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중원 무림인들은 하북팽가와 더불어 석가장을 하북무림의 이대패자로 당당히 꼽는다.
하북팽가가 전통적인 무력세가라면, 석가장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거대한 부를 축적한 상가이자 세가였다.
더구나 중원 상계의 양대 축을 이루는 중원상국과 함께 천하상국을 가장 위협하는 곳이기도 했다.
고진유와 인양은 산서성을 빠르게 넘어 하북성의 석가장으로 들어섰다.
“여기부터 석가장의 관할 지역이군.”
“형, 하북팽가의 이부인이 전대 석가장의 장녀라고 했잖아요.”
“맞아.”
“이부인이 극일천의 인물이라면 석가장주도 그러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그녀는 도중에 변절자가 된 경우가 아닌 것 같았거든.”
“석가장이 결국 극일천의 세력일 가능성이 많겠네요.”
“아마도. 심증은 가지만, 확신하려면 정확한 물증을 잡아야겠지?”
중원 무림에 얼마나 많은 문파가 있는가.
석가장뿐만 아니라 수많은 세가와 문파들이 극일천과 얼마나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인양은 파숙의 죽음 때문인지 극일천이란 말만 들어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형, 잠시 들렀다 가보면 안 될까요?”
“석가장에? 파 특사의 복수를 하고 싶어?”
고진유도 인양의 현재 심정이 어떠한지 너무나 잘 알았다.
마치 예전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지옥혈림의 지옥만 들어도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
“예전에 내가 뭐라고 했지?”
“……항상 움직이기 전에 생각해라. 머리는 냉정하고 정확하게.”
“맞아. 무영도수 시절부터 지녔던 마음가짐이지. 그 두 가지만 생각하면 알 수 있어. 내가 움직여야 할 때인지 물러나야 할 때인지.”
“…….”
인양은 극일천을 상대하기엔 때가 멀었음을 깨달았다.
감정으로 움직여야 하는 게 아니었다.
“근데…… 나도 가끔은 이런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게 안 되더군. 이해해.”
“혀어엉…….”
“가자.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때가 되면 그에 맞게 보답을 해주면 되는 거야. 알겠지?”
“네에. 알겠어요. 꼭 명심할게요.”
자신의 말을 믿고 늘 그대로 따르는 인양이었다.
‘후후후. 녀석.’
고진유는 미소를 지었다.
* * *
오르막 끝에 정형관(井陘關)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단 거리로 북쪽으로 향하는 두 사람.
이곳을 통과해야 평산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었다.
정형관 앞으로 검문을 위한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자.”
고진유는 신법을 멈추지 않고 정형관으로 달려갔다.
정형관 앞에서 검문 관인이 소리쳤다.
“다음 사람!”
휘이익!
순간, 정형관 사이로 빠르게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들린 듯했다.
“뭐지?”
고개를 앞뒤로 돌렸지만 무엇이 지나갔는지 알지 못했다.
휘이익!!
머리 뒤로 한 번 더 연이어 스치는 듯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고…… 이제는 귀에서 헛소리가 들리는 모양이구나. 마누라한테 보약 좀 지어달라고 해야겠어.”
관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두 사람이 정형관을 통과한 지 이각이 지날 쯤.
‘누구지?’
후방에서 빠른 속도로 누군가 접근하고 있었다.
“인양아, 뒤에서 따라오는 기를 느낄 수 있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움직이는 기를 직접 찾아내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상대의 능력에 따라 찾기 힘들 수도 있어.”
“그럼 어떻게 하는데요?”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 움직이지 않는 공간을 느끼는 거다. 만일 그 안에서 색다른 기가 느껴진다면 우리를 따라오고 있는 거지.”
“알겠습니다.”
인양은 신법을 펼치면서 주변의 기를 기억했다.
얼마를 달렸을까.
지나쳐 온 곳에서 새롭게 나타난 기를 느낄 수 있었다.
“형, 방금 찾았어요. 미세한 느낌이 우리를 계속 따라 움직이는 듯해요.”
“잘 찾았다.”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어때? 조금 더 확실히 감각 수련을 해볼까?”
“네.”
“좋아. 가자.”
휘이익!!
고진유와 인양의 신법이 좀 더 빨라졌다.
‘빨라졌어.’
정형관에서 빠르게 내려온 무구단주 정주승과 강부는 죽을 둥 살 둥 내력을 끌어 올린 채 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따라잡을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들과의 거리는 늘어났다가 좁혀졌다가를 반복했다.
마치 일부러 놀리는 것처럼.
“단주님,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듯합니다.”
강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 며칠 동안 빠르게 움직였다.
충분히 자신했지만, 상대가 멈추지 않는다면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좀 더 속도를 내야겠다.”
“…….”
정주승과 강부가 정말로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올 때였다.
“멈…… 췄어.”
전방에서 빠르게 달려가던 두 사람의 기가 멈춘 것을 알았다.
“하아아…….”
고진유와 인양은 길옆에 앉아 쫓아오는 인물들을 기다렸다.
