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설천산으로 향해 다가오는 이백 명의 백빙군.
이십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그들을 상대해야 했다.
두려움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긴장은 하는 게 정상.
하지만 일행은 무섭게 달려오는 백빙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신, 반대 방향에서 달려오는 한 명의 인영을 보며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우희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기 봐. 내 말이 맞지?”
“네……!”
설미도 일행과 마찬가지로, 백빙군이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직 그녀의 시선에는 고진유만이 보일 뿐이었다.
휘리리리릭-!!
수십 장의 거리를 단숨에 뚫고 나타난 고진유의 신법은 자연스럽게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 모습이 사람이 펼치는 신법이냐?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니야.”
장두총은 투덜거렸다.
“사제라서 다행이다.”
혁자영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다른 문파의 인물이었다면, 절로 정말 무공을 펼칠 마음이 사라질 것이었다.
“하아…… 대단하시다.”
설동 위에서 내려다보던 군성창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진유의 모습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여기에 계셨군요. 어디 재밌는 구경이라도 있습니까?”
고진유가 공중에서 내려오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당우희가 가장 먼저 달려와서 그를 포옹했다.
“사제! 드디어 왔구나!”
“호청 사저. 잘 지냈어요?”
“나야 늘 잘 지냈지. 지금쯤 도착할 거라 생각했어.”
“역시 호청 사저가 저를 제일 잘 아시는군요.”
고진유는 그녀와 떨어진 후 묵경과 우종성에게 포권을 했다.
“볼일 마치고 왔습니다.”
“잘 왔다. 갔던 일은 잘됐느냐?”
“네. 잘되긴 했는데…… 도중에 안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냐?”
“파 특사가 극일천의 놈들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허어, 이런…….”
장두총은 다급히 인양의 안부를 물었다.
“사제. 인양은 괜찮아?”
“냉 호위와 같이 오는 중입니다.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아 우선 제가 먼저 왔습니다.”
“그렇군.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고, 사제 말대로 우선은 급한 일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어.”
“호경 사형, 알겠습니다.”
툭툭.
묵경은 다가와서 고진유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파 특사는 좋은 곳에 갔을 거야.”
“네. 저도 알고 있어요.”
“그 물건이야?”
천에 싸인 물건이 고진유의 허리에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네. 파 특사가 아니었으면 찾지 못했을 겁니다.”
“마지막까지 큰일을 하고 갔군. 다음에 일이 끝난 뒤 한잔 마시기로 했는데…… 좋은 사람이었다.”
“인양이 마음에 충격을 많이 받았더군요.”
“그러겠지. 인양이 오면 위로를 해줘야겠어.”
묵경은 멀리서 다가오는 무리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우선 저들부터 처리하는 게 순서겠지.”
“그렇죠.”
고진유는 마지막으로 일행 옆에 선 설미를 보았다.
빙궁주의 뜻을 어기고 일행을 도운 그녀였다.
“설 소저, 고맙소이다.”
“아니에요. 소녀는 그저 빙궁을 위해서 한 일밖에 없어요.”
“설 공자는 어디에 있소이까?”
“아버지께서…… 빙옥에 가두었습니다.”
“설 공자 팔자가 어째 갇히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군요.”
“……그러게요.”
설미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본도가 알아서 할 테니 그는 걱정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설 소저는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사실 다가오는 그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일행과 함께 중원으로 내려가면 끝이니까.
“공자님, 빙궁을 도와주세요.”
설미는 진심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북해빙궁은 중원과 절대로 싸워서는 안 되었다.
이들만으로도 중원의 힘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잘못된 결정으로 많은 빙궁인이 다치게 둘 수는 없었다.
북해의 척박한 땅에서 생존하는 그들 모두 자신의 가족이었다.
고진유는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어떻게 할까요?”
“우린 네가 하는 대로 따를 뿐이다.”
우종성이 명쾌하게 대답했다.
고진유가 온 이상 일행의 수장은 자신이 아니었다.
“좋습니다. 설 소저의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하죠. 우선 저들부터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설원 위를 빠르게 달려오는 이백 명의 백빙군 무리들.
고진유는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 *
‘누구지?’
홀로 걸어오는 젊은 사내의 신형에서 뻗어 나온 기세는 대단했다.
군장 한정웅은 고민이 되었다.
그대로 밀고 들어가야 할까. 아니면 멈춰야 할까.
하지만 그의 고민은 필요가 없었다.
슈우우우웅-
홀로 천천히 다가오던 사내가 한순간 신형을 날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설원 위를 미끄러지듯 스치며 다가오는 그의 뒤로 거대한 설풍이 사방으로 솟구쳤다.
‘허억…… 대체 뭐지?’
한정웅은 입을 벌리며 놀랄 수도 없었다.
세상에 이보다 빠른 신법은 처음 보았다.
타아앗!!
눈밭을 차며 위로 날아오른 사내의 손에 검이 들려 있었다.
자줏빛 검신이 공중에서 태양보다 더 밝게 번쩍거렸다.
자줏빛 검신.
중원에 그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저자는…… 화산도협이다.’
