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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대도-132화 (132/425)

132화

휘리리릭!

고진유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내달렸다.

하북팽가에서 홀로 나온 뒤 인양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빠르게 움직였다.

하단전과 중단전에서 교차로 끌어 올린 덕에 내력의 소모 없이 호충신법을 펼칠 수 있었다.

쉬이이이익-!

그가 신법을 시전하며 움직이는 속도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천리마가 연상될 정도로 빨랐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좋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심심하네. 아무나 한 명 같이 올걸.”

꽤 오랫동안 사형제들과 함께 다니다 혼자 다니려니 조금 적적했다.

그렇게 고진유가 하북을 넘어서며 산서성으로 들어갈 때쯤, 안휘성에서부터 소문이 들려왔다.

남궁세가에 눌려 잠잠했던 혈사천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그 양반도 때를 잘 맞추는군.’

혈사천주는 남궁세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전체가 갑자기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세가를 받치고 있던 네 개의 커다란 축 중 두 개가 무너진 상황이었다.

“하긴 혈사천이 움직인다면 지금이 가장 최적의 시기니까.”

남궁세가에 있었던 안휘성의 주도권은 당분간 혈사천이 잡고 있을 것이 확실했다.

‘그러고 보니 사숙님께선 잘 계실까…… 시간이 나면 한 번 만나뵙는 것도 좋겠지.’

남들에게는 천살지인이라 하나 고진유에게는 사숙일 뿐이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아무리 신법으로 빨리 달린다고 해도 사람이라면 휴식이 필요하다.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괜히 야밤에 밤이슬을 맞으며 야외에서 잘 필요는 없었다.

‘한데…… 일반 객잔이 아니었네.’

주화루(珠花樓)의 홍등이 멀리서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객루나 객잔 같은 곳은 없나?”

하지만 둘러봐도 주위에 다른 곳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밖에서 자는 것보다 낫겠지.’

주화루로 다가서자 입구 앞에서 대기하던 백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오며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본인에게 하는 말이오?”

“화산도협이 아니신지요?”

“……!”

고진유는 웬만해서는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당황했다.

“누구신지?”

“주화루의 총관입니다.”

“나를 어떻게 아시오?”

“처음 뵙지만, 화산도협의 위명은 많이 들었습니다.”

위명을 들은 것과 자신의 알아보는 건 별개의 일이다.

“이거 참…… 요즘 놀랄 일이 많이 생기는데.”

사형제와 묵경조차 자신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정확한 행선지를 모른다.

게다가 이 마을에 들어선 것도 우연일 뿐이었다.

“소인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주화루의 총관은 누군가의 명을 받은 것이 확실했다.

“…….”

그를 따라 주화루의 본관을 지나 옆으로 돌아갔다.

정원 안으로 별관이 보였다.

“별관에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진유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정원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인영.

‘허어, 대단한 여자군.’

입가에 어이없는 실소가 나왔다.

고진유는 걸음을 멈추었다.

지옥혈림의 북소연이 살짝 무릎을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도협, 오랜만이네요. 우리가 여기에서 만나다니 연이 깊은가 봐요.”

고진유는 정원 끝에서 멈춘 채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날도 어두워지는데 계속 밖에 계실 건가요?”

“왠지 여기가 편할 것 같소만.”

“후훗, 누가 들으면 제가 괴롭히는 줄 알겠어요. 그만 안으로 들어오시죠. 저번에 얻어 마시지 못한 차를 제가 대접할 테니까.”

북소연은 미소를 띠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완전 꼬리가 수십 개 달린 여우 아닌가.’

고진유는 그녀를 따라 별관으로 들어섰다.

미리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올 줄 알고 있었군.”

“원래는 술을 준비하려고 했지만, 저와는 마시지 않을 것 같아서요.”

“확실히 술을 마실 사이는 아니지.”

“앉으세요.”

고진유는 그녀가 내민 자리에 앉기 전에 주위를 살폈다.

이십 장 반경 내로 전혀 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별관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는 상의 자락을 들어 올리면서 고진유의 앞에 차를 따랐다.

“드셔보세요. 꽤 좋은 차더군요.”

“안에 이상한 것을 탄 건 아니오? 춘약이라던가?”

“…….”

북소연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혹시 바라는 건가요?”

“아니라면 됐소. 요즘 갑자기 여자들이 무서워져서.”

“흐음, 보아하니 하북팽가의 이부인과 관련된 일인가 보네요.”

“지옥혈림이 무림에서 가장 쓰레기 같은 짓을 많이 하는 곳이라 생각했소만, 점점 생각이 바뀌고 있소이다.”

“좋게 변했나요?”

“좋다 싫다의 문제가 아니오.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겠더군.”

사파오패천의 한 곳이라 해도, 지옥혈림은 그들이 하는 짓들로 인해 항상 중원 무림인들 사이에서 비난과 무시를 받았다.

“대체 지옥혈림의 정체가 뭐요?”

“도협께서 알고 있는 그대로이죠.”

