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대도-142화 (142/425)

142화

남매가 빙궁전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없이 굳어진 표정을 한 채 걸을 뿐이었다.

스윽.

길게 뻗은 빙궁전의 복도가 시작되는 장소에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빙궁의 작화의(作化醫).

그가 살짝 허리를 숙였다.

“두 분께서 오셨소이까?”

“작화의를 뵙소이다.”

“궁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설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누구의 뜻인지 모르나 분명한 건 작화의가 자신들을 속였다는 것이었다.

‘나를 지옥혈림에 의뢰한 자가…….’

진작 고진유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알려주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까운 인물이 분명하지만…….’

가장 의심이 가는 인물은 바로 그들을 마중 나온 작화의였다.

그들이 북해빙궁을 떠나 무림에 나가도록 유도한 인물.

지옥혈림은 그가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알고 찾아왔다.

작화의 외에 북해빙궁에서 자신들의 정확한 행방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가 범인이라면…… 과연 혼자 이런 큰일을 계획할 수 있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작화의가 빙궁주를 중독시키고 자신을 죽인다고 해서 빙궁을 차지할 수는 없으니까.

사주를 받았다면 그의 뒤에 누가 있을까?

그런데…….

작화의를 보는 순간 느낌이 왔다.

모든 계획을 꾸민 인물은 다름 아닌 북해빙궁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범인이었어. 화산도협이 알려주지 않았던 이유가 이거였군. 내가 흥분해서 혼자 북해빙궁으로 돌아갈지 모르니까.’

만일 중원에서 범인의 존재를 알았다면 화산도협의 염려대로 혼자 섣불리 움직였을 터.

“작화의. 혹여…….”

입을 열던 설강은 도중에 말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아버지를 만나는 이상 굳이 그에게 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설 공자.”

“됐소. 그분께 어떻게 된 일인지 직접 여쭈어보도록 하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작화의는 대답을 하면서 그가 예전과 달라졌음을 알았다.

‘뭔가 기도가 바뀐 것 같군.’

예전의 그라면 당장 달려들었을 게 확실했다.

설강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들어가자.”

그의 목소리 또한 차분했다.

“네, 오라버니.”

설미는 빙궁전으로 따라 들어가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녀 또한 예전의 설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오라버니가…… 많이 변하셨어.’

작화의를 만나게 되었을 때 걱정이 되었지만, 염려한 것과 다른 행동을 보여주었다.

중원에 다녀온 뒤 한 단계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복도 끝 마지막 문 앞에 멈춰 섰다.

“휴우…….”

설강은 문을 열기 전,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호흡을 했다.

과연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설미는 그의 팔을 잡았다.

“오라버니…….”

“괜찮아. 넌…… 알고 있었느냐?”

빙궁전으로 오면서도 설미는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네에…… 오라버니. 죄송해요. 미리 말을 하지 못했어요.”

“이해해. 그럼 들어가 볼까?”

설강은 손에 힘을 주며 천천히 문을 잡아당겼다.

구우우우웅-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빙궁주 설무청을 만나기 위해.

* * *

빙백신공의 극성을 익힌 북해빙궁 최고의 고수.

그가 펼치는 빙백신장은 한때 중원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 만큼 두려움을 주었다.

빙궁주 설무청은 들어선 두 명의 자식을 내려다보았다.

목소리에도 냉기가 가득했다.

“무사한 것을 보니 다행이군.”

“옥체는 어떠하신지요?”

설미가 부복을 했다.

“작화의가 꽤 힘들게 치료를 했다.”

“…….”

“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는 모양이군.”

“네, 믿지 않습니다.”

설미는 반박하며 대답했다.

그녀는 한 번도 빙궁주의 말을 어기지 않았었다.

“많이 달라졌구나. 중원에 다녀오더니 불량스럽게 되었어.”

“아버지께서 자초한 일이십니다.”

“누가 우리 공주님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혹시 화산도협이라는 녀석인가?”

“…….”

“바로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맞는 것 같군. 보아하니 함께 돌아온 것 같지 않던데, 어떻게 된 일이냐?”

“그분께서는 바쁘신 일이 생겼습니다.”

“흐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인을 두고 딴짓을 하는 인물이라니…… 특이한 녀석일세.”