“형, 이제 어떻게 상대의 기를 파악하는지 이해했어요.”
“머리 좋은 줄은 알았지만 벌써 이해하다니…… 무공을 배우는 건 타고났구나.”
“그거야 형이 워낙 쉽게 잘 가르쳐 주잖아요. 도사 형들과 누님들도 늘 그렇게 말해요.”
“하하, 내가 잘 가르치긴 하지.”
“맞습니다.”
인양은 슬쩍 잘난 척하는 고진유의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좋았다.
오히려 겸손은 실례처럼 보일 정도였다.
‘형은 충분히 잘난 척해도 돼.’
앉아서 쉰 지 반각이 지나자, 멀리 두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표정들이 안 좋은데요?”
“힘든 모양인데.”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네요. 우릴 보면서도 경계하지 않는 것 같고요. 어디서 왔을까요?”
“잘 봤어. 누군지는 만나보면 알겠지.”
고진유와 인양은 일어났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두 사람이 앞에 멈춰 섰다.
정주승이 먼저 포권을 했다.
“하아…… 따라잡느라 힘들었습니다.”
“그게 아니죠. 따라잡는 게 아니라 당신들이 오기를 기다렸소이다.”
“그거…… 고맙군요.”
“별말씀을.”
길가에 선 그들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 쳐다보면서 지나쳤다.
주변 시선을 염려한 정주승이 조심스레 말했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겠소이까?”
“그렇게 하지요.”
네 명의 사내들은 관로에서 벗어나 인적이 없는 장소로 옮겼다.
“화산도협, 고맙소이다.”
“중원에서 처음 보는데도 내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는군요. 혹시 내 얼굴이 팔렸소이까?”
고진유는 나름 진지하게 물었다.
“그건 아니오. 우린 무구천에서 왔소이다.”
“아하…… 중원상국에서 지내시는 그분과 같은 소속이군요.”
“그렇소이다.”
“무구천에서 왔다면 본도를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겠군요.”
“…….”
정주승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이 없는 걸 보니 본도의 말이 맞군요. 서로 긴말 필요 없으니 결론부터 말하면,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소이다. 철갑에 대해 관심을 지워주면 좋겠소.”
대답하지 못한 정주승 대신, 곁에 있던 강부가 불쑥 끼어들었다.
“화산도협, 그 물건은 그대가 지니고 있을 물건이 아니오. 극일천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세력은 본 천밖에 없으니 건네주는 게 마땅한 것 같소.”
“극일천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면 싸우시오. 굳이 힘들게 철갑을 찾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소.”
“우리를 놀리는 것이오?”
강부는 단번에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여기서 그만둡시다. 계속 서로의 주장만 말하면 싸움밖에 더 하겠소.”
고진유는 이들과 대화를 하는 게 귀찮았다.
두 사람에게 한 번 더 강조했다.
“철갑은 누가 와도 줄 생각이 없으니 그대들의 상부에 확실하게 보고하시오. 자꾸 보채면 철갑을 망망대해에 가서 버릴 겁니다. 난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철ㄴ갑이 있으나 없으나 본도는 상관없으니까.”
“…….”
철갑을 버리겠다는 협박.
정주승과 강부는 어이가 없었다.
“화산도협, 너무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소이다. 우린 철갑 때문에 그대가 극일천의 위험에 처할 것이 걱정될 뿐이외다.”
“무구천에서 본도를 걱정해 준다고 하니 고맙기는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보이는 건 좋지 않소이다. 그대들이 누군지 궁금해서 기다렸던 것뿐이니, 그럼…… 우린 가겠소이다.”
“…….”
“인양아, 가자.”
“넵, 형님.”
타아앗!!
고진유와 인양의 신형이 그들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부는 무구천을 무시하는 고진유의 말투에 화가 치밀었다.
“단주님, 이대로 물러나실 것입니까?”
“강부, 그와 싸워 철갑을 빼앗아 올 자신이 있는가?”
“그가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 천의 무공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극일천의 육십사괘무장들도 그와 싸워 이기지 못했다.”
“저도 그들과 싸운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강부는 무공에 대해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 또한 극일천의 무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무구천에서 뛰어난 무공을 익혀 왔다.
‘하아, 아직 멀었군. 상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질투심에 제대로 파악을 못 하고 있다.’
고진유와 인양의 신형이 사라진 지 반각이 지난 후에도, 결국 정주승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우선 뒤를 쫓아다니는 수밖에 없겠군.’
* * *
‘크크크…… 드디어 저 두 놈만 남았군.’
철갑을 찾으라는 명주공의 명을 받은 이후 고진유의 주위를 따라 다닌 지 한 달이 넘었다.
자신은 우문전 최고의 살수.
하북팽가에서 잠시 놓친 동안을 빼면, 늘 시야 안에 그가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놈들이 이 객잔에 찾아왔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전황은 안으로 들어선 고진유와 인양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제법 나이가 많네요. 수고가 많소이다.”
탁! 탁!
화산도협의 손이 자신의 팔뚝을 세게 두드렸다.
‘뭐야, 이 자식이.’