북소연은 두 손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 우리의 만남을 위해.”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차를 마셨다.

“잘 마시겠소.”

고진유는 한 번에 찻잔을 비우며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도협께서는 정말로 차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있어도 상관없소. 내 몸은 만독불침이어서.”

“……정말인가요?”

“확인해 보겠소?”

“아쉽네요. 원하시는 것 같아 다음엔 홍춘고를 넣고 싶었는데.”

“…….”

“호호호. 농담이에요.”

농담이라고 했지만 왠지 진담처럼 들렸다.

‘이 여자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해.’

“적당한 선을 지키는 사이가 좋겠소이다.”

“도협께서 그러시다면야. 한 잔 더 받으세요.”

고진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밀었다.

“내가 여기를 지날 거란 건 어떻게 알았소?”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만리향(萬里香) 덕분이죠.”

“만리향?”

“예전에 만났을 때 도협 몰래 살짝 묻혀놨거든요.”

“…….”

고진유는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건 사람의 후각으로는 절대로 맡을 수 없어요.”

“동물이오?”

“바로 알아차리는군요. 맞아요. 만리향을 전문적으로 따로 맡을 수 있는 녀석이 있어요.”

“그게 무엇이오?”

“저기.”

그녀가 방 한쪽을 가리켰다.

푸른빛을 띤 청조가 한 마리 보였다.

“만리청향조(萬里聽香鳥)라고 하죠. 만리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녀석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요.”

“중원에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군. 알려줘서 고맙소.”

고진유는 만리향을 지우기 위해 전신의 피부로 내력을 흘려보냈다.

“좋은 경험을 했소이다.”

“흐음, 이런 식으로 만리향을 지울 수도 있군요. 근데 이렇게 한다고 제가 못 따라다닐 것 같은가요?”

“…….”

“제가 왜 만리향을 가르쳐 주었을까요?”

“하아. 그대 맘대로 하시오.”

“어떻게, 식사를 하신 뒤 어디로 가시는지 이야기를 나눌까요? 아니면 먼저 이야기를 한 뒤 식사를 할까요?”

그녀가 원하는 이야기는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합시다.”

“좋아요. 일행 사이에서 혼자 나온 이유는 철갑 때문인가요?”

“맞소.”

이미 짐작하고 있을 이야기에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숨겨놓은 철갑을 가지러 가는 것인가요?”

“그렇소.”

“꽤 멀리 숨겨 놓았네요.”

“움직이다 보니 그렇게 됐소이다.”

“하, 그렇군요. 철갑을 장소가 아닌 사람에게 맡겨놓았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고진유가 말하는 것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우리의 약속은 어떻게 되죠?”

“지옥혈림과는 원수라 하나 약속은 꼭 지킬 것이오.”

“흐음. 원수라는 표현은 이제 조금 완화하면 어떨까요? 지옥수 일도 그냥 넘어가 줬잖아요.”

“흑귀들이 사부님을 죽였다는 사실을 자꾸 잊는 것 같군.”

“당신이 그를 죽여 원수를 갚지 않았나요? 그를 찾고자 명령은 내렸지만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줄은 몰랐어요. 그가 과하게 움직였던 것뿐이에요.”

“…….”

“그리고 당신 사부를 우리가 다친 게 한 것도 아니잖아요. 지옥도에서 독자적으로 행동하긴 했지만, 우린 그저 의뢰받은 것밖에 없다고요. 또…… 의뢰 받을 땐 이미 폐인이 된 상태였고요.”

“그만합시다.”

“……좋아요. 오늘 당신을 만나러 온 건 철갑에 대해 확인차 온 것도 있지만 그분의 명을 전하기 위해 왔어요.”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혈성존께서 시간이 되면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나를?”

“그래요. 어떤가요?”

“생각해 봅시다.”

고진유는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뭐예요. 생각해 보겠다니? 그런 무성의한 대답이 어디 있어요?”

그녀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굳이 만나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소만.”

“흥. 역시 혈성존께서 예상하신 대로 대답하는군요. 하지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을 전하라 하시더군요. 극일천을 상대하는 데 본 림의 힘이 필요하다면.”

“…….”

그녀가 말한 대로 지옥혈림의 힘은 극일천과 상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극일천의 일에 대해 지옥혈림에서 유별스레 관심을 가지는 것 같소.”

“그건 혈성존께 여쭈어보세요. 그분께서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하셨어요. 물론 당분간이지만.”

‘……둘 사이에 뭔가 앙금이 있는 건가?’

고진유는 느낌상으로 두 곳 사이에 뭔가 알지 못하는 일이 있었음을 눈치챘다.

“알겠소. 시간이 나는 대로 혈성존을 만나 보겠소이다.”

“호호호. 잘 생각했어요. 도협의 말씀을 전해 드리죠.”

북소연은 그를 만난 목적이 해결되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우리 식사하면서 술이나 한잔할까요?”

“됐소이다. 난 당분간 여인과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을 거요.”

“…….”

“더 할 이야기가 없는 것 같소이다.”