스윽-

빙궁주 설무청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로 내려왔다.

설강과 설미 앞으로 다가선 그가 말했다.

“내가 왜 중독을 거짓으로 꾸몄다고 보느냐?”

“무엇 때문입니까?”

설강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너희들을 중원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너희들이 중원으로 내려가야만 북해빙궁이 중원에 나갈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

명분.

‘중원과 평화롭게 지내기로 하지 않으셨던가?’

지옥수에 갇힌 자신을 구하기 위함이라면, 북해빙궁의 무인들을 이끌고 중원에 나올 명분이 생긴 셈이었다.

북해빙궁의 염원은 중원 무림에 북해빙궁의 힘을 알리는 것.

설강은 갑자기 그의 태도가 변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중원 무림과 평화를 유지하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

“무슨 이유로 생각이 바뀌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생각이 바뀐 것은 없었다.”

“그 뜻은…… 그동안 중원 무림과 거짓으로 협정을 맺었다는 것입니까?”

“협정이란 상황이 변하면 깨질 수도 있다. 우리가 불리할 때는 한 발 뒤로 물러날 때도 있는 법이니.”

“그건 신의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중원인과 신의를 지킬 필요는 없다.”

“신의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중원인이라고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네가 아버지인 나를 깨우치려고 하는 것이더냐?”

슈우우욱--!!!

빙백신공의 빙화기가 솟구쳤다.

설강은 가슴이 점점 무거워졌다.

“……이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중원에 쳐들어갈 명분은 이미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고민하던 중이었다. 화산도협이 너를 지옥수에서 구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

“다행이군요. 만일 본 궁이 내려왔다면 화산도협에게 끝장이 났을 테니까요.”

“지금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더냐?”

설무청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누구의 편을 드는 게 아닙니다.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너희들은 본 궁의 사람들이다. 당연히 빙궁을 위해 움직여야 할 것이야.”

“…….”

그때, 설미가 물었다.

“그럼, 저희와 함께 오신 분들을 어떻게 할 생각이신지요?”

“설향전에 가두어 놓을 것이다.”

“……그분들은 화산파 일행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신 분들이에요.”

“쓸데없는 짓을 했지. 그리고 지금 그들은 본좌를 죽이기 위해 중원에서 올라온 살수들이다. 빙궁주를 죽이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한 것이고.”

“아버지! 그럴 수는 없어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화산파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설미와 설강은 바로 반박했다.

“지금 내 말을 거역할 생각이더냐?”

“아버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시끄럽다. 만일 이 사실을 그들에게 발설한다면 너희들도 그들과 같이 빙옥에 감금될 것이다.”

설무청은 뒤로 돌아선 뒤 빙옥좌에 앉았다.

“본 궁은 조만간 중원으로 내려갈 것이니라. 이미 세 곳의 새외사패와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아아…… 큰일 났다.’

설강은 가슴이 뛰었다.

중원에서 화산도협 고진유를 만나지 않았다면 당연히 빙궁주와 뜻을 같이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북해빙궁으로 오는 동안 하북팽가와 산동악가를 거쳤다.

그들의 무력도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존재했다.

화산도협 고진유.

산동악가와 하북팽가, 지옥혈림의 지옥수도 그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겨우 약관의 나이에 천하오무와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한 화산파 무인의 존재.

그를 말리지 않으면 북해빙궁은 멸문당할 수 있었다.

“아버지.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본 궁을 위해서라면 중원과 척을 세워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중원에 다녀오더니 완전히 그놈들에게 물이 들었군.”

“물이 든 게 아니라 세상이 어떠한지 똑바로 보게 된 것입니다.”

“안 되겠군. 빙천사들은 이 녀석을 빙옥에 가두어라!”

휙휙!

열 명의 빙천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설강을 포위했다.

설미가 다급히 나섰다.

“아버지……!”

설무청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사전에 막았다.

“됐다. 며칠 쉬게 놓아둘 생각이었거늘. 넌 빙화전으로 가서 그들에게 사실대로 말하거라.”

“…….”

설미는 빙천사에게 포획된 상태에서 빙옥으로 잡혀가는 오라비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설강의 암담해하는 표정이 보였다.

“그들이 조용히 항복한다면 목숨은 보존해 줄 것이라 전해라. 알겠느냐?”

