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훗. 결국 끝을 보겠다는 것이군.’
십무흑화 뒤로 모습을 드러낸 인물.
흑화부전주 다주경이 살기 짙은 눈동자로 고진유를 노려보았다.
“화산도협,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아, 그건 당신 말이 맞소. 본도는 당신이 돌아갈 줄 알았으니까. 멍청한 선택을 한 것 같소이다.”
“크크크…… 나에게는 선택이라는 게 없다.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지. 네놈이 죽거나, 내가 죽거나.”
“그래서 백향촌에 이들을 보낸 것이오? 말을 들어보니 별 볼 일 없었다고 하던데.”
고진유의 말에 다주경의 옆에서 벌컥 화를 내며 흥분했다.
“지금 뭐라 했지?”
십무흑화 일무 지항의 머리 위로 살기가 솟구쳤다.
그렇지 않아도 백향촌에서 당한 망신살을 어떻게라도 풀어야만 했다.
흑화부전주 다주경은 흑화전에 보고한 뒤 곧바로 화산도협을 잡기 위해 십무흑화을 불렀다.
그는 몸을 숨긴 채 화산도협의 흔적을 따라 십무흑화의 뒤를 따랐다.
그들 개개인의 무공은 자신보다 강했다. 십무흑화의 무공이면 화산도협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할 정도였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그를 쫓던 도중 백향촌에서 해동수호문을 만났던 것이다.
그들의 무력은 강했다.
중원 무림을 상대하는 해동수호문은 거대한 벽이었다.
‘십무흑화의 무력으로 해동수호문은 상대할 수 없다 해도…… 저놈들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일무 지항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이 상대할 적은 화산도협을 포함해 네 명밖에 되지 않았다.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지항은 명령을 내렸다.
“일무에서 오무까지 화산도협을 상대하고 나머지는 세 놈을 잡는다.”
“그렇게 하지.”
오무 두초가 살기를 끌어 올렸다. 그 또한 백향촌에서 당한 망신을 되갚아 주고자 했다.
샤아아아아-
전방에서 전해져 오는 거대한 살기.
그 순간, 고진유의 신형에서 호신강기가 스스로 움직였다.
상대의 살기가 그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막아낸 것이다.
‘또…… 내 의지와는 달리 상대의 기에 곧장 반응했어.’
마치 스스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파아앗-!
타아앗!!
먼저 움직인 건 다섯 명의 십무흑화였다.
그들은 고진유를 중앙으로 포위하며 쇄망오금진(鎖網五擒陣)을 펼쳤다.
“진유 아우!”
중앙에 갇힌 고진유를 보며 묵경이 다급히 소리치며 도와주려고 했다.
“오지 않아도 됩니다.”
고진유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스르릉-
그를 저지하며 사의검을 잡았다.
쇄망오금진에서 뿜어내는 살기가 고진유의 전신을 압박하고자 쏟아졌다.
“크크크. 네놈이 아무리 내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쇄망오금진에 갇힌 이상 압박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다주경은 확신했다.
이번 싸움은 자신의 승리다.
묵경과 인양, 그리고 녹림야검.
이들 세 명은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다.
“저들을 모두 죽이게.”
“알겠소이다.”
육무 장구촌도 마찬가지.
“저놈들은 내가 혼자서 상대하지.”
세 사람을 가볍게 여긴 그가 양손에 음양쌍도를 휘두르며 실소와 함께 신법을 펼쳤다.
* * *
‘우우욱…….’
쇄망오금진을 펼친 오인의 십무흑화가 신음을 참아냈다.
‘허어어억…….’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커지고 이마와 등에는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저놈은 혼자서 오인의 살기를 일일이 맞받아치며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녀석이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쇄망오금진을 펼친 그들의 내력이 오히려 상대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내력으로 상대를 누르다가 오히려 그들이 내력을 잃을 판이었다.
“위리안치.”
팟팟팟팟팟-!!
지항의 명에 다섯 명은 서로 위치를 바꾸며 검을 휘둘렀다.
각자 뻗어낸 다섯 자루의 검.
쇄망오금진에 갇힌 고진유의 눈으로 수십 수백 개의 검기가 휘몰아치는 것 같은 환상이 보였다.
지항의 눈은 확신에 가득 찼다.
‘내력이 강해도 쉽게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쉭쉭쉭-
날카로운 독이빨을 드러내며 고진유를 향해 다가서는 독사의 살음.
한눈을 잘못 팔기만 하면 단번에 목을 물어뜯을 기세로 다가왔다.
