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맞은편에 앉은 고진유와 노인이 서로를 뚫어질 정도로 자세히 쳐다보았다.
“허허허, 내가 이상해 보입니까?”
“올해 연세가 고희가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소이다. 살다 보니 세상 너무 빠르게 지나가더군요. 자네 같은 젊은 사람에게는 아직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산에 약초나 캐려 다니는 보잘것없는 노부의 이름을 굳이 알아서 뭐 하겠소이까?”
“어르신께서 보잘것없다고 하시면 세상 모두가 이름을 알릴 수 있겠습니까.”
“허허, 자네는 노부를 너무 치켜세우는군요. 알겠소. 노부의 이름은 을지현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는 해동인이 맞으시군요.”
“그렇소이다. 광활했던 요동의 해동인이었지요.”
묵경은 ‘을지’란 성에서 오래전 역사적인 인물을 떠올렸다.
‘을지의 성이라면, 설마 그분의 후예는 아니겠지?’
묵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르신, 제가 궁금한 게 있어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무엇이 궁금한 것이오?”
“을지라 하시면, 혹시 수양제를 막아낸 그분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허허허…… 오래전의 일이거늘, 자네는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군요.”
묵경은 어릴 적 중원의 무림사뿐만 아니라 중원에서 일어난 역사에 관해서도 배웠다.
믿을 수 없게도 수나라의 존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 그의 조상이라 했다.
[형, 그분이 누군데요?]
[수양제는 누군지 알지?]
[수나라 두 번째 황제, 맞죠?]
[맞아. 수나라가 망한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해동을 세 번이나 공격하러 들어갔다가 개 패듯이 맞고 나온 게 문제였지. 그때 수양제를 막아선 해동의 대장군이 바로 어르신의 선조라고 하시네.]
[대단한 분이시군요. 거대한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 정도라면.]
노인은 생각대로 예사롭지 않았다.
“어르신께서는 일개 약초를 캐는 분이 아니신 것 같습니다.”
“그냥 보이는 그대로 알고 있으면 되지요. 그건 그렇고 자네들은 무슨 일 때문에 노부를 찾아왔소이까?”
“장백령이란 장소를 알고 싶습니다.”
“…….”
그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진유의 말에 놀라거나 긴장한 기색도 아니었다.
“장백령이라…… 중원의 무림인이 그곳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소이까?”
“그곳에서 한 분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을 찾는다?”
“그렇습니다. 만능자란 분이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장백령에 그가 있다는 말을 들었소?”
“그분의 제자에게 들었습니다.”
“그렇군.”
노인은 만능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진유는 재촉하지 않고 그가 만능자에 대해서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중원인이 그를 만날 이유가 있겠소이까? 노부가 알기로 그는 중원 무림에 전혀 나서지 않을 인물인데.”
“그분께 한 가지 물건을 열어주십사 부탁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고진유는 허리에서 천을 푼 뒤 그의 앞으로 철갑을 보여주었다.
묵색의 진한 철갑이 탁자 위에 놓였다.
“이것입니다.”
“철으로 된 상자인가?”
노인은 철갑을 들어 육면을 모두 만졌다.
“음…… 이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풀기 어려운 철갑으로 보이는군요.”
“그렇습니다. 중원에서 풀 수가 없어 부득이하게 그분을 만나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알겠어. 이제야 자네들이 나타난 이유를 알겠구만.”
“어르신, 그분이 계시는 곳을 아신다면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팔짱을 끼며 고진유와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로 왔는지 이해했소이다. 한데 자네들에게 궁금한 게 있군요. 철갑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시오?”
“모릅니다.”
“혹시 값비싼 보석이라도 들어 있는가?”
“…….”
“아니면 세상을 경천동지시킬 비급이 들어 있는가?”
“그건…… 저희들도 그 어떠한 물건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걸 열고 싶은 이유가 있소이까?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괜히 열었다가 세상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겠소이까?”
