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156화 (156/425)

156화

장백령에서 시간을 보낸 지 반시진도 지나지 않았다.

‘뭐지?’

금강대협곡으로 다시 나왔을 때는 하늘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났지?”

얼핏 들은 말로는 선계에서의 시간과 속세에서 흐르는 시간과 다르다고 했었다.

“정말 신기한데.”

고진유는 하루가 지났을 뿐이라 단순하게 여겼다.

협곡을 빠져나온 뒤 뒤를 돌아섰다.

붉은빛을 띤 대협곡을 보며 허리에 찬 철갑을 만졌다.

‘천주의 피를 구하는 게 문제군.’

만능자를 만나 철갑을 열지 못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여는 방법을 알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방법은 알았지만 차라리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었다.

하지만 희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최선을 다해도 안 된다면 하늘의 뜻이겠지. 그분의 말씀대로 우선 천공공을 찾아가야겠어. 다행히 운이 좋게도 열 방법이 있을 수도 있을 테니.”

철갑에 얼마나 중요한 물건을 들어있기에 그가 아닌 다른 인물이 절대로 열지 못하게 한 것일까.

‘사형제들에게 이른 시일 내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하지만 당분간 늦어질 것 같았다.

‘우선 현재 상황에 대해 서신을 먼저 보내야겠어. 그를 만나러 가려면 대륙을 종단하는 수밖에 없는데.’

백향촌으로 나선 뒤 곧장 천공공을 찾을 것이라 결심했다.

휘익!

산 아래로 내려가는 고진유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 * *

‘도착했군.’

멀리 내려가는 산 아래로 백향촌의 집들의 지붕이 보였다.

마을로 내려선 뒤 감나무가 보이는 촌장 집으로 향했다.

‘어르신이시군.’

대문을 들어서자 마당에서 말린 약초를 정리하고 있는 을지현이 보였다.

“허허허. 왔소이까?”

일부러 내력을 감춘 채 다가섰지만 단번에 알아차렸다.

“어르신, 다녀왔습니다.”

“장백령에 잘 다녀온 모양이구려. 그분께서 다행히 자네를 데리고 간 것 같군요.”

장백령에서 처음 만난 선인을 말하는 것임을 알았다.

“네. 그렇습니다. 어르신께서 조언해주신 대로 말을 했더니 장백령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 안에서 만능자를 만나러 갔던 일은 해결이 잘되었소이까?”

“흠…… 모든 궁금증은 풀렸지만, 철갑을 열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아쉽겠군. 멀리서 그를 찾아왔는데…….”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오. 그런가? 잘됐구려.”

고진유는 대답하면서 집 안을 살폈다. 집 안에 있으면 일행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나왔을 것이었다.

“다들 어디 나갔습니까?”

“밭에 나갔소이다. 조만간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계시게.”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잠시 마당에 서서 말린 약초를 고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반각 후.

대문으로 들어서는 인기척이 있었다.

“앗…… 진유 형!”

인양이 먼저 반갑게 소리쳤다.

그 뒤를 이어 묵경과 녹림야검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대체 위에서 뭘 했기에 이십 일씩이나 걸려?”

“방금 이십 일이라 했어요?”

“어, 왜?”

장백령에 들어갔다가 나온 지 아무리 많이 걸려도 반시진이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네. 이십 일이나 내가 그곳에 있었다고?’

“허허허…….”

을지현은 웃으면서 허리를 폈다.

“장백령 또한 선계의 경계에 있는 곳. 선인이 아닌 속세의 사람이 들어서게 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네.”

“……제가 만일 그곳에서 며칠이라도 지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 * *

장백령 안에서 만능자에게 들은 그대로 세 사람에게 설명했다.

“안 된다고?”

“그렇게 됐습니다.”

묵경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당연히 열릴 것이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철갑을 열기 위해 멀리 이곳까지 왔지만 아쉽게도 열지 못했다.

방법을 알았다고 해도, 그게 안다고 해서 열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를 극일천의 천주를 찾기도 어려운데, 그자의 피를 어떻게 구한다는 거야?”

“열심히 최선을 다하다 보면 되겠지요.”

“허어. 아주 긍정적이라서 좋군.”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천공공이란 분을 만나면 또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복건의 하문까지 내려가겠다는 말이군.”

“네. 그곳에서 조용하게 지낸다고 들었어요.”

복건성의 하문에 지낸다는 천공공.

얼마나 대륙을 내려가야 할지 몰랐다.

“좋아. 이번 기회에 중원을 싸돌아다니는 거지 뭐.”

“하하!”

“화산파에 연락을 해야겠지?”

“여기서 나가는 길에 전서를 보내면 될 것 같아요.”

“알겠어. 그렇게 하자.”

묵경은 철갑을 툭툭 건드렸다.

“내가 죽기 전에 이놈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고 만다.”

“저도요. 파숙 형을 위해서 꼭 보고 싶어요.”

