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인양의 여정은 끝이 났다.
파숙과 함께했던 많은 날이 눈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인양은 울먹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고진유는 조심스럽게 안았다.
“고생 많았다. 정말 잘해주었어. 형이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흐윽…… 아닙…… 니다….”
인양은 여전히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제가 무공이 더 강해져서 그놈들에게 파숙 형의 복수를 할…… 겁니다.”
“그래. 파 특사의 원수를 갚도록 형도 도와줄게.”
“혀엉. 여기…….”
인양은 허리에 묶은 천을 풀었다.
자신이 맡았던 임무.
대목장 이춘광이 무림맹 황와정에서 훔쳐 달아났던 철갑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철갑을 찾았어요. 파숙 형이 없었다면 이것을 찾지 못했을 겁니다…….”
“고맙다. 너도…… 파 특사도.”
사부님께서 무림맹에 숨겨놓았던 철갑.
고진유는 철갑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쏴아아아-
손으로 전해진 철갑의 느낌은 괴기(怪氣)했다.
‘이것이었나? 사부님과 파 특사를 죽게 만든 물건이.’
얼마나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기에 극일천에서 끝까지 찾고자 했던 걸까.
고진유는 철갑을 확인했다.
‘열쇠로 여는 게 아니군.’
철갑에 유일하게 있는 구멍은 열쇠 구멍이 아닌 듯했다.
‘흠. 보통 이런 경우 상판에 장치가 있을 수 있지.’
무영도수의 경험을 떠올리며 철갑의 상판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스치듯 만졌다.
손바닥과 손끝에 느껴지는 미세한 감각들.
얇지만 철갑의 상판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을 알아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대단한 솜씨를 가졌어. 철갑의 재료는 만년한철인 것 같은데…… 일정하면서 깨끗하게 파여 있고.’
철갑의 내부는 정교한 장치로 된 게 확실했다.
당장 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고진유는 철갑을 다시 천으로 쌌다.
“가자.”
“네…… 형.”
* * *
산순벽 아래로 두 명의 인영이 내려섰다.
무구천 소속의 인물.
무구단주 정주승과 강부였다.
두 사람은 사방에 널려 있는 시신들을 살폈다.
“이들은…… 극일천입니다.”
“표정을 보니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로 죽었어.”
“단주님, 사인은…….”
“맞아, 매화 향이 남아 있어. 화산파의 매화검법이 확실해.”
“대단합니다. 인양이란 청년이 혼자서 극일천을 상대로 매화검법을 펼칠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아닐 거야. 이들을 죽인 인물은 그가 아니네. 이 정도의 무력을 지닌 인물은…… 화산도협밖에 없어.”
무구천에 올라온 보고에서도 무공이 강하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천에서 그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극일천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군. 여기 상황을 천에 알려야겠어.”
“알겠습니다.”
“시신을 보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거야. 화산도협을 빨리 찾아야겠군.”
철갑이 그의 손에 들어간 이상 극일천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 * *
객실에 앉은 두 사람.
고진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하얗게 변한 인양의 눈썹을 보았다.
‘파 특사의 죽음이 컸군.’
감당하기에 너무 큰 충격을 받을 때 백발로 변한다는 말을 가끔 듣긴 했지만, 인양의 눈썹이 변할 줄은 몰랐다.
“인양, 네게 할 수 있는 말이 모든 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밖에 없네.”
“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파숙 형은 항상 제 가슴에 있습니다.”
“맞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여기에 숨을 쉬고 있지.”
고진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후후후. 그래도 제법 어울려.”
“고맙습니다.”
가느다랗게 옆으로 뻗어 나간 인양의 눈썹은 강한 인상을 보여주었다.
“오늘은 여기에서 쉬고 내일 떠나는 걸로 하자.”
“북해빙궁으로 빨리 가지 않아도 되나요?”
“네 몸이나 잘 추슬러. 우리 정도라면 당장 따라붙을 수 있어.”
“알겠어요.”
고진유는 피곤해진 인양의 몸을 위해 객잔에서 하루를 쉬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철갑에 대한 긴장감으로 심신이 지쳤던 인양이었다.
드르릉-
침상에 누운 지 반각도 지나지 않았다.
“녀석…… 그동안 힘들었던 모양이군.”
인양은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다.
잠시 자는 모습을 본 후 다시 탁자 위에 놓인 철갑을 보았다.
‘이게 사부님과 파숙을 죽게 만든 철갑…….’
극일천에서 찾고자 했던 철갑.
눈앞에 보이자 흥분보다는 오히려 담담해졌다.
철갑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수년이 지났는데도 극일천에서 찾고자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작은 구멍에 눈을 대며 안을 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안 보이네.”
쑤욱.
이번에는 구멍 안으로 휴대용 철심을 밀어 넣었다.
‘음…… 걸리는 것도 없고.’
