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중원의 땅과 똑같이 생긴 모형도.
중원 문파의 이름이 적힌 적기와 백기, 그리고 흑기와 황기가 각각 모형도 중간중간 꽂혀 있었다.
스윽.
모형도를 내려다보던 천문전주 나하중 옆으로 중년 사내가 다가왔다.
“전주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인가?”
“새외무림 중 동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후후후, 제일 빨리 움직일 줄 알았네.”
그는 전서를 공손하게 내밀었다.
“중원에 세 곳으로 나누어 들어왔다고 하는군요.”
“세 곳으로?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단숨에 산동과 강소, 절강과 복건, 네 개의 성을 차지할 것이라 했습니다.”
“동영에서 제법 머리를 썼군. 성 네 개 정도면 그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만족하겠지.”
동영에게 중원 동쪽 네 개 성은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수곡자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단지 이용할 뿐이라고 해도, 그는 중원인이었다.
“동영에게 정말로 네 개의 성을 주실 것입니까?”
“후후, 그놈들에게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휘익!
나하중이 한 권의 서책을 그에게 던졌다.
천하멸살계(天下滅殺計).
서책의 표지에 적힌 다섯 글자.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말 그대로 천하를 멸살할 계획이지. 그 땅을 동영이 가지고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놈들은 잠시 맡고 있을 뿐이야.”
“…….”
“십오 장을 펴보게. 뭐라고 적혀 있는가?”
수곡자는 그의 말대로 천하멸살계의 서책을 넘겼다.
“십오책 새외무림중원혼돈계.”
“그렇네.”
서책 안에는 동영은 물론 새외무림의 세력들이 중원에 쳐들어오는 날짜까지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새외무림을 어떻게 쳐낼지도.
“후후후…… 모든 것이 본좌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다네.”
‘이렇게 된다면…….’
수곡자는 안심이 되었다.
“언제든지 무림을 쳐도 좋다고 동영에 연락을 하게.”
“전주님의 말씀을 동영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수곡자는 허리를 깊히 숙인 뒤 천문전을 곧바로 물러났다.
홀로 남은 나하중은 중원의 모형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놈만 아니었다면 천하멸살계가 더 순조롭게 되었을 것을…….”
휘익!
손가락 끝에서 기가 뻗어 나오며 섬서성에 꽂힌 백기를 떨어뜨렸다.
“화산도협, 네놈이 아무리 날뛴다고 해도 새외무림이 들어오는 것을 어찌 알아내겠느냐.”
스윽.
나하중은 서랍을 열고 안에서 한 권의 서책을 꺼냈다.
살생부(殺生簿).
붉은색으로 된 세 글자가 진하게 적혀 있었다.
스윽.
첫 장을 넘겼다.
‘천주 황야.’
나하중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이 모신 극일천주의 이름.
그가 제일 첫 번째로 살생부에 적혀 있었다.
스윽.
다시 한 장을 넘겼다.
“무신 초일군. 그때 천주께서 봉문을 받아주지 않고 끝을 냈어야 했어.”
극일천에서도 초일군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인물은 없다.
나하중의 표정은 아쉬웠다.
다시 세 번째 장을 넘겼다.
“천살지인……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거늘. 게다가 화산파와 연관이 있다면…… 가만히 둘 수 없지.”
네 번째 장을 넘겼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나하중은 붓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화산도협
“어린놈이 살생부에 올라올 줄이야…… 철갑 때문에 살려준 것이 여기에 오를 정도로 화근이 되었어.”
나하중은 붓을 내려놓은 뒤 살생부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흐음…… 이 녀석과 무신을 싸우게 한다면…….”
무신 초일군과 화산도협 고진유와 싸우게 만들 수 있는 방법.
“천살지인을 이용해야겠어. 그렇다면 우선 혈사천을 건드려 볼까?”
나하중은 천하멸살계를 펼친 뒤 빠르게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삼성혈전계
* * *
동영십살 산본은 점혈로 인해 움직일 수 없었다.
선상에 똑바로 앉은 채 해적선이 필가산을 향해 가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화산도협이라니…….’
저 네 사람 중 한 청년의 정체.
그 또한 화산도협이 누구인지 알았다.
천하오무와 동등하다고 알려진 중원무림의 신성 고진유였다.
‘왜…… 그가 여기에 있는 거지?’
필가도로 올라가는 도중 상선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심심해서 털어보려 한 게 운이 없었다.
“저어…… 도협님.”
녹림야검이 다가왔다.
“잠시 내려와서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알겠어요.”
고진유는 그를 따라 배 아래로 내려갔다.