“……그건…….”
“자네는 무엇을 기대하고 철갑을 열려는 것인지, 다시 묻고 싶군요.”
고진유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부가 숨겨놓았던 철갑은 극일천에게 중요한 물건이기에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들이 몰려온다는 것만 봐도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전…… 안에 어떠한 물건이 있을지 기대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이 물건을 너무나 찾고자 하는 무리들이 있어 궁금한 것뿐입니다.”
“……잘 알았소이다. 자네가 말한 철갑을 원하는 무리들이란 극일천일 것 같은데. 맞소이까?”
“…….”
고진유는 물론 세 사람 전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허허허! 노부가 극일천이란 조직을 아는 게 신기한 모양이군요.”
“어…… 떻게 아셨습니까? 혹시 무구천이십니까?”
“무구천도 아니외다.”
노인은 중원 무림인도 아니었다.
한데 극일천과 무구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점점 노인의 신분이 궁금해졌다.
스윽.
응접실 안으로 촌장이 들어왔다.
“모두 당신이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이군요.”
그는 미소를 띠며 고진유를 보았다.
“허허, 그렇습니까?”
“네. 맞습니다.”
“노부의 가문은 중원의 무림인들이 장백산을 넘지 못하도록 천 년을 이어 지키고 있소이다.”
“천 년…… 동안 말입니까?”
“그렇소.”
한 자리에서 천 년 동안 수호했다는 말.
중원 무림에서도 천 년의 역사를 지닌 가문이 있을까?
“천 년을 이어 내려온 가문이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허허허. 당연한 이야기이지요. 노부는 중원의 무림인이 아니니까 당연히 중원인들이 모를 수밖에. 게다가 중원 일에 신경을 쓰지 않소이다. 그들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스로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해서 나서지 않았지…….”
그렇게 답한 노인은 그녀가 건넨 대접을 받아 한입에 마셨다.
“크윽, 이건 만년하수오를 달인 것입니까?”
“맞소. 저번에 말려 놓은 것이오. 산을 힘들게 타셨을 텐데, 항상 건강하셔야지요.”
“부인, 고맙습니다.”
“마저 이야기들 나누시지요.”
그녀는 접시를 받은 뒤 다시 밖으로 나갔다.
“촌장님께서 어르신을 많이 위하시는 모양입니다.”
“허허허, 늘 고마운 분이지요. 궁에서 지내시던 귀한 공주님을 데리고 와서 산골의 촌부로 만들어 놓았지 뭔가. 항상 생각하지만 내가 복이 많은 사람이외다.”
고진유는 고개를 돌려 마당에서 말려놓은 고추를 다듬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녀는 정말 공주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네는 그 물건 속에 든 내용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겠소이까?”
“…….”
“노부도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도 열지 못하는 철갑에 넣을 정도라면 함부로 봐서는 안 될 무언가일 테지요.”
“감당하지 못할 자신이라면 열지 말라는 뜻입니까?”
“그렇소이다. 차라리 저 깊은 바다에 던져 버리는 게 낫다는 것이지요. 근데 자네의 얼굴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가 보군요.”
그의 말처럼 철갑을 열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었다.
“……어르신, 철갑을 연 뒤 감당하지 못한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 중 하나가 되지 않겠습니까. 죽거나 살거나.”
“…….”
너무나 간단한 원론적인 대답.
하지만 고진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을 가슴속에 담아놓겠습니다.”
“허허허, 이렇게 된 이상 안 가르쳐 주는 것도 이상하게 되었구려.”
“감사합니다.”
그는 장백령의 존재에 대해서 심어(心語)로 알려주었다.
“그곳은 장백산의 선령이 모인 곳이지요. 혼자 올라갔다 와야 할 겝니다.”
“알겠습니다.”
“하나 그가 이 물건을 열 수 있을지는 노부도 장담할 수 없군요. 혹시나 실망할지 모르니 장백령에서 그를 만나기 전에 생각은 하고 있으시오.”