예상대로 구멍은 철갑을 열 수 있는 자물쇠가 아니었다.
‘열지 못하는 것은 아닐 테고…….’
고진유는 안력을 높여 철갑의 곁을 살폈다.
흑색의 철갑에 미세하게 그인 수많은 선이 어지럽게 늘려 있었다.
‘이 선들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철갑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실선을 따라 시선을 이어갔지만.
‘연구를 계속해봐야겠군. 어려워.’
전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하아…….
고진유는 허리를 펴며 등을 뒤로 젖혔다.
“이런 물건은 누가 만드는지 몰라. ……아!”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맞아. 이것을 열 방법을 찾았어. 아니…… 열 수 있는 사람.”
철갑이 하늘에서 그냥 툭 떨어진 물건은 아닐 것이었다.
철갑에 세상에 있는 이유.
누군가 만들었기에 존재하고 있을 터.
‘이것을 만든 사람을 찾는다면…… 열 수 있어.’
고진유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후후후. 역시 난 똑똑해.”
벽하당 시절 두목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세상에서 열 수 없는 자물쇠는 없다.”
“우와, 정말입니까?”
“크크크. 딱 한 명이 만든 물건들만 제외하고는.”
두목이 말했다.
도둑들 사이에서 전설로 알려진 인물이 있다고.
‘만능자.’
그가 만든 자물쇠는 열쇠가 없기에 열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이 철갑 또한 만능자가 만들었다는 물건과 비슷하지.’
철갑을 누가 만든 물건인지 모르나 그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흐음…… 근데…….’
만능자까지 생각났지만 더 큰 문제가 기다렸다.
“만능자를 어떻게 찾지?”
그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살짝 입꼬리가 말렸다.
“이거 참……. 하기 싫어도 계속 부탁할 수밖에 없다니.”
북소연.
지옥혈림을 떠나 그녀라면 소문을 내지 않고 흔적 없이 만능자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찾아도 문제군.’
슥슥.
고진유는 철갑을 다시 천으로 싸기 시작했다.
* * *
한빈지부에서 올라온 보고에 종남파가 들썩거렸다.
화산파 무공을 펼친 인물을 쫓는 과정에서 만난 괴인들에 의해 문도의 절반 이상이 죽고 중상을 당했다는 내용.
종남파의 수뇌부들은 종남오검인 항일검 양조 도인이 이끄는 천용당을 급히 내려 보냈다.
두두두두-
천용당의 이백 명이 움직였고, 양조 도인은 섬서성의 정보망을 총동원했다.
곧바로 산순벽에서 괴인들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누가 그들을 죽였지?’
한빈지부를 궤멸시킬 정도의 무력을 가진 괴인들이었다.
‘또 다른 삼자가 있었던 게야.’
괴인들을 죽일 정도의 무력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백 명의 천용당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산양으로 가려고 했군.’
철령관에서 삼순벽으로 이어진 방향이라면 산양을 지나 화산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는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산양으로 간다!”
* * *
“으으으윽……!”
인양은 일어나면서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주위 신경 쓰지 않고 푹 잤다.
고진유와 함께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을까.
“잘 잔 모양인데.”
“네. 푹 잤습니다.”
“몸은 어떠냐?”
“개운합니다.”
“다행이야. 그럼 우리도 북해빙궁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준비하고 내려와.”
고진유가 먼저 일 층 객잔으로 내려갔다.
“내려오셨습니까? 아침을 준비했습니다.”
점소이가 아닌 객잔 주인이 계단 아래까지 나와 인사를 했다.
“수고했습니다.”
“아닙니다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않습니까?”
객잔 주인은 허리를 최대한 숙이며 탁자로 안내했다.
고진유는 자리에 앉으면서 그에게 황금 한 냥을 내밀었다.
“아하…… 하……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는 말과 달리 얼른 받아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고진유는 곧바로 품 안에서 황금색으로 된 기(旗)를 꺼냈다.
“이게…… 무엇인지요?”
“내가 떠난 뒤 이 깃발을 한 시진만 밖에 걸어놓으시오.”
“그것만 하면 됩니까?”
고진유가 건넨 황금색 깃발은 황조혈림기.
며칠 전 북소연이 떠나면서 전해준 깃발로 자신을 만나고 싶다면 중원 어디에서도 상관없이 한 시진 동안 걸어놓으면 된다고 했다.
“형!”
준비를 마친 인양이 이 층에서 내려왔다.
“먹자.”
“네!”
식탁에 앉아 식사한 지 반 시진이 지났을 즈음.
고진유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멀리서 다가오는 진동이 크게 느껴졌다.
‘이건 규모가 제법 있는데.’
두두두두-
“저깁니다!!”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사내가 전방 객잔을 가리켰다.
산순벽 방향에서 온 두 명의 사내가 있다는 보고를 받은 후 달려왔다.