“오우…….”
뜻밖의 대형 물건들이 보였다.
수많은 화포와 탄환들이 조심스럽게 싸여 있었다.
녹림야검과 인양이 함께 해적선을 살피다가 발견한 것들이었다.
“화포 이십 기입니다.”
역시 남해에서 동영 무사 한 명을 태워주러 먼 이곳까지 올라올 리 없었다.
“동영에서 화포들을 싣고 올라오던 중이었군.”
“도협님, 동영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홍이포입니다.”
“홍이포? 그게 뭡니까?”
“나라에서 운영하는 화포입니다.”
“그럼 동영에서 가지고 온 게 아니라…… 중원의 물건이라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녹검 씨는 어떻게 이것을 아는 거죠?”
“그게…… 녹림에서도 관아의 물건들을 털다 보니 몇 기……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왜 가지고 있소?”
“…….”
“관과 무림은 상호불가침이지 않습니까? 흐음…… 여하튼 녹림은 같은 나라이니 그렇다 치고, 왜구 이놈들은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아마도…… 팔았을 수도…….”
“나 참…… 나라 잘 돌아가는군.”
“…….”
“알겠어요. 올라가서 물어봅시다.”
고진유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인양과 녹림야검은 조용히 고진유의 뒤를 따르면서 서로 얼굴을 보았다.
[엄청 화가 나신 게 맞지?]
[네에…… 말은 저렇게 해도 남의 나라에서 홍이포를 가지고 있는 게 싫은 모양입니다.]
묵경은 배 아래에서 올라오는 고진유를 보았다.
“밑에 뭐가 있어?”
“홍이포 이십 기가 있어요.”
“엥? 홍이포? 그걸 왜 해적 놈들이 가지고 있어?”
관군 외 다른 곳에 있어야 할 물건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게요. 그래서 확인을 해야겠어요.”
녹림야검은 곧장 해적 두목을 끌고 왔다.
“방금 아래에 갔더니 이상한 물건들이 있던데.”
“…….”
바로 대답이 없었다.
고진유는 녹림야검을 보았다.
스릉-
녹림야검이 해적 두목의 팔을 잡으며 녹수검을 뽑았다.
‘헉…….’
해적 두목은 눈이 커지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건!! 수군 도독에게 돈을 주고 얻었습니다!”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해적 두목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쏟아냈다.
“소인은…… 그저 저자와 함께 이것들을 필가산으로 운송해 달라고 해서…….”
“……진유 아우, 이건 심각한데? 수군 도독이 미치지 않고서야 함부로 나라의 물건을 팔아?”
“이거 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바다에 버리는 건 어때?”
묵경도 마땅히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왜구에 동영, 그리고 화포까지.
고진유는 고민했다.
‘……동영에서 화포를 구하든 말든 내가 왜 걱정을 하지?’
굳이 나라 걱정까지 해야 하나?
‘됐어. 수군 도독이 화포를 팔든 함선을 팔든 난 몰라.’
필가산으로 가지 말고 그냥 산동성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은 자꾸 그를 필가산으로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쳇……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니었는데. 그냥 상선을 타고 산동으로 갔으면…….’
이미 발을 들인 이상 뭐라도 끝을 봐야 했다.
“좋았어. 형, 이왕 바다에 버릴 거면 신나게 쏘고 난 뒤 던져 버리는 게 좋겠어요.”
“화포를 쏴? 어디에?”
“어디긴 어디에요. 화포를 구한 놈들에게 줘야죠.”
“동영이 있다는 필가산에?”
“맞아요.”
“그럼…… 안 되지 않나?”
“후후후, 그냥 주는 게 아니라…….”
고진유의 입가에 웃음이 나타났다.
* * *
갑판 위로 정렬된 이십 기의 화포들.
해적들은 탄환까지 갑판 위로 전부 옮겨 놓았다.
그들로서도 이판사판이었다.
이대로 저들이 물러난다면 동영의 무사들에 의해 죽을 게 뻔했다.
동영이 모두 죽는다면 오히려 자신들이 살 수 있다.
동영십살 산본의 얼굴은 이미 핏기 없는 얼굴로 굳어 버렸다.
‘저 미친놈들이…….’
갑판 위로 화포들을 끌고 올라온 이유를 알았다.
필가산에는 일천 명의 동영의 무사들이 있다.
‘만일 섬에 화포를 쏜다면 피할 장소도 없어.’
순간,
퍼어어엉!!!
갑자기 천둥소리를 닮은 화포 소리가 울렸다.
탄환이 바다 수면에 떨어지면서 커다란 바닷물이 솟구쳤다.