이젠 철갑에 대해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 * *

어둠이 내린 백향촌.

고진유는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어르신?’

그는 마당에 앉아 짙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별들을 보고 있었다.

“나왔습니까?”

“늦은 밤입니다. 주무시지 않으십니까?”

“허허허. 늙은이는 일찍 자면 안 된다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빨리 자면 너무 빨리 일어나게 되거든. 잠이라는 게 새벽에 푹 자는 맛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좋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자네는 안 자고 뭐 하러 나오셨는가?”

“그냥…… 잠이 오지 않습니다.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젊음이 좋긴 하군요. 난 가끔 그곳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힘들던데.”

‘아하. 그래서…….’

고진유는 몸이 무거워졌다는 느낌이 이상한 게 아님을 알았다.

“잠이 안 오면 자네가 보낸 이야기나 해보시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살아온 이야기. 상당히 재미있는 일들을 많이 겪은 것 같아서 말이외다.”

“아…… 네에.”

고진유는 잠시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생각하다가 아예 처음부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전…… 고아였습니다. 그래서…….”

고아에서 벽화당으로 팔려 간 일부터 괴도에 들어가서 사부를 만난 일.

그리고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생겼던 사건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혼자서 떠들듯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을지현은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십 년의 시간이 너무나 짧게 느껴질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별일도 아니네. 그저 시간만 보낸 것 같아.’

알 수 없는 공허함이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달리 을지현은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게 지냈구려. 그리고 자네의 인생은 앞으로 더 재미있겠어.”

그는 대견한 시선으로 고진유를 바라보았다.

중원 무림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내가 중원 무림의 일에는 관여하지 못하지만, 멀리서라도 응원하겠소이다.”

“감사합니다.”

스윽.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보시게.”

고진유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자네와 한번 비무를 해보고 싶은 데 괜찮겠소이까?”

“제가 어찌 어르신과 검을 견줄 수 있겠습니까?”

“허허허…….”

고진유는 그를 따라 마당 중앙으로 나섰다.

“검을 뽑으시게나.”

스르르릉-

고진유는 허리에 찬 사의검을 뽑았다.

“호오, 중원인이 외날검이라니…… 그건 동방 해동의 검과 같구나.”

“사조님께서 구해주신 검입니다.”

“자네의 검도(劍道)를 한 번 보여주시게.”

고진유는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사의검을 휘둘렀다.

샤르르르-

사의검이 지나가는 자리 뒤로 매화향기가 퍼져 나갔다.

을지현은 눈을 감으며 매화 향을 감상했다.

“매화 향이 진하면서도 순하고 강하면서 부드럽구나. ……중원 무공에 대해 노부의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쳐 줘서 고맙군요.”

“어르신에 내기에 비하면 전 너무나 멀었음을 알았습니다.”

을지현의 내기는 이미 천하를 포용할 정도로 무한의 공간을 만들어 고진유를 감싸고 있었다.

“내 검을 막아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분명 그의 손에는 검이 보이지 않았었다.

파앗!

팔을 휘두르는 사이에 손안에 검이 생겨났다.

‘이건…… 무형지검? 그런데…….’

무형지검은 화경의 경지에 들어선 고수라면 무형의 내기로 강기검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을지현이 보여준 무형지검은 알고 있던 것과 달랐다.

을지현이 만들어낸 무형검은 강기검이 아니라 실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로 변한 유형검이었다.

채애애앵!!

사의검과 부딪힌 소리조차 실제 검과 같았다.

‘이게 무형의 기로 만들어진 검이라니……!’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신검.

그가 원하는 어떠한 모양으로도 만들 수 있는 무형지검이었다.

우우우웅-

하단전과 중단전이 모두 열렸다.

고진유의 의도가 아닌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내력이 스스로 움직였다.

“허허, 대단하군. 상대의 기에 스스로 반응을 보이는구려.”

“그건…… 저도 몰랐습니다.”

“원래 깨달음이란 몸이 먼저 깨우치는 법. 단지 우리가 모르고 지나갈 뿐이지요.”

휘익!

다시금 을지현의 공격이 이어졌다.

‘잘라내야 해.’

고진유의 앞으로 다가온 무형지검을 향해 내리쳤다.

스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을지현의 무형지검을 단숨에 잘랐다.

바닥에 떨어진 잘려 나간 검 조각.

“오오. 노부의 검을 자르다니…….”

을지현은 진심으로 감탄이 나왔다.

스르르르-

반으로 잘린 무형지검이 원래의 모양대로 다시 만들어졌다.

“한 번 더 잘라낼 수 있는지 볼까?”

채앵!!

‘점점 강해지고 있어. 내력을 반 정도도 사용하지 않은 듯해.’

내력에 대해서만은 최고라 자부했던 자만심이 무너졌다.

무형지검은 반원을 그리며 고진유를 향해 재차 떨어졌다.

