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채애앵!!
이부인 석화린은 서랍 위에 물건들을 무작정 잡은 뒤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누가 여길 손댔어?!”
“저희들은…… 방금…….”
시비들은 온몸을 떨면서 똑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석화린 또한 시비들은 자신의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음을 잘 알았다.
그런데도 서랍 속에 잘 넣어둔 붉은색 주머니가 사라졌다.
‘어떤 놈이……!!’
일반 도둑이 아니었다.
방에 널린 귀한 보석들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니까.
‘분명해. 누군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놈이 한 짓이야.’
석화린의 눈이 독하게 변했다.
휙!
그녀는 영빈정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그놈이?”
극일천과 신무선단의 존재를 알 법한 인물은 지금 하북팽가에서 화산도협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때 도둑 출신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놈에게 다시 가봐야겠어.’
석화린이 영빈정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마님!”
시비가 다급히 들어왔다.
“뭐야?”
“가주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거긴 왜? 바쁘다고 해.”
“저어…….”
휘익!
석화린의 손이 위로 치켜 올랐다.
“맞고 싶어? 방금 내가 한 말 그대로 전해!”
“가, 가주님께서 화산도협과 같이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시비를 보며 다시 물었다.
“정말이야?”
“네…… 그렇사옵니다.”
석화린은 다시 돌아서며 차분하게 자리에 앉아 물건이 사라진 서랍장을 보았다.
‘그 녀석이 물건을 훔치려고 왔다가 서랍장에서 신무선단을 보고 훔쳐 가지고 간 게 분명해.’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피해 나갈 수 있었다.
“가장 화려한 옷으로 준비해.”
“……네에.”
그녀는 옷을 고쳐 입으면서 신무선단에 대한 변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 증거가 될 수 없어. 난 그걸 우연히 주웠을 뿐이라고.’
* * *
중년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벽에 걸려 있는 혼원도를 바라보았다.
반각 전.
가주전에서 연락이 왔다.
수년 동안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연락이었다.
혼원도를 잡았다.
‘형님이 원한다면…… 내가 스스로 끝을 낼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용서를…….’
혼원도 아래 걸린 백색의 요대.
-천하제일도 팽하벽.
요대 중간에 적혀 있는 붉은색 글자가 보였다.
가주 팽직도가 오래전에 선물했던 물건이었다.
팽하벽은 백색 요대를 허리에 찼다.
‘형님. 죄송합니다.’
* * *
가주전으로 향하는 팽하도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흠칫.
동시에 가주전으로 들어서는 여인.
붉은빛으로 물든 비단 자락에는 화려한 금색으로 수를 놓은 봉황과 꽃들이 가득했다.
‘이부인.’
가주전으로 들어선 그녀 모습을 보면서 확실해졌다.
이른 아침에 두 사람을 부른 이유.
분명 그 일에 관한 것이 확실했다.
석화린은 미소를 띤 채 팽하벽을 맞이했다.
“호호호, 도성께서도 오셨나 보군요.”
그녀는 밝게 웃었지만 팽하벽이 나타난 것은 의외였다.
“이부인께선 여기에 어인 일이오?”
“상공께서 우리를 동시에 부른 모양인가 봐요. 무슨 일일까요?”
“본인도 그건 모르오. 가주님을 뵈면 알 수 있지 않겠소이까?”
“아 참. 부탁했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잘 안되더군요.”
“설마…… 진 것은 아니겠지요?”
“알아서 생각하시오.”
팽하벽은 차갑게 대답했다.
그녀는 팽하벽의 허리에 찬 요대를 내려다보았다.
“그 요대는 오랜만에 차셨군요.”
“…….”
“제가 준 요대를 죽을 때까지 벗지 않는다고 하시더니.”
“그와 비무하는 사이 잘려 나갔소.”
“어머, 그럼 나중에 그보다 더 좋은 요대를 선물하겠어요.”
“이게 있으니 괜찮소.”
팽하벽은 정중하게 대답하는 듯했지만, 목소리와 표정은 냉랭할 만큼 차가웠다.
“후후, 제 모습은 어떤가요?”
그녀가 양팔을 벌리자 어깨를 타고 내려오는 상의 자락에서 봉황이 화려하게 날갯짓을 하는 듯했다.
“괜찮소이다.”
“그게 전부인가요?”
“들어가시죠. 가주님께서 기다릴 겁니다.”
“흐음, 그렇게 하죠. 근데 도성께서는 본녀에게 화가 난 듯하네요?”
휙.
석화린은 그의 담담한 표정을 본 뒤 고개를 돌리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 * *
가주전으로 들어선 팽하벽과 석화린은 응접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호위가 두 사람을 낯선 곳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드르릉-
석벽이 열리고, 호위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어딜 가는 거죠?”
“이곳은 가주님만을 위한 장소입니다.”
팽하벽은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가주전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그건 석화린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긴장하면서 석벽 사이를 지나 깊은 곳으로 들어섰다.