한정웅은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다.
“……!!!”
공중에 떠오른 고진유는 하단전에서 끌어낸 십 성 내력으로 사의검을 떨어뜨렸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싸여 있던 눈들이 눈사태가 일어난 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어억……!”
“커어어억!!”
백빙군 소속의 수하들의 신음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커어어. 이놈이…….’
한정운은 앞을 가로막은 눈이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은 채 긴장했다.
바람이 불어오면서 서서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상대는 이미 몸을 빼낸 뒤 오 장 뒤로 물러나 있었다.
“화산도협이…… 그대…… 인가?”
목소리가 떨렸다.
겨우 한 초식만으로 백빙군을 충격에 빠뜨리다니.
“맞소이다.”
“화산도협…… 역시 그대가 화산도협이었군.”
북해빙궁에 들어오지 않았던 인물.
‘대체 언제 설천산에 도착한 거지? 더구나 이 정도의 내력을 너무나 쉽게 펼다니…… 소문대로 정말 강하군…….’
강자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그리고 승부를 간절히 원하는 호승심이 동시에 들었다.
한정웅의 손에 들린 한빙검에서 서늘한 빙천기가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화산도협.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이 그날인 것 같군.”
“때가 좋지 않군요.”
“본인을 무시하는 것인가?”
“맘대로 생각하시오. 당신이 이들의 수장이오?”
“그렇다.”
“본도가 방금 보여준 것은 마지막 경고일 뿐이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서서 빙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오.”
“협박인가?”
“당신은 자신의 가족을 죽이고자 한 사람에게 협박하는 모양이지? 본도는 협박이 아니라 통보하는 것이오.”
“…….”
“또한 이 자리에 설 소저가 없었다면 당신들은 여기서 돌아가지 못했다는 걸 똑바로 알았으면 좋겠군. 설 소저를 봐서 살려주는 것이오.”
고진유는 협박이 아니라 통보이며 용서라 했다.
한정웅의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은 북해빙궁의 백빙군장이다.
살려줄 테니 조용히 꺼지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오기를 부렸다.
“화산도협, 그대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군! 겨우 이십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본 빙궁을 상대할 수 있다고 보는가?”
“당연히 빙궁 전체를 상대할 수 없겠지. 하지만 지금 당신들 정도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슈우우우욱-
고진유는 내력을 끌어내자 발밑 아래로 또 한 번의 눈 폭풍이 솟구쳐 올랐다.
공중으로 치솟은 후 바람을 타고 떨어지는 눈꽃은 마치 설매화처럼 한정웅의 머리 위로 날렸다.
믿기지 않는 광경.
‘내력이…… 궁주님보다 더 높다.’
직접 눈앞에서 그의 내력을 보았다.
고진유와 시선이 마주쳤다.
‘무공은…… 소문대로 강해. 하지만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우리를 전부 이길 수 없다.’
그의 자존심이 계속해서 물러나야 할 기회를 놓쳤다.
고진유만 잡을 수 있다면 나머지 일행은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스스로 세뇌하고 있었다.
우종성은 앞으로 나서지 않고 제자리에서 멈춘 채 상황을 주시했다.
“설 소저, 저들은 물러갈 생각이 없는 것 같구려.”
“네에…… 그런 것 같아요.”
“싸우게 된다면 소저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는 게 좋을 듯하군요.”
그녀는 우종성의 말을 따라 물러났다.
빙궁의 무인이 다치지 않기를 원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정웅은 수하들과 함께 고진유를 상대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역시 우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군.”
장두총이 앞으로 나섰다.
“선봉은 제가 맡겠습니다.”
“좋아. 각자 저들을 상대하지만 간격은 항상 유지하도록.”
“알겠습니다.”
* * *
백빙군이 먼저 움직였다.
군장 한정웅은 명령과 동시에 고진유를 향해 달렸다.
“빙하동후!!”
한빙검이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공기가 얼어붙을 정도로 냉기를 뿜어냈다.
채애애앵!
고진유는 매화산우의 초식으로 왼쪽에서 떨어지는 한빙검을 허벅지 위로 사의검으로 쳐냈다.
두 개의 검이 가볍게 부딪힌 듯했다.
‘허억.’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의검에서 천 근의 힘이 느껴졌다.
한정웅은 뒤로 휘청거리며 미끄러졌다.
쉬리리릭!
그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고자 할 때였다.
상대방의 사의검은 쉬지 않았다. 어느새 눈앞으로 매화검기가 다가왔다.
‘막아야 해……!!’
그는 한빙검을 앞으로 당기며 매화검기를 겨우 막아냈지만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젠장!!’
한정웅의 다급한 상황을 보며 백빙군의 무인들이 앞을 가로막기 위해 쏟아져 나왔다.
“빙궁백무설진을 펼쳐라!!”
바닥에서 재빨리 일어난 그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수하들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우르르르-
천둥소리가 울리면서 벼락이 수하들 사이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번쩍!!
백빙군의 진영으로 류화검을 든 장두총이 떨어져 내렸다.
“본도가 바도 화산전협이다!!”