객잔에 도착한 그가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부관은 나를 따르고 나머지는 객잔 앞을 지켜라.”
“옙.”
부관 표여군은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린 후 양조 도인의 뒤를 따랐다.
객잔으로 들어선 양조 도인이 주위를 살폈다.
‘저들인가?’
두 명의 청년들.
양조 도인은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흘러나오는 압박감에 점점 다가서기가 어려웠다.
‘이자의 내력은…….’
너무나 진한 매화 향이 흘렀다.
‘화산파에 이 정도의 내력을 지닌 청년 도사가 있다니…… 대체 누구이기에?’
양조 도인의 뒤에서 따르던 부관 표여군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숨이 멎을 정도였다.
그 또한 종남파 삼대제자이건만, 상대는 마치 천외천의 고인인 듯했다.
양조 도인은 더 움직이지 못한 채 제자리에 멈춰 섰다.
“본도는 종남파의 양조라 하오.”
고진유는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고진유라 하외다.”
“화산도협……!”
그 순간 객잔이 술렁거렸다.
이른 아침이라 하나 객잔의 절반 정도는 손님들이 식사하고 있었다.
“화산도협이시다…….”
섬서성 사람에게 화산도협은 중원의 자랑이나 다름없었다.
“저분께서…… 와우…….”
여기저기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양조 도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로…… 그대가 화산도협이 맞소이까?”
고진유의 복장은 매화도의가 아니었다.
“그대에게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소이다.”
“…….”
양조 도인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천하오무에 도전할 수 있는 화산파의 젊은 무인, 화산도협에 대한 소문은 중원 전역에 퍼져 있었다.
“양조 도인께서는 본도에게 볼일이 있으십니까?”
“철령관에서 본문의 제자들이 죽음을 당했소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서 온 것이오.”
“그들 모두 죽였소.”
“…….”
“내 사람을 죽였기에 한 놈도 남김없이 죽였소이다.”
그 순간 고진유의 신형에서 강한 패기가 솟구쳤다.
‘이런 기운을 도문의 제자가 가질 수 있다니…….’
양조 도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본도가 알기로는, 화산도협과 함께 있는 저 청년과 본 문의 제자가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소이다.”
“아우에게 듣기로는 귀문의 도사들이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객잔에서 먼저 소란을 피운 모양이더군요. 그때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거짓말이라 여기신다면 확인을 해보시는 게 좋겠군요.”
양조 도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게 없었다.
‘영동, 이 망할 녀석이 똑바로 이야기를 안 했군.’
“……그건 알겠소이다. 덧붙여 괴인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소.”
“그건 본도도 모르오.”
“그들을 죽인 게 화산도협, 그대이지 않소이까? 그들은 그대의 동생이란 분을 쫓고 있었다고 했소.”
“맞소이다. 하지만 왜 쫓는지는 모릅니다. 그놈들이 내 사람을 죽였기에 복수한 것밖에 없으니까.”
“그 이유가 전부라는 것이오?”
“그렇소이다. 본도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군요.”
고진유의 대답은 간단했지만, 양조 도인은 그가 괴인들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화산도협, 괴인들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는 이유가 있소이까?”
“이유는 없소. 그들이 누구인지 당신들이 직접 알아보시오.”
“가르쳐 주지 않는 이유를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오.”
양조도인은 내력을 끌어 올렸다.
“분명 모른다 했소만. 지금 본도와 싸우고자 하는 것이오?”
고진유도 내력을 쏟아냈다.
파아앗!!
기의 폭풍이 뻗어 나갔다.
‘우우욱.’
양조 도인의 신형을 스치며 지나쳐간 고진유의 내력.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난…… 종남오검이거늘…….’
내력으로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고진유는 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양아. 도저히 식사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만 가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형님.”
“많이도 왔군.”
고진유와 인양은 객잔 밖으로 나오자 천용당의 무인들이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고진유는 천천히 객잔 아래로 내려섰다.
“장사하는 집 앞을 막아서 되겠소이까? 지나갈 수 있게 길은 터놓아야지 않겠소?”
“…….”
슈우우우욱!
고진유의 신형에서 뻗어 나온 내기에 객잔 앞을 막아선 종남파의 도사들이 부지불식간에 옆으로 물러났다.
“고맙소이다.”
고진유와 인양은 그들 사이로 지나가며 객잔을 떠났다.
그들을 따라 바로 나온 양조 도인은 그 장면을 본 뒤 허탈한 목소리가 나다.
“허허……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
“당주님, 그냥 보고만 있을 것입니까?”
“소덕, 그는 우리가 상대할 인물이 아니야. 운소 사백님 외에는…….”
“화, 화산도협의 무공이 사일검성이신 그분과 겨줄 정도란 말입니까?”
끄덕.
양조 도인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제는 화산파를 넘어섰다고 믿었거늘.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