‘흐음…….’
석벽의 통로는 오 장 정도 되는 거리였다. 인공 동굴을 지나자 건너편에서 밝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북팽가의 가주만이 들어올 수 있다는 장소.
두 사람이 석벽 끝으로 나오자, 넓이가 이십 장 정도 되는 장소가 나타났다.
팽하벽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기는…….’
대충 하북팽가에서 위치가 어디쯤인지 알 듯했다.
가주전 뒤편에 가면 암벽으로 된 절벽이 막고 있었다.
그곳 뒤로 이런 공간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오셨소이까?”
“……!”
두 사람이 동시에 흠칫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앞에 아무도 없었다.
“가…… 주 형님.”
언제 나타났는지 두 사람 앞에 팽직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법이 펼쳐져 있군.’
팽하벽은 단번에 상황을 똑바로 파악했다.
“두 분, 오시느라 고생하셨소이다.”
“상공, 여기는 어디인가요?”
석화린은 한 발짝 내디디려는 순간.
“이부인,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게요. 주위에 진법이 펼쳐져 있소이다.”
“……!”
그녀의 몸이 멈칫거렸다.
“왜 이곳에 진법을 펼쳤나요?”
“그럴 이유가 있소이다.”
“이유가 뭐죠?”
“이부인, 그건 본인이 아니라 다른 분이 알려줄 것이외다.”
스윽.
세가주 팽직도의 곁으로 다가오는 기척.
매화도의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화산도협이 여기 왜 있는 거죠?”
석화린은 매섭게 고진유를 노려보았다.
‘흐음…….’
팽하벽은 나란히 선 팽직도와 그를 보며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
적막감이 감돌았다.
석화린과 팽하벽의 시선이 고진유에게 향했다.
“화산도협,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우선 도성께서는 좌로 삼 보, 앞으로 이 보를 걸으시지요.”
“…….”
팽하벽은 그를 바라보다 조용히 고진유의 말대로 신형을 옮겼다.
휘이이이잉-!!
갑자기 돌풍이 눈앞에서 솟구친 뒤 사라졌다.
“됐습니다.”
“…….”
고진유는 팽하벽과 석화린을 떼어 놓았다.
만일에 일어날 불상사를 사전에 막아선 것.
“상공, 대체 무슨 일인가요? 저자의 말을 왜 우리가 들어야 하는 거죠?”
“이부인, 이번 일은 가주님께서 본도에게 일임을 하셨습니다.”
“네놈이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지 모르겠구나! 상공을 협박한 게 틀림없어! 도성, 저자를 잡아 헛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하세요!!”
“이부인, 조용히 하시오. 화산도협의 말이 맞소이다.”
“상공!!”
팽직도의 단호한 눈빛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본도가 하는 이야기를 똑바로 들으십시오.”
“……대체!!”
고진유는 미소를 띠며 그녀의 말을 끊고 이야기를 꺼냈다.
“본도는 어제저녁 우연히 세가로 칩입하는 도둑놈을 보게 되었습니다. 가주님께 환대한 대접을 받은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더군요. 그래서 도둑놈을 잡기 위해 뒤를 쫓았지요. 그런데…… 그놈이 대담하게도 교화전으로 들어가더이다.”
“정말 어이가 없군. 난 전혀 잊어버린 게 없다!”
석화린은 단번에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이부인의 말이 맞습니다. 그놈은 도둑이 아니니 당연한 말이지요.”
“……뭐?”
“도둑인 줄 알고 그놈의 뒤를 따라 교화전으로 들어갔다가, 본도는 그 안에서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되었소이다.”
“……!!”
순간 석화린의 동공이 커지면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어제 우리를 지켜봤어……?’
그녀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지만, 이내 원상태로 돌아갔다.
‘증거가 없어.’
다행히 가주에게 들이밀 증거는 없을 터.
석화린은 미소가 지었다.
“호호호, 화산도협, 쓸데없는 말을 하는군요. 보아하니 본녀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 모양인데, 증거가 없으면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부인. 본도는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소이다. 어떤 내용을 누명 씌웠다고 하는지 모르겠군요.”
“…….”
“증거를 원한다고 하니 좋습니다. 증거를 보여주면서 어제저녁 흑의인과 이부인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 드리지요.”
고진유의 시선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자신감이 느껴졌다.
‘증거라고?’
“들어오시오!”
고진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복면을 한 흑의인이 호위 무사에게 끌려와 그녀의 눈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서, 설마…….’
고진유는 석화린이 동요하는 것을 애써 숨기려는 것을 보며 말했다.
“이부인의 표정을 보니 이자가 누구인지 잘 아는 모양이군요.”
“난…… 모른다. 웬 놈을 복면까지 씌워놓고 내게 악독한 누명을 씌우려고!!”
“그런가요? 그렇다면 복면을 벗겨 보지요.”
파앗!!
고진유는 복면을 잡아당겼다.
복면이 벗겨지면서 사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난 모르는 놈이야.”