“정말 고맙습니다, 어르신. 그럼 곧바로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고진유와 함께 묵경과 녹림야검이 마당으로 나왔다.
“지금 갈 거야?”
“빠를수록 좋잖아요.”
“늦은 시간인데?”
“어떻게 가는지 들었어요. 충분히 날이 어둡기 전에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야…… 우린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조심해서 다녀와.”
“네, 형. 다녀올 테니 인양에게 잘 말해주세요.”
* * *
장백령의 선령이 모인 장소라 했다.
고진유는 장백산을 오르며 금강대협곡(錦江大峽谷)을 향해 올라갔다.
지나가면서 보이는 경치들은 화산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저곳인가?’
을지현이 알려준 대로 움직였다.
원시림 사이사이로 붉은색을 띠는 절벽이 나타났다.
대협곡 앞에 선 고진유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정기를 가다듬었다.
장백령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세속의 령을 잊어야 한다고 했다.
하단전과 중단전을 거둔 채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괴암괴석들이 협곡 사이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이것들 모두 장백령의 진기라 했어.’
고진유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얼마를 움직였는지 모른다.
협곡 위로 어둠은 이미 짙게 흐르고 있었다.
‘이런…… 낭패인데.’
장백령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겨우 한 치 앞이 보일 정도의 협곡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 할까?
‘휴우…… 여기서 돌아가는 것도 어렵다면 앞으로 계속 갈 수밖에.’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다 정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다면 그 자리에서 멈추기로 결정을 내렸다.
고진유는 최대한 조심하며 걸음을 내딛었다.
바닥을 조심하기 위해 오직 아래를 보며 걸은 탓인지 얼마나 안으로 들어섰는지 알 수 없었다.
“어허, 그만 걸음을 멈춰라. 멍청한 녀석이로군.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몇 걸음 앞 협곡 아래로 낭떠러지가 보였다.
다시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은 누구더냐?”
“고진유라 합니다.”
“중원 무림에서 왔느냐?”
“네, 그렇습니다.”
“선기가 얼핏 느껴지는 듯해서 나와 보았더니 중원에서 온 녀석이었군. 으음. 내력을 봐서는 화산파라고 하는 곳의 제자인 모양이구먼.”
“네. 맞습니다. 섬서 화산파 제자입니다.”
“제법이야. 싸움질이나 하는 도사라 선기는 없을 줄 알았거늘. 허허허. 게다가 패왕기도 눈빛에서 보이고. 어떻게 된 녀석이 선기에 패왕기까지 가지고 있는 게지? 믿기지 않는구나.”
“…….”
“그건 그렇고. 중원인이 해동의 선령까지 무슨 일로 왔느냐? 네놈들 땅에도 충분히 좋은 선령들이 있거늘.”
“만능자란 분을 뵙고자 왔습니다. 그분의 제자가 말하기를 천공공의 물건이라는 철갑을 가지고 왔습니다.”
장백령으로 올라오기전 을지현이 가르쳐 준 대로 대답했다.
허공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스으윽.
백의장삼을 두른 노인이 나타났다.
‘선인이시다.’
백의노인의 신형에서 흐르는 선령의 기는 경외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천공공의 물건을 지녔다고 했느냐?”
고진유는 얼른 허리에서 천을 풀어 철갑을 보여주었다.
“이것입니다.”
휘이이익!
백의노인이 손짓을 하자 철갑은 어느덧 허공으로 떠올랐다.
철갑이 스스로 허공에서 원을 그리며 돌았다.
“천공공의 물건이 맞도다.”
“…….”
백의노인은 가볍게 손을 내젓자 철갑이 다시 고진유의 손으로 돌아갔다.
“이 철갑을 어떻게 해서 얻었느냐? 천공공의 물건들은 일반 사람이 지닐 물건이 아니거늘.”