고진유는 제자리에서 사의검으로 원을 그렸다.
화아아아아-!!
거대한 돌풍이 솟구치고, 고진유 주위로 먼지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한 치 눈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뿌연 먼지로 가득했다.
그리고,
스걱-
그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먼지를 가르며 매화검강이 뻗어 나왔다.
“……?”
지항은 목이 따끔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커어억……?!”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손으로 목을 만지자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허탈했다.
그는 옆으로 쓰러지면서 알았다.
‘젠…… 장…… 그냥…… 물러났어야 했다.’
쿠우웅!!
지항의 굳어진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뒤를 이어 두 명의 십무흑화가 먼지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무! 삼무!! 오무!”
이무 황종군은 목소리를 높여 세 명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무, 세 사람은 당한 것……! 커어어억!”
사무 신훈정의 비명 소리가 먼지 속에서 들렸다.
“사무? 사무!”
황종군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스윽.
순간,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에 몸이 움찔거렸다.
‘뒤?!’
몸을 돌리면서 검을 뻗지만 그보다 먼저 상대의 검이 가슴에 닿아 있었다.
“빠르…… 다.”
황종군은 앞으로 몸이 숙여지면서 쓰러졌다.
다섯 명이 목숨을 잃기까지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먼지가 사라지면서 다주경은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온몸이 떨렸다.
바닥에 쓰러진 오인의 시신.
‘젠장…… 십무흑화도 이들의 상대가 안 되다니…….’
고진유뿐만 아니었다.
혼자 세 명을 상대하겠다고 호기롭게 나섰던 장구촌도 인양의 화산복호권에 심장을 가격당한 뒤 쓰러졌다.
남은 건 네 명의 십무흑화밖에 없었다.
‘결국……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인가?’
다주경은 품에서 신단을 꺼냈다.
“공마신단을?”
그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한번 공마령인이 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예전 것과 다르오. 이건 이성을 유지할 수 있소. 계속 복용해야 하긴 하지만, 이성을 잃지는 않소.”
“…….”
“그리고…… 우리의 목표는 저 녀석이오.”
다주경의 말처럼 그들도 방법이 없었다.
네 명의 십무흑화인은 결국 그에게 받은 공마신단을 삼켰다.
그들을 본 고진유는 이마를 찌푸렸다.
“또 저걸…….”
두두두둑. 두둑. 두두둑.
크으으윽……!!
공마신단을 복용한 다섯 명의 몸에서 근육과 뼈가 움직이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다주경의 눈동자는 백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뻘겋게 변했다.
공마신단의 효과가 단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크으…… 죽…… 인다…….”
오직 눈앞에 선 고진유만이 보일 뿐.
전신에서 흐르는 살기는 종전보다 다섯 배 이상을 뛰어넘었다.
공마령인으로 변했지만, 그럼에도 다주경의 말처럼 모두 이성의 마지막 끝은 끊어지지 않았다.
파앗!!
다섯 명은 동시에 신법을 펼치며 고진유의 앞으로 불쑥 다가섰다.
휘익!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뻗어 고진유의 목을 낚아채려고 했다.
“어딜…….”
다섯 개의 손을 피하고자 얼굴을 빠르게 뒤로 물렸다.
“크으으…….”
“이놈…… 어디…… 가느냐……?!!”
휘익.
휙휙휙!
그들은 다시 손을 옆으로 틀며 고진유의 목덜미와 옷자락이라도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진유는 간격을 유지한 채 뒤로 피하면서 물러났다.
스르륵.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 그들은 양손을 뻗으며 고진유를 덮쳤지만 그때마다 좌우 뒤로 물이 흐르듯 가볍게 피했다.
“화…… 산…… 도…… 협!!!”
빠드드득.
그 자리에서 멈춘 다주경이 붉은 눈동자로 고진유를 노려보며 이빨을 갈았다.
슈우우우우-
양손에 검붉은 기가 거대한 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로지 죽이겠다는 살기만이 가득했다.
“크아아…… 받아라!!”
살광존자의 독문무공 살주무(殺朱武)가 삼백 년 만에 다시 무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공마령인으로 변한 네 명의 십무흑화도 고진유를 향해 공마령의 전 내력을 펼쳤다.
파아아아앗---!!!
다섯 개의 강력한 강기가 쏟아졌다.
‘두려운 힘이다.’
고진유의 두 개의 단전은 이미 완전히 개방했다.
