가…….’
배조경은 그때서야 알았다.
철갑을 버렸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망할 놈이 우리를 놀리는군.”
“알아차린 모양이군. 그걸 왜 버려. 꼭 열어서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할 거요.”
“…….”
“혹시 당신은 철갑을 어떻게 여는지 아시오?”
극일천에서도 철갑에 대해 아는 인물은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극일천의 천주와 천문전의 나하중, 이 두 사람만이 철갑을 열 수 있다고 했다.
“흐음, 극일천에서도 극비인 모양이군. 그럼 본도가 가르쳐 줄까?”
“…….”
배조경은 물론 판진모도 철갑을 열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한지 입을 다물었다.
“별거 없더군. 천주의 피만 있으면 된다던데. 그게 바로 철갑을 열기 위한 열쇠라고 하더이다.”
‘천주의 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열쇠였다.
한 번 닫히면 천주 외에는 열지 못한다는 이유를 알았다.
“네놈을 잡아서…… 철갑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고야 말 것이다.”
“할 수 있다면 해보시오. 당신들 뜻대로 될지.”
판진모는 내력을 끌어 올렸다.
“혼자서 싸우고자 하는 것이오? 힘들지 않겠소?”
“크하하하! 본인이 누구인지 아느냐?”
“처음 만났는데 어떻게 알겠소. 대충 무공을 보아하니 극일천에서도 제법 한 자리 할 인물이라는 것은 알겠소만.”
“본인은 특무괘장 동인으로 육십사괘무장의 수장이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가? 지금까지 네놈이 만났던 무장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뜻이지. 크하하하하!!”
판진모는 대소를 터뜨리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왔다.
그의 보폭 아래로 흑색의 암흑기가 바닥 아래를 번지며 점점 앞으로 퍼져 나왔다.
휘리리릭!
순식간에 암흑기가 고진유의 발밑 그림자를 감싸며 발목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어디 장난질을.”
고진유가 발아래 그림자를 향해 사의검을 내리꽂았다.
번쩍.
자줏빛의 검강이 터지면서 암흑기를 간단하게 제압했다.
“이런 장난은 서로 시간 낭비일 뿐. 제대로 하는 게 어떻겠소?”
“……!!”
고진유에게 장난질이라 말을 들었지만 절대로 무시당할 무공이 아니었다.
암흑영멸(暗黑影滅)이 너무나 쉽게 깨졌다.
판진모의 눈이 커졌다.
‘당황스럽군. 이 녀석의 내력이 거의 나와 동등할 줄이야.’
기와 기의 대결은 서로 내력의 싸움이기도 했다.
단숨에 암흑기를 깨버린 고진유의 내력을 보며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판진모는 양손으로 합장했다.
우우우웅-
양손 안에서 강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멸흑천하.
고진유를 향해 손바닥을 펼치자 검은 먹구름이 쏟아져 나왔다.
크아아아아---!!
먹구름이 퍼져 나가자, 괴소를 지은 악마의 얼굴들이 사위를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