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백향촌의 촌장인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차린 음식을 먹는 고진유를 쳐다보았다.
‘음…… 이거 참…….’
고진유는 그녀의 시선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촌장님, 제가 이상합니까?”
“글쎄. 이상한 건 아니고. 그냥 입에 잘 맞는가 보군.”
“제 입맛에 맞습니다.”
“호호호, 다행이오.”
집안에는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부군께서는 어디에 계시는지요?”
“멀리 갔소.”
“멀리라면 혹시 중원에……?”
스윽.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을 위로 가리켰다.
“저기에.”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그 뜻이 아니오. 내가 한 말을 오해했군. 저기 장백산 위에 약초를 캐러 갔다는 말이오.”
“…….”
고진유는 당황했다.
“아…… 그렇군요. 위를 가리켜서 놀랐습니다.”
“호호호!”
그녀는 즐거운지 크게 웃었다.
“당신들을 보니 무림인 같은데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가 있소?”
“장백령이란 곳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
고진유는 사실대로 말을 했다. 괜한 거짓말을 해서 오해를 만들기 십상이다.
“흐음. 잘못 온 것은 아니오? 장백령을 찾고자 한다면 산으로 올라가야 할 듯한데.”
“저희들도 그러고 싶지만 장백령이란 곳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장백산으로 오는 길에 알아보았더니 여기 마을에 사시는 한 분이 장백산에서 수십 년 동안 약초를 캐셨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고진유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대의 말을 들어 보니 내 남편을 만나러 온 모양인가 보오.”
“남편……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장백산에서 약초 캔다는 노인이 내 남편을 말하는 것 같다는 말이오.”
일행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아무리 많아도 그녀는 사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죄송하지만 부군께서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올해 고희를 넘었지.”
“……!!”
‘대체 나이차가 얼마나 나는 거야……?’
고진유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저어…… 촌장님께서는 올해…… 어떻게 되십니까?”
“몇 살처럼 보이는가?”
중년의 얼굴과 목소리에서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십…… 정도?”
“호호호.”
그녀는 신나는 듯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젊은 사람들이 정말 고맙게도 이십 년이나 젊게 말해주는군.”
그녀의 대답에 또 한 번 일행은 몸이 경직됐다.
‘이십 년 차이라면…… 지금 이분의 연세가 육십이라고?’
촌장은 육십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중원 무림에 내력으로 늙지 않은 주안술(朱顔術)이 있다고 하지만, 촌장은 주안술을 익힌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올해…… 예순이 맞습니까?”
“내가 그대들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겠소?”
“그게…… 아니라. 놀라워서 그런 것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고진유는 촌장의 나이에 듣고 진심으로 놀랐지만, 다행히 자신들이 만나야 할 인물을 쉽게 찾은 듯했다.
“부군께서는 언제쯤 돌아오십니까?”
“산에 올라간 지 보름이 지났으니 이제쯤 돌아오지 않을까 싶네만…… 워낙 자유롭게 사시는 양반이라 언제 내려올 줄은 확답을 못하겠소.”
촌장도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내려올 때까지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우리들이 올라가면 그분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글쎄. 아마 찾지 못할 듯싶은데.”
“제가 기감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 능력으로 다른 사람은 잘 찾을 수 있겠지만, 그분은 산에서 직접 만나지 않는 한 전혀 기척을 느낄 수 없소.”
“촌장님, 아닙니다! 진유 형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인양은 그녀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고진유다.
무림에 그를 속일 수 있는 무인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호호, 아우라는 사람이 형님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그녀는 웃으면서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허!’
묵경은 물론 인양과 녹림야검 또한 깜짝 놀랐다.
천에 싸여 고진유의 허리춤에 숨겨져 있던 철갑이 어느새 그녀의 손에 놓여 있었다.
“어떠하오? 이제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소? 내 기를 느낄 수 있었나?”
“아닙니다. 전혀…….”
“그분도 이 정도는 간단히 할 수 있소.”
고진유는 그녀가 내민 철갑을 받았다.
“중요한 물건인가 보오. 그대 같은 인물이 허리에 꽁꽁 싸매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아…… 네에.”
그녀의 물음에 고진유는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만났던 무인들 중 가장 경외로운 인물이었다.
“어딘지 모르는 장백령을 찾는 것을 보면 그 물건과 관련된 일인가 보오.”
“……그렇습니다.”
그녀의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환하게 미소를 짓는 얼굴 앞에서 사실대로 말을 해야 했다.
“난 처음 들어보는 장소요. 그분이 돌아오면 그곳이 어디인지 물어보는 게 빠를 것 같군. 다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 않소.”
“네. 알겠습니다. 그럼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쉴 방은 많으니 그렇게 하시오.”
“고맙습니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네 명이 지낼 수 있는 방을 가리켰다.
“저기 방이 있으니 알아서 지내면 되오.”
“예에, 알겠습니다.”
“아…… 그동안 혹시 네 사람 중 한 명만 나를 도와줄 수 있겠소?”