설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화전을 물러났다.

* * *

빙화전에서 휴식을 하는 듯 보이던 화산파 일행은 한자리에 모여 상황을 주시했다.

빙화전 밖의 상황을 주시하던 녹림야검이 들어왔다.

“빙궁의 인물들이 주위에 모여들고 있습니다.”

“쩝…… 이상하게 찝찝하더라.”

장두총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일행은 묵경과 우종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호진 사형, 어떻게 할까요?”

“한동안 뜸하다고 생각했지.”

“하하하! 그렇지요. 요즘 북해빙궁이 너무 조용하게 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북해빙궁은 늘 힘이 강해졌다는 확신이 들면 중원에 내려왔다.

그리고 최근 이십 년 동안은 조용하게 지내고 있었다.

“빙궁의 뜻을 알았으니 우린 계획대로 움직일 거다.”

“어…… 계획이라는 게 있었습니까?”

장두총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종성과 묵경은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번에는 묵경이 대답을 했다.

“당연히 있지. 무턱대고 올 수는 없잖아. 호정 사제가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예상도 했고.”

“묵경 형님, 정말입니까?”

“지옥수에 설 공자를 의뢰한 인물이 빙궁주인 걸 알고 있었거든.”

“아…… 하, 알고 있었군요. 그래서 계획을 세워둔 거고요.”

“당연히.”

장두총뿐만 아니라 일행 모두 안심이 되었다.

우종성이 상황을 정리했다.

“북해빙궁에서 어떻게 움직일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바로 움직이지 않을 거다.”

“그동안 싸울 준비를 해야 하는 건가요?”

“호경, 이 인원으로 어떻게 빙궁 전체와 싸우겠느냐. 저들이 준비하는 동안 이곳을 도망가야겠지.”

“네에?”

장두총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설 소저가 우리를 빙화전에 데리고 온 이유는 빙궁을 벗어날 수 있는 비상통로가 있기 때문이지.”

“……!!”

북해빙궁을 몰래 빠져나가겠다는 뜻이었다.

“하핫, 좋은 방법이네요. 우린 그냥 떠나면 되는 거잖아요.”

당우희는 싸우지 않고 북해빙궁을 나가는 방법이 마음에 들었다.

“저도 찬성입니다. 북해빙궁과 싸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곽우도 손을 들었다.

“저희들도 따르겠습니다.”

다섯 명의 특사들과 녹림야검까지 손을 들었다.

무공이 강하다고 하지만 스무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북해빙궁을 상대할 수 없었다.

“모두 같은 생각이군. 설 소저가 오면 이곳을 바로 떠나는 것으로 하자.”

“호진 사형, 알겠습니다!”

* * *

설미는 착잡한 심정으로 빙화전을 향해 걸었다.

‘공자님의 말씀이 맞았어.’

빙궁으로 오기 전에 세웠던 계획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화산파 일행은 항복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도 무조건 싸우려고 할 거야.’

화산파의 일행을 잡기 위해 많은 빙궁의 제자들이 다칠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모르고 계셔. 그들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결국 죽음이 따를 수밖에 없을 터.

게다가 더 큰 문제는 화산도협 고진유였다.

일행 중 한 명이라도 다친다면, 그는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난…… 그분과 약속을 했어. 설령 약속이 아니어도 본 궁을 위해 아버지의 뜻대로 되지 않게 막아야 해.’

설미는 걸음을 멈추었다.

늘 자신의 뒤에서 변함없이 따르는 인물.

냉풍이 자신의 입 모양을 잘 볼 수 있도록 돌아섰다.

“냉 호위, 하나만 물어도 되겠어요?”

끄덕.

냉풍은 고개를 움직였다.

“당신은 제 사람이 맞나요?”

설미의 물음에 냉풍은 고민할 사이도 없이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지금 바로 공자님을 모시고 그곳으로 오세요. 설원초림에 가면 그분이 찾아오실 거예요.”

휘이익!

냉풍의 신형이 그녀 앞에서 바람 소리만을 남기며 사라졌다.

‘차라리…… 무림맹에 찾아가지 않았다면.’

빙궁과 중원이 싸우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빙화전으로 가는 그녀의 가슴은 점점 발걸음처럼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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