방금 전 두 번의 내력과 다르게 더 강해진 내력으로 펼친 무형지검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막을 수…… 없어.’

그의 검을 막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능력 밖의 일이었다.

사의검을 밀어내며 고진유의 얼굴 앞까지 무형지검이 다가왔다.

쏴아아아아--!!

을지현의 무형지검이 물방울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

물방울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처럼 반짝이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보다 완벽한 패배를 당한 적이 없었다.

누구와 싸워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지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또…… 자만에 빠졌었구나.’

하늘에 떠 있는 별들처럼 세상에는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잊었다.

“노부와 비무를 해보니 어떠하오?”

“무(武)의 궁극은 무(無)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자아(自我)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아가 무의 끝이라 깨달았소이까?”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아는 깨닫는 게 아니라 먼저 깨우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허허!”

을지현은 대견한 웃음을 지었다.

무공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깨우쳐야 하는 것과 깨닫는 것.

수많은 무인들은 둘 중 하나라도 익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고진유는 자아를 알기 위해서는 깨우쳐야 한다고 말했다.

“극일천과 충분히 싸울 수 있겠소이다.”

“아닙니다. 저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어르신을 뵙지 않았다면 여전히 먼 길을 계속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허허허. 아니오. 항상 모든 것은 바로 눈앞에 있지요. 내가 장담하건대 극일천의 그와 마주칠 때가 될 때 노부가 한 말이 맞음을 알게 되겠지. 자네는 모든 것이 충분하오.”

“고맙습니다.”

고진유는 그를 향해 감사의 고개를 숙였다.

“고맙기는…… 내 오늘 처음으로 중원 무림이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

“내가 알기로 중원에 자네 같은 인물이 태어나지 않을 텐데…… 혹시 자네의 부모님들께서 해동인이 아닌가 모르겠구려. 중원 한족에는 고씨의 성이 없는 걸로 알고 있으니…… 어릴 적 신패에 적힌 자네의 이름이 확실하다면 고씨는 삼족오의 가문에서 이어져 내려온 성씨일 수도 있다는 게지요.”

“…….”

“허허허. 심각한 표정을 짓지 마시게나. 그냥 부러워서 해본 말이니. 자네가 중원인이면 어떻고 해동인이면 어떠한가. 세상 살아가는 데는 의미가 없거늘. 후후, 내일 떠날 텐데 그만 들어가서 쉬시게.”

“네. 어르신.”

고진유는 방으로 먼저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숙였다.

* * *

아침이 밝았다.

거의 한 달을 지냈는지 정이 든 모양이었다.

묵경, 인양, 그리고 녹림야검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백향촌을 나섰다.

네 사람은 곧장 요녕성의 남쪽 대련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육지로만 길을 생각했던 고진유와 달리 묵경은 복건성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찾았다.

대련의 여순포에서 배를 이용하면 하북 땅을 돌아서 산동으로 넘어갈 필요가 없었다.

뱃길을 이용해 산동의 봉래포로 간다면 편안하게 하루 만에 이동할 수 있었다.

일행은 백향촌을 나온 뒤 여순포로 들어서기 위해 우선 동항으로 길을 떠났다.

“잠시 쉬죠.”

두 시진을 빠르게 움직인 뒤 잠시 휴식을 위해 자리를 만들었다.

인양이 음식을 싼 보따리를 풀었다.

“촌장님께서 가는 길에 배고프지 말라고 잔뜩 싸 주셨어요.”

“정말로 정이 많으신 분이야. 말이 거칠긴 하시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 묵경은 구박을 많이 받았다.

그에 반해 녹림야검은 하는 일마다 칭찬을 받았다.

고진유는 시원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후후후. 정말로 촌장님께서는 공주님이셨더군요.”

“그래서 내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공주에 대한 환상이 깨졌어.”

“그게 뭔데요?”

“청순하고 예쁘고 똑똑하고 상냥하고 곁에서 보기만 해도 행복함을 주는 여인이라 생각했지.”

“제가 보기에 촌장님께서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데요?”

“…….”

묵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넌…… 확실히 여성관이 특이해.”

“그런가요?”

“내가 지켜볼 거야. 누구와 결혼을 하는지. 꼬오오옥…….”

“푸훗, 저도 궁금하네요.”

네 명은 휴식하면서 적당하게 배를 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나고자 했다.

“이거 참. 든든하게 먹고 나니 누군가 겸사겸사 운동을 시켜줄 모양이네요.”

고진유는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멀리서 다가오는 무리들.

묵경과 인양, 녹림야검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았다.

백향촌에서 쫓겨난 열 명의 극일천 무인들.

“형, 저들이에요! 백향촌에 쳐들어왔다가 어르신께서 불쌍하다고 살려 보내준 인물들.”

“어르신께 목숨을 살려줬는데도 찾아오는 것을 보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군. 저들에겐 측은지심을 가질 필요가 없겠어.’

고진유는 다가오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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