석화린은 냉정하게 말을 꺼냈다.
“정말로 모르는 인물입니까? 어제저녁 둘이서 서로 껴안으며 즐겼던 사이가 아니던가요?”
“상공!! 이자가 헛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정말로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팽하벽은 눈앞에 펼쳐진 일련의 장면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도 저 흑의인과 같은 처지가 아닌가.
그때 그녀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으니까.
“본도는 당신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모두 들었소이다. 이자가 사공자의 친부라면서 가주님과 도성을 비웃었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들이라면서.”
‘뭐…… 라고?’
고진유의 말에 팽하벽의 시선이 석화린을 향했다.
당황하는 눈빛.
‘그의 말이…… 사실이다.’
지금까지 억눌러 왔던 답답함이 일순간에 풀렸다.
수십 년 동안 마음고생을 하며 사공자 팽병진이 커 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화산도협…… 방금 한 말이 사실이오?”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부인에게 물어보시지요.”
팽하벽은 시선을 돌려 석화린을 노려보았다.
“이부인, 화산도협의 말이 사실이오?”
“아니!! 거짓말이에요. 저 아이는 당……!”
하지만 석화린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멈췄다.
사공자가 팽하벽의 자식이라고 해도 그녀는 불륜을 저지른 것이기 때문이다.
고진유는 붉은색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혹시 이건 뭔지 아시오?”
“…….”
그녀의 눈빛이 또 한 번 흔들거렸다.
“이자가 선물한 물건일 텐데.”
“난…… 모르는 물건이다.”
“모른다고 할 줄 알았소. 흐음, 한데 여기 안에 든 것이 꽤 특이하더군요. 이걸 복용한 인물이 내력을 운용하면, 이것과 같은 냄새가 나더란 말입니다.”
“……?!”
석화린도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한 번도 확인해 본 적이 없어서 당황한 나머지 고진유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이부인께선 내력을 한번 올려 보겠소이까?”
“…….”
“당신은 이자에게 하북팽가를 장악하고자 주요한 자리에 당신의 사람들을 올려놓았다고 했소. 하북팽가가 가주의 말이 아닌 당신의 말을 듣도록.”
“거짓말이야. 모두 네놈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그녀는 악을 쓰며 고함을 질렀다.
고진유의 옆으로 팽직도가 나섰다.
“이부인, 그만 인정하시오.”
“상공, 절대로 아닙니다. 이건 저놈이……!!”
“됐소. 여기 이자가 이미 모든 것을 인정했소이다.”
팽직도는 무릎을 꿇은 흑의인을 가리켰다.
“구 매…… 미안하게…… 됐소. 모든 것을 밝혔소이다…….”
“이…… 멍청한 놈이!! 헛……!”
석화린의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순간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난…… 난 저자를 몰라! 난 함정에 빠진 거라고!”
“당신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요.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하자던 사람도 모른 척하고 말입니다.”
“…….”
“인정을 못 하겠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이미 사실이 밝혀진 이상 당신은 세가의 반역자로 처리될 테니까.”
“……하하, 하하하! 누가 감히 나를 반역자로 처리한다고 하느냐? 세가의 멍청한 그놈들이 당신들 말을 들을까? 그놈들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과연 그럴까요, 내당주님?”
‘내당주?’
고진유가 부른 인물.
내당주 팽홍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설마 이부인이 세가의 반역자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를 내당주의 자리에 올려준 사람이 이부인이었다.
‘여기에서 내치지 못하면 나도……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
고진유는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팽가의 내당주로서 확실하게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팽홍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제대로 알았다.
“본 세가는 반역자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팽호오오옹!! 이노오오오옴!!”
그녀는 목청이 터지도록 고함을 질렀다.
고진유는 내당주 팽홍을 가주전으로 부르면서도 미리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뒤에 숨어 현 상황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스스로 파악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예상대로 살길을 택했다.
“내당주께서는 사리에 밝으시군요.”
‘팽가 놈들……!!!’
석화린은 노기가 머리끝까지 올라섰다.
“구 매…… 그만 항복하시구려.”
“천의 변절자가 말이 많다! 어차피 네놈도 나중에 버려질 놈들 중 하나였지! 목숨이 아까워 적에게 굴복하다니…… 당장 네놈의 목을 베고 난 떠날 것이다. 이까짓 진법으로 본녀를 묶어놓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녀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변했다.
그러자 눈앞에 펼쳐진 진법이 한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파앗!!
석화린의 신형이 움직였다.
정확히 진법을 파훼하면서 단번에 뚫고 나갔다.
“죽어라!!!”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흑의인의 머리를 내리쳤다.
한데,
휘익!!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흑의인의 신형이 순신간에 뒤로 물러났다.
“어허, 악랄하구만. 어제까지만 해도 좋다고 붙어 있었다며?”
“……?!!”
석화린은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부릅뜨고 흑의인을 쳐다보았다.
“당신…… 누구지?”