‘물론 신단으로 힘을 억지로 끌어낼 순 있지만, 조화를 이룬 자가 펼치는 강한 힘과는 달라. 무공이란 조화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멍청한 짓을 하고 있어.’
번쩍!!
사의검에서 자줏빛 폭광과 함께 고진유의 패왕명안이 폭발하면서, 그들의 움직임이 머릿속에 투영되었다.
콰아아앙-!!
사의검에서 뻗어나간 매화검강의 다섯 줄기.
다주경의 살주무를 뚫어내고 가슴을 강타하며 십무흑화 네 명의 머리와 심장들을 그대로 베고 지나갔다.
커다란 매화 문양이 다섯 명의 가슴을 포함하여 매화검강이 부딪힌 그들의 몸에 뚜렷하게 새겨졌다.
“커어어억!!!”
고통의 신음과 함께, 매화 문양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다주경은 몸이 산산조각 나는 듯했다.
‘공…… 마…… 령인도……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인가?’
쿠우웅.
그는 억울한 표정으로 지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공마령인으로 변한 네 명도 매화문양을 남긴 채 쓰러졌다.
목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내력이 깨져 버렸다.
죽지 않는 이상 영원히 공마령인으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야 했다.
‘차라리 죽는 게 이들 처지에서 더 좋을 수도 있겠지’
고진유는 그들의 눈과 마주쳤다.
겨우 한 가닥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이성을 최대한 이끌어낸 그들이 고개를 움직였다.
고진유는 사의검을 내리쳤다.
* * *
중년 사내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다급하게 전해져 온 한 장의 서신.
그 안에는 믿기지 않을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십무흑화, 부전주 실패. 전부 죽음.
화르르…….
서신이 손안에서 재가 되었다.
흑화전주 배조경은 한숨을 쉬며 움직이지 않았다.
‘한 놈에게 완전히 당했어.’
화산도협 고진유.
흑화천군과 십무흑화. 부전주 다주경까지 흑화전은 전멸이라 할 정도로 였다.
“크크크…… 이런 걸 어이가 없다고 하는 거겠지?”
중원에 심어놓은 세력 외, 흑화전에 남은 건 자신과 호위대뿐.
현재 그와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세력인 석가장을 빼내기에는 무리였다.
하북팽가와 긴장감을 유지한 일촉즉발의 상태기도 했지만, 놈들이 이동하는 방향이 하북이 아니었다.
“놈들이 대련의 여순포로 움직인다는 것은…… 곧바로 산동으로 넘어오겠다는 뜻이다.”
배를 타고 내리는 장소를 알게 되었지만, 어디에 가려고 산동성으로 가는 지는 알 수 없었다.
“화산파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군. 대체 어디로 갈 생각이지?”
갑자기 동북까지 올라간 뒤 이번에는 산동성으로 내려간다.
화산도협을 상대하기 위해 대련으로 가기에는 늦었다.
“잠소.”
허공으로 호위대주를 불렀다.
“전주님을 뵙습니다.”
호위대주 잠소가 배조경의 앞으로 나섰다.
“전 호위대를 이끌고 산동으로 향할 것이다.”
“……전주님께서 직접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그놈을 잡기 위해서는 본인밖에 없다. 대주도 알 것이다. 이젠 흑화전에 남은 건 오직 나뿐. 모두 화산도협에 누가 당했는지 알고 있겠지?”
“소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전주님의 무력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직접 그를 상대하기 위해 가신다고 하시니 수하의 입장에서 걱정이 될 뿐입니다.”
“그대의 뜻을 잘 알지만, 본 전주가 그에게 질 것이라 보는가?”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문제가 되는 게 없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수고하게.”
휘이익.
그는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 흑화전을 나섰다.
잠소가 사라진 뒤 문밖으로 기척 소리가 들렸다.
똑똑.
“누구냐?”
“윤여림입니다.”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천문전에서 왜?’
그곳에서 굳이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일단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들어보기로 했다.
“들어오게.”
“고맙습니다.”
윤여림의 예의는 이미 극일천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는 안으로 들어선 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대가 여기까지 무슨 일이오?”
“천문전주님께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천문전주 나하중이 전해준 서신을 읽었다.
‘보고하지도 않았거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군.’
흑화전에서 실패한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하긴 모를 리가 없겠지.’
서신에는 육십사괘장의 수장과 함께 떠나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육삽사괘무장의 수장이자 최고의 무인, 판진모는 현재 폐관 중이었다.
그런 그와 함께하라니.
‘폐관까지 마쳤다면…… 얼마나 강해졌는지 궁금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