“제가 하겠습니다.”
고진유가 바로 나섰다.
“그럼 편안한 옷을 입고 나를 따라오시오.”
“지금 복장도 편안합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별일 아니오. 밭을 갈 사람이 필요했는데 마침 그대가 도와준다고 하니 부탁하고 싶소만.”
“네. 촌장님, 어디인지 먼저 앞장을 서십시오.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호호호. 그럼 잘 따라오시오.”
고진유는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진유 형. 제가 대신 갈게요.”
“공자님, 소인이…….”
“됐어. 두 사람은 묵경 형과 함께 쉬고 있어.”
“정말 괜찮으세요?”
“신경 안 써도 돼. 쉴 수 있을 때 쉬는 게 진정한 휴식이야.”
“알겠습니다.”
고진유는 밖으로 나간 그녀의 뒤를 얼른 따라붙었다.
* * *
흑화전으로 급보가 날아왔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흑화천군의 대패와 통화산장의 전멸.
“멍청한 놈.”
화산도협과 싸우지도 않고 물러난 부전주 다주경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는 수하들과 함께 죽더라도 싸워야 했다.
‘목숨이 아까웠던 모양이군. 물론 아니라고 변명하겠지만.’
급보에 정상적인 상태에서 싸우겠다고 적혀 있었지만 변명이었다.
부전주는 이미 상대의 기에 밀렸다.
한번 밀린 적에게는 실력이 나아졌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머릿속에 패배가 각인된 상태로 상대를 다시 마주치면 그를 극복하기 쉽지 않으니까.
‘다수로는 이길 수 없다…… 치사한 녀석이군. 아쉽게도 우리에겐 가장 짜증 나는 형태의 인물이야.’
그와 흑화천군이 전면전으로 붙었다면 승패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을 것이었다.
“앞으로 포위된 상황이 아니고서는 다수로 밀어붙일 수 없겠군. 결국 귀찮지만 직접 상대해야겠어.”
흑화전주 배조경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다주경이 부전주라 해서 흑화전에서 무공이 가장 강한 것은 아니었다.
십무흑화(十武黑火).
흑화전 십인의 최고 무인들.
‘누굴 보낼 볼까?’
잠깐 고민하던 그는 곧 만족스럽게 웃었다.
“후후후. 굳이 누굴 정할 이유가 없겠군. 전부 보내는 게 당연하다.”
이들 십인의 흑화들이라면 고진유를 상대하기에 충분할 터.
“잠소.”
스르륵.
배조경이 허공을 향해 부르자, 그의 앞으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군, 부르셨습니까?”
“십무흑화들에게 전해라. 당장 부전주에게 가면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줄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사내가 다시 사라졌다.
배조경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밖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완벽하게 준비하고자 했던가?’
변수를 제어하기 위해 충분히 대비했다고 여겼건만, 생각지도 못한 고진유의 등장에 대처하지 못했다.
‘화산도협이 불확실성의 조건이란 말인가?’
천주는 극일천만의 절대무림을 만들고자 했다.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 들어가는 시간은 천주와 극일천에게 의미가 없었다.
극일천에는 긴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천주의 뜻만을 따르는 인물들이 있어야 했다.
오랜 시간 동안 극일천은 그런 사람의 변수를 충분히 제어해 냈다.
중원 무림 또한 그들의 손아귀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극일천의 뜻을 위해, 중원 무림을 제어하기 위해, 수많은 간자와 세작들을 심어놓았다.
모든 게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며 시간이 흘렀다.
이젠 마지막으로, 완벽한 때만 기다리면 되었다.
근데…….
‘늘 염려했던 불확실성이 이제야 나타날 줄은.’
뜻하지 않은 불확실성을 수에 넣지 못한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비밀리에 무림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극일천에 반항하는 세력이나 인물이 새롭게 나타날 가능성도 당연히 고려했다.
‘무구천처럼 말이지.’
무구천의 탄생은 불확실성이었지만, 그 정도는 이미 그들의 수 안에 있었다.
어떻게, 어느만큼,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할지 모를 뿐, 무구천 정도는 극일천이 예상한 불확실성에 충분히 대응 가능한 조건이었다.
문제는, 화산도협이 나타나면서 불확실성의 문제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철갑이 문제가 아니었어.”
배조경은 정확히 불확실성의 문제가 일어난 원인을 알아냈다.
“굳이 찾지 않아도 될 것을…….”
천주가 그토록 원하는 물건이 들어 있다고 해도, 극일천 전체를 위한다면 가만히 둬도 될 사건이었다.
“이젠 방법이 없어. 결과는 중요하지 않아. 문제를 만들었던 원인이 사라진다면 어차피 결과는 또 다른 과거가 될 뿐이지.”
극일천에서 가장 급하게 처리할 문제는 화산도협 고진유의 존재다.