장두총이 펼친 뇌전화검의 위력은 그들의 싸우고자 하는 의지를 단숨에 꺾어놨다.
스걱-
콰아아아앙!!
퍼어어어억-!!
다른 방향에서도 끊임없이 공격이 이어졌다.
화산파 일행의 공격에 그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들의 무공이…….’
한정웅의 얼굴은 핏기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새하얗게 변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행의 무력 앞에 수적인 우위는 의미가 없었다.
무시했던 그들의 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당…… 했다.’
화산칠협에 대한 중원인들의 소문은 진짜였다.
그제야 실수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물리고 싶어도 물릴 수 없었다.
“이제 후회가 되는 모양이오?”
고진유가 바짝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쉬이이익-!!
탈형을 넘어선 고진유의 초식은 생각만으로 동작이 이루어졌다.
한정웅은 전면에서 쏟아져 나온 매화검기를 막을 수 없었다.
핏핏핏!
고진유의 검기가 전신을 뚫고 나갔다.
“커어억!!”
한정웅의 몸에서 붉은 피가 백색의 눈밭 위로 뿜어졌다.
그는 숨을 쉬는 게 힘들었다.
“허…… 헉…….”
저벅. 저벅.
고진유는 그의 앞에 다가섰다.
절망에 가득한 한정웅의 눈빛.
“겨우 이 정도로 무림과 싸울 생각이었소이까? 본도의 넓은 아량으로 목숨은 살려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
“차후 본도에게 복수를 하고 싶으면 중원에 얼마든지 찾아와도 좋소. 하지만 살려주는 것은 이번 한 번뿐. 그대의 수하들과 함께 그만 돌아가서 똑바로 이야기하시오.”
“…….”
한정웅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백빙군과 함께 설천산에서 물러났다.
고진유의 주위로 일행이 모여들었다.
“다친 사람은 없지요?”
“없는 것 같다.”
“수고들 많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근처에 설동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저기 뒤에 있어.”
묵경은 설동을 가리켰다.
일행은 설동으로 들어섰다.
고진유는 들어선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며칠 지내기에 괜찮네요.”
“엉? 바로 중원으로 안 가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잖아요.”
고진유는 일행 사이에 앉은 설미를 보았다.
“설 소저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했으니 마무리는 지어야죠.”
묵경이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빙궁에 가서 빙궁주를 만나겠어요.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물어보죠.”
“음…… 네가 그러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과연 빙궁주를 만날 수 있을까?”
“갔다가 힘들면 그냥 오죠. 저도 위험을 무릅쓰고 억지로 만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야…… 조심해서 다녀와라.”
우종성도 허락했다.
“누가 한 사람 정도는 같이 가야 하지 않겠느냐?”
설미가 나섰다.
“제가 같이 가겠어요. 빙궁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하죠. 사형들은 여기에서 쉬고 계세요. 준비되는 대로 다녀올게요.”
끼이이잉-
그때, 설동의 문이 열렸다.
밖에서 누군가 빠르게 달려 들어왔다.
“묵경 혀어어엉! 두총 혀어어엉!!”
인양은 안으로 뛰쳐 들어오면서 묵경과 장두총을 반갑게 불렀다.
“야아…… 인양!”
장두총은 벌떡 일어나 달려오는 인양을 향해 안았다.
“녀석…… 돌아왔구나.”
“네에. 두총 형.”
인양은 장두총과 떨어지자 이번에는 묵경과도 껴안았다.
“혀엉.”
“허어…… 고생 많았다.”
인양의 눈썹이 변한 것을 보며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인양은 이번에는 우종성 앞으로 다가섰다.
“호진 도사님, 보고 싶었습니다.”
“먼 길 다닌다고 수고했다. 나도 보고 싶었다.”
“고맙습니다.”
고개를 숙인 인양의 곁으로 혁자영이 양손을 뻗어 가볍게 안아주었다.
“무사히 잘 왔다.”
“네에…… 호중 도사님도 보고 싶었습니다.”
당우희와 연자련, 그리고 곽우도 환하게 웃으며 인양을 반겼다.
“우리 막내가 드디어 왔네!”
“누나들, 정말 보고 싶었어요.”
“나도 우리 인양이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
세 사람과 돌아가면서 껴안은 뒤 나머지 특사들과 녹림야검까지 반갑게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 인양은 처음 보는 여인, 설미를 보며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고진유에게 말은 들었지만 세상에 이보다 예쁜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중원상국에 만난 청미화 조여하 보다 더 예쁜 것 같았다.
“한미화님이신가요?”
설미가 미소를 띠며 인양에게 소개를 했다.
“공자님의 의동생이라 들었어요. 설미라고 해요.”
“인양입니다. 와…… 진유 형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하신 게 맞네요.”
“공자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네. 진유 형 말씀대로 제가 본 여인 중…… 아니, 두 분 누나들을 제외하고 세상에서 가장 예쁩니다.”
“후후후, 우리 인양이가 사회생활을 잘하는구나.”
“그러게. 그래서 내가 인양을 귀여워하는 거잖아.”
당우희와 연자련의 웃음소리에 설동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