“저 정도 사정거리군.”
고진유는 화포가 떨어진 위치를 보며 가늠했다.
“이번에는 좀 더 여러 각도를 조절해서 쏴봐.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알겠습니다.”
녹림야검은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듯한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치지지직-!!
심지에 불꽃이 일어나면서,
퍼어어엉!!
탄환이 바다를 향해 날아갔다.
방금 전보다 삼 장 더 먼 곳에 탄환이 떨어진 뒤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좋았어. 계속해 봐.”
펑! 펑! 펑! 펑!
서너 번 실험하듯 바다에 화포를 계속 쏘았다.
“됐어. 대충 사거리를 알겠네. 이제 해적선이 필가도에 도착하면 되겠군.”
모든 준비를 마쳤다.
곧 돛대 위에 올라선 인양이 소리쳤다.
“형, 저기 섬이 보입니다!”
휘이익!
인양은 아래로 곧바로 내려왔다.
“준비들 하죠.”
“알겠습니다!”
녹림야검은 탄환을 이십 기가 넘는 화포에 모두 장전했다.
네 사람 중 가장 신난 표정이었다.
점점 섬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섬의 해안가에는 정박한 다섯 척의 배들이 보였다.
“우선 저기 배부터 맞혀야겠어. 밖으로 못 나오게 만드는 거야.”
필가도를 향해 가까이 다가간 그들이 화포의 사정거리를 확인했다.
“멈춰라!”
고진유의 명에 해적선이 멈췄다.
“먼저 배를 향해 쏴라!”
“넵.”
퍼어어엉-!!
펑! 펑! 펑!
피우우우우웅-
화포 소리가 터지면서 이십 개의 탄환이 동시에 필가도를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그리고 해적들의 정박한 배에 떨어지면서 폭발했다.
“으아아아악!!”
“화포다!!”
“뭐야!! 저놈들이 미쳤나?!”
해안가에서 날벼락을 맞은 왜구들과 동영 무사들이 화포의 사정거리에서 물러나며 해적선을 보았다.
피이이이이잉-
피우우우우웅-!!
계속해서 탄환이 하늘 위로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쾅쾅쾅쾅쾅!!!
수십 발의 폭음이 선박 위로 터지면서 하나도 빠짐없이 구멍이 난 채 바다 아래로 침수되기 시작했다.
“이젠 바다로 나오지 못하겠군. 쾌속 전진!”
필가도 전체가 충분히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갈 위치까지 해적선이 이동했다.
“닻을 내려라!”
드르르르륵-!!
닻이 수면 아래로 떨어진 후 해적선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했다.
“한 번 신나게 쏴볼까?”
“넵. 알겠습니다!!”
* * *
해적선 안에 있던 탄환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필가도를 향해 날렸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이런 막무가내 같은 짓을 하는 거냐!!”
동영일천군을 이끌고 필가도에 올라온 일월산종의 눈은 노기로 가득했다.
해적선에서 날아온 화포에 의해 일천 명의 수하들이 중경상을 당한 채 바닥에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중원 놈들이 이렇게 무식하게 공격하는 편이었나……?”
피우우우웅-
콰아아앙-!!
사방에서 화포 소리와 함께 탄환이 날아와서 떨어졌다.
드드드드드-
수백 발의 폭탄이 떨어지면서 섬 전체가 흔들거렸다.
“크아아아아!!”
“으으으으윽…….”
또다시 수하들은 화포를 피하기 위해 뛰어다녔지만 섬 안에서 피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섬에는 해적선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배가 없었다.
빠드득.
“우리를 완전히 폭탄으로 괴멸시킬 모양이군. 저 새끼…… 여기로 올라오기만 하면 사지를 찢어버릴 테다!!”
피이이이이잉-
그때, 자신의 머리 위로 불꽃이 번쩍였다.
일월산종은 아래로 떨어지는 탄환을 보았다.
휘이익!!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렸지만.
콰아아앙-!!
“커어어억!”
그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털썩.
바닥에 떨어지며 정신을 잃었다.
얼마 동안 기절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끄으으응.
“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얼마나 기절했는지 몰랐지만, 주위에선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산동을 점령할 동명 무사 천 명이…….’
해적선이 쏜 화포에 육 할 이상이 부상을 당해 움직일 수도 없었다.
“완전히…… 당했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섬에 갇힌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쾅!! 콰앙……!!
“대체 누가…….”
탄환이 떨어졌는지 점점 섬으로 날아오는 포탄의 수가 적어졌다.
이윽고,
동영 무사 일천 명을 초토화시킨 화포 소리가 완전히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