“……흥. 그래요, 그럼. 식사만 하도록 하죠.”

* * *

일찍 객잔을 출발하한 인양과 파숙에게 뜻하지 않는 동행이 생겼다.

야랑무인 나석기.

그는 한곳에 정착하는 것보다 주로 중원을 돌아다니는 용병이었다.

그는 마을을 벗어난 뒤 신법을 펼치는 두 사람 뒤를 따랐다.

인양은 물론 파숙의 신법도 생각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사람, 정체가 뭔가?”

“보시다시피 장사꾼입니다.”

“쿡쿡, 화산복호권을 펼치고 신법까지 펼치는 장사꾼이 세상에 어디 있나?”

“여기 있지 않습니까.”

“크하하하! 그렇군!”

나석기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굳이 신분을 밝히지 않는 두 사람을 보며 계속해서 묻지 않았다.

‘장사꾼으로 변복한 것으로 봐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거나 들키지 않고 화산으로 움직이려는 거겠군.’

두 사람은 화산파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소형제는 화산파의 제자가 맞는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내가 보기에는 제대로 익힌 화산복호권이었네. 어떻게 된 것인가?”

“제 의형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허, 화산파의 무공을 아무 외부인에게 가르쳐 주지는 않을 텐데. 소형제의 의형이란 분은 대단한 모양이구려.”

“맞습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어떠한 말로도 설명조차 할 수 없는 분입니다.”

‘음…… 얼마나 엄청난 인물이기에 경외심을 보이지?’

나석기가 입을 떼려고 한 순간, 앞에서 움직이던 파숙의 걸음이 멈췄다.

“인양, 저기.”

그들이 지나가야 할 마을 초입에 갈색도의를 입은 종남파 도사들이 모여 있었다.

“설마 우리를 잡으려고 기다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벌써 소문이 여기까지 난 모양인걸.”

인양을 화산파 인물이라 생각한 종남파 도사들이 화산파로 가는 길목을 막아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쓸데없이 빠르네. 어떻게 하죠?”

조용하게 움직여야 할 두 사람이었다. 곤란하게 그들과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여기에서 우회하면 상당히 돌아서 가야 해.”

“그래도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하루 정도 늦게 간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잖아요.”

“알겠다. 그렇게 하지.”

인양과 파숙은 편한 관로로 움직이지 않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회 길을 이용하기로 했다.

나석기 또한 굳이 종남파의 도사들과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정파 녀석들은 잘못 건드렸다가는 끝까지 싸우고자 덤비는 경우가 많았다.

“소형제의 무공이라면 저들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텐데, 아닌가?”

“이길 수야 있겠지만 다음에 더 강하고 많은 상대를 맞이할 겁니다. 될 수 있는 한 부딪히지 않는 게 좋죠.”

“그렇긴 하지. 소형제의 생각이 현명한 것 같네.”

나석기는 나이가 어린 인양에게 감탄했다.

두 사람의 정체가 점점 궁금해졌다.

* * *

공각원주 무심해는 향운촌을 완전히 불태운 뒤 인양과 파숙의 뒤를 추적했다.

향운촌에서 가까운 마을들을 살폈지만 두 사람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갑자기 사라질 리가 없는데?’

수하들을 사방으로 흩어져서 찾아보았지만 그들의 행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큰일이다. 여기서 놓치면 전주님께서…….”

세상에서 그분보다 무서운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두 사람을 무조건 찾아내서 철갑을 확보해야 했다.

휘이익!

그때, 사방으로 흩어졌던 수하가 인영을 드러냈다.

“원주님, 평윤객잔이란 곳에서 싸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싸웠다는 말이냐?”

“종남파 도사와 야랑무인이 싸웠다고 합니다.”

“멍청한 놈. 우리와 상관이 없잖아!”

무신해는 끝까지 듣지 않고 짜증을 냈다.

“그게 아니라…… 싸우던 도중 야랑무인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젊은 장사꾼이 나서서 종남파 도사를 이겼다고 했습니다. 그때 젊은 장사꾼의 펼친 무공이 화산복호권이라 했습니다.”

무신해의 눈이 커졌다.

“그놈이군!”

인양은 화산도협 고진유의 의동생이라 했다.

고진유에게 화산복호권을 배운 게 틀림없었다.

그는 지도를 펼쳤다.

“역시 이놈들은 화산파로 움직이고 있어.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았으니 먼저 가서 기다리면 되겠군.”

휘이익!

또 다른 수하가 다가왔다.

“원주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뭐지?”

“종남파 한빈지부에서 도사 놈들이 움직였다는 보고입니다.”

“쳇. 그놈에게 당한 복수를 할 모양이군. 인원은?”

“화산파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종남파 도사들이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귀찮은 놈들이 중간에 끼어들었군.’

한빈지부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조용하게 처리할 수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종남파 도사 놈들보다 우리가 그놈들의 행적을 먼저 찾는다.”

“알겠습니다!”

공각원의 수하들은 큰 소리로 대답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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