무례한 손길이었지만 그는 자연스레 답했다.
“헤헤헤. 고맙습니다요. 주무시고 가실 것입니까?”
“객실 하나만 준비해 주게.”
“알겠습니다. 좋은 방이 하나 있습니다요. 소인을 따라오십시오.”
전황이 앞장서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화산도협이 하루 묵을 거라 예상한 뒤 미리 준비해 둔 방.
드륵.
객실 문을 열고 안으로 먼저 뛰어가듯 들어선 뒤 불을 밝혔다.
“손님, 마음에 드십니까?”
“아니…… 별로 마음에 안 드네.”
고진유는 퉁명스럽게 주위를 살피면서 고개를 젓고는,
툭툭.
침상 끝을 가볍게 발로 찼다.
그는 고진유의 눈치를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낡았잖아. 이건 또 무슨 냄새지? 방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고.”
“그건…….”
그는 당황하면서 말을 똑바로 하지 못했다.
“형, 다른 객잔으로 갈까?”
“됐어. 시간도 늦었는데 귀찮잖아. 잠만 자고 갈 텐데 대충 자지. 뭐.”
“고…… 고맙습니다.”
“씻을 수 있도록 따뜻한 물 부탁하네.”
“네에. 알겠습니다요. 혹시 식사는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오는 길에 점심을 많이 먹었더니 생각이 없네.”
“……저희 객잔은 객실에서 하루를 주무시면 저녁 식사는 무료입니다만.”
“그래? 공짜면 가지고 오게.”
“넵.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객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이봐. 잠깐만.”
“무슨……?”
“그냥 가면 섭섭하잖아. 받아.”
휘익.
퍽!
고진유의 손가락 끝에서 동전 하나가 날아갔다.
그의 얼굴을 바로 스쳐 지나간 동전이 문틀에 살짝 박혔다.
“아…… 미안하군. 손가락이 미끄러졌어. 그건 수고비로 가지시오.”
“……고, 고맙습니다요. 그럼 편히 쉬십시오.”
그는 문을 닫은 뒤 돌아섰다.
‘저 새끼가…….’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쥐자, 손안에 있던 동전이 반으로 구부러졌다.
‘나중에 두고 보자.’
* * *
“형, 혹시 기분이 별로세요?”
객잔에서 괜한 트집을 잡는 고진유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후후,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어.”
“누구…… 혹시 방금 나간 점소이를 말하시는 겁니까?”
“맞아. 무림맹을 나선 직후부터 내 주위에서 맴돌던 인물이야.”
“그때부터 지금까지 따라다녔다고요? 대단하네요…….”
“하북팽가에서 나올 때 잠시 안 보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따라붙더군. 미행하는 능력이 좋아.”
“아하…… 그럼 그자도 극일천인가 보네요.”
“그렇겠지. 여하튼 오늘 모습을 드러낸 걸 보니 이제 움직이겠다는 뜻이군. 우리 둘을 제외하고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말이야.”
고진유는 침상에 앉으면서 촛대를 가리켰다.
“저기 촛대를 들어 안을 봐.”
스윽.
인양은 그의 말대로 안을 살폈다.
붉은 가루가 촛대 안으로 묻어 있었다.
“이상한 가루 같은 게 있어요.”
“아마 산공향일 거야.”
“…….”
“지금은 미세한 양이라서 괜찮겠지만, 한 시진 정도 맡으면 내력이 흩어져서 무공을 펼칠 수 없을 테지.”
“끌까요?”
“그냥 긁어내면 될 거야.”
슥슥.
인양은 산공 가루를 바닥으로 긁어냈다.
“형, 음식에도 독이 있을 가능성이 있겠네요? 아까 안 먹는다고 하니 표정이 안 좋았어요.”
“계획대로 안 되니 화가 났겠지. 여기 여기에도 이상한 장치를 해놨고.”
고진유는 침상을 슬쩍 들어 올려 바닥을 가리켰다.
“허어…… 독침들인가요?”
침상 아래에 묽은 액체가 흐르는 독침들이 숨겨져 있었다.
“형. 위험해요.”
“괜찮아. 분명 이것들과 연결된 부분이 있겠지만, 이젠 안 될 거거든. 아까 발로 차면서 기폭장치를 망가뜨려 놨어.”
척.
인양은 손을 치켜세웠다.
“형, 대단해요. 이걸 어떻게 한 번에 알았어요?”
“으음, 벽화당 두목이 나쁜 놈이긴 하지만 내 능력을 보고 어릴 때부터 특별한 교육을 많이 시켰거든. 처음 보는 장소에 들어가면 주위부터 살피는 습관이 그때 생겼어. 산공향은 내가 워낙 후각이 뛰어나서 알게 된 거지만.”
“역시 전문가는 다르군요. 형, 이젠 어떻게 할 건가요?”
“지금쯤이면 열심히 독을 넣은 음식을 만들고 있을 텐데. 뭘 만드는지도 볼 겸 내려갔다 오마. 쉬고 있어.”
“네에. 조심하세요.”
스르르륵.
고진유의 신형이 객실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