“사부님께서 극일천의 인물들에게 빼앗은 물건입니다.”
“호오, 극일천이라 했느냐?”
“그렇습니다.”
백의노인 또한 극일천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휘익!
백의노인은 손을 좌우로 크게 휘두르자 협곡의 광경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아…… 이러니 찾을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지…….’
눈앞은 마치 선령들의 세상인 듯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따라오너라.”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얼른 백의노인을 따라 들어섰다.
* * *
‘여긴 선령들이 지내는 장소인가?’
백의노인을 따라 걸으면서 주위를 살폈다.
따스하고 포근한 기가 사방에서 흐르고 있었다.
중단전이 스스로 운기를 하듯 반응을 보였다.
‘허허, 신기한 녀석일세.’
앞서가던 백의노인은 고진유의 몸에서 일어난 기의 변화를 읽었다.
깨우침으로 얻은 중단전은 아니었다.
반응이 점점 강해졌다.
‘설마…… 중단전을 만든 것 자체가 깨우쳤다는 것인가?’
깨우침에는 정의가 없다.
정의를 내리는 순간 그것은 깨우침이 아니라 배움이 되는 것이었다.
‘허허허, 내가 어리석은 짓을 할 뻔했도다.’
고진유는 백의노인을 보며 물었다.
“여긴 동천(洞天)입니까?”
“글쎄. 선계라고 하기에는 완전히 속세와 인연을 끊어진 곳이 아니라네. 굳이 따진다면 선계 쪽이 더 좋지 않겠는가.”
“…….”
“여기서 원한다면 바로 방선문을 통해 선계로 들어갈 수는 있지.”
백의노인은 초가집 앞으로 멈췄다.
그는 그만 물러나고자 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게. 자네가 찾던 그가 있을 것이네.”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미리 친하게 지내는 것이니 부담 가지지 말게.”
스르르륵.
백의노인의 신형이 바로 눈앞에서 바람처럼 흩어지면서 사라졌다.
‘정말로…… 신선이 맞을까?’
백의노인이 사라지는 도중에서 어떠한 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진유는 손에 든 철갑을 보았다.
‘우선 이것부터 처리하자.’
스윽.
백의노인이 안내해 준 초가집으로 들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고진유는 안으로 향해 말을 했다.
잠시 뒤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갈의장삼을 걸친 노인이 밖으로 나왔다.
“자네는 누구인가? 선기는 있다만 여기에 올 정도는 아직 멀었거늘. 게다가 중원인이 아닌가.”
“화산파 제자 고진유라 합니다.”
갈의노인의 시선은 고개를 숙인 고진유의 손에 들고 있는 물건에 닿아 있었다.
“허허. 화산이라…… 멀리서 왔군. 보아하니 손에 들고 있는 물건 때문에 백 형께서 들여보내 주셨군.”
“실례지만 어르신께서 만능자라 불리는 분이십니까?”
“맞네. 자네가 여기까지 찾아온 것을 보니 모용 그 아이가 가르쳐 준 모양일세. 맞는가?”
“네. 맞습니다.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되어 어르신께서 계시는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능자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연히 만나지는 않았겠지. 보아하니 그 아이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맞는가?”
“어르신께서 염려하실 정도로 큰일은 아닙니다.”
모용지와 만난 뒤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허허허. 연이 닿아 몇 가지를 가르쳐 주었지. 성정은 나쁘지 않은 아이라네. 자네가 충고를 해주었다고 하니 고맙구먼. 자, 이제 그것을 줘보게.”
만능자에게 철갑을 건네주었다.
슥슥.
철갑을 가볍게 스치듯 만지기 시작했다.
“천공공의 물건이 맞군.”
“어르신, 철갑을 열 수 있겠습니까?”
“후후후…… 세상에 열지 못하는 것은 없네. 다만 열어야 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이지.”
“…….”
고진유는 철갑을 들고 환하게 웃는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