그를 죽이지 않는 한, 그와 연관된 것들을 없앤다고 해도 또 다른 불확실성을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십무흑화가 안 된다면 결국 내가 나설 수밖에. 나 또한 화산도협의 존재라는 불확실성을 지우지 못한다면…… 또 다른 누군가 제어해야겠지.”
배조경은 창가에 서서 멀리 보이는 높을 건물을 보았다.
천문전.
극일천의 모든 관리를 맡은 곳의 주인이라면.
‘그는 하늘조차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겠지.’
* * *
백향촌에 들어온 지 삼 일째가 지났다.
고진유와 일행은 그동안 촌장을 따라 농사일을 도왔다.
마을에 들어왔을 때 입은 옷은 벗어 던지고 마을 주민들처럼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밭으로 나갔다.
팍팍팍!
묵경은 계속해서 허리를 숙인 채 호미질을 했다.
“아이고…… 무슨 일이 끝이 없어?”
“그러게 말입니다. 차라리 무공 수련하는 게 더 쉽겠습니다.”
녹림야검도 그의 뒤를 따라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 잘생긴 얼굴에 기미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첫날부터 면구를 벗어 던졌다.
촌장은 그가 면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말이야. 내 얼굴이 기생오라비같이 생겼다고? 녹검 씨, 정말 그렇게 보여?”
그때 묵경의 본 얼굴을 본 촌장의 한마디가 생각났는지 녹림야검은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천하의 풍류옥협의 얼굴을 누가…….”
녹림야검은 말을 하다가 그만 멈추었다.
‘언제 다가왔지?’
묵경의 뒤로 촌장과 함께 고진유가 나타났다.
묵경은 뒤를 돌아 두 사람을 보았다.
“어, 언제 왔어?”
“방금요.”
촌장은 묵경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런 얼굴이 잘생긴 것이오? 난 차라리 사내다운 녹검의 얼굴이 더 잘나 보이는군.”
“아하하, 촌장님은 잘 모르시는군요. 제가 중원에 나가면 수많은 여인이 제 얼굴을 보기 위해 줄을 섭니다.”
“정신이 빠졌어. 그 시간에 잠이나 자는 게 더 좋을 텐데. 얼굴만 보면 먹을 게 떨어지는지. 쯔쯔쯔.”
“…….”
“됐소. 오늘은 그만하고 여기서 마칩니다.”
오늘 하루 중 묵경의 얼굴에 가장 밝은 미소가 나타났다.
촌장집에서 묵기 위한 하루 일당의 일을 모두 마쳤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에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돈을 준다고 해도 필요 없다면서 오로지 노동으로 일당비를 채워야 한다고 했다.
묵경이 촌장의 뒤를 따라가던 고진유의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뭐 했어?”
“산에 가서 썩은 나무를 벴어요.”
“내가 그 일을 할걸!”
묵경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근데 나무 둘레가 이만하던데요.”
고진유는 손을 쭉 뻗었다.
“그걸 베고 난 뒤엔 또 바위를 부수고 완전히 뿌리까지 뽑아야 했어요.”
“내가 한 말 취소.”
묵경은 오히려 호미질이 낫다는 것을 알았다.
“근데 인양은 어디 있어?”
“마을 북쪽에서 다리 보수공사 하고 있어요. 저번 폭우 때 물에 떠내려 갔다네요.”
“아하, 고생하네.”
“인양은 일 잘한다며 주민들에게 칭찬받는다고 하더군요.”
“하긴…… 인양이 일은 정말 잘하지.”
세 사람이 그렇게 그녀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자 마당에 누군가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중년 사내인 듯했지만, 세월의 흔적이 그의 온몸에서 느껴졌다.
“당신 오셨소.”
촌장이 그를 보며 반갑게 맞이했다.
‘이분이…… 촌장님의 부군이시군.’
“부인, 이 젊은 친구들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군요.”
고진유는 얼른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
“고진유라 합니다. 여기 두 사람은 제 의형과 동료입니다.”
묵경과 녹림야검도 바로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묵경입니다.”
“녹검이라 합니다.”
“흐음. 보아하니 중원에서 온 무림인 같구려. 아, 다리 공사를 하고 있던 청년과 같이 온 모양이군요.”
“네. 그는 제 의제입니다.”
“성실한 사람들이군요. 마을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구먼.”
“호호호. 맞소. 요즘 애들과 다르게 착하더이다.”
스윽.
그는 어깨에서 약초 바구니를 벗은 뒤 촌장에게 건네주었다.
“만년초 세 뿌리를 캐 왔소.”
“정말이군요. 당신이 드시면 되는데.”
그녀는 안을 보았다.
“허허, 내려오는 길에 정력을 위해서 한 뿌리 먹었습니다. 나머지는 당신이 드시구려.”
“고맙소. 자, 이들이 당신을 뵙고자 찾아왔으니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그러지요.”
그녀는 약초 바구니를 가지고 약초를 모아놓은 창고로 갔다.
“본인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지 궁금하구려. 우선 모두 안으로 들어가시겠소이까?”
“감사합니다.”
고진유가 먼저 집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